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수 구술/ 박금옥 대필

박금옥 약력 :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수기, 수필, 시 수십 편 발표. KBS 수기 공모 우수상 등 수차 수상.
박금옥 약력 :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수기, 수필, 시 수십 편 발표. KBS 수기 공모 우수상 등 수차 수상.

세월은 유수와도 같다더니 아내와 결혼한 지 어제 같은데, 어느덧 44년이란 세월이 흘러 머리에는 흰 서리가 내리고 이마에는 얼기설기 주름살이 늘어났어요.

저는 1951년도에 시골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조선 항미원조 전선에서 희생되었고요, 제가 열사 자녀라고 해서 기업에 추천해 주어서 몇 년간 차 운전을 하였어요. 저는 한 직장에 있는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어 1977년 1월 2일에 결혼식을 올렸어요.

가난하기로 소문이 난 우리 집에는 고작 이불 두 채에 그릇 몇 개만 달랑 있었어요. 아내는 없는 살림에 임신까지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하였어요. 아내는 가정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하려고 콩나물과 여러 가지 야채 장사도 하고 빈대떡 장사까지 하였고 임신 막달까지 삯일을 하였어요.

아내는 항상 돈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해 친척 집 군일에 가면 말없이 부엌에서 일만 하니 모두 아내를 몽당치마 아주머니라 불렀어요. 비싼 신식 옷 한 벌도 변변히 사지 못하고 친척들이 입던 옷들을 가져다 깨끗이 빨아서 입으면서 불평 한 번도 안 부렸어요. 간혹 아내가 친척 집 군일에 다녀와서는 마음이 상해 가만히 혼자 울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어요.

무능한 남편을 만나 자존심이 상한 아내는 이를 악물고 악착스레 살림하면서 아들 둘을 훌륭하게 키워냈어요. 큰 아들은 일본 유학 가서 박사 학위를 따고 지금 일본에서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작은 아들은 한국에서 회사에 출근하다가 결혼해서 며느리와 같이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귀여운 딸을 잘 키우면서 행복하게 보내고 있어요.

저의 아내는 가난한 살림에도 촌에서 부녀 주임 사업을 하면서 호평을 받아왔는데, 애들에게는 현모였고 남편에게는 양처로서 동네방네에 소문이 자자하였어요.

그 후 제가 퇴직하고 아이들이 모두 제 밥벌이를 하니 아내가 한국으로 돈벌러 가게 되었어요. 아내는 한국에서 친구의 소개로 식당일을 얼마간 하다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간병일을 하게 되었지요.

2011년 6월부터 2018년까지 공동 간병 일을 하였는데 철창 없는 감옥과 마찬가지였데요. 병실에서 간호사와 보호자들의 눈총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프면 약을 먹으면서 이를 악물고 악착스레 7년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아내가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저는 혼자 집에서 술만 마시고 식사도 제때로 챙겨 먹지 않은 탓에 술 중독이 와서 20일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어요. 내가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는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어요. 그리고 밤도와  화룡 병원으로 달려와서 입원해 있는 저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엉엉 울었어요.
 
아내는 저의 병시중에 전력을 다 하였어요. 주치 의사를 찾아 약도 제일 비싸고 좋은 것으로 쓰게 하고 수혈도 하면서 병 치료에 돈을 아끼지 않고 정성을 다하였어요. 음식도 병에 따라, 영양가에 따라 대접받아 얼굴색도 날마다 달라지게 좋아졌지요. 또 걸음 연습도 끈질게 한 데서 20일 만에 퇴원하게 되었어요.

당시 우리는 초가집에 살았는데 집이 빈 사이에 쥐들이 사처에 구멍을 내고 구들 고래까지 메워 놓은 탓에 불을 땔 때면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나서 집에 있을 정황이 못되었어요. 아내는 뛰어다니면서 시가지에 한 달에 300원씩 하는 세집을 맡아 3개월 살다가 연길에 있는 저의 누나네 집 근처에 이사하여 살게 되었어요. 아내는 제가 병이 좀 호전되자 병 치료할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저를 누나에게 부탁하고 또다시 한국으로 돈벌러 나갔어요.

