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일 약력 :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수필, 시, 소설 등 수십 편 발표. 수상 다수
남태일 약력 :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수필, 시, 소설 등 수십 편 발표. 수상 다수

1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대성은 문뜩, “행운을 파는 곳이 있으면 사고 싶다”라는 헤밍웨이 말이 떠올랐다. 당장 사채를 빌려서라도 행운을 사고 싶은 것이 지금의 갈급한 심정이다.
이때였다. 텔레비전에서 녀 아나운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비 태풍’이 서해를 강타한 소식을 한창 방송하고 있었다.
“……단동시와 동항시는 ‘나비 태풍’의 반경에 들어있었지만, 기상청에서 미리 방송하고 사전의 충분한 준비가 되었으므로 피해가 적었다. 북조선에서는 급작스레 나타난 ‘나비태풍’을 예고하지 못하여 고깃배 수십 척이 침몰 되고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았다…….”

단동시의 텔레비전 뉴스 방송을 듣고 난 대성은 요즘 잔뜩 부풀어 올랐던 희망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그는 담배 한 모금 깊게 빨았다가 내뿜으며, 담뱃재를 창문 밑에 열병처럼 세워 놓은 빈 맥주병 속에 털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안개는 마치 작은 벌레떼처럼 한 덩어리로 엉켜 있고, 부둣가 가로등은 열심히 어둠을 삼키며 불그레한 빛을 발사하고 있다. 어젯밤까지 미쳐 날뛰던 바다는 아침이 되자, 간밤에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침목을 지켰다. 해경은 오늘까지 모든 배와 선박을 출항 금지했다. 

……대성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 B 회사 회장을 대행하여 북조선 평안북도에 사는 회장의 친동생과 비밀리에 서해 코끼리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필이면 만나자 약속한 날, ‘나비 태풍’이 서해를 강타했다. 집채같은 큰 파도가 콘크리트 방파제를 대릴 때마다 인근 숙소의 유리창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대성의 가슴에서 어지러운 잡념과 추측이 마치 열 받은 냄비 속의 물과 같이 들끓었다.
“아니야, 북조선 바다 인근에 사는 어부들은 자기 경험으로도 태풍 오는 줄 알고 출항하지 않을 것이야.”
“그래, 육손이 아저씨는 지금 북한에서 잘 계시고 있을 거야……”.
대성은 자기 마음을 달래며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해도 자꾸 불길한 예감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의 전화였다. 
“아버지, 잘 계셨어요? 어쩐 일인 기요? ”
“이번 팔월 추석에 집에 올기가? ” 
수술 후 변해버린 아버지 쉰 목소리를 듣자, 죄송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 울음이 울컥 딸려 나왔다. 대성은 은빛처럼 반짝이는 ‘망류하’가 푸른 평야에서 굽이쳐 흐르고, 아련한 추억들이 아버지가 갈아엎던 흑토(黑土) 덩어리같이 많은 고향이 오늘따라 간절하게 생각났다. 


2
90년대 후기, 교화 시의 산간마을, 홍풍촌에도 봄이 찾아왔다. 마을을 가로지른 큰길 량쪽에 앙상한 백양나무들이 아직 가난한 색을 드러내며 열병처럼 서 있다. 큰길 뒷줄에 새로 지은 벽돌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한가운데, 초라한 초가 한 채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가지런히 자란 치아 한가운데 썩은 충치 한 대가 거멓게 꽂혀 있는 것 같았다. 
초가 집안에 들어가 보면 비록 흙바닥일망정 깨끗이 정돈되어 있고 가구들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전형적인 정갈한 조선족의 집안 구조였다. 벽에는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대성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릴 때의 큰아버지와 아버지였다. 만주에 오기 전에 한국 고향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예전에 깊이 숨겨둔 사진인데 한중 수교 뒤, 길이 트이면서 멋진 사진액자를 사서 벽 한가운데 번 듯이 걸어 놓았다. 
고향이 한국 경북인 정 씨는 환갑 나이에 비운이 날아들었다. 대장암 3기로 수술을 받고,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또 재발하여 새집 짓는다고 은행에 저축해 두었던 돈을 몽땅 찾아 병원에 가져다주었다. 
중국해군 부대에서 4년 복역하다 제대한 아들 대성은 친구 따라 큰돈을 번다며 전국을 누비고 다녔지만, 밑천이 없는 그에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여동생 은영은 아버지 때문에 다른 여자애들처럼 대도시에 돈 벌러 나가지도 못하고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장가갈 나이가 된 대성에게 처녀 소개는 많이 들어오지만, 결국 대성의 깊은 한숨으로 마무리 짓는다. 오늘도 외숙모가 인근 향에 사는 처녀를 소개했다. 아직도 가난의 냄새가 나는 초가집에 산다는 이유로 처녀에게 거절당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무어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가슴이 곧 터질 것 같았다.
‘이번에 벌써 아홉 번째……, 정말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장가도 못 가보고, 포톨(외톨이) 귀신이 되겠다. 밑천 없이 장사해도 안되고, 에라! 모르겠다. 이제는 한국 가는 길밖에 없구나’ 
 아들이 마치 물을 잔뜩 먹은 종이처럼 축 늘어져 집에 들어오자 대성 어머니는 벽에 걸린 누렇게 바랜 옛날 사진을 힐끔 바라다보며 원망 같기도 하고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에 시아버지나 시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치고, 형님 되는 분은 그래,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을 초청해서 만나보면 얼마나 좋아요. 참!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들이지. 편지 회답도 없고…….”
가만히 듣고 있던 대성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며 마누라를 나무랐다.
“뭐라카노? 또 시작이네, 한국 힝님이 살아만 있으먼 언제던 초청할기 아니가.”
며칠이 지난 뒤 대성이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집 식구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계속 이렇게 가난하게 살 수 없어요. 이틀 뒤에 저의 친구 성국이 소개로 심양시에 있는 한국회사에 가기로 했어요. 한국회사에서 2년 열심히 일하면 한국 본사에 연수생으로 갈 수 있데요, 한국에 가면 큰아버지를 꼭 찾아뵐게요.”


 3
심양시 교구(郊區)정부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축구 시합을 했다. 현지의 청년 축구팀과 중년 축구팀, 한국기업 축구팀이 모두 10개 팀이 참가했다. 중국 진출한 한국 B회사 사장과 부장은 축구를 즐기는 분들이지만, B 회사 축구팀은 해마다 시합에 참여해도 꼴찌를 겨우 면할 수준이었다. 
대성이 B회사 입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축구 운동대회가 열렸다. 제비를 뽑다 보니 현지에 청년팀과 맞붙게 되었다. 금방 시작하여 얼마 안 되어 연속 골 두 개가 들어가면서 0 : 2로 지고 있었다. 대성은 금방 입사한 초보자다 보니 운동 구경도 못 하고 자질구레한 심부름하기가 바빴다. 금방 손수레에 물과 음료수를 싣고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대원 한 명이 다리를 다쳤다. 김부장은 대성을 보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성씨, 일단 심부름은 그만하고 팀에 한사람이 모자라니 들어가서 숫자나 채워 주세요.” 
부장이 시키는 대로 하던 심부름을 놔두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운동장에 뛰어 들어갔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아 공이 앞으로 굴러왔다. 익숙한 발놀림으로 요리조리 공을 몰고 상대방의 선수들을 뒤로 젖히고, 골문 앞에 가서 살짝 슈팅하자 공이 골문 안으로 대굴대굴 굴러 들어갔다.
“와아!!” 환호성이 터졌다. 잠시 후 대성은 머리로 헤딩하여 또 한 골을 넣었다. 전반전이 끝나자 대성은 또 손수레를 밀고 간식을 사러 가려고 했다. 김 부장은 대성을 끌어당기며 성질이 나서 고함을 쳤다. 
“지금 무엇 하는 거야, 누가 자네에게 심부름시켜서! 엉!”
김 부장은 화가 나서 고함칠 때 얼굴색까지 변했다. 
“김 부장님이 시켰는데요.”
“뭐, 김 부장, 김 부장이 누구야, 당장 다른 사람 시켜!”
옆에 사람들이 하하하 웃자, 김 부장은 그제야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히며 같이 따라 웃었다.
후반전에 대성은 운동복 입고 정식으로 투입되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대성이 몸을 민첩하게 놀리며 무인지경처럼 혼자서 공을 몰고 들어가 멋진 슈팅으로 또 골을 넣었다. 대성이 골 세 개를 넣자 대원들이 투지가 살아나면서 더욱 신나게 공격했다. 결국, 청년팀과 4 : 2로 이겼고, B 회사는 중국에 진출한 후 처음으로 2등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김 부장은 음료수 뚜껑을 열어 대성에게 주면서 물었다.
“대성 씨, 옛날에 축구 해보았어?”
“네, 중학교 다닐 때 ‘성省 소년 축구팀’에서 축구 시합에 많이 참가해 보았어요?”
“그러면 그렇지!, 야! 앞으로 우리 축구팀도 희망이 있겠구만, 대성 씨는 어디도 가지 말고 우리 회사에서 해요. 하, 하, 하” 
칠순이 넘은 B회사 회장은 시합이 끝나자 잰걸음으로 달려와 대성을 안아주면서 어깨를 살갑게 다독여주었다.
“나는 자네가 입사할 때부터 이미 우수한 사원이 될 것이라고 짐작했네, 열심히 하게, 내가 자네를 언제든지 중히 써 줄기다.” 흥분한 회장은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대성씨 수고했어요. 정말 대단해요.”
아침 공기처럼 상쾌한 젊은 녀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회사 인사과 과장, 회장의 무남독녀인 현미 과장이 대성이 옆으로 다가왔다. 대륙의 젊은 녀자보다 더 희고 맑은 얼굴, 자연스럽지 않을 정도로 쪽 곧은 콧대, 첫눈에 보기만 해도 전형적인 한국 젊은 녀성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쌩긋쌩긋 웃으며 대성 옆으로 다가섰다.
현미 과장은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손수건을 꺼내, 쑥스러워 어쩔 바를 모르는 대성이 이마에 돋은 땀방울을 꾹꾹 찍어서 닦아 주었다. 대성은 가슴이 세차게 뛰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자꾸 뒷걸음을 쳤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저 혼자 닦겠습니다.”
“대성 씨, 나는 대성 씨보다 한 살 더 많으니까, 나보고 누나라고 불러야 해요.”
“아닙니다. 과장님, 저 같은 사람이 어찌 과장님을 보고 누님이라고…….”
그때, 현미 과장과 대성의 눈길이 마주쳤다. 대성은 이상하게도 얼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눈길에서 구름처럼 스치는 애수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4
봄 아가씨가 아지랑이를 폴폴 날리며 다가오자, 앙상한 나무들도 싱싱하게 살이 오르고 산과 들판은 점차 초록색으로 변해 갔다. 휴식 시간이 되면 현미 과장은 자주 대성을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대성이 사무실에 들어서면 그녀는 살짝 웃으며 얼굴이 삽시에 밝아지고, 커피를 타서 대성 손에 쥐여주었다. 대성은 회장의 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세련된 의복과 몸짓에서 범접하지 못할 생소한 기질을 느껴서 그런지, 자기도 모르게 그녀 앞에 서면 자꾸 위축감을 느꼈다. 때로는 너무 긴장하여 그녀의 앞에서 말을 더듬고 엉뚱한 말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진작 밖으로 나가면 향기 도는 아늑한 공간에서 그녀와 오래 얘기 못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날도 점심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2층 현미 과장 사무실 앞으로 지나가면서 위로 쳐다보았다. 창문의 화분 통에서 자란 앙증스러운 꽃 몇 송이가 한 가닥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녀는 꽃 속으로 하얀 얼굴을 내밀며 2층으로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 단말기를 내밀면서 말했다.
“대성 씨, 휴대전화기가 없죠? 제가 오늘 휴대전화 단말기를 교체했는데 아직 새것이라서 버리기 아깝네요. 쓰던 거라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쁘지 않으시다면…… ” 
그녀가 준 휴대전화 단말기를 손에 쥐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없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렇게 잘 대해 주는 걸까? 그는 온갖 생각을 다 해보았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녀 관계에선 아예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아니, 정말 이해 안 돼!’ 대성에게는 현미 과장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일 뿐이었다. 

