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숙 수필가/ 재한동포문인협회 수필분과장
천숙 수필가/ 재한동포문인협회 수필분과장

   서울의 11월은 두 계절을 거쳐가는 것 같았다. 11월초에 서울 근처에 단풍구경을 갔더니 일부 나무들은 단풍이 곱게 물들었는데 일부 나무들은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자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가 싶더니 바로 입동에 들어 섰다.

    빨갛게 노랗게 곱게 물든 단풍잎들이 절정에 머문 시간이 짧은 채 바람에 춤을 추며 벚꽃잎처럼 우수수 땅에 떨어 졌다. 흔들리는 나무가지에 얼마 남지 않은 나뭇잎들은 외로움의 등불을 걸어 놓은 듯  독락(獨樂)에 취해 있는 듯 하였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음을 몸짓으로 낙서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면서 내 인생의 봄날과 여름날의 푸른 꿈들은 기억 속에 아물거리고, 나도 언젠가는 어디론가 저렇게 떠나가겠지 하는 서글픈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인생도 계절처럼 변한다. 여러 해 농사를 지어 온 노련한 농부와는 달리, 우리는 인생의 계절변화를 단 한번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그 변화를 잘 인식하지 못할 뿐더러 그에 적응하는 능력도 미숙하다.  

  내 인생의 가을도 그렇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이제는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인생의 가을철이라는 걸 인식못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아쉽고 아련한 생각이 갈마들었다. 

    마음은 낡지 않아 젊은이들의 옷차림을 따라하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리며 경쟁을 해보기도 하고, 건강과 체력관리에 몰두하기도 했지만, 세월의 흐름은 걷잡을 수 없다. 이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로 위로를 삼으며 다양한 활동에 골몰해 본다. 나이를 먹더라도 몸과 마음을 젊고 건강하게 유지하려는 것이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죽음은 나와 아주 먼 거리데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선배나 친구들의 부음을 접하게 되면서 죽음과 시간의 한계를 인식하게 된다. 내 인생의 전반을 되돌아 보고 내 자신을 재평가해보면서 삶에 대한 내향적 관심이 증가하게 되었다. 

  특히 '논어'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는 그 동안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는가? 남은 인생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삶의 가치를 만들기 위한 탐색과 노력을 하게 되었다. 

    내 인생의 가을도 다를바 없이 고독, 무의미 같은 삶의 딜레마에 직면할 때가 있다. 그 땐 먼저 걸어 간 이들의 길을 터득하면서 낮아지는 법을 배워 본다. 뿌린만큼 거둔다는 진리를 터득하기도 한다. 

   내 인생의 가을은 인생의 리모델링이 이루어지는 시기인 것 같다. 남은 인생을 진정으로 내 자신이 원하는 소중한 것으로 채우기 위해 대대적으로 손질 해 본다.

   표현을 잘 하지 못했던 예전과는 달리 표현을 많이 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라는 말에 린색하지 않는다.

   만추의 단풍잎처럼 아름답게 열정을 활활 태우기도 한다. 비록 총알처럼 휙휙 지나가는 세월일 지라도 즐겁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기에 노력한다. 짬짬이 책을 보고, 글을 쓰는 시간들이 참 행복하다. 지금도 나는 외우고 노트에 적는 것을 참 좋아 한다. 때로는 감동적인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적시기도 하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면서 아련한 추억에 잠겨 보기도 하고, 마음 속에 나만의 소설을 써보기도 한다. 그런것들이 모여서 나의 수필이 되기도 한다.

   혹시나 내가 무의식 간에 내뱉은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을 점검해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 자신은 웬만한 일에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잘 털어 내고 잘 통과한다. 대통령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라고 완벽하라는 법은 없잖아 하면서. 잘못이 있으면 고치면 되고 없으면 삼가하면 되지 뭐 .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제는 남들과 비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도 버린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빈 공간들을 채워 간다.

    내 마음도 11월초의 단풍처럼 점 점 물들어가고 있다. 가을은 짧고 추억은 길다고 했던가! 가을 끝자락에서 마음속 그려진 황량했던 가을 풍경은 지워지지 않는 긴 추억으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산을 넘고 바다 건너 저 멀리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해도 내 추억의 노트에서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가는 것이다. 하루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혹여 젊은 날 지나치고 놓쳤던 게 있다면 다시 담아 보고 조금씩 무리하지 않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채워간다면 나이 들고 늙어갊이 그저 초라함이 아닌 성숙과 완숙으로 곱게 물든 단풍잎같이 아름다우리라! 내 온 몸 불태워 곱게 익어가리라! 비록 절정에 머무는 시간이 짧더라도 기꺼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 봄을 잉태하리라! 

    거울 앞에 섰다. 새삼 주름 하나하나가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다가 온다. 나뭇잎같은 세월을 담았다. 소중한 날들로 만들어 졌고 앞으로도 귀하고 아름다운 흔적들로 더해갈 것이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송화강문학지 2022년  2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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