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랑하는 셋째 딸로부터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리어왕이 딸로부터 냉정한 대답을 들은 후 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며 내뱉은 절규이다. 자신의 근본에 대한 이 존재론적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명제와 맞닿아 있다. 그런 만큼 이 물음은 오래도록 인간의 사유에 영향을 미쳤고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을 자극했다. 영화 본 시리즈의 첫 편인 <본 아이덴티티>나 평론가 류철균을 소설가 이인화로 만든 장편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때때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번민하곤 한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주인공 제이슨 본(멧 데이븐 역)이 조직으로부터 배척돼 모든 기억이 지워진 상태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찾아 나서는 것처럼. 개인 차원을 넘어 집단적으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보다 포괄적인 질문은 결국 집단의 자기 정당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며 소속감으로 귀결된다. 조선족 동포들이 정체성 때문에 겪는 아픔도 같은 문제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에 있는 명동교회 내부 모습. 명동교회는조선인 초기 이주자들이 세운 최초의 교회로 알려져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에 있는 명동교회 내부 모습. 명동교회는조선인 초기 이주자들이 세운 최초의 교회로 알려져 있다.

한국사회와의 관계맺기로 정체성 혼란 겪게 돼

조선족동포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한국사회와의 관계맺기가 본격화되면서 부터였다. 일제가 항복한 후 한반도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 동북지역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그들은 그때부터 그곳에 뿌리를 내려 정주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전까지는 언제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품고 엉덩이를 반쯤 들고 살았었다. 이른바 나그네 의식이 그들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런데 1992년에 이르러 중국에서 적극적인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한중 수교(1992.8.24)가 체결되면서 이들에게서 다시 나그네 의식이 되살아났다. 마음을 다잡고 수 십 년간 중국 공민으로 살아왔지만 고국과의 관계맺기가 시작되면서 중국 공민인 동시에 한민족의 일원인 자신들의 처지를 되돌아보며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한중 수교 이전까지 조선족동포들은 대체로 이동을 거의 하지 않고 동북지역 곳곳에 터 잡고 살았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중국 공민으로서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안분지족(安分知足)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부터 형성된 정주의식이 작용한 탓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950년대 말 민족정풍운동에 이어 1960년대 중반부터 10여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소수민족으로서의 설음을 견디어야 하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해방 후 문화대혁명이 끝나는 1970년대까지 중국 정착과정에서 희생된 조선족동포들의 수가 공식적으로도 13600여 명에 이르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초기 조선족 인구 111만 명을 기준으로 할 때 1.2%가 넘는 숫자이다.

사실 조선족동포들은 해방 후 중국 동북지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뒤에도 한반도 어디엔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족 문단의 거목인 김학철은 195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에서 그들이 그 같은 미련을 버린 것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부터 였음을 다음과 같이 애둘러 표현하고 있다. “영수 오랍누이는 나중 돌아가신 어머니를 여윈지도 벌써 4, 5년이지만 어려서부터 받아온 그들 부모네의 영향으로 줄곧 해마다, ‘명년에 나간다! 명년에 나간다!’를 외느라고 언제나 궁둥이가 반쯤 떠 있어서 빤빤한 터전에 나무 한 그루 심으려 하지 않다가 작년에야 비로소 울타리 밑에 백양나무 다섯 주와 배나무 다섯 주를 떠다 심고, 거기에 자기들도 뿌럭지를 박고 안착할 결심을 내리었다.”

그러나 다시 한국사회와 관계맺기를 하게 되고 그 관계가 커지면서, 특히 한국사회로부터의 박대와 폄하가 커지면서 조선족동포들 스스로 중국 공민이며 동시에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자신들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족 스스로 정체성에 대해 언급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이다. 연변대학 부교장(부총장)을 역임한 정판룡이 조선족을 중국에 시집온 며느리로 규정하며 조선족 정체성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이다. 며느리론은 조선족을 조선(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시집온 여인으로 비유하는 가운데 시집온 이상 중국의 남편과 시부모에게 잘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리 해야 하는 이유와 관련, 정판룡은 “100여년 이래의 이민 생활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생활교훈이라고 설명한다.

며느리론, 변연문화론, 100% 조선족론 그리고

정판룡은 또 조선족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중 문화 또는 이중 심리를 갖게됐다고 언급, 중국(조국)과 조선(한반도/ 모국 또는 고국)을 모두 지향하는 이중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주장은 이후 박쥐론 사과배론 등으로 이어졌다. 낮과 밤의 행동패턴이 다른 박쥐와 연변의 특산물인 사과배(사과와 같이 붉은 빛을 띠지만 배의 맛이 나는 과일)로부터 조선족의 이중적(?) 모습을 엿보고자 한 것이다. 한편 며느리론은 시집(조선/한반도)의 친정 부모(남과 북)가 이혼 후 서로 싸우고 있어 시집온 며느리의 시집살이가 고되다는 주장으로 확대 재생산되기도 했다.