목요일 저녁 퇴근할 무렵이었다. 검은 먹장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으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리었다. 전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현미 과장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쉰듯해서 뭔가 슬픔에 젖은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 한국 K료리집에서 식사하려고 하는데 그곳으로 와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다. 전화를 받자 긴장감과 부담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비록 누나라 불러 달라고 말 한 적이 있지만, 아직 단둘이서 식사할 정도로 편안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현미 과장 앞에만 서면 자기도 모르게 위축감을 느끼며 항상 말과 행동이 혼란에 빠지기가 다반사였다. 갑자기 자기 같은 하층 일꾼을 불러 단둘이 식사하자고 하니 불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그렇다고 못 간다는 말은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은근히 묘한 흥분에 사로잡히며 알 수 없는 설렘이 온몸으로 번져 갔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시외(市外) 저수지 옆에 전망이 좋은 한국 K료리집으로 갔다. K료리집은 이름은 많이 들어 보았으나 아직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한국 고급 료리집이었다.
 비가 그치자, 부드러운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른 끝없이 펼쳐진 저수지는 마치 즐거운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K 료리집은 말 그대로 푸른 산, 맑은 물, 일류의 풍미를 자랑하는 료리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거 같다.
문을 열고 식당으로 들어서자 이미 식당 안은 많은 손님이 북적였고 중국 사람들의 특유한 고성으로 귀가 먹먹했다. 서빙을 하는 녀직원의 안내를 받아 2층의 특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푸짐한 음식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대성 씨”
그녀는 반가워하며 하얀 이가 약간 보이게 미소를 지었지만, 금방 얼굴색이 굳어졌다. 그녀는 오늘 어쩐지 아래위로 검은색 옷을 입었다. 대성은 현미 과장 정면으로 앉지 못하고 대각선으로 부자연스럽게 앉아 곁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여느 때같이 활기찬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깔끔한 피부는 몹시 창백하고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으며 두 눈이 약간 부은 듯했다. 그녀는 몸을 약간 일으키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목소리는 조금 불안했다.
“저녁인데 쉬지 못하게 불러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식당에 불러 주셔서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죠.’
대성도 현미 과장에게 술 한 잔을 부어 주었다. 서로 술잔이 부딪치자 현미 과장이 먼저 건배했다.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조용한 특실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녀는 낮고도 조용한 목소리로 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대성 씨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말하면 적잖게 불쾌할 수도 있어요.”
 밝은 등불 아래 그녀의 얼굴에 눈물 자국을 볼 수 있었다. 날 파리 한 마리가 등불을 빙빙 돌다가 무거운 기분에 힘이 빠졌는지 테이블 한쪽 구석에 차분히 붙어 있었다. 
“사실 저는 3년 전에 결혼했어요, 신랑은 저의 대학 동창이고 대학병원의 부교수였죠, 3년 전 바로 오늘이었어요, 둘이서 같이 점심을 먹고 신랑이 대구에 학술토론 하러 간다고 차를 운전하고 떠났어요. 평소에는 사람들 많은 곳에서 한 번도 안아 준 적이 없던 그이가 저를 꼭 안아주더군요. 그리고 세 시간 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교통사고라고. 허둥지둥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어요.”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엔 우울감이 비쳐 있었다. 검정 옷깃에 다인 하얀 목덜미는 윤기가 없고 메마르고 창백하였다.
“대성 씨가 처음 입사했을 때, 저가 대성 씨 이력서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대성 씨의 사진 속 얼굴이 돌아간 남편과 너무나 닮았어요, 넓은 이마와 눈, 코가 똑 닮았어요. 그때 제 가슴은 세차게 뛰고 현기증까지 났어요, 대성 씨의 이력서를 한쪽에 밀어 놓고 오랫동안 고민을 했죠. 아버지는 대성 씨가 저세상 사람인 사위와 많이 닮았다며, 나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채용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상관없다고 고집하자 아버지는 허락하시더군요. 축구 하는 모습까지 많이 닮았어요. 
대성 씨를 죽은 남편과 생김새를 비교하는 거는 저 자신이 너무 황당하다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오늘만 지나면 그이에게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울 거에요. 그래야만 그이도 내 마음에서 떠나 천국으로 갈 수 있겠죠.”
대성은 현미 과장의 이런 사연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리해할 수 없었던 행동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애수의 그늘이 진 눈빛의 비밀도 알게 되었다.
죽은 사람의 환영(幻影)으로 인식되었다는 거는 분명 기분 좋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듣고 보니 젊은 녀자가 자기 앞에서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상처와 비밀을 토로했던 것은 그만큼 자기를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성은 현미 과장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과장님, 저 같은 사람에게 한 젊은 녀자가 마음속 상처를 보여준다는 것은 저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과장님의 남편이 죽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저의 생김새도 저의 의지 되로 되지 않습니다. 과장님의 아픈 상처를 빨리 치유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돕고 싶습니다.”
 그날 현미 과장은 술을 많이 마셨고 취했다. 택시를 타고 그녀의 숙소로 갈 때였다. 그녀는 머리를 대성의 어깨에 살짝 기대고 잠들었다. 깔끔하고 유난히 흰 얼굴에는 아직도 눈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에서 까만 머리카락 세 오리가 얼굴의 눈물 자국에 묻어 있었다. 이제까지 대성은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행복할 줄로만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남편을 잃은 현미 과장이 3년간 겪은 슬픈 시간은 가난한 자기보다 오히려 더 처참했을 거로 생각했다.

5
대성이 B 회사에 왔는지 3개월 되는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현미 과장이 숙소에서 쉬고 있는 대성이를 찾으러 왔다. 현미는 해맑게 웃으면서 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성씨, 회장님이 대성씨를 회장실에서 뵙겠다고 하네요. 회장님이 대성씨에게 큰일을 맡길 거 같아요. 중요한 일을 상의한다고 했어요. 빨리 올라가 봐요. ”
 “네? 저하고 중요한 일을 상의하신다고요?”
대성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화장은 반갑게 맞이하며 악수까지 했다.
대성은 당황하여 어쩔 바를 몰랐다.
현미 과장이 따끈한 커피 한잔을 대성이 앞에 가져다주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대성이 자네가 해군 출신이라면서?”
“네, 회장님” 
“나는 솔직히 말해서 중국에 진출하면서부터 오랜 시간 동안 현지 동포 중에서 젊고 정직하고 담력이 있는 친구를 찾던 중이었는데……, 그래서 사실 자네가 입사한 뒤부터 줄곧 관찰 해왔네. 자네에게 에돌아 얘기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옛날 나의 고향은 한국 충청도였네, 우리는 남자 형제가 둘이었어. 어릴 때, 아버지가 벌목장에서 일하시다 사고로 돌아가게 되었네. 어머니 혼자서 어린 우리 둘 형제를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었겠지. 그 무렵 아들이 없는 큰외삼촌이 만주로 가면서 내 동생 영철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네. 그 뒤에 외삼촌이 만주 봉천에서 잘 있다고 편지를 써서 인편으로 보내왔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소문에 외삼촌이 병으로 돌아가고 외숙모가 재가하게 되자 동생 영철이가 공부를 더 하겠다며 북한으로 갔다고 했네, 그 뒤에 월남한 영철이 친구가 나에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평안북도에서 현지의 처녀와 결혼하여 살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었네.”
 
잠시 말하는 동안 회장은 기침을 자주 했고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회장의 창백한 얼굴에 잔주름은 많았지만, 눈빛은 강렬했다. 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창가에 다가가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밖에 오동나무 파란 잎들이 회장의 조각난 기억처럼 미풍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작은 새 한 마리가 잎이 무성한 가지에서 한 송이 꽃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회장은 깊은 감회 속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중국 단둥시의 중국인들이 북한 평안북도의 주민들과 서해에서 민간 무역을 하고 있는데, 북한 주민 중 많은 사람이 이 기회에 탈북했다는 소문을 들었네. 그때부터 나는 믿을만한 조선족 젊은이들을 눈여겨보았네. 북한 주민들과 무역 거래를 하면서 동생 영철이를 찾아 중국에서 한 번이라도 만나 볼 계획이네.” 
회장은 대성을 오래 관찰한 끝에 적임자로 선정하고, 현미도 적극적으로 추천하였기에 더 주목하게 됐노라고 말했다. 회장은 대성의 손을 꼭 잡으며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암 수술을 받은 사람이라 오래 살 수 있다는 보증도 없네, 내가 죽기 전에 동생 영철이를 한번 만날 수 있다면 한이 없네, 그렇다고 가족은 놔두고 동생만 한국으로 데리고 갈 생각은 없네, 동생을 찾은 뒤 거취 문제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게. 우리는 자네를 믿고 이 위험하고 고생스러운 일을 부탁하는 것이네, 자네 능력으로 꼭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네, 자네, 잘 생각해 보고 삼 일 안으로 확답 주기 바라네,”
“그리고 일만 성공하면 앞으로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유학하겠다면 경비까지 내가 다 책임지겠네, 만약 동의한다면 당장 각서까지 쓰겠네.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월급도 지급하고 모든 경비까지 내가 책임지겠네” 
옆에서 듣고 있던 현미 과장이 웃는 얼굴로 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성 씨는 한국 유학하는 것이 제일 큰 소망이라고 말했잖아요, 호호호” 
대성은 회장의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서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제가 비록 큰 능력은 없지만, 만약 그분이 살아 계시면 최선을 다해 동생분을 찾아서 회장님 앞에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역시 대성 씨는 기백이 있는 남자군. 꼭 기억해 둘 거는, 동생 영철은 1936년생이고 왼손이 여섯 손가락이야, 좀 특별하지, 허, 허.”
회장은 대성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마침, 단둥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친구가 있고, 인맥이 넓다고 하니 그 친구를 찾아가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대성이 짐을 꾸려 숙소에서 나왔을 때, 비가 구질구질 내렸다. 생각밖에 현미 자가용 자동차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제가 대성씨를 기차역까지 대려다 줄께요.”
그녀는 대성 얼굴을 얼핏 보고는 머리를 돌려 막연하게 비를 맞고 있는 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빛은 비를 맞고 있는 축축한 나뭇잎처럼 우울하고 생기가 없었다.
“아니, 일없어요. 저 혼자 버스 타고 가면 돼요. 과장님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저 같은 일꾼까지 신경 쓰시고…….”
빗방울은 쉴새 없이 승용차 유리창에 부딪히면서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의 두 눈에는 애수의 그늘이 자주 스치곤 했다. 오늘따라 새 옷을 갈아입은 대성은 키가 유난히 크게 보였고 헌칠한 몸매도 의젓하고 름름해 보였다. 개찰구 앞에서 현미는 잘생긴 대성 얼굴을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성씨가 뜨나니 내 마음이 왠지 허전하네요. 자주 전화해요. 너무 위험하면 다른 회사에 가지 말고 꼭 우리 회사로 돌아와요. 내가 언제든 반겨 줄 테니까요.” 

