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족의 일원인 동시에 중국의 소수 민족 -

곽승지 (전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 정치학박사)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동북지역에 정착한 조선인을 중국 공민으로 인정하면서 부른 정치적 용어." 2013년에 쓴 책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중국 정착 과정의 슬픈 역사>에서 필자가 정의한 조선족에 대한 개념이다. 중국 공산당이 1950년대 초 소수민족식별사업을 통해 조선인(한민족)을 중국 공민을 구성하는 소수민족의 하나로 공식화하면서 그 명칭을 조선족으로 쓰기 시작했음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엔 조선사람, 조선인, 한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지만 조선족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다른 민족들을 표기하는 형식의 한자식으로 바꾸어 조선족이라 칭한 것이다.

   중국은 민족구역자치제를 핵심으로 하는 소수민족 정책에 따라 1952년 9월 3일 연변지역을 자치지역으로 선포했다. 사진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의 현판을 거는 장면

 

조선족이란 용어는 지금은 고유명사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이 표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이다. 중국이 조선인을 중국 공민을 구성하는 소수민족으로 인정한 후 조선족이란 표현을 구체화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구체적 사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명칭의 변화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중국은 민족구역자치제를 핵심으로 하는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1952년 9월 3일 연변지역을 자치지역으로 선포했다. 그런데 당시의 공식 명칭은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였다. 지금과 같이 ‘연변조선족자치주’로 확정된 것은 3년여 뒤인 1955년 12월이다.

그러면 조선족은 어떻게 중국 공민이 되었을까? 중국에는 400여 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지만 중국 공산당은 그들이 정한 조건에 부합하는 55개 민족에게만 소수민족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조선족은 1953년에 실시된 제1차 소수민족식별사업에서 선정된 37개 소수민족에 포함됐다. 중국 공산당은 ‘과학의거 민족의원(科學依據 民族依願)’의 원칙에 따라 소수민족을 선별해 왔는데 스탈린의 민족관을 차용하여 해당 민족이 특정 지역에서 공동 언어를 사용하며 공동의 경제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는가 등을 핵심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더불어 중국 공산당과의 역사적 관계 등도 중요한 변수이다. 조선족이 제1차 소수민족식별사업에서 소수민족으로 선정된 것은 항일투쟁은 물론 중국의 해방전쟁(국공내전) 기간 조선인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 때문이다.

결국 조선족이 중국 공민이 되는 과정은 일제하에서 조선인들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후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면서 역사적 전환기에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고 함께 투쟁한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이 항일투쟁 기간은 물론 해방전쟁 기간 지원하고 역할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왔다. 그와 관련, 모택동(毛澤東)은 “중국 오성홍기의 붉은 별에는 조선인민의 피가 스며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전쟁 기간 누구보다도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많은 희생을 감수했던 것을 평가한 것이리라. 중국의 유명한 시인 하경지(賀敬之)는 1980년대 중반 연변지역을 둘러보며 곳곳에 널려있는 혁명열사비를 보고 이를 칭송하며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열사비(山山金达莱 村村烈士碑)”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여기서 한민족의 해외 이주 역사를 살펴보자. 한민족의 해외 이주 역사는 1902년 말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을 위해 조정이 나서 하와이 노동이주를 주선한 것이다. 121명이 인천의 제물포항을 떠났지만 하와이에 도착한 사람은 102명이었다. 19명은 일본에서 행한 신체검사에서 탈락해 하와이행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의 노동 이주는 1905년까지 3년여 동안 지속돼 이주자는 모두 7천226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후에 미국 본토는 물론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 지역을 확장했다. 타국에서 간난신고의 어려움을 견뎌야 했던 미주지역 노동 이주자들은 이후 이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멕시코와 쿠바에는 지금도 이들의 후손들이 고국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다.

400년간 한민족의 혈통을 지켜온 중국 랴오닝성 번시(本溪)현 ‘번시 박씨’들의 집성촌 전경. 우리말은 못하지만 한민족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하며 16대 전해오는 족보를 간직하고 있다. 

천입민족설과 토착민족설

공식적 절차를 통한 이주 역사와는 달리 한반도 주변 지역으로의 이주는 훨씬 먼저 시작됐다. 주 대상 지역은 러시아와 중국 동북지역이었다.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의 이주 역사는 분명하다. 이 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이 1914년 연해주 이주 50주년을 기념했기 때문이다. 고려인들 스스로 1864년을 연해주지역 이주의 원년으로 특정한 것이다. 연해주지역에 정착해 살아가던 이들은 일본이 중일전쟁을 획책한 1937년 스탈린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지역으로 강제로 재이주됐다. 이런 연유로 고려인들의 이주 영역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포함한 구소련 전역으로 확대됐다. 2014년 한국과 연해주 중앙아시아 등지에서는 고려인 이주 15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했다.

