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나딘 고미머

나딘 고디머(Nadine Gordimer, 1923∼2014)1923년 11월 20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출생하였다. 섬세한 감수성, 선명한 이미지, 암시에 넘치는 문체가 특징이다.《사탄의 달콤한 목소리》(1952), 《금요일의 발자국》(1960) 등 5권의 단편집과 장편 《낯선 자의 세계》(1958) 등이 있다.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은데, 정면으로 항의하지 않고 인종간의 협조와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심리묘사에 뛰어난 서정적 사실주의 문학으로서 예술성이 높다. 199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나딘 고디머(Nadine Gordimer, 1923∼2014)1923년 11월 20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출생하였다. 섬세한 감수성, 선명한 이미지, 암시에 넘치는 문체가 특징이다.《사탄의 달콤한 목소리》(1952), 《금요일의 발자국》(1960) 등 5권의 단편집과 장편 《낯선 자의 세계》(1958) 등이 있다.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은데, 정면으로 항의하지 않고 인종간의 협조와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심리묘사에 뛰어난 서정적 사실주의 문학으로서 예술성이 높다. 199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 한다. 알다시피 그건 좋은 일이 아닐 테니까 - 혹 당신은 너무나 잘 알만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5,6천 마일이나 떨어진 그곳에서 너무 성급히 결론을 내리지 마시기 바란다. 당신이 이곳에 살고 있다면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이해하리라 - 충성의 표현이 학교 운동장에서 손을 잡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는 괜찮은 것이라고 친구들은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은 사치며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위험스러울 수도 있다. 만일 내가 반 국가죄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흑인 아무개의 친구라고 말한다 해서 그것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글쎄, 다만 저 결정적인 약간의 관심이 조금 더 나한테 쏠릴지 누가 알겠는가. 누구보다도 먼저 ‘그’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들이 나의 인사 기록에서 아직 충분한 것을 얻지 못했다면 사정이 좀 달라질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또 그가 정말로 그런 친구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 다른 문제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애매모호하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법과 의심과 반역과 경고와 또 - 조금도 그렇지 않지만 - 자기혐오에 몰려 무엇이 우정이고 무엇이 우정이 아닌지 말하기도 어렵다. 물론 나는 지금 흑인과 백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백인으로서 백인 편에 서서 컨트리클럽에 다니고 전원 주택단지라는 백인구역에 살거나 또 흑인으로서 흑인 편에 서서 흑인지구에 살고 맥주홀이라는 흑인구역에 다닌다면야 이 말은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평화롭게 흑백이 분리된 공동묘지로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나 나나 그렇지 않았다.

내가 흑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이었을 때 이른바 분개한 정의감과 강렬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백인 학생들의 자원봉사기구를 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키부츠식의 집단 야영이었다. 그 기구의 백인 남녀학생들은 시골로 가서 캠프를 치고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교실을 지었다. 인종분리 대학교에서 온 유색인 학생과 그들과 나란히 잠을 잔다는 가치가 없지도 않은 새로움이 있었다. 우리의 자원봉사대 틈에는 ‘특별 분과’의 스파이들이 끼여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유색인 처녀나 흑인 처녀에게는 감히 추근대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은 - 육체적으로 덜 힘든 것으로서 - 재즈 음악가와 저널리스트, 화가와 시인 지망생들과 배우들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백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끌렸는데 그것은 백인들이 세상을 해방시켜줄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었고 또 그들에게서 달짝지근한 격려와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얼마 동안은 자원봉사기구에서 일해 보았지만 두 번째 방법이 내게는 더 맞았다. 어쨌거나 나는 뭐 하려고 정부가 흑인 아이들의 복지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해서 현 정부를 도우랴 싶었다.

나는 건축가다. 내가 흑인들 세계로 쓸모 있게 들어간 것은 문자 그대로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즉 백인 연출가가 한데 모아놓은 흑백혼성 연극의 무대장치를 설계했던 것이다. 도회지의 인간집단 치고 사실 이런 단체만큼 서로 친한 단체도 없을 것이다. 피부색 문제는 오히려 우리를 한층 더 가깝게 했다. 나는 ‘당신들’이 의미하는 것, 즉 그 검은 피부의 인간을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느끼는 분노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작품 제작과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인종차별법을 용케 면하거나 넘어가거나 또는 그걸 이겨낼 때 느끼는 분노 말이다.

