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캐서린 맨스필드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1888년~1923년)영국의 女流소설가. 런던의 퀸스대학(Queen's College)에서 공부했다.19세부터 작가를 지망하던 중 첫번째 결혼에 실패하자 그 당시 남성에게 버림받은 고독한 여성을 그린 단편집 〈독일의 하숙집에서>(1911)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반독일적 풍조가 당시 영국 국민 사이에 만연되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탔다는 것 외에도 특이한 감정과 섬세한 스타일로 세인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의 수법을 쓴 단편소설의 명수라 하여 자주 체홉과 비교되는데, 그녀의 문체는 여성다운 감성에 바탕을 둔 이른바 시적 산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와 산문의 경계선이 그녀의 스타일인 것이다.주요작품으로 단편집 (1920), (1922), 평론집  등이 있다.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1888년~1923년)영국의 女流소설가. 런던의 퀸스대학(Queen's College)에서 공부했다.19세부터 작가를 지망하던 중 첫번째 결혼에 실패하자 그 당시 남성에게 버림받은 고독한 여성을 그린 단편집 〈독일의 하숙집에서>(1911)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반독일적 풍조가 당시 영국 국민 사이에 만연되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탔다는 것 외에도 특이한 감정과 섬세한 스타일로 세인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의 수법을 쓴 단편소설의 명수라 하여 자주 체홉과 비교되는데, 그녀의 문체는 여성다운 감성에 바탕을 둔 이른바 시적 산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와 산문의 경계선이 그녀의 스타일인 것이다.주요작품으로 단편집 (1920), (1922), 평론집 등이 있다.

"여기 자네 방 참 아늑하군"

노년에 접어든 우디필드는 새된 목소리로 말하며 친구인 사장의 책상 곁에 놓인 큼지막한 녹색 가죽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치 갓난 아이가 유모차에서 몸을 일으키는 모습과 같았다. 그리고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우디필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은퇴한 뒤로, 그러니까 뇌일혈로 쓰러진 이후 아내와 딸들은 화요일만 빼놓고 일주일 내내 그를 집안에 붙들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화요일이면 외출복을 입혀주고 머리손질도 가족들이 해주어 하룻동안의 시내 외출이 허용되었다. 그가 시내에 나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내와 딸들은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은 그가 고작 친구들에게 귀찮은 손님 노릇이나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나무가 마지막 잎새에 집착하듯 우리 사람들도 마지막 인생의 낙에 집착하는 법이 아닌가. 그래서 우디필드 노인은 시가를 피우고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탐욕스러운 눈으로 사장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자기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는 사장은 그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아직도 건장하고 좋은 혈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도 쇠약해지지 않은 힘으로 일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를 보면 힘이 날 법했다.

탐나고 부럽다는 듯이 우디필드의 늙은 음성이 다시 울렸다.

"이곳은 아늑해. 정말이야"

"그래, 아주 편안하기는 하지"

사장은 맞장구를 치며 페이퍼 나이프로 "더 파이넨셜 타임즈 The Financial Times>지의 갈피를 툭툭 쳐서 자르고 있었다. 사실, 사장은 자신의 사무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며 그는 사람들이 자기 사무실을 칭찬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우디필드의 경우에는 더욱 즐거운 생각이 들었다. 머플러를 둘렀으나 힘없는 그 노인의 눈길이 구석구석 미치는 사무실의 한가운데에 파묻혀 있다는 생각에 그는 깊고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최근에 손을 좀 보았지"

그는 여러 주 동안 수도 없이 설명해 주었던 그대로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카펫도 새로 깔았지"

그러면서 사장은 손가락으로 흰 고리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선홍색 카펫을 가리켰다.

"전기 난방일세"

그는 뽐내듯이 기울어진 구리팬 안에서 아주 부드러운 백열을 발산하는 다섯개의 투명한 진주빛 대롱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군복을 입은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소년의 사진에 대해서는 우디필드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사진 속 소년의 배경에는 사진사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만들어 놓은 야릇한 공원 풍경과 조작된 뭉게구름이 찍혀 있었다. 그 사진은 오래된 사진이었다. 벌써 6 년이나 넘게 그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우디필드 노인이 말했다. 그의 눈은 기억을 더듬느라고 초점을 잃고 있었다.

"그게 뭐 였더라 ? 아침에 집을 나올 때 까지만 하더라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수염 바로 위에는 붉은 반점이 나타났다.

저 불쌍한 친구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구나 하고 사장은 생각했다. 측은한 생각이 든 사장은 노인에게 윙크를 해주며 농담 어린 말을 건넸다.

"내가 얘기해 주지. 여기 뭘 좀 가진 게 있네. 추운 바깥 날씨를 쐬기 전에 마셔 두면 좋을 물건이지. 귀한 물건이야. 어린 아이들이 마셔도 괜찮은 거지"

그는 시계줄에 걸린 열쇠 중에서 하나를 고르고는 책상 밑에 달린 찬장을 열고 검고 땅딸막한 병을 하나 꺼냈다. "내가 얘기한 것은 바로 이 술일세" 그리고 그는 덧붙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술을 건네 준 작가가 아무도 몰래 얘기해 주더군. 바로 윈저 성 지하실에서 나온 술이라고 말야"

무척 놀란 듯 우디필드의 입이 딱 벌어졌다. 사장이 도깨비를 끌어냈더라도 더 놀란 표정을 지을 수는 없을 정도였다.

