할아버지의 한복
조선옷과 한복

위의 이 사진은 2021년 1월 3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의회의사당에서 치러진 련방 하원 취임, 개원식에서 미국의 한국계 녀성 련방 하원의원인 메릴린 스트릭랜드(58·한국명 순자)가 한복을 입고 참석한 모습이다. 스트릭랜드 의원은 한국인 어머니와 미군인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1962년 9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복을 입고 련방 하원 취임 선서를 하는 스트릭랜드에게 한국의 네티즌과 언론, 정객들은 일제히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번 북경동계올림픽 개회식에 55개 소수민족의 일원인 조선족의 상징으로 등장한 한복을 입은 처녀를 대할 때와는 완판 다른 반응을 보였다. 분명히 이중잣대를 적용한 실례다. 

  가령 한국계 미국인이 그것도 련방 하원의원이 취임선서식에 한복을 입은 것을 "미국이 우리의 한복을 훔쳐갔다, 빼앗아갔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창의성으로 이룬 문화적 자산을 리용하려는 책략"이라는 등 나라간 갈등까지 빚을 어처구니없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면 그 담대함과 배짱을 인정해줄만도 하다. 무서운 호랑이 앞에서 감히 할 말은 한다고 봐야겠다.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다. 지어 한국계 녀성을 안해를 둔 미국의 한 주의 주지사가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신문에 올리면서 "대한민국의 사위"의 멋진 모습이라고 치켜올렸다. 허나 네티즌뿐이 아니라 야당과 여당, 대통령 대선 후보까지 합세한 이번 한복 론란을 보면 그저 "한복을 훔친 사건"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나라간 분쟁까지 유발할 조짐까지 보였다.

  조선족으로서 가장 통분할 일은 이번 한복 론란은 당당한 중국 국민인 조선족의 존재를 아예 말살한 것이다. 조선족을 이른바 "중국의 문화공정"에 한복을 갖다바친 것처럼 매도했다. 언제는 "중국 조선족", "재중 동포"라고 하던 것이 갑자기 중국의 소수민족이 아닌 중국인으로 치부해버렸다. 내가 어제 글에서 썼듯이 조선족은 함부로 입에 올릴 민족이 아니다.

  조선족이 누구냐를 알려면 시간을 할애해서 공부를 좀해야 하는데 빠른 시간내에 조선족을 대충이라도 알려면 조선족 조상들이 왜서 정든 고향을 등지고 눈물의 강이라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왔는지 부터 알아야 한다. 이 화제가 좀은 거창하니 이 글에서는 접고 다시 한복으로 돌아온다.

  국회의원 선서식에서 한복을 입고 선서한 스트릭랜드 의원은 "한국계 미국인이자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한복을 입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한복은 내가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을 상징하고 우리 어머니를 명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국가, 주,  그리고 국민의 의회에서 다양성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더 큰 증거이기도 하다"고 한복을 입은 의미를 밝혔다.

  미국인들이나 유럽인들이나 예전엔 우리 민족의 한복을 “코리안 기모노”라고 했다. 기모노는 일본 전통의상이다. "왜 하필 우리 민족의 전통의상에 기모노를 붙여야 합니까?" 한국의 한 패션 전문가의 반발이다. 그는 한복의 진미를 알려주려고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한복 패션쇼를 가졌다.

  그 분은 우리 민족의 전통미를 상징하는 한복은 세계적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잘 어울리게 만들어진 하나의 과학이라고 하면서 글로벌 시대에 한복도 세계화 진척에 합류해야 한다고 했다. 한복의 세계화, 말하자면 한복의 해외 진출이다.

  두 분의 말씀에서 한복을 보는 시각과 사유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한복을 마치도 도적이 훔쳐갈 "보물"같이, 남이 입으면 안 되는 "내의"같이 보는 시각을 가지고는 글로벌시대에 발붙일 곳이 없다. 이번 "한복 론란"을 통해 조선족을 보는 시각과 사유 바탕에 깔린 "속내"가 드러날 대로 드러났다. 그 음습한 "속내"를 들여다 본 것이 참말로 다행이다.

  "속내"를 드러낸 사람들은 "속내"를 가볍게 드러내면 남한테 "허를 찔리기 쉽다"는 말을 명심해두길 바란다. 

 

할아버지의 한복

 

이 글은 "한복 논란"과 관련해 쓰는 세 번째 글이다. 한국의 언론, 여당, 야당, 지어 대선후보들까지도 한복이 마치도 이른바 중국의 "문화공정"에 빼앗긴 것처럼 오도하고 있는 상황을 더는 잠자코 지켜볼 수가 없어 나의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셨다.