우리는 밤이면 반드시 ‘통행증’을 기재해 주어야 했다. 그래야 흑인 배우들이 흑인 통행금지 시각 이후에도 체포되지 않고 귀가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한 번도 본 일조차 없지만 ‘인종적으로’ 명백히 속해 있는 시골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배우들에게 시내 거주 허가증을 마련해주려고 우리는 반투족 사무국에서 몇 시간씩 보내야 했다. 우리들 중에서 ‘반투족 담당관’을 설득해서 피부색에 따라 지정된 ‘집단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순회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또 ‘백인 전용’의 공회당을 흑백혼성의 배우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시 서기에게 위원회를 움직여 달라고 아첨할 수 있는 사람을 정해야 했다. 흑인 배우들의 삶은 우리들 손에 달려 있었다. 그들은 흑인이었고 우리는 백인으로서 우리가 흑인을 위해 중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들 사이가 온통 사랑과 빛으로만 이루어 졌다고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사실은 그런 일 때문에 우리는 끝없이 화를 내고 말다툼을 벌였으니까.

의상담당과 섭외를 맡아 노예처럼 일했던 한 백인 여자는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내게 말을 하지 않고 있는데, 내가 흑인지구로 가는 마지막 열차가 끊어진 후까지 남아서 일한 한 친구에게 그녀의 자동차를 빌려주라고 한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친구는 주말 내내 그 차를 갖고 있었고 그녀는 그 친구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흑인지구에 있는 집에는 전화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또 일단 흑인 하나가 그 우글거리는 토끼장 같은 곳에서 사라지면 다시 백인 동네에 나타날 때 까지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이 친구가 나타났을 때 그는 백인 계집들이 아직도 속으로는 ‘애녀석들’로 생각하면서 흑인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나한테 헐뜯었다. 그렇더라도 우리들의 논쟁과 분개와 오해는 우리가 가졌던 즐거운 시간과 파티와 섹스처럼 이 집단의 친밀성의 큰 부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으로서 - 이 집단을 규정짓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우리들 사이의 논쟁과 분개와오해를 수용할 만큼 이미 상당히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동안 이 작은 패거리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흑인 댄스 클럽의 급사로 있다가 그 후 ‘지배인’과 ‘어깨’노릇을 하고 있었다. 여가에는 가끔 우리 극단의 공연에서 단역을 맡았고 보통은 막일을 했다. 마침내 그가 정말 소질 있는 것은 관객들을 제대로 다루는 일임이 밝혀졌다. 그의 뚱뚱한 체격의 매력은 (그는 몸집이 큰 젊은이었고 옷도 근사하게 입었다) 우리가 순회공연 할 때 예측할 수 없는 흑인지구 관객들의 기분을 다루기에 꼭 알맞은 것이었다 - 때로 관객들은 교회에 갈 때나 입는 제일 좋은 옷으로 빳빳하게 성장하고 들어왔고 무대에서 진행 중인 것을 보고 웃거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천박하다고 느끼는 듯했다. 또 어떤 곳에서는 관객들이 문으로 돌진해 와서 입장료도 내지 않고 들어가려고 했고 또 자기들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으려 하지 않는 작은 패거리인 길거리 개구쟁이들이 판을 치기도 했다. 그는 나의 각별한 친구인 엘리아스엥코모의 각별한 친구 - 그의 수동적인 반쪽이었다.