6
대성은 단둥시에서 식당을 하는 친구를 찾아갔다. 그는 단둥에 오게 된 사연을 얘기했다. 친구는 대성에게 북조선이 가까운 동항시에 가서 통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어선보다 조그마한 무역 배를 타면 북조선의 민간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친구는 대성에게 허 군이라는 중국 선장을 소개해 주었다. 허 선장이 자그마한 배로 무역하는데 요즘 마누라가 병으로 죽고, 좋은 통역이 없어 돈벌이가 안 되니 좀 도와주라고 했다. 
 단둥시에 소속되는 현급시 동항시(東港市)는 중국 해안선에서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동항시 동쪽으로는 사품 치며 흐르는 압록강이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 파도가 높다는 서해를 끼고 있다. 북조선 평안북도 신도군(薪島郡)은 동항시에서 손만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북조선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 당국에서는 평안북도의 룡천군, 신도군 인근 바다를 중국 배들이 래왕하도록 눈을 감아 주었다. 북조선 사람들이 바다에서 잡은 해산물과 중국 곡물을 바꾸는데 편리를 위한 것이다. 그 후부터 룡천군과 신도군 인근 바다는 북조선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이 같이 고기도 잡고, 물물교환하는 공해가 되었다. 북조선 사람들은 주요로 해산물과 구리, 동, 철, 때로는 귀한 약초도 가지고 나왔다.
허 선장의 디젤엔진으로 추진하는 소형목선에는 백화점같이 많은 물건이 꽉 차 있었다. 입쌀, 옥수수, 콩 등 여러 가지 양식을 비롯하여 과자, 사탕, 주류, 음료수, 채소 등 부식품이 있고, 화장품과 녀자들의 액세서리 등도 진열해 놓았다.
북조선 주민들이 바다에 나올 수 있다는 자체는 행운이었다. 내륙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한다고 했다. 그들이 조금씩 캔 조개와 바지락을 들고 와서 양식과 바꾼 뒤 서비스를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선장이 냉정하게 거절하면, 얼마 되지 않은 양식만 배낭에 넣고 힘겹게 배에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 안타깝고 불쌍했다. 

대성은 며칠 바다에 다니며 굶어서 뼈만 앙상한 동포들을 바라보고 가슴이 아팠다. 듣는 말보다 더 처참했다. 그래서 자기 혼자 계획을 세웠다. 한국회사에서 받은 월급은 은행에 저축하고, 배에서 통역하여 번 돈은 아예 량식을 사서 선창 뒤에 따로 보관해 두었다. 
북조선 로약자들을 만나면 쌀을 푹푹 떠서 배낭에 넣어 주었다. 대성은 자기가 준 쌀을 배낭에 넣고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할 때 가슴이 뿌듯했다. 앞으로 돈 벌어 현미와 함께 북조선과 무역도 하고 싶었다. 자기가 돈을 많이 벌어서 아무 방법 없이 굶고 있는 동포들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성에게 배려를 받은 북조선 주민들은 돌아가서 사람 찾는 홍보도 많이 해주었다.

대성이 북조선 사람들과 물물교환하다, 우연히 북조선 신도에 육십 대 되는 육 손이 아저씨가 살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태양이 솟아오르자 신도 앞바다에 숲을 이루는 칼바위 봉오리들이 하얀 바닷속에서 서서히 솟아올랐다. 만조가 된 고요한 바다 수면에는 산봉우리가 투영한 길고도 검은 그림자가 마치 거대한 구렁이들이 기어가는 것같이 물속에서 일렁거렸다. 
대성의 목선은 곧바로 신도 방향으로 달렸다. 신도가 가까울수록 육손이 아저씨를 정말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겠는가, 설레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사실 다지증(多指症)은 인구의 1000명 중 2명 정도라고 한다.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도 육손인 사람을 찾기 힘든데 북조선 사람 중에서 육손인 사람을 찾았다는 거는 희망이 보인다는 징표였다. 
대성은 신도의 육손이 아저씨가 진짜 B회사 사장의 친동생이라면, 하늘이 행운을 준 것으로 생각했다. 일이 잘 풀리면 한국도 갈 수 있고. 한국의 큰아버지도 찾아뵙고, 몇 년 류학하여 중국에 돌아오면……그는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오색영롱한 그림을 그렸다.
초록색 하늘에 흰 구름이 굴러가고 그 아래 푸른 바다에서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북조선 아저씨들이 통나무 쪽배에서 노를 살랑살랑 저으며 고기 낚시를 하고 있었다. 숲을 이룬 칼바위와 돌기둥 사이로 다니며 낚시하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저분들이 굶주리지만 않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대성은 혼자 생각했다. 디젤엔진의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허 선장 배가 신도 바다로 진입했다. 그들은 중국 배라는 거를 이미 알고 허 씨 배에 붙였다. 
쪽배마다 아침에 낚은 싱싱한 2~3킬로 되는 송어를 꺼내 놓았다. 북조선 사람들과 물물교환 할 때, 마치 상점에 상품같이 가격이 이미 정해져 있는 만큼 흥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술 담배 같은 서비스를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징징댄다. 마침, 대성이도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기에 북조선 아저씨와 같이 식사하자면서 술과 그들이 제일 즐겨 먹는 삶은 돼지고기를 꺼내 놓았다. 
그들은 푸짐하게 쓸어 놓은 삶은 돼지고기를 생각보다 많이 먹지 못했다. 굶다 보니 위장이 작아졌는지, 중국인보다 식사량이 적었다. 대신 술 4병은 눈 깜박할 사이에 다 마셔 버렸다. 그들은 남은 돼지고기와 과자를 조금씩 나누어 신문지에 싸서 배낭에 깊숙이 넣고 그 위에 다른 물건을 넣었다. 사람 좋게 생긴 아저씨는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고기를 먹고 싶어 했는데 이제 소원을 풀 수 있다며 하늘의 룡고기라도 얻은 것처럼 좋아했다. 한 아줌마는 내일 군대에서 휴가오는 아들에게 고기에 시래기를 넣어 푹 끓여주겠다며 기뻐했다. 북조선 사람 얼굴에 항상 수심이 어려 있고, 사람끼리 경계하고 의심이 많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 대성은 육손이 아저씨 찾는 사연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저는 중국통역 해석(바다에서 부르는 별명)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찾으려는 육손이 아저씨 외삼촌 딸 되는 분이 중국에서 돈을 엄청 많이 벌었어요. 누구든지 육손이 아저씨를 찾아 주시면 수고비를 많이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 동네 가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키가 작고 야위어 뼈만 앙상한 한 아저씨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신도에 육손이 아저씨가 살고 있고 나이도 비슷하다고 했다. 고기 낚시는 하지 않고 사리 때, 갯벌에서 조개 캐러 나온다고 했다. 그 아저씨는 육손이 아저씨 옆집에 산다면서 오늘 새벽 함께 바다에 나왔다고 했다. 
대성은 그 아저씨에게 술 두 병, 담배 한 보루, 그리고 바가지로 쌀을 푹푹 떠서 배낭을 가득 채워 주었다. 썰물 전에 그 육손이 아저씨를 만나러 같이 가자고 했다. 대성은 육손이 아저씨가 있다는 곳에 다가갈수록 가슴 속에 솟구치는 희열을 억제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육손이 아저씨가 탄 배를 찾았고 그 옆에 나란히 배를 붙였다.
 대성은 심장이 세차게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렸다. 그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그 육손이 아저씨와 악수했다. 먼저 손가락을 보니 여섯 손가락이었다. 나이도 비슷하였다. 육손이 아저씨는 흐릿하고 정기 없는 눈빛은 낡고 도수 높은 안경에 가려 누구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낯선 사람을 거리끼는 기색이었다. 대화가 매우 힘들었다. 
묵묵히 앉아 있던 육손이 아저씨가 갑자기 손을 내밀며 술 한 모금을 돌라고 했다. 비닐봉지 술 한 봉지를 건네주자, 그는 이빨로 물어뜯고 물 마시듯 꿀컥꿀컥 마셨다. 조금 뒤, 술기운이 오르자 대화가 순리로 워 졌다.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성은 출렁이는 파도가 뱃전에 부딪히며 하얗게 부서지는 장면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육손이 아저씨에게 비닐봉지 술 5개, 담배 한 보루와 배낭에 하얀 입쌀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마음이 자꾸 울적해지고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일이 잘 안 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를 깬다고. 신도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대성은 변장한 북조선 군인들의 배를 민간인 배인 줄 알고, 잘못 붙였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 군인들에게 배 안에 물건을 몽땅 빼앗겼다. 대성이 성질에 가만히 앉아 그들에게 빼앗기리 만무했다. 4명과 격투하다 나무 몽둥이에 머리를 맞고 혼미해 쓰러졌다. 너무 심하게 폭행당하여 갈비뼈 4개나 부러지고 피투성이 되었다. 때마침 중국 해경 순찰 선박이 옆으로 지나가기에 다행이었다. 대성은 난생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단동시에서 식당 하는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대성이 너, 북한 군인에게 당했다며? 너 그래도 운수 좋은거야, 북조선 군인들에게 그렇게 물건 빼앗기고 맞는 거는 보통이야, 그렇다고 어디 가서 해볼 자리도 없어……. 조선족 통역 중 80%는 한 번씩 당해 보았을 거야. 
다음부터 신경 많이 쓰고 조심해, 그런데 대성아! 너,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허 선장네 빛 6만 원 다 갚았다메, 허 선장 완전히 너를 신(神)으로 떠받들더라. 너, 담력 있고 장사 잘한다고 우리 식당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났어. 너 때문에, 나도 장사가 더 잘 되는 거 같다. 친구야 빨리 치료받고 우리 식당에 놀러 와! 내가 단동시 제일 고급 식당에 가서 대접할게. 친구 쨔유!