  "웃기지 마! 한복은 내 조상 대대로 입어왔고 내가 만주로 올 때도 입고 왔다. 문화대혁명이란 살벌한 세월에도 난 한복을 벗지 않았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다. 한복엔 할아버지의 애환이 서려있다. 할아버지의 얘기를 오늘 이 글에 올린다.  

  18살 나이에 목에 엿판을 메고 동냥 길에 나섰던 할아버지는 우연하게 울산에서 일본 어선에 올라 일본으로 건너가 원양선 어부가 되였다. 할아버지는 험한 날 바다에서 생사를 걸고 일하다가 환고행할 때는 양복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 시골에선 보지도 못한 승용차에 앉아 고향마을에 들어섰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벌어온 돈으로 고향에서 땅 몇 뙈기 사서 농사를 지었고 작은 정미소도 하나 차렸다. 당시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불사한 일제는 패망을 앞두고 최후 발악을 하고 있었다. 어느 하루 할아버지는 턱없이 많은 공출을 바치라고 하는 일본 순사한테 대들었다가 피터지게 맞고 며칠 유치장에 갇혔다.

  성격이 강직한 할아버지는 유치장에서 나오자마자 훌쩍 고향을 떠나 만주 땅을 밟았다. 할머니 얘기로는 그때로부터 할아버지는 양복을 아예 입지않고 항상 하얀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하얀 옷차림이란 한복으로 말하면 서민들이 입는 평상복이다. “양복쟁이”가 “백의민족”으로 변신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산에 나무하러 갈때나 약초 캐러 갈때도 하얀 옷차림을 하였는데 한번은 할머니가 왜 산에도 그런 옷차림으로 가는 가고 하니 할아버지는 “이 옷을 입으면 호랑이도 피해 가.”라고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고 한다. 진짜 호랑이가 흰색인 한복을 무서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산에 가면 흰색이 나는 물체가 드믄건 사실이다.

  자고로 민족의 고유한 전통의상은 민족의 상징물로 되여 왔지만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55개 소수민족의 전통의상은 물론 한족들의 전통의상인 치포도 "썩어빠진 봉건시대 물건짝"으로 치부되여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화대혁명기간 한복을 더군다나 남자가 한복을 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인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한복을 차려입었다.

나의 한돌 기념 사진
나의 한돌 기념 사진

  지금 보는 이 사진은 나보다 10살 위인 삼촌이 문화대혁명 기간 장가가는 날에 집 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꼭 한복을 입으셔야 할 할머니는 그냥 밭일을 하고 돌아온 시골 할머니 차림새였지만(사실 할머니에겐 당시 연변의 말대로 치마저고리라고 하는 한복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한복을 입으셨다. 허연 턱수염을 길게 기룬 할아버지가 한복을 입으시니 한결 늠름해보였다.

  그 후 엉뚱하게 "한복 사건"이 터졌다. 당시 거주지 주민들을 관리하는 가두위원회에서 주로 성분이 좋지않거나 자식이 투쟁을 맞거나 감옥에 간 부모들을 상대로 이른바 "사상개조 학습반"을 조직했는데 할아버지가 학습반 명단에 들었다. 할아버지는 매일 저녁 학습반에 갈 때마다 한복을 차려입고 갔다.

  하루는 할머니가 나보고 할아버지를 따라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가를 지켜보라고 했다. 그날은 모주석의 업적을 칭송하는 자리인데 보통 침묵을 지키던 할아버지가 불쑥 한마디 했다. "그래도 중국에선 장개석과 모택동이 호걸이지." 이 말에 방안이 발칵 뒤집혔다.

나의 어린 아들과 딸
나의 어린 아들과 딸

  할아버지를 "타도하자!"란 구호소리가 련달아 터지고 학습반 참석자들이 할아버지를 향해 삿대질을 해대면서 할아버지를 성토했다. 한 자가 "저 봐 아직도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완고통이야!" 라고 하니 할아버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조상 대대로 입던 옷이다. 너들은 지금 입고 있는 것이 옷이라고 걸치고 다니냐?" 하고는 문을 차고 나갔다.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에겐 한복은 자존심이였고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준 "가보"였다. 그 대물림 보배를 나뿐만 아니라 내 자식까지 지켜오고 있음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한마디 부연할 말이 있다. 이번 "한복 론란"에서 함부로 입을 놀린 사람들은 조선족들에게도 당신들 조상들처럼 대대로 물려준 "가보"가 있음을 명기하기 바란다. 