이 부분에서 나의 말은 갑자기 멈춘다. 엘리아스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를 지난 5년 동안 알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엘리아스는 조각가였다. 그는 요하네스버그 외곽지대의 작은 금광도시와 산업도시에 사는 글자깨나 아는 젊은 흑인들이 가지고 싶어 할 직업 중의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 심부름꾼 ‘아이’인지 뭐 그런 거였다. 누군가가 그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했고 누군가가 그를 내게 보냈다 - 처음에 모든 흑인이 자신을 발견하는 길은 어쩔 수 없이 백인을 통하는 듯하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작품이 어떠했다고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기차를 타고 요하네스버그 중앙역의 흑인 구역으로 왔다. 그날 조간신문으로 싼 부피가 큰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가냘픈 몸에 머리가 동그랬으며 귀는 아주 조그맣고 밤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자동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백인이 틀림없이 나라는 것을 알자 - 우리의 만남은 미리 약속된 것이었으므로- 그의 얼굴은 환하게 풀어지면서 사과하는 듯한 그러나 자신에 찬 미소를 띠었다. 나는 그를 나의 ‘장소’로 데려갔다(그는 사람들의 집을 언제나 그렇게 불렀다), 그는 신문지를 풀었다. 거기에서 나온 것은 뉴욕이나 런던이나 요하네스버그의 미술관에서 보아온 ‘떠오르는 아프리카’라든지 ‘조상의 얼’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섬록암이나 사암의 덩어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줄무늬가 있는 옹두리 나무를 깎아 만든 염소라고 할까 또는 염소 모양의 조형이었다. 반인반수의 괴물이 말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 작품을 만지고 싶었다.) 그 작품의 어느 정도 구체적인 통시성과 수인(獸人)과 거친 목재 가공의 솜씨는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 작품에는 무엇인가 노출된 것이 있었다(결국 내민 손을 움츠리게 된다).

나는 그에게 피카소의 염소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피카소라는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작품은 본 일이 없었다. 나는 피카소의 자택에 있는 그 유명한청동 염소상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후로는 그가 만드는 모든 짐승에 피카소 염소의 유방처럼 재미있는 성기관이 달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가 받은 단 하나의 ‘영향’이었다. 사실 백인은 엘리아스 같은 사람에게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끼여든다. 내가 끼여든 것은 그를 후원하고자 하는 미술 애호가인 화랑 여주인들과 또 그의 후견인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저 백인 화가들 및 조각가들로부터 그를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에게 낡은 차고를 내주고 (이 말은 내가 차를 차고에서 꺼냈다는 말이다) 많은 나무더미를 안겨 혼자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엘리아스는 작업의 외로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차고는 그의 ‘장소’가 되지 못했다. 평생을 사람이 들끓는 마당에서 살아왔다면 산만함의 逆자극은 집중의 긴장을 창출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 된다. 아니 - 내 말은 다만 그가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주말에만 왔다. 그런 다음 작품이 팔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심부름꾼 일을 버리고 어느 정도 영구적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우리는 함께 그 ‘장소’를 수리했다. 천장을 만들고 수도관을 연결했다. 그가 우리 백인의 교외 주택가에서 사는 것은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런 법은 엘리아스와 나같은 사람에게는 보족적인 핑계를 제공한다. 내가 차고를 장모가 쓸 집으로 개조하고 있다고 말하자 백인 빌딩조사관은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일단 이주해 오자 엘리아스에게는 더 좋았다. 아가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잠자리를 나누어 쓰려는 친구들이 언제나 와 있었던 것이다. 때로 아가씨들은 거의 가지각색의 부엌데기 같은 어리고 부끄럼타는 아이들이었는데 뜰을 지나가다가 내 아내와 마주치면 ‘마님’이라고 불렀다. 또 때로는 가발을 쓰고 분장을 한 극단의 여배우들이 와서 내 아내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동안 함께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자주 그곳에 와 있었다. 뚱뚱하고 유쾌한 관객 담당 매니저인 그는 결혼한 사람이었으나 우리 남자들이 보통 그렇듯이 그의 삶에서는 오랜 우정이 아내와 아이들보다 더 중요한 요소였다 - 그것이 만약 흑인의 특징이라면 나 자신도 피부 속이 검을 게 분명하다. 엘리아스도 어쨌든 ‘그 사람’처럼 극단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엘리아스는 우리가 공연했던 나이지리아 사람이 쓴 희곡을 위해 ‘갓 풀을 먹인 딱딱한 종이’로 아름다운 이교도신들을 만들었는데 - 즐겁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조상의 얼들’이었다. 그리고 한번은 우리에게 가수가 필요했는데 그가 놀랍게도 영가의 선조처럼 쉽게 어떤 마드리갈의 악구를 뚜렷하게 나누어 부를 수 있는 목소리를 가졌음이 밝혀졌다 - 지금은 잊었지만 그 노래는 그가 작업하고 있는 차고에서 몇 시간이고 높이 울려나왔다. 엘리아스는 그 친구가 곁에 있을 때 작업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 듯 했다. ‘그’는 아이 같은 퉁퉁한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유행하는 구두를 신고 있는 발가락끝을 꼼지락 거렸고 윗도리에 달린 가장 최신 유행의 옷깃에서 먼지를 털어냈다. 또 레코드 판을 바꿔서 계속 흥겹게 독백을 읊조렸는데 그것은 엘리아스가 끌로 파고 깎는 작업을 하면서 흥얼거리는 낮은 웅얼거림이라든지 생각이 일치해서 내는 한숨소리, 그리고 갑자기 짜내는 듯한 거의 무언의 웃음소리 - 아프리카 말로만 가능한 반응들인데 - 에 의해서 중단되곤 하였다. 그들은 저희들 말로 이야기했고 나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지금껏 모른다.