    7
동항시에 조선족 통역협회가 있었다. 한 달에 한자리에 모여서 식사하면서 정보와 경험 교류를 했다. 대성은 육손이 아저씨 찾는 단서가 단절되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 통역들의 모임에 참가했다. 친구들에게 자기의 고민을 얘기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통역 친구가 육손이 아저씨에 대한 단서를 고맙게 알려 주었다.
“남포시를 가기 전에 온천군에서 육손인 노인과 해산물 거래도 해보았는데 중국에 친척도 있다고 하더라.”
그 통역 친구는 한참 생각 뒤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포 바다에는 개방하지 않아 아무 사람이나 갈 수 없어, 오직 고속 보트만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전번에 우리가 보트에 물건을 잔뜩 싣고 돌아오는데 북조선군대가 목선으로 쫓다가 안 되니 총으로 사격하고 포까지 쏘았던 거야, 선장 허벅지에 총알이 관통하여 많은 고생을 했어.”
그러나 대성은 보트를 임대해서라도 꼭 가야겠다고 하자, 통역 친구가 함께 남포 바다에 다니는 다른 보트 통역이 북조선군대 총에 상처를 입어 병원 치료를 받고 있으니 그 보트 선장을 찾아가서 연락해 보라고 했다.
대성이 보트 선장을 찾아갔을 때, 통역 친구가 미리 선장에게 소개했었다. 대성은 이 바닥에서 장사를 잘한다고 선장들에게 인기가 좋다 보니 말이 떨어지게 바쁘게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일주일 뒤, 대성은 고속 보트를 타고 남포 바다로 갔다. 비록 새로 구매한 고속 보트지만 외부에 총알 맞은 구멍과 포탄 파편에 찢어진 자리가 력력히 보였다. 

남포 특별시는 수도인 평양과 해외를 연결하는 관문이자 북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역도시이다. 고속 보트가 한 시간쯤 달리자 푸른 바다에 북조선의 작은 고깃배들이 보였다. 대성이 보트는 작은 섬 사이로 다니며 수산물거래를 했다. 북조선의 남포시 방향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거는 아주 위험한 도전이었다. 위험한 만큼 싱싱한 해삼, 골뱅이 등 조개류와 해산물을 저렴하게 곡물로 바꾸어 올 수 있다. 남포 바다에 가려면 목선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고속 보트로 남포 바다 범바위까지만 들어가면 싱싱한 해산물을 잠깐 사이에 선창을 가득 채울 수 있다. 
계산이 끝나자 북조선 어부들이 아침밥을 못 먹었다며 빨리 식사를 하자고 졸랐다. 소고기볶음, 삶은 돼지고기 그리고 구운 닭고기에 술까지 마음껏 먹으라고 주었다. 금방까지 먹구름 끼었던 얼굴이 환해지고 눈빛이 반짝이었다. 그들은 조금씩 맛만 보고 더 먹지 않고 나누어 제각기 배낭 속에 넣었다. 
 대성은 담배 한 보루와 과자, 사탕을 꺼내 갑판 위에 놓고 어민들에게 사람 찾는 데 도움을 청했다. 찾아 주신 분에게 수고비를 돈이나 량식으로 섭섭하지 않게 주겠다고 했다. 듣고 난 그들은 집에 돌아가면 다른 일을 제쳐 놓고 육손이 아저씨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때였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오십 대 중반 되는 아줌마가 중요한 단서를 알려 주었다. 육십 대 되는 육손인 노인 한 분이 자기 며느리 친정 동네, 온천군에 살고 있다고 했다. 오늘 군대 초소에서 같이 바다로 나왔고, 그 사람은 자기 동생과 함께 다른 섬으로 갔다고 했다. 
보트로 가면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니 지금 그곳으로 가면 육손이 아저씨를 만날 수 있다 했다. 대성은 그 아줌마에게 쌀 한 포대 주면서 함께 가자고 했다. 자그마한 섬을 몇 개 지나가자 넓은 갯벌이 나타났다. 북조선 사람들이 밀물이 서서히 차오른 갯벌에서 단골 중국 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성이 보트가 밀물 따라 그들에게로 다가 갔을 때, 배들이 서로 다투며 보트 옆에 붙였다. 
 대성은 육손이 아저씨를 만나 보았다. 아저씨와 악수를 하며 손가락을 보니 손가락이 여섯 개는 분명했다. 자세히 물어보니 그는 중국에 친척은 있으나 본적은 남포시라고 했다.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쌀 한 포대와 사탕 한 봉지를 주었다. 
이때였다. 북조선 한 아저씨가 남포시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를 쳤다. “해군 고속정이 옴네다.……”
말이 떨어지자 어민들은 배낭을 메고 각자 자기 배로 돌아가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은 군대를 제일 무서워했다. 불법으로 침입한 중국 보트와 물건 거래했던 거를 알면 양식이나 생선을 몽땅 몰수해버린다. 중국 선장도 부랴부랴 보트 시동을 걸어 속력을 내어 도망쳤다. 워낙 짐을 많이 실은 보트는 속도를 내지 못하였다. 그들과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대성은 선장에게 해산물 일부분을 바다로 버리자고 했다. 선장은 아까워 우물쭈물 대답이 없었다. 북조선 고속정 확성기에서 보트가 멈추지 않으면 포사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대성은 제 고집대로 해산물을 절반 이상 바다에 처넣었다. 보트 속도를 내자 선장의 작업복이 검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선두(船頭)가 쳐들리며 쏜살같이 앞으로 달리었다. 조금 뒤, 고요한 아침 바다에서 포 소리가 귀청이 찢어지는 듯 울렸다. 뒤이어 보트 주위에 포탄이 터졌다. 맑은 공기 속에 화약 냄새가 풍기는 동시에 하얀 물줄기가 높이 치솟아 올랐다. 
높게 치솟던 물기둥이 사람에게 쏟아지면 살가죽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팠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는 흔들리는 보트 바닥에 납작 엎드려 손잡이를 꼭 잡고 두 눈을 감았다. 포탄이 보트에 떨어지면 이 몸뚱어리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날아갈 수 있다는 공포감을 느꼈다. 절망감을 느끼는 절박한 시기에 왠지 최초에 가슴 뛰게 했던 한 녀인이 문뜩 머릿속에서 떠올랐고, 그녀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북조선 군대가 한참 맹렬하게 포사격하다가 멈추었다. 대성이 영문을 알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볼 때였다. 갑자기 포 소리와 함께 포탄이 날아와서 보트 옆에서 터졌다. 하얀 물기둥이 높이 치솟았다. 몸 전체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왼쪽 어깨와 팔이 연결한 근육이 찢어지는 듯 아프고 날카로운 통증이 전신을 훑어 내렸다. 
조금 뒤 어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선장의 머리에서도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북조선 고속정이 포사격을 멈추고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 갔다. 선장에게 약을 바르려고 다가갔을 때 그는 턱과 입술이 덜덜 떨고 있었다. 대성도 왼팔의 통증으로 전신이 경련하고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상처를 붕대로 감고 곧바로 병원으로 갔다. 귀에서 아직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울리는 거 같았다.



