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승 지 (전 연변과기대 교수/ 정치학박사)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옌지의 한 건물 전체를 뒤덮은 한글 간판들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옌지의 한 건물 전체를 뒤덮은 한글 간판들

얼마 전 중국 연변에서 자주 어울렸던 지인과 함께 식당에 들렀다. 식사를 주문하려고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는데 말소리가 귀에 익었다. 연변 사투리였다. 고향 사람 만난 듯 반가운 나머지 어디서 오셨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건성으로 대답한다. “경상도예요.” 애써 말투를 바꾸려 했지만 분명 조선족 아주머니였다.

우리는 요즈음, 거리에서든 전철 안에서든 혹은 식당에서든, 조선족 동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8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선족이냐고 묻는 것에 대해 불편해할 뿐 아니라 스스로 아닌 척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본다. 하나는 한국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면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야겠다고 마음 먹은 경우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생활하는 조선족 동포들 중 십 수 만 명이 한국 국적을 회복하였거나 취득했기에 이들은 이제 규범적으로 조선족이 아니다. 중국 국적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다수의 동포들도 장기 체류하면서 한국을 생활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다음은 자신을 조선족으로 드러내는 데 대한 부정적 인식을 말할 수 있다. 이 역시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동포들 중에는 애초에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조선족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조선족이라고 자신을 드러내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 불이익을 당하게 될 거라는 생각 때문에 말을 아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찌 보면 이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뭔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자신이 조선족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한국사람 및 한국사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조선족 동포들은 지난 30여년 동안 한국사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때로는 홀대당하고 때로는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지만 다수의 동포들이 그런 대접을 받았고 그래서 집단적으로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거다. 이에 따라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는 상당한 정도의 갈등적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관계의 양은 엄청나게 커졌지만 그 질은 비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양자 간의 갈등은 앞으로 언제든 새로운 형태로 재연될 수 있을 거라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민족 내부에서의 갈등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한국사회가 지난 역사를 헤아리며 동포들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나아가서 포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한국사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8천 만 명이 넘는 한민족의 맏형이고 중심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밖에서 살아가는 한민족은 어디에서 살아가든 모두 나름의 곡절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해방 이전에 나라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해 불가피하게 고향산천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 혹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지역으로 이주했다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에게는 미안함 혹은 부채의식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그들이 간난신고의 어려움 속에서도 한민족의 일원임을 잊지 않고 고국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는데 대해 선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민족이 20세기 전반기에 겪은 슬픈 역사의 흔적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러한 흔적은 한반도 주변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에 대한 호칭은 각 지역별로 그곳의 사정을 반영함으로써 각이하다. 지금 여기서 다루고 있는 조선족은 주로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의 중국 동북지역에 자리잡고 살아온 우리 동포들을 지칭한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1950년대 중엽에 공식화됐다. 반면 두만강 하류를 건너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스탈린 치하에서 강제로 중앙아시아 각 지역으로 재이주된 후 모진 세월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스스로 고려사람으로 칭한데 따라 오늘날 고려인으로 불린다. 또 해방 전부터 일본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그 자녀들은 그곳에서 살아온 특별한 역사성을 담아 스스로 자이니찌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족 동포 바로알기> 연재를 시작하면서 ‘조선족’ 이라는 표현과 관련해 이렇듯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연재의 타이틀은 물론 첫 번째 글의 제목에서도 ‘조선족’ 이란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족 동포들이 조선족이라는 표현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불편해 하는 줄 알면서 굳이 그렇게 표현한 것은 조선족을 정확히 지칭할 다른 용어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다. 덧붙이자면 용어 사용을 하지 않는다고 그로부터 비롯된 부정적 현상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정도라고 생각했다. 즉, 그 용어로부터 비롯된 문제를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가 함께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재의 타이틀을 <조선족 동포 바로알기>로 정한 것은 한국사회가 한민족의 일원인 조선족 동포들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적극 포용함으로써 함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바람을 담고 있다.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올바로 잘 아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친구는 옛 친구” 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는 그가 아무리 문제가 많더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그의 행동거지는 물론 그가 살아온 역사를 잘 알기 때문이다. 올바로 잘 안다는 것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주제는 ‘지금 왜 조선족인가’ 이다. 첫 주제를 이렇게 정한 것은 뜬금없이 조선족 바로알기를 말하려 하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란 염려 때문이다. 사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우리는 조선족 동포들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한중수교 30주년을 앞두고 있다는 시점에서 조선족 동포들과 공식적 적극적 관계를 맺어온 지도 그만큼 많은 세월이 지났다. 따라서 지금 조선족 바로알기를 말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분명하다. 그 새삼스러움을 극복하고 연재의 취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도 먼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독자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중국 연변한국인(상)회는 2017년 12월 9일 오후 연변조선족자치주 옌지(延吉)의 한 호텔에서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시낭송 공연회’를 개최 했다. 이날 행사는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의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시인의 고향인 중국 지린(吉林)성 연변자치주에서 한국인과 조선족 동포 300여 명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사진은 한국인 어린이들의 태권도 시범공연. 
중국 연변한국인(상)회는 2017년 12월 9일 오후 연변조선족자치주 옌지(延吉)의 한 호텔에서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시낭송 공연회’를 개최 했다. 이날 행사는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의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시인의 고향인 중국 지린(吉林)성 연변자치주에서 한국인과 조선족 동포 300여 명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사진은  어린이들의 태권도 시범공연. 