엘리아스를 혼자 있게 하려는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엘리아스는 ‘말려들게’되었다. (그 과정을 나 자신이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 차고로?) 어떤 화랑이 그의 중개상임을 공표했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가 충동질해서 샀을 목까지 올라오는 자주색 스웨터를 입고 가만히 혼자 웃으며 기쁘다기보다 당황한 모습으로 개인전 개막식날 돌아다녔다. 어느 미술평론가가 그의 초월적 가치와 조형양식에 대해서 썼다. 우리가 맥주를 탄 브랜디로 - 남아연방에서는 브랜디가 부자들의 술이 아니다. 그것은 여기서 만들어지는 술이고 사람들이 취하도록 마시는 술이다 - 그의 성공에 축배를 들 때 그 평론가는 ‘세상에, 맙소사. 저 사람이 그걸 정말 만들었나요,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그해에 그는 돈을 꽤 벌었다. 그런 다음 화랑 주인과 미술 평론가는또 다른 아프리카 영혼의 해석자를 발견하면서 그를 잊었다. 그는 다시 가난해졌다. 그러나 그는 여자 후견인 한명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그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으나 그를 잊지 않았다. 이미 짐작했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미국인 부인이었다. 남아연방에서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매우 늙고 부유한 부인이었다. 그러나 아마 그냥 상당한 주식을 소유하고 있고 아직 사람이 몰리지 않은 미술품 수집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유리한 입장에 한몫 끼여 들고 싶은 욕망을 가진 중년의 미망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요하네스버그를 여행할 때 그의 작품을 몇 점 구입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미술계의 학자들과 연관을 맺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엘리아스 엥코모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어떤 재단에서 장학금을 제공하도록 주선한 사람은 그 부인이었다.

그가 다만 가기 위해서, 다만 바깥세상을 보기 위해서, 가고 싶어 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 단계에서 정규 미술학교 교육을 원했다든지 또는 그런 것을 활용할 수 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당시 그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건축가일 뿐이지만 학교 교육과 심지어는 가장 우수한 학교에서 열광적으로 행해지는 비학구적인 접근 방법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은 그 쪽 말을 쓰자면 자신을 발견한 사람들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던 기억이난다. “내가 자신을 발견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러나 잃은 적은 없었지. 신문지에 쌌던 그 최초의 염소는 바로 자네의 염소였어.”