앞으로 남포시 쪽으로 더 찾아갈 필요가 없고, 평안북도 룡천군, 신도군, 철산군 인근 바다에서 육손이 아저씨를 계속 찾아보겠다고 생각했다. 대성은 허 선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 선장은 요즘 장사가 말이 아니었다. 대성이 고속 보트 통역으로 떠난 뒤, 벌써 통역 두 명이나 바꾸었다. 시간이 갈수록 대성이가 더 그리워지고 대성이 떠나서는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대성이 다시 온다는 소식을 듣고 허 선장은 마치 어린애같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대성은 다시 허 선장과 함께 장사도 하며 새로운 단서를 찾으려 서해 구석구석 다녔다. 
안개가 자욱이 낀 어느 날 새벽이었다. 대성은 약속도 없이 무작정 바다로 나갔다. 오늘따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앞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배 속도를 죽이고 서서히 잔잔한 파도를 가르며 앞으로 달렸다.
 안개는 더욱 짙어가고 앞을 4~5m도 볼 수 없었다. 청각으로만 판단하여 조심히 운전하였다. 갑자기 선두에 집채 같은 시커먼 물체가 정면으로 달려왔다. 목선은 어찌할 사이 없이 “쾅!” 소리와 함께 큰 선박과 부딪쳤다. 선장은 선미에서 키를 붙들고 있어 괜찮지만, 선두에서 아무것도 붙들지 않은 채 서 있던 대성은 미사일처럼 튀어 나가 바다에 떨어졌다. 
차가운 물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코앞에서 큰 선박의 스크루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대성은 스크루가 물을 밀어내는 힘을 빌려 빠르게 물 위로 솟아올랐다. 헤엄을 치며 수면을 바라보니 안개는 여전하고 배들이 어슴푸레 보였다. 대성은 급속히 흐르는 밀물에 밀리어 선박과 점점 멀어져 갔다. 
가끔 선장이 대성을 부르는 소리가 바닷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어슴푸레 들렸다. 대성이 중국해군 부대에서 복역할 때 바닷물 속에서 훈련을 많이 했기 때문에, 차가운 바다 물속에서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해나갔다. 허 선장이 대성을 부르는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선박들의 디젤엔진 소리만 은은하게 들려 왔다. 대성은 검푸른 바다 한가운데 검은 콩알 같은 까만점이 되어 밀물에 밀려 내려갔다. 점차 온몸은 나른해지며 무서운 공포감에 휩싸이었다.
 조류가 대성을 어디까지 밀고 가는지 알 수 없었고, 귀에는 사품 치며 흐르는 물소리만 들릴 뿐이다. 저 체온에 온몸은 점차 얼어들어 다리에 쥐가 도는 거 같이 굳어졌다. 입으로 자꾸 쓴 바닷물이 들어갔다. 크고 작은 수포가 물 위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대성은 절망감을 느끼며, ‘나도 이 작은 수포같이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대성이 기진맥진하여 물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목선 한 척이 닻을 내리고 바다 한가운데 정박하고 있었다. 대성은 배를 향해 큰 소리로 “사람 살려 주세요.” 외치면서 그곳으로 헤엄치며 다가갔다. 아무 응답이 없었다. 대성은 다시 온 힘을 다하여 “사람 살려요”라고 고함을 쳤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목선에서 한 젊은 녀성이 선창에서 머리를 내밀고 대성이 급급히 외치는 목소리 방향으로 바라보았다. 대성이 배까지 헤엄쳐갔을 때 밧줄을 던져 주었다. 물속에서 기진맥진한 대성은 젊은 녀자와 선장 아저씨의 도움으로 목선에 올라서 보니 북조선 배였다. 북조선 선장은 전신이 물에 흠뻑 젖고, 기진맥진한 대성을 바라보다가 대성 손을 꼭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해석 통역 아닙네까? 차가운 바닷물에서 얼어 죽께소, 날래, 날래, 옷을 갈아 있소……”
대성과 북조선 선장은 물물 교환한 적이 있었고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젊은 녀성은 추워 떨고 있는 대성에게 선창 밑에 깔았던 누더기 같은 얇은 담요를 주며 젖은 옷을 벗고 우선 이 담요를 걸치라고 했다. 대성이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자, 북조선 선장은 기쁨에 젖은 목소리로 옆에 서 있는 젊은 녀성에게 대성을 소개했다.
“혜영이 여기 와 보라우, 이분이 우리가 애타게 찾았던 통역 선생이라우, 정말 놀라운 인연임네다. 흐, 흐, 흐”
바다 안개가 걷히자 하늘은 명랑하고 높이 뜬 흰 구름은 더없이 부드럽고 기묘하게 보였다. 북조선 선장은 또 젊은 녀자를 대성에게 소개하였다. 이 아가씨는 육손이 아저씨의 친딸이고, 이번에 아가씨가 바다에 나온 목적은 통역 선생을 만나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육손이 아저씨는 요즘 몸이 불편하여 바다로 나오지 못하고 딸이 대신하여 통역 선생님을 만나러 왔다고 덧붙여 말했다. 아가씨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다른 한 녀자의 아름다운 두 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현미와 눈이 많이 닮았다.
"……혜영이라고 함네다. 반가와요.“
“정말 하늘이 준 대단한 인연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녀는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하나, 키가 훤칠하고 멋진 대성이를 쳐다보며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곱게 인사를 했다. 혜영은 대성의 뜨거운 눈길과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가씨와 선장님은 저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입니다. 꼭 보답하겠습니다.”
대성은 멀리서 허 선장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소리 들리는 방향으로 옷을 허공에 대고 휘두르자 배는 곧바로 다가왔다. 배를 붙이자 선장은 북조선 선장 배에 뛰어올라 먼저 대성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대성은 혜영이를 허 선장에게 자기가 찾던 육손이 아저씨 딸이라고 소개했다.
“자네가 바다에서 잘못되면 나는 당신들 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요. 차가운 바닷물에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재앙 뒤에는 큰 복이 온다는 말이 옳네요.”
허 선장은 대성을 구해 준 북조선 선장과 혜영에게 고맙다 인사를 하고 나서 말했다. 
“오늘은 장사도 걷어치웁시다. 우리 통역 선생 목숨을 구해준 당신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내가 가지고 온 술과 고기 안주로 마음껏 마시고 먹으며 축하합시다.”
허 선장이 배를 몰고 가까운 섬으로 갔다. 북조선 선장과 혜영이도 좋다며 찬성했다. 그들은 섬에 도착하여 배를 바닷가에 정박해놓고 나무 그늘 밑에서 비닐을 깔고 파티를 벌였다. 평시에 북조선 사람들에게 사탕 한 알도 아까워서 주지 않던 짠돌이 선장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선창에 있는 사탕, 과자, 담배, 술, 그리고 절인 소고기, 삶은 닭백숙, 삶은 돼지고기 등 모두 꺼내어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놓았다. 북조선 선장과 혜영이는 가득 차려 놓은 음식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고 오랫동안 이렇게 많이 차린 음식을 못 봤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북조선 선장은 혜영이를 바다로 데리고 나온 사연을 얘기했다.
 -대성이 육손이 노인을 찾는다는 소문이 북조선 서해 인근에 많이 알려졌다고 했다. 북조선 선장 큰형님이 혜영이 동네에 살고 있는데, 며칠 전에 큰 형님네 집에 입쌀을 가져다주러 갔다고 했다. 일부러 혜영이 집에 찾아가서 중국 배 통역 선생이 육손이 아저씨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고 하였다. 얘기를 듣고 그녀는 아버지와 상의 끝에, 지금 아버지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니 혜영이가 먼저 바다에 나가서 중국통역을 만나 보기로 했다고 했다. 
선장과 혜영은 어제 바다로 나왔고, 바다의 구석구석 다니며 통역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거는 하늘과 땅, 바다가 도와준 덕분이라며 모두 웃었다.
혜영이 먼저 빛바랜 옛날 사진 한 장을 꺼내 대성에게 주었다. 대성도 배 안에 돈과 함께 비밀스레 보관해 두었던, 회장님이 준 옛날 사진을 꺼내서 혜영에게 보여주었다. 혜영 아버지는 의심할 바 없이 대성이가 찾던 회장의 친동생이었다. 대성은 선장에게 다음번에 혜영 아버지를 꼭 모시고 함께 바다로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중국 돈과 달러를 한 묶음 혜영과 선장에게 주고, 술 담배와 필요한 물건도 많이 주었다. 대성은 선장보고 혜영 아버지를 만날 때, 서로 알아보기 좋게 배에 있던 새 잠바 옷을 주라고 시켰다.
혜영은 갈라질 때 어쩐지 표정이 어둡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대성이 아가씨 무슨 고민이 있는가? 물었다. 그녀는 선장 얼굴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우리 오라버니 말임네다, 지금 변방초소에서 소대장으로 있어요. 곧 중대장으로 승진한다고 함네다. 원수님께 충성하는 적극 분자임다. 제가 남조선의 맏아바이와 모르게 연락하는 거 알면 자기 앞길 망친다고 나를 가만 놔두디 않을거 같다요.”
선장은 혜영이 말을 듣고 있다가 침착하게 말했다.
“혜영이랑 아바이가 한국에 도강(탈북)하는 것도 아니고, 고저, 바다에서 혈육 간 잠깐 만나 본다고 말 잘하면 오라버이도 량해 할거외다.”
“네, 나도 그렇게는 생각했는디 자꾸 걱정됨네다.”
가만히 듣고 있던 대성은 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회장님 생각도 동생 한 분만 데리고 한국 갈 생각은 전혀 없어요. 년세도 있으신데 가족을 떠나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말씀하셨어요.”
“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단동에서 북조선과 국제무역하는 절친한 중국 친구가 있데요. 자기가 입만 떼면 발 벗고 나서 도와줄 분이라고 했어요. 아가씨도 합법적으로 정부의 무역허가증을 발급받아 정당하게 무역하면, 회장님이 경제와 인맥 방면에서 대폭 지원해준다고 했어요.”
혜영이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우며 말했다.
“저의 동창, 남자 친구가 신의주 조중 무역회사에서 근무함네다요. 우리도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놔두고 한국은 가기 싫슴네다. 우리 오라버니는 국제 무역하는 거도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기 쉽다며 견결히 반대 합네다요.” 
“그래요, 혜영 아가씨도 집에 돌아가서 집식구들이랑 잘 상의해보세요. 저가 아버님을 먼저 만나서 충분히 우리 회장님의 의사를 전달하고 다시 상의해봅시다. 밥도 한술에 배부르지, 안잖나요.” 
대성과 혜영은 상의 끝에 아버지와 만나는 날짜를 9월 16일이 추석인데 추석 4일 전인 12일에 코끼리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9