중국 동북지역으로의 이주 역사는,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의 역사와 달리, 복잡하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인들이 수시로 이주하였기에 어느 시점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선족의 중국 동북지역으로의 이주 역사에 대해 중국 역사학계의 주장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1800년대 후반 한반도에서 들어왔다고 보는 천입민족설이다. 대략 고려인들의 이주 역사와 유사한 1860년대 중엽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실제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하류지역은 연해주와 접해 있고 중상류지역은 지금의 중국 동북지역과 맞닿아 있으니 설득력이 있다.

천입민족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은 없어진, 연변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에 의해 주로 주창되었다. 이들은 1800년대 중엽 무렵 시작된 조선인의 이주가 상황변화에 따라 확대됨으로써 여러 단계를 거치며 동북지역 전역으로 널리 확장됐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조선족의 이주 역사의 기원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현재의 조선족 동포들과 밀접한 인과성을 근거로 하고 있어 많은 지지를 받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조선족 동포들은 물론 한국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천입민족설에 입각해 한민족의 중국 동북지역으로의 이주 역사를 이해해 왔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중국 동북지역을 일컫는 북간도 서간도 등의 명칭도 천입민족설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중국 동북지역에는 1800년대 중엽 이전에 이미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토착민족설이다. 연변대학 교수들 사이에서 주장되고 있는 이 설은 1980년대 초 요녕성지역에서 한족으로 살아온,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나도 조선족’ 이라고 커밍아웃하고 중국 공산당이 이를 수용한 것이 계기가 됐다. 요녕성 곳곳에는 박가촌 박보가촌 등 이른바 ‘박씨촌’으로 불리는 마을들이 여럿 있고 박씨들은 이곳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다. 요녕성 번시현 지역에만 약 7천여 명의 박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들의 조상은 1600년대 초, 즉 명말청초 시기 동북아시아 역내의 정치적 혼란기에 여러 가지 이유, 전쟁에 참여하거나 붙잡혀가거나, 로 그곳에 갔다가 정착한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중국에는 이들을 제외하곤 박(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박씨촌 사람들은 그곳에 정착한 초기부터 족보를 만들어 대대로 전하며 일정하게 민족문화를 향유해 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민족의식이 약화돼 청나라 때는 만주족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한족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중국공산당이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는 등 상황이 변함에 따라 이들은 스스로 조선족임을 천명하고 나섰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이를 받아들이자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조선족의 이주 역사를 소급한 것이다. 하지만 요녕성지역의 박씨촌 사람들은 1800년대 중엽 이후 두만강 및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조선족동포들의 이주역사의 기원으로 말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중국 당국은 박물관 등에 조선족의 이주 역사를 정리할 때 대체로 토착민족설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번시 박씨 후손들이 족보와 가계 내력을 정리한 문헌을 보여주고 있다. 뒤로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 영정이 보인다.

번시 박씨 후손들이 족보와 가계 내력을 정리한 문헌을 보여주고 있다. 뒤로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 영정이 보인다.

한민족의 일원으로 적극 포용해야 

조선족의 이주 역사에 대한 중국학계의 이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일제가 항복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이곳에 살던 조선인들은 대부분 한반도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로 광복 무렵 중국 동북지역에는 216만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는데 귀환을 위한 우호적인 정책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절반이 한반도로 돌아왔다. 1950년대 초 중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족 인구는 111만여 명이었다. 고향산천에 대한 그리움과 낯선 곳에서의 설움이 이들의 귀환을 재촉했을 것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조선족 작가 유연산은 광복 시점이 가을 이후였다면 더 많은 사람이 한반도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대부분 농사꾼이었던 조선사람들이 논과 밭에서 자라고 있는 곡식을 그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1800년대 중엽 이후 다양한 이유로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의 절반은 광복과 더불어 한반도로 돌아왔고 나머지 절반은 그곳에 남아 조선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족은 나라가 제 역할을 못하게 됨에 따라 먹고 살기 위해 혹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했던 사람들 중 광복 후 한반도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정착한 사람 및 그 후손들을 말한다. 조선족이란 표현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간에 이들은 한민족의 굴곡진 지난 역사속에서 우리 민족이 겪은 모든 아픔을 온몸으로 체현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만 이미 80만여 명에 이른다. 따라서 이들은 응당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인식되어야 하며 한민족의 일원으로 적극 포용되어야 한다. 한국사회는 한민족의 중심이고 맏형으로서 이들과 함께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여야 한다.

곽승지(郭承志) 프로필 : 정치학 박사, 아시아발전재단(ADF) 자문위원.  전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  전 연합뉴스 기자, 전 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저 서 :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 '중국 동북지역과 한민족' 등.
곽승지(郭承志) 프로필 : 정치학 박사, 아시아발전재단(ADF) 자문위원. 전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 전 연합뉴스 기자, 전 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저 서 :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 '중국 동북지역과 한민족' 등.

/ <자유마당 7월호> 및 재외동포포럼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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