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다가치포럼 대표
김정룡 다가치포럼 대표

아마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봄에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화창한 날씨에 기분 좋게 일하고 있는데 꽤 세련되어 보이는 한 젊은 여성이 나를 찾아왔다. 
“본인은 캐나다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로서 현재 영국 00대학교에서 박사 공부하고 있으며 전공은 이민학입니다.”
그녀의 간단한 자기소개다. 성이 최라고 하니 그녀를 미스 최라고 하자. 

그즈음 한국 내 대학교는 물론이고 가까운 일본대학교에서, 머나먼 호주대학교에서, 파리대학교에서, 베를린대학교에서 이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여러 명 나를 찾아왔는데 조선족 유학생도 있었고, 한국인도 있었고, 파란 눈에 금발도 있었다. 그 중에는 조선족 관련 문제들이 궁금해서 찾아오는 이도 있었고 박사논문 작성에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실제사례들이 필요해서 찾아오는 이도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 중인 용정 출신 미스 김은 박사논문 제출 막바지에 나를 세 번이나 찾아왔다. 후에 미스 김은 한국재외동포재단 공모에서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어 300만 원의 상금을 수령하였다. 

한편 나는 재한조선족 문제가 세계만방에 널리 알려져 있고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것이 희인지, 비인지? 고민이 깊어졌다.
그건 그렇고. 미스 최의 박사논문 주제가 ‘조선족 고국 이주’란다. 
“세상이 넓고 논문주제가 많고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조선족이주라니?”
내가 이렇게 물었더니 미스 최는 흥미진진한 태도로 대답한다. 
미스 최의 지도교수 왈, “현대사회에서 이주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복잡한 케이스가 조선족 고국 한국이주이다.”
가장 복잡한 케이스라면 연구 과제가 많을 것이고 연구가치도 있을 것 같아 박사논문 주제를 조선족이주로 잡게 되었다는 것이 미스 최의 고백이다. 
“복잡한 케이스 중에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사회집단 이주에 없는 구체적으로 가장 눈길을 끄는 한두 가지 사례를 든다면?”
내가 이렇게 물었더니 미스 최의 대답이 아주 흥미로웠다.

우선 고국이 해외동포를 연고동포와 무연고동포로 나눈 사례가 지구촌에서 한국 말고 없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다음 해외동포가 고국에서 체류하는데 있어서 비자종류가 가장 많고 복잡한 것이 한국인데 이 두 가지 사례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고도 많아 케이스가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서 먼저 비자문제를 말하자면 확실히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단기비자(C-3-8), 방문취업비자(H-2), 재외동포비자(F-4), 영주자격비자(F-5) 등등인데 일각에서는 이 여러 종류의 비자가 사실상 동포사회의 계급 분화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 해외동포를 닛케이진(일계인, 日系人)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고국 일본에 오면 입국 시 정주비자, 5년 경과 후 영주비자로 변경되며 귀화신청을 제출할 수 있다. 이렇게 비자 종류가 간단하다. 일본의 닛케이진은 일본 동포이며 연고 무연고로 따지지 않는다. 중국은 해외 화교·화인이 6천 만이 살고 있는데 그들을 연고 무연고로 나누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은 해외 동포를 통일 호칭인 닛케이진이라 부르고 중국은 통일적으로 화교·화인이라 호칭한다. 이웃 나라 일본과 중국은 해외동포에 대한 통일 호칭이 있는데 반해 한국은 재미교포, 재일교포, 중국동포, 고려인 등 거주국에 따라 여러 가지 호칭이 난무하고 있다. 통일 호칭이 없기 때문이다. 통일 호칭이 없다는 것은 해외동포에 대한 관리가 부실하다는 반증이다.
고국이 해외동포 관리가 부실하기 때문에 어처구니없게도 동포를 연고 무연고로 나누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전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이런 ‘불가사의’가 생겨난 이유가 나름대로 있다.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중국조선족이 밀물처럼 고국에 밀려오자 해외동포를 관리해 본적 없는 대한민국정부는 당황해 났다. 경험이 없다 보니 10년 넘게 방치해두어 10여 만 명에 달하는 불법체류자가 생겨나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팔을 걷고 관리에 나섰다. 2002년 처음으로 조선족 불법체류자에게 신고 받고 본국에 돌아갔다가 재입국하면 합법화 시켜주고 외국인등록증(F-1-4)이라는 카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그 뒤 2006년에 제2차 자진출국지원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많은 불법체류 동포를 구제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구제조치로는 밀물처럼 흘러들어오는 조선족동포를 관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즈음 한국산업 현장은 일손이 모자라 외국인인력이 필요했다. 조선족동포들이 한국에서 체류하려는 의도와 부족한 일자리 채우려는 정부의 ‘뜻’이 일치되어 정부는 수년간 합법 체류할 수 있는 비자 발급이 시급했다. 문제는 조선족도 한국정부에게는 재외동포이지만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재외동포와 동등하게 대할 생각이 없어 차별화 정책마련을 시도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조선족동포에게는 재미나 재일교포처럼 재외동포비자(F-4)를 발급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잘 사는 나라에 시집간 딸만 자식으로 인정하고 못 사는 나라에 시집간 딸은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비자가 바로 2007년 3월부터 실시한 방문취업비자(H-2)이다. 고국을 방문도 하고 일하여 돈도 벌라는 뜻이다. H-2비자는 사실상 재외동포비자를 주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만들어낸 비자이다.