"그거 위스키 아닌가?" 우디필드는 힘없는 목소리로 떨리듯 말했다.

사장은 병을 돌려 귀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상표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바로 위스키였다.

우디필드는 놀라운 표정으로 사장을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집 식구들은 그런 것은 입에도 못 대게 하는데"

그는 막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할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허, 바로 그런 점에서 여자들은 우리만큼 알지 못하는 거야"

사장이 소리치고는 테이블 위 물병 옆에 놓여 있던 술잔 두 개를 집어당겨 놓고는 각기 손가락 하나는 족히 잠길 만큼 술을 따랐다.

"마셔 보게. 자네에게 좋을 거야. 물은 조금도 타지 말구. 이런 물건을 가지고 주물럭거리기만 하면 벌을 받지. 암 !"

사장은 그의 잔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손수건을 꺼내 얼른 콧수염을 닦아내고는 술을 입안에서 굴리고만 있는 우디필드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꿀꺽 삼키고서 잠시 말이 없다가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친 짓을 했군"

그러나 술기운으로 노인은 몸이 따뜻해 지는 것을 느꼈다. 술기운은 차갑고 노쇠한 그의 두뇌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는 기억해 냈다.

"그래, 바로 그거였어"

노인은 의자에서 몸을 세우며 외쳤다.

'난 자네가 알면 기뻐하리라고 생각했지. 지난 주 딸아이들이 벨기에에 가서 불쌍한 레기의 무덤을 찾다가 우연히 자네 아들의 무덤을 찾았다지 뭔가. 서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누워 있는 모양이야"

우디필드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사장은 아무 대꾸도 없었다. 단지 눈가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딸아이들은 그 묘역이 잘 유지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더군"

노인은 다시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더군. 집 근처에 있다 해도 그 보다 더 근사할 수는 없을 거라고 말하더군. 자네 가본 적 있나?"

"아니, 없네 !"

사장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묘지가 수 마일이나 된다는 거야"

노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부 정원처럼 말끔하게 꾸며져 있다네. 무덤마다 꽃이 자라고 있고, 길도 넓고 깨끗하다네"

노인의 음성은 그가 깨끗하고 넓은 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노인은 이상하게도 명랑한 기분이 들었다.

"딸 아이들이 잼 한 통 값으로 호텔에 얼마를 지불했는지 말해 줄까?"

아직도 그의 목소리는 새된 목소리였다.

"10 프랑이나 물었다더군. 강도야, 그렇지 않은가. 크기는 동전 하나보다도 더 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통이었다고 거투르드가 말하더군. 겨우 한 숟가락도 떠 먹지 않았는데 10프랑 씩이나 내라고 하더래. 거트루드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잼통을 들고 나와 버렸다더군. 그런 수작들은 우리 마음속의 허영심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수법이었겠지. 관광차 들른 사람이라 무슨 돈이든 척척 내주리라고 놈들은 생각했겠지. 그런 실정이라니까"

그리고 노인은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건 그래. 정말 그렇구 말구"

사장은 무엇이 정말 그런지 알지도 못하면서 노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책상을 돌아나와 지척거리는 발걸음으로 노인을 문까지 배웅했다. 우디필드의 모습은 이제 방 안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사장은 오랫동안 그 어느 것에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만 백발의 비서가 그를 주시하면서 주인의 심부름을 기다리는 개처럼 자리를 들락거렸다.

"메이시, 앞으로 30 분간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게. 알겠나 ? 아무도 만나지 않겠네"

"네, 알겠습니다"

사장은 문을 닫더니, 굳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밝은 색으로 빛나는 카펫 위를 걸어 부풀어 비대한 몸을 용수철 의자 속으로 털썩 떨군 다음, 앞으로 몸을 수그리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는 울고 싶었고, 그래서 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장은 우디필드가 아들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불쑥 꺼내자, 마음 속으로 끔찍한 충격을 받았다. 마치 땅이 쩍 갈라지고, 그 안에 아들이 누워 있는 모습을, 역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우디필드의 딸들과 함께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작스러운 기분이었다. 비록 6 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장은 언제나 아들이 군복을 입은 채, 변함없이 흐트러지지 않고 의젓하게 누워 영원한 잠에 빠져 있는 모습 이외에는 아무런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오, 내 아들아" 사장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지나간 세월, 즉 아들이 죽고난 처음 몇달, 아니 몇년 동안 그는 격렬하고 발작적인 울음이 아니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는 비애를 억누르기 위해서 오로지 이 세 마디만 입 밖에 내면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이 지나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선언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비애를 이기고 살아가면서 슬픔을 잊어버릴지도 몰랐지만, 그는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아들이라고는 그 녀석 밖에 없었다. 그 아들이 태어난 뒤, 사장은 오로지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이 사업을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삶 그 자체도 아들을 위하는 마음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앞에, 아들이 자기의 뒤를 이어 그가 남긴 일을 떠맡는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도대체 그가 어떻게 자신을 돌보지도 않고 노예처럼 일하며 그 모든 세월을 참아낼 수 있었겠는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거의 실현될 단계에까지 와 있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 1 년 동안 아들은 사무실에 나와 일을 배우고 있었다. 매일 아침 그는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같은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아들의 아버지로서 무수한 축복을 받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일에 열중했다. 직원들 간의 인기로 따지자면 메이시 노인까지 포함해도 아들의 인기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아들은 조금도 예의에 벗어나는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어울리는 말 만을 골라 쓸 줄도 알았고, 나이에 맞는 용모에다 '정말 근사한데 !'라는 말버릇을 가진 총명하고 꾸밈없이 솔직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느날 메이시가 전보 쪽지 하나를 건네 주었을 때, 그는 주위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귀하에게 ......'