그러나 나중에 그가 여권을 거절당하면서 그가 해외로 나가는 문제가 우리들 마음에 크게 자리 잡았을 때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떠나고 싶어한 이유는 그에게는 일반 교육, 흑인 지구 학교에서 보낸 6년 동안 놓쳐버린 일반적인 문화적 소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장소에 온 이후 나는 당신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 유모차에 있는 당신의 아이처럼 무지하단 말씀입니다. 그래요, 여기저기서 약간의 정치문제와 미술용어 몇 개는 알게 되었지요 - 이젠 머리를 흔들며 ‘조형적 가치’를 말할 수 있지요, 네? 그러나 보세요, 내가 인생에 대해서 무얼 알겠습니까? 삶이 도대체 어떻게 작용하는지 내가 무얼 알겠어요? 내가 만들고 있는 작품을 ‘어떻게’만들고 있는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우리는 왜 살고 죽습니까? - 내가 계속 여기서 산다면 지팡이나 조각하고 있겠죠”라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그가 무얼 말하는지 알았다. 아프리카 전역에는 관광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앉아 토산목으로 멋진 지팡이를 조각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노인들이 있다. 그것은 화랑 주인들로부터 그토록 열광적으로 갈채를 받았던 ‘떠오르는 아프리카’파의 조각가들보다 세련미에서 겨우 한 단계 아래인 것이다. 그의 이 말에 우리는 함께 웃었다. ‘내가 만들고 있는 작품을 어떻게만들고 있는 것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라는 그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 암시한 사고의 방향을 쫓아서 나는 그의 집안에 실제로 어떤 전통기술이 전해오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상상한 대로 없었다 - 그는 도시 빈민가의 아이로 거리의 맥주홀 건너편에 있는 파라핀 양철로 만든 용구와 폐기된 자동차 부품들 틈에서 자라났다. 이상하게도 이런 물건들은 그를 뒤샹 같은 화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와는 정반대로 그는 거기에서 고전주의적 표현주의자로 만개하여 솟아올랐다. 그의 조상 가운데 시골 지팡이 조각가는 없었지만 그는 흑인지구에서 보낸 유년기 체험의 일부라고는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떤 일을 들려주었다. 10대에 그는 숲 속에 있는 부족 성인입문학교에 보내여져 의식에 따라 할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그 체험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엘리아스에게 여권을 얻어주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으로 가려는 그의 열망은 다른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열망은 감금 자체에 대한 강박적인 분노로 변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여권 거부의 이유를 듣지 못하였다. 공식적인 답변은 흔히 있는 것 이었다- 즉 그런 일에 대한 이유를 밝히는 것은 ‘공적 관심사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저들’이 그가 ‘백인처럼 살고 있는’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극단에 있는 흑인 배우 한 사람이 내게 가르쳐준 이론) 어느 비평가가 그의 작품이 ‘떠오르는 아프리카 영혼의 고뇌’를 표현했다고 충실하게 설명했기 때문일까?

아무도 몰랐다. 도대체 아무도 모른다. 검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흑인은 정부가 그들의 장소라고 지정한 남아연방의 그 지역에, 흑백으로 분리된 지역에,종족적으로 할당된 그들만의 거리에 박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 우리의 삶을 조종하는 방식 전체가 대답되지 않는 물음이 아닌가 - 엘리아스의 가장 친한 친구가 돌연 여권을 얻었다. ‘그’도 여시 장학금이거나 학자금, 그런 것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뉴욕으로 가서 제작과 최신 연기술(그때는 그로또브스키 보다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전성기였다)을 공부하도록 초청받았다. 그리고 ‘그’는 여권을 얻었다. 엘리아스가 아무 악의도 없이 기뻐하고 감탄하며 말했던 것처럼 ‘첫 번째 시도’에 말이다. 어떤 흑인이 여권을 얻으면 거기에는 우리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어떤 것보다 한 수 더 뜬 것 때문에 집단적인 쾌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떠났다. ‘그’는 그의 여권을 가지고, 엘리아스 엥코모는 출국허가증을 가지고.

출국허가증이란 어쨌든 편도 차표다. 그것을 신청했을 때 정부가 기꺼이 승인해주며는 다시는 남아연방이나 그 위임 통치령인 남서아프리카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서약에 서명을 하게 된다. 서명과 엄지손가락의 지장으로 그것을 서약하는 것이다. 엘리아스 엥코모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그가 얻은 바깥세상에 대해서 열광적으로 편지를 써보냈다(그리고 아주 자주 썼다). 그는 조각가로서라기보다는 순수하고 진짜 살아있는 아프리카의 검둥이로서 어떤 작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듯 싶었다. 미국 여인의 아름다움이라든지 할렘이나 왓츠의 생활, 눈으로 직접 본 흑인의 힘 등등 이런저런 것에 논평을 요청 받을 만큼은 세련된 검둥이로서말이다.