현미가 중국에 있을 때는 대성과 자주 통화한다. 누가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는 딱히 알 수 없다. 대성은 그녀와 대화할 때는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때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거 같고 한 번씩 통화하고 나면 온몸에 새 힘이 솟구쳤다. 
 어느 날, 현미가 단동에 가서 중, 북 국경선에 북한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는 실제 모습들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대성은 현미 같은 젊은 여자가 어찌 홀로 있는 남자 부하의 거처에 놀러 오겠는가, 그리고 회장님의 무남독녀인데……. 그저 입으로 말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은근히 현미가 놀러 오기를 바랐다. 
어느 날 문뜩 현미가 보낸 문자를 받았다. 
“삼 일 후 아침 비행기로 단둥에 도착합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오면 감사하겠습니다. -김 현미”
대성이 정말 문자를 받고 나니 가슴이 세차게 뛰고 현미를 어떻게 접대해야 할지 막연하고 걱정부터 앞섰다. 그는 친구에게 승용차를 빌리어 공항으로 마중 갔다. 수수한 평상복을 입은 현미는 대성의 손을 잡고 얼굴을 한참 쳐다보며 애처로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고, 우리 대성 씨 얼굴이 검고 매우 수척해졌네요. 수고가 많았어요……. 쯧, 쯧”
그녀는 마치 오래된 옛친구를 만난 듯이 대성 어깨를 다독이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저를 어디로 안내하지요?”
“과장님이 제일 가고 싶어 하던 북한과 중국 국경선에 가서 구경하고, 점심은 그곳에서 간단히 먹고 오후 4시면 북한 남포에서 들어오는 신선한 해물을 받아서 제가 직접 요리하겠습니다.
”네, 좋아요. 먼저 숙소에 가서 트렁크를 놔두고 가야 하겠네요. 대성 씨가 어떤 곳에서 생활하는지 봐야 하겠어요. 호호호”
현미는 대성이 하루 동안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숙소를 둘러보고 물었다.
“대성 씨는 날마다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 정돈하며 생활하는 거예요?”
대성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네, 노력은 하고 있어요.”
그들은 곧바로 동항시로 가는 대로로 들어섰다. 한참 달리다 선박들이 빼곡히 들어선 부두로 꺾어 들어갔다. 부두를 지나자 인가(人家)도 없는 동 떨리진 곳에 집 한 채가 있었다. 북조선 사람들과 물물교환하는 중국 슈퍼였다. 슈퍼 앞에 1m 넓이도 채 되지 않은 실개천이 있었다. 실개천이 중국과 북조선의 국경선이었다. 실개천 넘어 흙으로 높이 쌓은 방파제가 있고 방파제 넘어 북조선 주민이 사는 동네였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똑똑히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대성은 건너편 마을을 가리키며 현미에게 말했다.
“과장님 저 동네가 북한의 곡창 황금평입니다.”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 황금평은 북조선에서 보기 드문 넓은 평야였다. 전문 수전 농사를 하는 곡창이고 평안북도 신도군에 속한다. 계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바다와 연결된 큰 강이 보인다. 큰 강 양쪽을 비교해보면 너무나 안타까웠다. 한쪽에는 아파트가 숲을 이루는 현대 도시라면 다른 한쪽은 근대시대같이 초라한 동네였다. 
북조선 황금평에는 방파제를 흙으로 쌓았고 오랜 시간에 파도에 씻기어 곧 허물어질 것 같았다. 방파제 위에 여기저기 아낙네들이 아이를 업고 나물을 캐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논에는 잡초가 벼 키보다 더 높고 아낙네 몇 명이 논에서 일하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어쩌다 군복을 입고 총을 멘 북조선군대들이 방파제 위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똑똑히 보였다. 
마침 북조선 방파제 위에서 몸이 너무 야위어 바람 불면 날아갈 거 같은 군대 한 명이 총을 메고 걸어왔다. 그는 대성과 현미가 서 있는 앞까지 다가와서, 풀숲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저씨, 담배 한 대 줘요.”
서로 바라보는 거리는 1m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왜 너에게 담배를 줘야 하노?”
대성이 웃으며 말하자 현미가 대성이 팔을 흔들며“담배 한 갑을 거저 줘요.” 했다.
그때, 북조선군대가 현미를 한참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앞에 녀자래, 혹시 남조선 아가씨 아니요? 중국 려자들과 얼굴색이 다른데요.”
 “남조선 아가씨가 아니고 상해 처녀야. 여기 담배 한 갑 줄게 받아,”
“예! 예!” 그는 대성이가 던져 준 담배를 줍지 않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이내 주머니에 넣고 도망치듯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달아나버렸다.
조금 뒤, 젊은 아줌마가 어린아이를 업고 방파제 위에 자란 풀을 골똘히 내려다보며 지나가고 있었다. 대성이 현미에게 조금 전에 산 초콜릿 사탕을 달라고 하며 북조선 아줌마를 불렀다. 아줌마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대성이 초콜릿 사탕을 건네주자, 또 주위를 휙 둘러보고 잽싸게 주머니에 넣고 돌아서 갈려고 할 때였다. 
북조선군대 중에서 보기 드문 키가 헌칠한 군대가 총을 메고 쫓아와서 아줌마의 초콜릿 사탕을 빼앗았다. 아줌마는 악을 쓰고 도로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군대는 그녀를 밀치고 빼앗은 사탕을 먹으려고 할 때였다. 대성이 계천을 뛰어넘었다. 그곳은 마치 조그마한 섬 같은데 물이 많을 때는 침수가 되어 보이지도 않는데, 북조선 땅도 아니고 중국 땅도 아닌 애매한 곳이다. 대성은 군대의 멱살을 꼭 잡고, 그 초콜릿 사탕은 내가 준 것이니 어서 아주머니 품속에 있는 어린 아기를 먼저 주라고 호통쳤다. 북조선군대는 눈을 부릅뜨고 총부리를 대성이 가슴에 겨누었다.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대성을 쏘아보며 고함쳤다. 
“꼼짝 말았! 뒤로 돌아 가라구우, 나래! 여기서 너를 죽여도 너는 개죽음이야.” 
대성은 대수롭지 않게 북조선군대가 자기를 겨누고 있는 총부리를 옆으로 밀면서, 번개같이 총을 빼앗아 풀숲에 던져버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원래부터 너네 땅도 아니고 우리 땅도 아니야, 내가 과자와 사탕을 줄 테니 그 초콜릿 사탕은 아줌마 돌려줘!” 
미처 어쩔 사이도 없이 총을 빼앗긴 북조선군대는 눈이 휘둥그레서 아줌마에게 초콜릿 사탕을 넘겨주었다. 대성이 현미를 보고 “과장님 슈퍼에 가서 사탕과 과자를 사 오세요”라고 말했다. 현미가 달려가서 물건 한 상자를 샀는데 너무 무거워 주인집 아저씨가 들고 나왔다. 상자 안에는 사탕, 과자, 담배, 술, 공책, 연필 등이 있었다.
“이거 저 아줌마란 절반씩 나누어 가져, 알았지! 나, 너네, 초소에 장 소대장 잘 아는 사이야, 통역 해석이 줬다면 알 거다.” 
북조선군대는 “예, 예”하며 담배 술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아줌마를 주었다. 그는 풀숲에서 총을 찾아 도망치듯 초소 쪽으로 사라졌다. 아줌마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고맙다는 말만 하고 물건을 들고 방파제의 우거진 풀숲으로 사라졌다. 현미는 얼굴이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려 다시 돌아온 대성을 나무랐다.
“대성 씨, 어찌 자고 북한 땅에 마음대로 건너가요. 북한 군대는 사람 죽이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총부리를 겨누었는데도 피하지 않고 도리어 빼앗아요. 나는 심장이 빨리 뛰어 쓰러질 뻔했어요. 너무 하는 거 아닌가요. 다시는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하지 말아요.” 그녀는 아직도 벌렁거리는 앞가슴을 문지르며 말했다.
“하, 하, 하, 내가 건너간 곳은 중국 땅도, 북한 땅도 아닌 곳이에요. 우리는 바다에 나가면 매일 이렇게 거칠게 놀아요, 허, 허. 네, 과장님 조심하겠습니다.” 
현미는 눈을 곱게 흘기며 손가락으로 대성이 완강한 어깨를 콕콕 찔렀다. “어이구, 정말 간도 크지, 총으로 가슴을 겨누고 있는데도 겁도 없이 도로 빼앗아 던져버리다니?” 
그녀의 두 눈에서 대성의 거친 행동에 원망보다는 자랑과 감탄의 눈빛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오후 네 시 전에 시장에 가서 남포 바다에서 가져온 해산물을 받아야 했다. 승용차 옆 좌석에 앉은 현미는 자꾸 대성을 바라보며 혼자 웃었다.
“과장님 왜 자꾸 저를 쳐다보며 웃어요. 얼굴에 무엇이 있어요?”
“아니요, 대성 씨, 오늘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니 정말 남자답게 잘생겼어요. 하는 행동도 남자 같고요.”
현미는 웃으며 대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이구, 과장님, 쑥스러워 얼굴을 못 들겠네요. 허, 허, 허”
“호탕하게 웃는 모습도 남자 같고요.”
그녀는 차창밖에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대성과 현미가 시장에서 나란히 걸어갈 때, 대성과 낯익은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여자 친구 예쁘다고 칭찬했다. 중국말을 조금씩 알아듣고 할 줄도 아는 현미는 일부러 과장되게 대성 팔짱을 꼭 끼고 말했다.
“다들 나보고 대성 씨 여자 친구인가 물었지요? 여자 친구라고 말해요. 호호호.”
남포 바다에서 가져온 해산물은 말 그대로 싱싱했다. 보트 선장은 해삼, 꽃게, 참돔 등을 대성이에게 주며 여자 친구와 맛있게 먹으라고 했다. 현미는 서투른 중국말로 연신“쎄쎄, 쎄쎄” 했다. 
“그럼 돈도 안 받고 이렇게 많이 공짜로 준거예요?”
현미가 눈이 휘 동거래서 물었다.
“네, 친구들이 과장님 대접 잘하라고 공짜로 드린 겁니다. 허, 허, 허.” 
저녁녘이 되자 하늘에 먹장구름이 밀려오고 비가 곧 쏟아질 거 같았다. 대성은 서슴지 않고 주방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익숙한 솜씨로 장만했다. 대성은 현미가 샤워하고 화장할 동안 푸짐한 밥상을 차려 놓았다. 오늘따라 현미는 신경을 써서 화장했던 거 같았다. 
현미는 대성의 요리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성은 술을 마시며 북한의 혜영이가 현미 과장을 많이 닮았다고 했다.
“저도 사촌이라도 여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얼마나 좋아요, 앞으로 차차 혜영이는 한국 대학에 보내어 경영학을 더 배우게 할거예요. 그리고 작은아버지와 연락이 되면, 대성 씨는 한국 갈 준비해야겠어요. 그때 가서 우리 앞날을 잘 계획 해보자요.”
현미는 몸을 약간 일으켜 손수건으로 대성 얼굴에 돋아난 땀방울을 닦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실은 지금 와서 허물없이 얘기하지만, 저의 남편은 소심하고 자상한 성질이었어요. 여성들이 선호하는 성격이지요. 처음 대성 씨를 만났을 때, 생활했던 환경이나 가치관이 달라서인지 조선족이라고 편견과 배타성이 없지 않아, 있어서요.
그런데 대성 씨와 많이 접촉하면서 광야를 질주하는 준마 같은 거친 성질, 끝없이 자기 목적을 위해 목숨까지 걸고 달리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바로 남자의 성격이구나! 라고 느꼈어요.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아낌없이 도와주는 그런 인격은 내 생각을 바꾸었어요, 그래서 점차 대성씨에 대한 편견과 배타성도 사라졌어요.”
현미의 말에 대성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와 술잔을 살짝 부딪쳤다. 지금의 현미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범접하지 못할 그런 기질은 찾아볼 수 없고, 천진한 여자애처럼 웃고 떠들고 흥분한 상태였다. 
“원래 우리 집은 부유한 집안이 아니에요, 아버지가 사업하다가 실패도 몇 번 했고, 곰팡이 낀 지하 월세방에서 살아본 적도 있어서요. 우리 회사의 전성기는 중국에 진출한 뒤이에요. 저도 가난의 쓴맛을 잘 알고 가난 속에서 몸부림도 쳤고 가난이 얼마나 두려운지 너무나 잘 알아요. 정말 지난날 얘기하면 눈물이 나요.”
그녀는 지난 얘기를 하는 동안 밝았던 얼굴이 굳어지고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후, 옛날이야기를 더 하기 싫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나서 얼굴에 밝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제가 단둥으로 올 때, 사실 제정신으로 오지 않았어요. 머릿속으로는 젊은 녀자가 타곳에 혼자 있는 남자 직원에게 찾아가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쇠처럼 자기도 모르게 비행기 표를 사고, 공항에 가고, 단둥에 대성 씨 찾아왔어요. 나도 제 행동에 이해가 가지 않아요.”
 
현미의 눈길은 옅은 여름옷 속으로 드러난 넓고 탄탄한 대성의 앞가슴으로 자꾸 쏠리었다. 그녀는 어쩐지 자꾸 엉뚱한 대답만 하고 정신을 얘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어느 사이 자정이 넘었다. 밖에서 또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조금 뒤에는 장대 같은 비가 또 쏟아졌다. 천둥소리가 한 번씩 터질 때마다 현미는 대성이 옆으로 바짝 붙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목이 흘렀다. 대성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현미에게 말했다.
“과장님, 미안하지만 여기서 혼자 주무시고 저는 여관에 가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오겠습니다.”
현미는 어찌 이를 수가 있겠는가, 하는 의아한 눈길로 대성을 쳐다보다가 조금 뒤, 마치 화 난 듯이 말했다.
“어떻게 일을 그렇게 처리해요? 비가 오고 천둥 번개 치는 캄캄한 밤에 녀자 홀로 자라고 하면 예의가 없지요. 대성 씨는 바닥에서 쉬세요.”
현미는 침대에서 자고 대성은 바닥에 누웠다. 불을 끄자 고막이 터질 듯한 우렛소리가 울렸다. 현미는 어둠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침대 바로 밑에 누워있는 대성에게 속삭이었다.
“대성 씨 무서워요. 저의 손을 잡아 줘요.” 그녀는 한쪽 손을 대성이 가슴에 내려놓았다. 대성은 말없이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꼭 쥐었다. 잡은 손이 마치 불꽃에 타는 듯 뜨겁게 느껴졌다. 조금 뒤 현미의 몸체가 대성이 몸 위에 겹쳐졌다. 대성은 절묘한 곡선이 살아 있는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정신을 아찔하게 하는 그녀의 부드러운 젖가슴이 따뜻하게 와 닿았다. 아득하고 막연하게 느끼던 그리움과 갈증을 뛰어넘어선 두 사람은 마치 한 덩어리의 광석처럼 타오르는 연탄 속으로 뛰어들었다.