2014년 봄 한국사회에서는 ‘조선족 윤동주’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다. 윤동주 생가 표식비에 새겨진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라는 글귀가 발단이 되었다. 이후 이로부터 비롯된 논란은 다양한 형태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정치권에서는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대신할 용어를 찾으려 애썼고 문학인들은 학술회의장에서 ‘조선족 윤동주’에 대한 논쟁을 이어갔다. 2019년에는 교육부가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교과서에 윤동주를 재외동포로 표기하면서 조선족과 관련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재외동포재단이 해방 이전 중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윤동주 등을 재외동포로 기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제기했고 교육부가 이를 수용한 결과였다.

기실 윤동주는 연변에서 태어나 28년여 생애 중 20여 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한국과 일본에서 생활한 것은 각각 4년여 기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죽은 후에도 고향땅 용정 동산 묘지에 묻혀있다. 따라서 조선족사회로서는, 특히 윤동주를 기리는 사람들은, 중국 당국의 정치적 의도가 어떻든 간에 윤동주를 조선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거다. 조선족은 자신들의 뿌리를 1800년대 말 혹은 그 이전으로 소급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한국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친숙하고 존경하는 민족시인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한정하는 게 마땅치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갈등은 사안에 대한 각자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거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상황이 단순히 조선족 명칭에 국한된,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의 논쟁을 넘어 한국사회와 중국사회 간의 정치사회 및 문화적 갈등으로 확산되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중국의 인터넷 백과사전 바이두가 윤동주를 포함해 20세기 전반기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조선족으로 칭한데 대해 한국사회 일각에서 이에 대한 삭제를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 구체적인 사례이다. 역으로 조선족사회를 보는 한국사회의 시선에 대한 조선족사회의 예민함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사회 일각에서는 필요에 따라 조선족을 희생양으로 삼아온 사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상영된 영화 ‘청년경찰’과 ‘범죄도시’가 그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경험한 한국사회에서는 민족문제와 관련한 중국 움직임에 대해 경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안에 대해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하게 되면 올바른 좋은 관계를 맺기 힘들지 않을까. 또한 중국측 의도를 헤아리는 문제에 대해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자칫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의 민족 내부의 갈등으로 확산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한국사회가 조선족을 지속적으로 폄훼하거나 배타시한다면 조선족사회와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21세기의 초연결사회의 특성을 고려할 때 앞으로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은 물론 민족 내부에서도 서로의 입장 차이로 인해 점점 더 많은 갈등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관계맺기 과정에서의 불편했던 마음을 툴툴 털어버리고 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생각을 가다듬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할 때이다.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는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가깝고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한민족의 일원인 조선족 동포들은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함께 미래로 나아가야 할 우리의 동반자이다. 

곽승지(郭承志) 프로필 : 정치학 박사, 아시아발전재단(ADF) 자문위원.  전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  전 연합뉴스 기자, 전 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저 서 :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 '중국 동북지역과 한민족' 등.
곽승지(郭承志) 프로필 : 정치학 박사, 아시아발전재단(ADF) 자문위원.  전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  전 연합뉴스 기자, 전 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저 서 :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 '중국 동북지역과 한민족' 등.

출처 : 자유마당 6월호 / 재외동포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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