 

조선옷과 한복

 

  한국에서 "한복 론란"이 일자 이와 관련해 쓴 세 편의 글에서 한복이란 단어를 주로 썼는데 내 글을 본 한 분이 한복이란 한국인들이 쓰는 말이고 조선족들은 조선옷이라고 해왔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 기억엔 한국과의 교류가 있기전 연변에서는 한복이라고 하지 않고 "조선족 치마저고리", 또는 "조선옷" "우리옷"이라고 했다. 조선에서도 한복이라 하지 않고 지금까지 "조선옷"이라고 한다, 조선에서는 해마다 "전국 조선옷 전시회"를 열고 있다. 

  "꼬리치마"란 말도 들어본 것 같다. "꼬리치마"를 일명 "풀치마"라고도 한다. 사전에도 녀인들이 입는 한복을 이르는 말이라고 올라있다. 조선족 녀인들 사이에 오간 말이다.

  "꼬리치마를 입으니 첫날 새각시 같소."

  "치마저고리를 입어보기는 오늘이 처음임다."

  "옷이 날개라고 그래도 녀자는 조선옷을 입어야 물기난다이."

  한복에 대한 정의에는 한복을 조선옷이라고도 한다고 적혀있다. 한국에서도 한떄 한복을 조선의 조선옷, 한국의 조선옷, 조선족의 조선옷이라고 해왔다. 조선옷에는 례복과 평상복이 있는데 남녀별, 계절별, 어린이용으로 나뉜다. 

  내가 첫돌에 입은 옷을 당시 어린이 한복이라고 하지 않고 "꼬까옷", "색동옷"라고 했다. "꼬까옷"과 "색동옷"은 같은 뜻을 갖고 있다. 이 옷은 어린이가 돌이나 명절에 입는 옷인데 오래 살라는 뜻에서 색동으로 소매를 대서 만든 저고리다.

  한복이란 말은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한중간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족들이 받아들인 것으로 본다. 한국인과 조선족들이 사용하는 언어 차이로 당혹할 때가 적지 않았다. 내가 한국의 한 녀성전용상점에 들렀던 일을 실례로 든다. 당시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아 한국에 가려면 홍콩을 거쳐야 했다.

  출국하기전 안해는 얇고 긴 양말을 사오라고 부탁했다. 양말만 사올 수 없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녀성전용상점을 찾았다. 우선은 안해의 사오라는 얇고 긴 양말부터 사야했다. 깍듯이 반겨주는 가게 주인에게 한 첫말부터 한국인들과의 언어장벽을 실감했다.

  "얇고 긴 양말"이라고 하니 받는 말이 "스타킹 말이죠."이고 차마 "젖싸개"라고 하지 못해 겨우 골라낸 말이 "가슴띠"인데 이 말에 가게주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니 체면 불구하고 두 손을 가슴에 대니 "아, 브래지어 말이죠" 한다. 안해를 "전신무장" 시킬 바하곤 속옷까지 사려고 했다. 가게 주인이 예쁜 속옷, 예쁜 팬티에 "팬티 스타킹"까지 사라고 한다. "팬티스타킹"라는 말도 첨 들어본다.

  치마저고리까지 사려고 하니 가게주인이 "한복 말이죠" 하며 키며 몸집이며 어께 너비며 가슴높이까지 묻는다. 내가 그걸 알 리가 있나. 한복이란 말도 처음 듣는다. 그냥 "조선족 치마저고리", "조선옷"으로만 알고 있었으니.

  왜 이 실례를 떠올렸는가 하면 옷 명칭이 죄다 영어니 이번 "한복 론란"을 일으킨 자들의 론리대로라면 한국이 양말부터 팬티스타킹에 이르기까지 죄다 영어권 나라에서 "훔친"거나 다름이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상품뿐만 아니라 가수그룹명, 건물명칭, 일상용어에 이르기까지 영어투성인 한국이 영어권 나라에서 "훔친"게 참으로 많을 것 같다.

  한복을 갖고 너무 생억지를 쓰니 한 조선족 네티즌은 우린 대대손손 조선옷을 입었지 한복은 입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에 한번 시원하게 웃어봤다. 한복이란 명칭을 조선족들도 이미 받아들였으니 한복이면 어떻고 조선옷이면 어떠랴. 다 같은 우리민족의 전통의상이니 누가 입던 우리민족을 자랑하는 일인데 그걸 시비거리로 만들어가지고 긁어대고 있으니 그게 큰 문제다.    

  상상도 못할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려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으로 떠들어대는 판을 보면서 한가지 크게 느낀바가 있다. 그 느낌을 미국 작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말을 빈다면 "인간의 어리석음이 가진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이다.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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