10
대성은 육손이 아저씨와 만나자 약속한 날짜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설레고 흥분했다. 만나자 약속한 날 이틀 전이었다. 무심결에 단둥시 텔레비전 기상 예보를 듣고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내일과 모래 사이에 북조선 서해가 태풍 중심권으로 될 수 있다고 방송했다. 어쩌면 북조선 선장과 혜영 아버지가 약속한 그 전날 바다로 나올 가능성이 컸다. 북조선에는 기상 예보가 정확하지 않을뿐더러 많은 선박이 무선전화나 라디오가 없었다. 설사 기상 예보를 했다 하더라도 바다에 나가 있는 사람들은 알 수가 없고, 밤이면 어느 곳에 배가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다
9월 11일, 중국 해경은 모든 중국 배들을 출항 금지했다. 저녁에 되자 먹장구름이 하늘에 뒤덮이고 폭풍우가 몰아쳤다. 장대 같은 굵은 빗줄기는 쉴 사이 없이 쏟아지며 원룸의 유리창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집채같은 파도가 부두의 콘크리트 벽을 때리는 소리가 무겁게 들려 왔다. 마음이 불안하여 도무지 집안에만 있을 수 없었던 대성은 현관문을 살짝 열어 보니, 굵은 빗방울과 축축하고 차가운 바람 한 줄기가 거세차게 집안으로 밀려들어 오자 온몸을 오싹 떨었다. 
밤새 몰아치던 폭풍우는 아침이 되자 기세가 누그러들고 점심이 되자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했다. 혜영 아버지와 만나자던 12일에도 중국 해경이 통제하여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13일 새벽 밀물이 들어오기 바쁘게 바다로 나갔다. 대성은 속력을 다하여 북조선 선장과 약속했던 코끼리섬으로 달려갔다. 바다의 검푸른 물결은 태풍이 방금 지나갔던 기억조차 없다는 듯이 고요했다. 암석에 좌초한 북조선 배들이 옆으로 쓰러져 있는 모습은 죽은 큰 고래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성의 목선 앞에 북조선의 선박 한 척이 천천히 가고 있었다. 갑판에는 사람들이 망원경을 들고 무엇을 찾는 듯했다. 대성 배가 북조선 선박 옆을 지나갈 때였다. 대성을 부르는 젊은 녀성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속도를 죽이고 위로 쳐다보니 혜영이 선박 위에서 눈물을 훔치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성을 부르고 있었다.
“통역 오라버니, 저, 혜영이 배 위에 있슴네다.” 
혜영이는 분명 울고 있었다. 대성은 가슴이 ‘철렁’ 내리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밧줄을 대성이 배에 던져 주었다. 대성은 배를 붙이고 혼자 북조선 선박 위에 올라갔다. 그녀는 대성을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대성은 혜영 얼굴에 눈물을 닦아 주며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물었다. 혜영은 선박 뒷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아바이 시신이 바닷물 속에 …….” 
그 말을 듣는 순간, 대성은 누가 배 속의 내장을 두 손으로 비트는 듯했다. 그의 예감이 현실로 되었다. 혜영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와 선장이 바다에 나온 사연을 말했다.
-혜영이 바다에서 대성과 만나고 집에 돌아와서, 한국에 계시는 큰아버지가 아버지를 애타게 찾는다는 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려 주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옛날 추억을 더듬으며 푸른 산 넘어 흰 구름 피어오른 아득한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약속한 날짜보다 이틀 일찍 선장 집까지 걸어가서 바다로 나가자고 졸랐다고 했다. 북조선에서는 아버지가 바다로 나가는 11일 새벽까지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태풍 소식을 방송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 시신은 작은 섬에서 발견되고 선장 아저씨의 시신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했다. 이미 찾은 시신이 부패할까 봐 우선 밧줄로 발목을 묶어 바닷물에 담가 놓았다고 하였다. 대성은 혜영 아버지의 시신이라도 한번 보자며 선장에게 배를 세워 달라고 사정하면서 술 두 병과 담배 한 보루를 주었다. 선장은 흔쾌히 대답하고 배를 멈추고 닻을 내리었다. 
선박 뒷부분에 밧줄로 발목을 묶은 남녀 여섯 명 시신이 바다 물속에 잠겨 있었다. 두 팔을 아래쪽으로 축 내리고 물속에서 일렁거리는 시신의 모습은 좀비를 방불케 했다. 반짝반짝 빛을 뿌리는 조그마한 고기 때들이 시신 살가죽에 붙어 입을 부지런히 놀리며 살코기를 뜯어 먹고 있었다. 대성은 육손이 아저씨 발목 묶은 밧줄을 당기어 갑판에 눕혀 놓았다.
 대성이 바다에 나올 때 입으라고 준 감색 잠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미 시신에서 냄새가 났다. 고기들이 오른쪽 뺨을 하얀 뼈가 드러나도록 뜯어 먹었다. 상처 자리었다. 손가락부터 살펴보았다. 왼쪽 손가락은 육손이고 마치 싱싱한 피부같이 깔끔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사진기를 꺼내 육 손 아저씨의 시신을 찍었다. 대성은 술을 가지고 와서 현미 작은아버지, 육손이 아저씨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 난 뒤 술을 부었다. 배에서 새 담요를 가져와, 시신을 둘둘 말은 다음 노끈으로 묶으려고 할 때였다.
북조선의 경비정 한 척이 목선 옆을 지나고 있었다. 혜영이 경비정 쪽으로 손짓을 하며 소리를 쳤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아바이 여기 있슴네다, 여기래요.”
북조선 경비정이 서서히 목선 쪽으로 다가왔다. 경비정 갑판에 눈빛이 날카롭고 다부지게 생긴 한 젊은 북조선 군인이 손짓하고 있었다. 갑판에 오르자 북조선 선장이 거수경례하며 먼저 말을 하였다. “중대장동지, 아바이 시신을 찾았습니다.” 혜영 오빠는 육손이 아저씨 시신 곁으로 다가가서 “아바이! 아바이”라며 두 무릎을 꿇었다. 
“며칠 전까지 튼튼한 아바이 어찌 여기에 누웠슴네까. 빨리 일어나시오. 아바이 날래 일어나시우.”
그의 얼굴은 눈물투성이고 두 눈은 충혈되었다. 한참 눈물을 흘리며 울던 혜영 오빠는 벌떡 일어나 대성이 앞으로 다가가서 혜영에게 물었다.
“내가 수령님 다음으로 존경하신 분이 아바인데, 아바이 없으면 어띠 살갛쏘. 이 통역넘이, 아바이를 꾀어서 바다로 나오라 했디! 애미나이, 남조선 놈들이나 외국 사람들 접촉하지 말라고 벌써 말 했디.” 그는 표독스럽게 대성을 쏘아보았다.
 혜영은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약이 잔뜩 오른 오빠에게 두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사정했다.
“오라버니, 이 통역 오라버니 좋은 생각으로 아바이를 바다로 나오라 약속한 검네다. 오해 하지 말라우”
“아니 뭐이야? 통역 오라버니? 명심하라우, 오직 수령님만 계시면 남조선 놈들이 방조하지 않아도 우리는 잘살 수 있다우. 아바이를 죽인 쌍간나새끼, 절대 가만 놔두지 않을거야!”
대성은 혜영 오빠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혜영이 오라버님, 아니, 중대장 동지, 내 말 좀 들어 보세요.”
 이때였다. 대성이 어쩔 사이도 없이 혜영 오빠가 권총 자루로 번개같이 머리를 내리쳤다. 
그는 뒷걸음치며 피했으나 워낙 생각 밖이고 준비도 없는 상태라, 앞이마에 ‘퍽’ 소리가 나도록 맞았다. 대성은 두 눈에서 수천 개의 불꽃이 튀어나왔다. 붉은 피가 두 눈을 가리었다. 다시 옆으로 피하려고 할 때, 또 권총 자루로 정수리를 내리쳤다.
 대성은 무거운 신음을 내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혜영 오빠는 독이 잔뜩 오른 짐승처럼 총자루로 대성이 머리를 마구 짓 쪼았다. 쓰러진 대성의 코와 입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옆에서 울기만 하던 혜영은, 
“오라버니! 이 사람 나쁜 사람 아니야요, 우리를 방조하려다가 이렇게 된 거야요”라며 전신의 힘을 다해 오빠 허리를 꼭 껴안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때, 배에서 벌벌 떨며 넋 나간 사람처럼 참혹한 광경을 쳐다보던 허 선장이 선박으로 뛰어올라 대성을 업고 자기 배에 눕혔다. 그는 배 안에 있는 약을 꺼내 혼미한 대성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뒤, 속도를 내어 집으로 향해 달렸다.


11
허 선장은 배가 부두에 도착하기 전에 동생에게 전화하여 구급차를 부두에 대기하라고 했다. 대성을 구급차에 태워 단둥 병원 응급실로 갈 때 구토를 멎지 않았다. CT 촬영하니 뇌진탕과 외상성 뇌 손상이고, 머리 안에 응고된 피를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허 선장은 조선족 통역에게 도움을 청해 한국 B 회사 회장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게 했다. 
이튿날 한국 B 회사의 김 부장이 병원에 찾아와서 회장의 지시를 전달했다. 대성은 회장의 지시로 임무를 수행하다 부상했기 때문에, 제일 좋은 병원과 의사를 찾아서 치료하며 병원 경비는 회장이 전부 책임진다고 했다. 원래 현미 과장이 와야 하는데 개인 사정으로 한국에 체류 중이라고 했다. 
여동생 은영이도 소식을 듣고 단둥시로 왔다. 여덟 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의사 선생이 수술 결과를 얘기했다.
“뇌 속에 응결된 핏덩어리는 제거하여 생명 위험은 없어도 뇌진탕 증후군으로 인해 옛날같이 정상적으로 뇌 활동은 할 수 없고 실어증과 기억 장애도 올 수 있다”라고 했다.