한 발 물러서서 말하자면 그나마 임시방편이든 편법이든 뭐든 지간에 H-2비자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재한조선족사회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었다. 우선 자녀가 학교 붙고, 결혼식을 거행해도, 부모가 돌아가도 본국에 돌아갈 수 없어 눈물만 흘리던 재한조선족들이 본국을 합법적으로 왕래할 수가 있었다. 불법체류자로 음지에서 살던 이들이 양지로 나오게 되어 ‘인간’처럼 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본문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는 임시방편이고 편법으로 시행된 방문취업

비자가 중국조선족에게 너나없이 똑 같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중국조선족을 두 개 그룹으로 나누고 차별화했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조선족을 연고동포와 무연고동포로 나눈 것이다. 한국에 친척이 있는 조선족을 연고동포로 취급하고 이들에게 친척초청 자격을 부여하여 방문취업비자를 발급해주었다. 이와 다르게 한국에 친척이 없는 조선족을 무연고동포로 취급하고 한국어능력시험을 거쳐 합격자에게만 H-2비자를 발급해주었다. 당시 연변사람이 수천 킬로 밖에 있는 남방 상해, 광주에 가서 시험 치는 수고를 겪어야 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전에 한반도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에 만주에 갔다가 한중수교 이후 고국에 돌아온 조선족을 1세대로 취급하고 국적을 회복시켜주었다. 이들을 귀한동포(歸韓同胞)라고 부른다. 이분들은 자녀를 초청하여 한국에 데려오기 쉬웠고 한국에 와서 국적취득도 매우 쉽다. 
문제는 이 정책도 또 중국조선족을 두 개 그룹으로 나눠 시행했다는 것이다. 1948년 한반도에서 출생하고 만주에 갔다가 수교 이후 돌아왔지만 그 출생지는 반드시 남한인 자만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뿐 이북에서 출생한 조선족은 이 정책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중국조선족을 연고동포와 무연고동포로 나눠 차별화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남북분단 때문이다. 분단사회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항들이 수두룩하다. 연고동포와 무연고동포 문제도 분단사회에서 생겨난 그 일환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충분한 이해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 한국정부가 일관성이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일례로 지난 8월 한국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한국에 모셔왔다. 한국정부는 홍범도를 한국인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홍범도가 ‘한국인’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홍범도는 평안남도 평양출신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군에 나팔수로 입대하여 군 생활 하다가 사고를 치고 제대하여 이런저런 풍파를 겪고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봉오동전투를 지휘한 대장으로 지금까지 명성이 자자하다.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에서 살다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3년 사망했다. 
한국정부의 연고동포 무연고동포 정책에 의하면 홍범도는 그냥 무연고동포일 뿐이다. 그런데 왜 한국정부는 홍범도를 한국인으로 취급할까? 홍범도가 유명인이기 때문이다. 

유명인이 한국인 취급 받는 인물을 더 들라면 윤동주를 말할 수 있다. 윤동주는 증조부 때 함경북도 종성에서 만주에 이주했다. 윤동주는 1917년 연변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1945년 2월 광복을 3개월 앞두고 일본 옥중에서 사망했다. 한국과의 인연이라면 연희중(지금의 연세대 전신) 3년 유학이 전부이다. 윤동주가 한국사회에 알려진 시기는 고작 1980년대이며 연세대학교 마광수 교수의 논문에 의해서이다. 
윤동주는 만주에서 태어났고 일본에서 사망했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윤동주를 한국인으로 취급한다. 

필자의 부친은 1917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나 3개월 만에 부모의 등에 업혀 만주에 이주했다. 필자의 부친은 한국인이 아니다. 한국정부의 정책에 의하면 필자의 부친은 무연고 동포일 뿐이다. 이런 맥락으로 본다면 필자의 부친, 홍범도 및 윤동주는 모두 무연고동포이다. 하지만 필자의 부친이 한국인이 아니고 홍범도나 윤동주가 한국인인 이유는 딱 하나! 홍범도나 윤동주는 유명인이고 필자의 부친은 일개 범부이니까.

이렇게 따지고 보면 1948년 이전에 한반도에서 태어난 선조들 중 이북에서 태어났더라도 더욱이 조상이 이북출신이고 당사자가 만주에서 태어났더라도 그가 유명인이면 한국인이 되고 무명인이면 무연고동포다. 

필자는 한국정부가 처사를 잘못한다거나 스케일이 옹졸해서 이런 해프닝이 발생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남북분단이 낳은 비극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난삽한 문제들이 언젠가 해결되어야 하고 또 해결되려면 오로지 남북이 통일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민족의 운명이 참 기구하고 답답하다는 말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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