그 후 그의 사무실은 실의에 빠져 일생이 덧없이 되어 버린 사람이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6 년 전, 6 년...... 시간의 흐름은 무척 빨랐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보이는데. 사장은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아들의 사진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사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의 표정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차갑고, 엄숙하게까지 느껴졌다. 아들의 표정이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순간 사장의 눈에는 파리 한 마리가 넓은 잉크 포트에 빠져, 기력을 잃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기어 나오려 애쓰는 것이 보였다. 바둥거리는 다리로 파리는 살려주세요 ! 살려주세요 ! 라고 애원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잉크 포트의 옆은 젖어서 미끄러웠다. 파리는 다시 뒤로 떨어져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사장은 펜을 들어 파리를 건져내고 한 장의 압지 위에다 내려놓았다.

한동안 파리는 주위로 검게 번져나가는 반점 위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런 다음 파리는 앞발을 흔들며 힘을 쓰는가 싶더니, 흠뻑 젖은 작은 몸을 일으켜 날개를 푸득거리며 계속해서 잉크를 털어 버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낫이 숫돌의 위아래를 오가듯, 다리 하나가 날개의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쉬더니, 발가락 끝으로 받치고 선 듯이 보이는 파리는 처음에는 한쪽 날개를 다음에는 다른쪽 날개를 펼치려고 애썼다. 마침내 파리는 날개를 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얼굴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이제 누구라도 파리가 조그마한 앞발들을 가볍게 부벼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소름끼치는 죽음의 위기는 이제 지나가 버렸다. 파리는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삶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사장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펜을 들어 다시 잉크 속에 담갔다가 파리가 날개를 움직여 날려고 할 때 무거운 잉크 한 방울을 파리 위에다 떨어뜨렸다. 파리가 그 잉크 방울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그 잉크 방울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 파리는 불쌍하게도 다음에 무슨 무서운 일이 닥칠지 완전히 겁을 먹고 질려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파리는 고통스러운 듯 앞쪽으로 움직여 나가려고 꿈틀거렸다. 앞발이 흔들리면서 조금 힘을 쓰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조금 느려 보이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다시 작업이 시작되었다.

"거 대단한 놈이군 !"

사장은 파리의 용기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것이야말로 일과 부딪치는 방법처럼 보였다. 올바른 정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 그것은 단지... 그러나 파리가 힘들게 작업을 끝내자 사장은 시간을 놓치지 않고 펜에 다시 잉크를 채워 새로이 깨끗해진 파리의 몸에다가 또 다른 검은 잉크 방울을 흔들어 정확하게 떨구었다. 이번에는 파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 고통스러운 순간이 흘렀다. 그런데 보라, 앞다리가 다시 흐느적거렸다. 사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장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파리에다 대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이 악착같은 녀석..."

그러면서 사장은 파리가 잉크를 떨구고 몸을 말리는 것을 도와 주기 위해 입김을 불어주어야겠다는 그럴듯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제 파리의 노력에선 무엇인가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면이 보였다. 사장은 펜을 잉크 포트 속에 집어넣으며, 이번이 마직막이 될 거라고 마음먹었다.

사장의 생각이 옳았다. 마지막 잉크 방울이 젖어 있는 압지 위에 떨어지자 만신창이가 된 파리는 누운 채 움직일 줄 몰랐다. 뒷다리가 몸에 붙어 버렸다. 앞다리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봐"

사장은 파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정신차리라고"

그는 펜으로 파리를 건드려 보았다. 그러나 파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려는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파리는 이미 죽어 있었다.

사장은 죽은 파리의 몸을 페이퍼 나이프 끝으로 들어올리더니 쓰레기통 속에다 던져버렸다. 그러나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가엾은 생각이 엄습해 왔다. 그것은 두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벨을 눌러 메이시를 불렀다.

"새 압지를 좀 가져다 주게"

그는 엄하게 말했다.

"빨리 가져오란 말이야"

늙은 비서가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장은 조금 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더라 ? 뭐였지......? 그는 손수건을 꺼내 칼라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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