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이남철 교수
이남철 교수

1990년 2월11일,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필자가 유학생활 한달쯤. 정확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내용이지만 모든 방송들은 이 사건을 온 종일 보도하는 것이 아닌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인 넬슨 만델라가 27년간의 감옥 생활 끝에 어제 석방이 됐습니다.”사건의 주인공은 1962년 8월5일 반역죄로 체포되었고 1964년 종신형 징역을 선고받았다. 1964년 내란 혐의로 재판을 받던 만델라가 최후 진술을 통해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일생 동안 아프리카인의 투쟁에 헌신해왔다. 나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고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이상을 간직해왔다.”

필자는 만델라가 감옥에서 석방되기 전까지 그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그는 1918년 7월18일 남아공 트란스케이 수도 움타타 지방의 음베조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이 아버지는 만델라에게 롤리흘라흘라(Rolihlahla)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는 ‘말썽꾸러기’라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는 4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만델라는 셋째 부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학교 문턱에도 가지 않았지만 아들 교육에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친구 욘긴타바가 그를 돌봤다. 만델라는 클라크베리 학교를 마치고 19살 때 힐트타운 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 유학생들로 넘쳐났다. 만델라는 이 학교에서 아프리카인으로서 처음으로 자신을 깨달았다고 한다. 만델라는 힐트타운에서 3년 동안 공부를 한 다음 포트헤르대학에 진학했다. 이 대학은 남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영국 옥스퍼드나 미국 하버드 같이 명성이 높은 곳이었다. 욘긴타바는 만델라가 포트헤르대학에 입학하자 흥분할 정도로 좋아했다. 이 대학에는 15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만델라가 처음 만난 학생 중 하나가 3학년생 마탄지마였다. 그는 만델라에게 장래를 생각해서 법을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대학 시절 총장이 만델라의 장래 운명을 놓고 절대적 권한을 휘두르는 것에 분노했다. 그는 자진해서 포트헤르대학을 자퇴하고 투사가 되었다. 만델라는 남아공 현실을 보면서 투사가 되었고, 투사가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들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정치화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아프리카 흑인 아이는 일반적으로 흑인 전용 병원에서 태어나 흑인 전용 버스만 타고, 흑인 거주 지역에서만 살아야 하고, 흑인 전용 학교에만 다녀야 했다. 중략---. 흑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통행증을 제시하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춰야만 하고, 통행증을 제시하지 못하면 경찰서에 연행된다. 이것이 남아프리카 흑인의 현실이었다.” 

1952년, 만델라는 정식 변호사가 되기 위해 비트버터스란트 대학에서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시험에 몇 번 떨어지자 그만두었다. 그러나 변호사 자격시험을 보기로 방향을 바꿔, 변호사 자격을 땄다. 그는 투쟁 활동과 변호사 두 가지 삶을 살았다. 그는 남아공의 유일한 흑인 변호사는 아니었지만 개업한 유일한 흑인 변호사였다. 1993년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남아공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이 주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만델라는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다음은 만델라의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내용 일부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이 상의 가치는, 큰 성공을 거둘 즐거운 평화를 기준으로 평가될 것이고, 평가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지 않는 세상에서 인류 모두가 천국의 아이들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 만델라의 '도덕적 권위'는 그가 27년간 옥고를 치르고, 노벨 평화상을 받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인종차별 정책 반대와 고난을 이겨내고, 노벨상을 받은 지도자들은 지구상에 많다. 남아프리카인으로서 1960년 알버트 루툴리 추장, 1984년 데스몬드 투투 주교, 그리고 1994년 데 클레르크가 있다. 만델라가 특별한 것은 오히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보여준 용서와 화합의 리더십이 세계에 준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만델라의 진정한 ‘용기 있는 삶’은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우리는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 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 ‘용서와 화해’를 실천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비참 하고도 추악한 과거사를 밝히기 위해 만들어 낸 타협의 산물이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정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샤프빌 학살사건(1960년 3월21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가까운 샤프빌에서 발생한 아파르트헤이드 체제 폐지, 인종차별 반대,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과 흑인들을 학살한 사건. 이 사건으로 69명의 사망자와 어린이 29명을 포함, 총 289명이 부상자가 발생했음).