아내가 한국으로 나간 몇 년 뒤에 전 일보러 화룡에 갔다가 또 사고를 당하게 됐어요. 버스에서 내리다가 쓰러져 구급차에 호송돼 연변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누나와 조카가 달려와서 저를 전면 검사시키고 호흡기 달고 인공호흡을 시키면서 야단법석이었데요. 누나는 한국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전화해서 당장 돌아오라고 했대요. 아내는 군말 없이 그 길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저를 연변병원에 입원시켰지요. 저는 십여 일 간 치료하고서야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에 돌아와서 얼마 안 지나 한국에 있는 작은 아들이 결혼식을 한다고 하여 저와 아내는 한국에 나가게 되었어요. 결혼식을 끝내고 저는 집에 돌아왔고 아내는 한국에 남게 되었어요. 아내는 또 다시 간병일을 하다가 작은 아들집에서 손녀를 돌보게 되었어요.

손녀를 돌보면서 아내는 매일 전화를 하거나 문자 메시지를 하면서 저를 채근하였지요.

2020년 12월 7일 아침,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해도 제가 응답이 없자 아내는 누나에게 전화해서 우리 집에 가보라고 했답니다. 누나가 와서 보니 전 이미 쓰러져 혼미상태에 처해 있었대요. 누나는 급히 구급차를 불러 저를 연변병원에 호송했지요. 전 호흡기를 달고 링게르를 맞으면서 구급치료를 받았답니다. 하루 치료 비용만 1만 5천 위안이 들었는데, 중환자실에서 3일간 치료를 받고 누나네 집 가까이에 있는 연길시병원에 입원하여 집중치료를 받았지요

한국에 간 아내는 코로나19로 인해 연길직행 비행기표를 못사고 남경행 비행기편으로 남경에서 두 주일 동안 격리, 연길에 와서 또 두 주일 격리하고, 집에 와서도 자가격리 해야 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귀국했지요.

저는 연길시병원에서 23일 간 입원치료를 한 다음 완쾌되지 못한 몸으로 퇴원해서 집에 왔어요. 아내가 저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집 소독도 하고 남편 목욕도 시키고 옷도 갈아 입혔지요. 엉덩이 욕창도 살펴보고 드레싱을 해 주었어요. 소독수로 상처부위를 깨끗이 닦고 한국에서 갖고 온 약을 상처에 뿌리고 세균이 침습 못하게 붕대로 정성스레 봉해주었어요

아내는 한국에서 간병일을 해 보았기에 간병인을 쓰지 않고 본인이 직접 간병을 하였지요. 

아내는 아침 5시이면 일어나서 저의 상처를 둘러보고 변기를 비우고 세수를 시키고 팔다리를 안마해 주곤 했었어요. 식전에는 사과를 깎아 챙겨주고 아침은 닭고기, 소고기국과 여러가지 입맛에 맞는 밑반찬에다 식사를 시켜주었지요. 식사가 끝나면 엉덩이 욕창 드레싱을 시켰고요, 병원에서 욕창드레싱을 하루에 한번하던 것을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하고 체형 변경도 두 시간 아니면 세시간에 한 번씩 했기에 저의 엉덩이 욕창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어요. 

이렇게 아내의 정성어린 간호하에 병원에서 나을 가망이 없으니 피부이식을 해야 한다던 저의 욕창은 아내의 끈질긴 보살핌하에 40일만에 나아졌어요. 걷지 못하던 저를 열심히 부축해 주면서 운동을 시키고 물리치료를 시켜준 덕에 저는 한달만에 홀로 걸을 수 있게 되였어요

저의 누나와 조카, 일가친척들은 너무 좋아서 아내가 돌아왔기에 제가 살아났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저의 병시중을 들면서도 화룡에 있는 새 집을 장식하느라 두 달동안 식사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채 연길에서 화룡으로 오갔습니다. 아내가 애 쓴 덕분에 우리는 남못지 않게 집장식을 하고 가정살림기물도 새로 장만해서 2021년 9월 10일에 화룡의 새집으로 이사를 갔어요.

아내의 이런 정성과 사랑에 저는 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내를 눈물 겹도록 고맙고 또 고맙게 생각하고 있ㅂ니다. 저의 아내는 사회에서도 존경을 받고 가정에서도 현모양처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다정다감한 아내는 저에게 두 번이나 생명을 준 천사입니다. 하여 저는 오늘 이렇게 “고마운 나의 아내”라고 세상을 향해 소리 높이 자랑하고 싶습니다.

2022넌 1월 2일

한국 충남 천안시 두정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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