일주일 뒤에 현미 과장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이제 겨우 만나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얼굴은 알아볼 수 없도록 야위었고,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아 누군지 분별할 수 없었다. 한쪽 눈은 반쯤 떴는데 빨간 핏줄이 가득하고 얼굴색은 병원 침대보처럼 창백했다. 그렇게 잘생기고 기개가 넘치어 때로는 야성이 돋보이던 그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모습이었다. 
현미가 도착한 이튿날 기적같이 의식이 돌아왔다. 그러나 기억을 잃고 누구도 기억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현미가 그의 손을 잡고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을 때, 오랫동안 쳐다보면서 눈만 자꾸 깜박이었다. 
현미는 착하고 예쁜 은영이를 만나자마자 친동생같이 대해 주었다. 은영이와 현미가 상의 끝에 대성을 고향 집 근처 병원으로 이동하자고 했다. 상처도 다 아물고, 위험시기도 지나자, 병원 측에서도 동의했다. 집에 돌아온 후,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치료받았지만 역시 실어증과 기억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어느 하루, 은영이가 동네 남쪽에 있는 큰 저수지로 대성을 데리고 갔다. 저수지를 둘러싼 나무에 단풍이 곱게 들고, 하얀 파도 위에는 노란 낙엽이 배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으로 대성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보였다. 대성은 거의 날마다 저수지에 다녀갔다. 저수지에 가면 온종일 주위를 돌며 걷기도 하고, 때로는 벤치에 앉아 저수지 위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하얀 물거품으로 부서지는 모습을 넋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한 달이 지난 뒤부터는 아침밥만 먹으면 저수지로 가서 늦은 오후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은영이가 동반하여 다니었다. 자주 다니던 길이 익숙해지자 자기 혼자 집을 잘 찾아왔다. 그런데 저수지에 가려면 새로 공사한 고속도로가 가로질러 있어 위험하였다. 멀리 돌아가야만 도로를 건너갈 수 있는 터널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은 바쁜 일이 있고, 주행하는 차가 없을 때는 남몰래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가버렸다. 여기는 사고 잦은 곳이었다. 
어느 하루, 대성이 아버지보고 빵을 사 먹겠다며 돈을 달라고 했다. 말소리가 똑똑하지 않아 아버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은영이가 눈치를 알아차리고 오빠에게 돈을 주었다. 그는 저수지에서 놀다가 늦은 오후에 집으로 오면서 저수지 매점에 들렸다. 처음으로 음료수와 빵을 사서 멀쩡한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 먹었다. 옆에 한사람이 맥주를 먹는 거 보고 자기도 맥주 한 병 돌라고 했다……. 
대성은 전에는 늘 길을 돌아서 터널을 거쳐 집으로 갔는데, 오늘은 차들이 싱싱 달리는 고속도로 혼자서 건너갔다. 도로를 다 건너갔을 때였다. 고속으로 달리는 승용차가 머리를 숙이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대성을 들이박아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 십 미터 밖에 떨어진 대성은 피투성이가 되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12
대성이 집에 돌아온 후부터 은영과 현미는 평일에도 자주 통화했다. 언제나 현미가 먼저 전화를 걸어 오빠 안부를 물었고, 한국에서 실어증과 뇌진탕 회복에 좋다는 약도 많이 부쳐 왔다. 현미가 요즘 한국에 체류하다 어제 회사에 도착했다고 했다. 요즘 꿈자리가 어지러웠는데 무슨 별일이 없어는 가고 먼저 물었다. 은영이 한참 침목 지키다, 흐느껴 울면서 대성이 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차 사고로요? 아! 또 차 사고!” 
그녀의 말소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침목이 흘렀다. 가뿐 숨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의 숨소리에서 슬픔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차가운 이성으로 꾹꾹 누르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흐느끼다가 낮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내일 그곳으로 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마지막으로 한번 보겠어요.”
이튿날 점심때쯤 현미의 자가용 차가 도착했다. 그녀는 미리 준비했던 흰 국화꽃을 밖에 설치한 대성이 영정에 올리고 묵례하였다. 
자기와 만난 후부터 모든 힘을 다해 몰두했던 사랑과 꿈이, 한순간에 죽음과 함께 증발해버렸다. 활력이 넘치고 건강했던 한 청년은 눈앞에서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신으로 조용히 누워있었다. 현미는 지나간 그와 함께했던 일들이 선명하게, 가슴 아프게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끝내 눈물이 창백한 얼굴을 적시었다. 
 은영이 집안으로 같이 들어가자고 할 때, 약간 주저하다 발길을 천천히 옮기어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정면 벽에 누르스름하고 색이 바랜 네 사람이 찍은 옛날 사진이 유난히 눈을 끌었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서 사진을 오랫동안 자세히 쳐다보았다. 
“아가씨, 혹시, 저 벽에 걸린 옛날 사진이 한국에 계시는 친척 되신 분들이 아닌가요.?”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큰아버지와 아버지예요. 아버지가 중국으로 오기 전 한국에서 찍은 사진이래요. ” 
그녀의 얼굴은 삽시에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아~’하는 신음을 내며 이마에서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은영이 보고 사진을 찍어도 되겠는가고 물었다. 사진을 찍은 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어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고개를 들 때 몸을 휘청거리었다. 은영은 재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온몸이 바르르 경련했고 두 눈 주위에는 검푸른색이 약간 어려 있었다. 그녀는 은영이를 바라보며 낮고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대성 씨가 날마다 다니던 저수지에 잠깐 갔다 올 수 있어요?” 
은영과 현미는 차를 운전하여 저수지로 갔다. 현미는 운전하며 차창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모든 것을 빼앗긴 초겨울 들판은 더없이 쓸쓸하고 황량해 보였다. 저수지 오른쪽 기슭 위에 누른 억새와 갈대밭이 펼쳐졌고, 마른 갈대의 기다란 잎은 황갈색 리본처럼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저수지 주위를 돌며 살펴보다가 감탄하듯 말했다.
“올봄에 대성 씨와 처음으로 둘이서 식사하던 한국요리 집 앞에 저수지가 있었어요. 이 저수지와 요리 집 앞에 저수지 모양과 구조가 똑같네요. 무엇 때문에 대성 씨가 날마다 이 저수지로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때 제가 중국에 진출한 후, 마음속 비밀을 처음으로 대성씨에게 말했어요. 나는 이미 결혼했던 녀자이고 저의 남편이 차 사고로 돌아가고 남편과 대성씨가 너무나 닮았다고 말했던 거예요. 우리는 사랑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서로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아요.”
은영이와 현미는 잔잔한 파도가 꿈결같이 굴러가는 저수지를 향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이따금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은 풀들이 말라 쓰러진 벌판에서 안타까운 탄식처럼 스치었다. 
“아가씨, 아빠는 이번에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오지 못하게 되었어요. 대성 씨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까운 인재가 일찍 죽어 너무 비통하다고 했어요. 앞으로 아가씨 집에 힘든 일이 있으면 우리 가족 일과 같다면서 꼭 얘기하라고 부탁했어요.”
현미는 옆에 서 있는 고목 밑에 기묘하게 서로 엉켜 있는 뿌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고 계속 말했다.
“오늘 생각 밖으로 한 가지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네요. 아가씨 집안 벽에 걸린 옛날 사진과 한국에 전남편 집에 보관해 두었던 옛날 사진이 똑같아서요. 대성 씨와 저의 남편 얼굴이 많이 닮았다고 말한 적 있지요. 지금도 생각하면 두 사람의 눈길, 행동, 그리고 거짓말하고 감추지 못해 얼굴이 붉어지는 천진한 모습까지 똑 닮아서 헷갈릴 때가 많았어요. 저의 생각에는 분명 두 사람은 사촌 형제예요. 한 남자는 늘 가슴속에 잔잔한 물결 같은 사랑으로 나를 애무했고, 다른 한 남자는 최초로 나의 가슴을 격렬하게 뛰게 했고 늘 긴장 속에서 사랑하게 했어요.”
현미는 말을 멈추고 다시 침목을 지켰다. 사랑했던 두 남자가 사촌 형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슴속에서 격렬한 폭풍이 일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그녀의 얼굴은 가을 아침의 호숫물처럼 고요했다.
“그럼, 언니 남편이 우리 사촌오빠인가요?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눈물을 흘리며 듣던 은영이는 현미를 꼭 껴안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현미의 두 눈이 약간 붉었지만,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왼손으로 은영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오른손으로 자기의 농밀한 검은 머릿결을 스쳐 올릴 때 은영이의 진한 눈물 같은 흰 머리카락 세 오리가 햇빛에 반짝이었다. 
“또 오빠와 관련되는 얘기를 아가씨에게 꼭 알려 주려고 했어요. 아가씨, 너무 놀라지 말아요, 비록 상식에는 벗어나지만, 저의 뱃속에 삼 개월이 된 대성 씨 아이가 있어요. 남자아이예요. 지금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요.”
그녀는 은영이 얼굴에 눈물을 닦아 주고 손을 꼭 잡으며 말을 계속했다. 
“어쩌던 아빠가 없어도, 아빠처럼 아이를 밝고 씩씩하게 잘 키울 것이고, 우리 집 가산을 이어받을 훌륭한 후계자로 키울 거예요. 그래야만 저의 전남편과 대성 씨도 하늘 아래에서 편안하게 잘 지낼 거 같아요.”
이때였다. 두 녀인은 비에 젖은 진흙 속에 큰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 옆에는 이미 주인을 잊은 듯이 지워지고 있는 어지러운 큰 발자국도 눈에 띄었다. 그 발자국 속에서 무엇이 살아서 곧 나올 것만 같았다. 현미와 은영은 그 발자국의 주인을 알면서 눈길만 마주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침목을 지켰다. 

대성의 시신을 화장하고 그 유해는 그가 생전에 자주 다니던 저수지에 뿌렸다. 

이듬해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하늘에서 진눈깨비기가 푸슬푸슬 내리었다. 노란 리본 같이 나풀거리던 마른 갈댓잎에 하얀 눈가루가 희끗희끗 보였다. 점심쯤 돼서 검은 구름이 밀려가자 햇볕이 따사로웠고 날씨도 쾌청해졌다. 빨간 승용차 한 대가 저수지에 나타났다. 머리가 흰 할아버지와 젊은 녀자 두 명과 어린 남자아기가 승용차에서 내렸다. 아기는 어머니 품속에서 엄마의 따스한 체온을 받으며 안온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머리가 흰 할아버지는 현미의 아버지고, 젊은 녀자 두 명은 한국의 현미, 중국의 은영이었다. 오늘이 대성의 기일(忌日)이었다.
저수지는 작년 이때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단지 큰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발자국 자리에 한때는 무성히 자랐던 풀들이 다른 색상으로 변하여 무엇을 기다리는 듯 꼿꼿이 서 있었다. 
대성의 유해를 뿌린 자리에서 현미 아버지는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물에 뿌리며 눈물을 흘리었다.
“작년에 내가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마지막으로 자네를 볼 수 없어 마음이 너무 아팠네,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승의 흰머리가 저승의 검은 머리를 찾아왔네. 내 욕심으로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해 결국 이런 비극이 생기게 되었네. 동족끼리 생긴 이른 비극은 단지 개인의 비극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비극이기도 하네. 다행히 자네의 혈육이 나의 손자가 되었으니 마음이 다소 안위 되는구려. 자네 혈육을 정성껏 키워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겠네. 부디 하늘 아래서 행복하게…….”
현미는 아기를 안고 은영이와 함께 묵례하였다. 저 멀리서부터 밀려온 파도가 조약돌과 모래가 깔린 기슭을 살짝살짝 치며 하얀 거품을 내뿜었다. 여섯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 차가운 파도 속에 희석되었다. 아기가 머루알 같은 눈을 뜨고 고사리손을 흔들며 입을 오물거렸다. 울지는 않았다. 이마가 넓고 두 눈이 부리부리한 얼굴은 아빠의 판박이였다.
이때였다. 저수지 가운데서 은백색 유람선이 누르스름한 산들이 기복을 이루는 동쪽으로 향해 천천히 가고 있었다. 유람선 뒤에는 샴페인의 창백한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길고 넓게 퍼져나간 항적을 남기었다.
 
(끝)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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