조선족의 정체성과 관련한 이같은 주장들은 대체로 시공간적으로 두 개의 기준을 전제하고 그 사이에 조선족을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논리가 전개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부각될 초기 조선족 작가 허련순에 의해 소설로 묘사되기도 했다. 1996년 한국에서도 출간된 장편소설 <바람꽃>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바람이 불어왔던 곳(조선/한반도)과 바람이 자는 곳(중국) 두 세계를 설정하고 두 세계 중 어느 한 곳에도 머무르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그리워하며 원망하며 갈등하고 있는 조선족이 처한 상황에 대해, 별도로 설정한 서문에서 본문과 달리 1인칭 시점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귀추 없이 떠돌아다니는 바람꽃. 바람이 불어왔던 곳과 바람이 자는 그 곳, 두 세계 중의 어느 한 곳에 머무르거나 또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도 못한 채 두 곳을 끊임없이 우왕좌왕하였다. 언제나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다른 한 곳에 대한 끊임없는 추억과 망각, 그리움과 원망의 갈등을 수없이 겪으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수없이 날아갔었다. 언제나 두 세계에서 함께 공존했던 셈이고 두 세계에서 함께 탈출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나는 누구일까?”

그러나 조선족의 정체성을 조국(중국)과 모국(조선/한반도) 사이에 끼어있는 존재로 인식하려는 흐름에 대해 연변대학 교수 김강일은 변연문화론(邊緣文化論)을 통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반론을 폈다. “조선족의 문화와 정체성은 중국과 조선(한반도)의 문화와 정체성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문화와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조선족은 중국과 조선(한반도) 사이에 위치한 동북지역에 자리잡고 살아가고 있어 중국문화와 민족문화를 공히 품고 있는 문화적으로 특수한 존재라는 것이다. 김강일은 또 조선족이 중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조선족은 중국 국민(공민)으로서의 조선족이라는 주장을 펴며 민족 정체성보다 국민 정체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시에 세워진 연변박물관의 '조선족혁명투쟁사' 전시실에 전시된 연변지역에서 활동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사진. 사진 속에는 익히 알고 있는 김약연 이동휘 서일 김좌진 이상룡 등 여러 선열들이 포함되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시에 세워진 연변박물관의 '조선족혁명투쟁사' 전시실에 전시된 연변지역에서 활동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사진. 사진 속에는 익히 알고 있는 김약연 이동휘 서일 김좌진 이상룡 등 여러 선열들이 포함되어 있다.

정체성 극복 한중간 가교역할 필요

국민 정체성을 강조하는 김강일의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족개념은 2000년대 후반에 이르러 ‘100% 중국 조선족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중국 중앙민족대학 교수 황유복은 2009년 한국에서 개최된 한 포럼에서 조선족은 한민족 집단에 속하는 동시에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지만 완전한 독자성을 갖는 ‘100% 조선족이라고 역설했다. 조선족의 이주역사와 중국에서의 정착과정을 인정하여야 하지만 이제는 완전한 독자성을 갖는 존재라는 주장이다. 그는 미국 예일대 법대 학장을 역임한 헤럴드 고(고홍주)가 미국동포로서의 정체성과 관련해 스스로 ‘100%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말한 것을 인용함으로써 중국 공민으로 살아가는 조선족 역시 100% 한국계 중국인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또 그렇게 해야 조선족이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어 향후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 중 유독 조선족동포들에게서 정체성 갈등이 두드러졌다. 이같은 현상은 해방 전 고국을 떠나 현지에 정착한 고려인이나 자이니찌와 달리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우리 말과 글은 물론 우리 문화를 오롯이 유지해온 것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따라서 조선족동포들이 정체성으로 인한 고민이 많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만큼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의식, 즉 민족 정체성이 강하다는 의미로 해석할만 하다. 실제로 이들은 한국의 8배나 되는 중국 동북지역 곳곳에 흩어져 집단을 이루고 살아오면서 그들 나름으로 민족 문화를 계승.발전시켜 왔다.

조선족동포들 사이에서 정체성 문제에 대한 논의는 2010년을 전후한 시점까지 활발히 논의 되었지만 최근에는 어느 정도 진정된 듯하다.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 문제가 나름 정리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이들의 마음속에서 민족의식이 옅어졌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다. 세월이 흘러 상대적으로 민족의식이 강했던 사람들의 자리를 동포 3-5세들이 메움에 따라 민족에 대한 관심이 낮아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부질없어진 시대상황의 변화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쨋거나 조선족동포들이 이제는 더 이상 정체성으로 인한 고민을 하지 않고 그들만의 장점을 살려 한국과 중국의 가교로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한다. 한국사회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야 한다. (자유마당 8월호 및 재외동포포럼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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