이 일어난 1960년부터 만델라 대통령이 취임한 1994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만 조사한다. 둘째, 정치적 동기에 의해 일어난 사건만 다룬다. 셋째, 사면을 청원하는 사람은 그 사건에 관련된 진실을 모두 충분히 밝혀야 한다.‘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처리한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종차별 시절 인종차별 반대투쟁을 벌인 흑인들을 화형이나 총살 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면 사면했다. 나중에는 그들에게 경제적인 보상도 베풀었다. 피해자 가족들에게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 무덤에 비석을 세워 줌으로써 아파르트헤이드(인종분리) 시절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잊히지 않도록 처리했다. 이렇게 하여 만델라의 ‘용서하는 마음’은 남아공을 ‘화해의 나라’로 만들었다.
 
만델라는 적지 않은 개인적 고뇌를 안고 살았다. 장기간의 수감 생활로 인해 자식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모친과 맏아들이 사망했을 때에도 장례식에 참석 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6명의 자녀를 뒀지만 이 중 3명은 만델라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만델라는 모두 세 차례 결혼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말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피력한 만델라 어록이 눈에 선하다. "난 말을 결코 가볍게 하지 않는다. 27년간의 옥살이가 내게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독의 침묵을 통해 말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고 말이 얼마나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됐다는 것이다.(2000년 7월14일, 만델라 어록집)

며칠 있으면 대한민국 차기 대통령이 선출된다. 여야가 모두 본격적인 대선 경선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상대 후보를 향한 인신공격성 막말 대잔치 가 늘어나고 있다.‘정치 보복의 문제’ 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사전 선거가 시작됐고 3월9일 치러지는 대선을 앞두고 대선 후 국론과 민심이 한층 더 양극화되는 극심한 후유증을 겪을 것이란 암울한 전망들이 많다. 대선 판이 일단 마음을 정한 후보에 대해서는 ‘묻지마 지지’를 보내는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후보와 배우자 등 가족을 둘러싼 의혹과 리스크가 터져도 지지율은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지지하는 후보에 대해서는 중대한 법 위반과 심각한 도덕적 하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럴 수 있지”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7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정과제 보고대회’ 인사말에서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적폐청산(積幣淸算)’을 첫머리에 올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사 청산 위원회’와 만델라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한번 비교해보면 어떨지? 한 때 ‘대단한 분’으로 존경받던 선배들을 하루아침에 ‘용서받지 못할 친일파’나 ‘역적’으로 몰아세웠고, ‘좌파’로 지목 받아 수감생활을 했거나 사형당한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영웅’으로 돌려세웠다. 리콴유는 일본치하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일본어를 배워 일본회사에 취직했고, 총리가 된 후에는 일본치하에서의 경험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박동운, 2019).

영국 국영방송인 BBC의 유명한 앵커였던 프로스트(David Frost)가 감옥에서 풀려난 남아공의 정치 지도자 만델라를  인터뷰 할 때의 일화이다. “바보는 용서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지만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지는 않는다”고 만델라는 말했다. 자신을 억압한 잘못된 제도와 사람들을 용서했기에 원한을 갖지 않았지만 잊지는 않았기에 할 일이 많다고.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만델라는 2013년 12월 5일 요하네스버그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 질곡 많던 삶 행보에도 불구하고 장수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을 “역사의 거인”이자 “20세기 마지막 해방자”라고 칭송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만델라의 영결식에서 “만델라의 투쟁은 당신의 투쟁이었고 그의 승리는 당신의 승리였다”며 “만델라는 인류의 영혼을 결속시켜 주는 유대를 이해했다"”고 강조했다.

사진 설명: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과거 어느 선거처럼 확실한 것은 선거 후 정국의 혼란과 후유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후 폭풍을 최소화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낙선한 후보의 깨끗한 승복과 지지자 설득이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아쉬움이 크지만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선거결과를 흔쾌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승자는 실질적인 사회통합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당선된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은 넬슨 만델라의 ‘용서와 화합’의 리더십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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