그는 <에보니>지와 <뉴욕 타임즈 매거진>에서 까지 오려낸 기사를 보냈다. <라이프>지에서 일하는 어떤 아가씨가 그의 작품에 관한 기사를 실으려고 한다는 말도 했다. 그의 작품? - 글쎄, 아직은 새 작품을 제작할 만큼 정착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예술의 중심지는 정말 눈부시게 돌아가는 곳이고 거기서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란정말 굉장했다고 썼다. 당연히 침묵의 기간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잊었고 그도 몇 주일씩 우리를 잊고 있었다. 그럴 즈음 국내 신문들이 전세계로부터 오는 그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뉴스를 실었다. 엘리아스 엥코모가 반인종차별 대회에서 연설을 했다는 것이었다.

엘리아스 엥코모는 서아프리카 의상을 걸치고 스토클리 카마이클(미국 흑인해방운동가)과 나란히 연단에 서 있었다. “그럼 어때요? 그 사람은 고국에 돌아올 때에 대비해서 몸조심할 걱정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 나의 아내는 그를 옹호하면서 신랄하게 말했다.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작업이 궁금했다 - “그 사람들이 그가 일하도록 혼자 내버려둘까?”나는 그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침묵을 그가 읽은 듯했다. 몇 달 후 어느 대학교의 미술잡지에서 오려낸 기사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 잡지는 한 호를 전부 아프리카특집으로 꾸미고 있었는데 엘리아스의 목조품의 사진도 실려 있었다. 사진이 실린 페이지의 가장 자리에 그의 친필이 있었다. - ‘당신이 새 작품을 제작하지 않는 사람을 대단찮게 여기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 중에는 나의 이 옛날 작품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입니다.’이것은 비꼬는 말투였는데 만일 방안에서 커다랗게 내게 말했다면 우리는 둘 다 웃었을것이다. 그러나 두 주일 후 엘리아스는 죽었다. 그는 어느 이른 아침 미술학교가 있는 뉴잉글랜드의 강에 투신 자살했다.

그것은 아마 여권 발부의 거부와도 같았다. 우리 누구도 그 이유를 몰랐으므로. 그런 해프닝 앞에서 갖게 되는 흔한 오만감에서 나는 그 편지에 대해 죄책감조차 느꼈다. 아마 자신의 ‘장소’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져서 어쨌든 불행하게 있으면, 옛날에는 격려하는데 상당히 인색해서 상처를 주었던 사람으로부터라도 한 통의 격려의 편지나 말 한 마디 같은 작은 것이 도움이 되었을까.......? 그 일에 대해 이 무슨 감상적 오만인가? 다른 일들에 몰두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쓴 실제로는 격려하기 위한 거짓말인 짤막한 편지 따위가(당신의 옛 작품이 어떤 시시한 조그만 잡지에서 인정받고 있으니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두 번째로 물에 빠지려는 사람이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엘리아스는 그 강으로 들어가기 전에 분명 내가 전혀 알지 못할, 아무것도 알지 못할 비참한 공포 속에 깊이 빠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분명 어떤 돌연한 자기인식 때문에, 살아 있는 자들인 우리는 얻으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그 자기인식 때문에 자살한다. 그것이 바로 절망의 의미가 아닐까- 그 자살자들이 알게 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자신의 사정을 변명하면서 ‘난 사실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엘리아스가 나의 ‘장소’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언젠가 어린 시절 할례 받는 집단과 함께 몇 주일을 숲 속에서 지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정말 얼마나 어울리지 않았던가? 물론 그의 친구들인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사실과 우리의 정치적 개인적 견해에서그가 죽은 이유를 규정해 버렸다.

그가 죽도록 아팠었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일지 모른다. 그를 영원히 추방했던 조국 , 아프리카 대륙의 그의 출신국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원주민의’옷을 조롱하듯 입고 혼자서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을 조국에 대한 향수로 죽을 만큼 아팠을지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흑인주의의 유대가 그가 전에 남아연방에서 백인의 우정에 의지했던 것을 돌이켜보게 만든 수치 때문에 죽도록 아팠을지모른다. 그를 죽인 것은 남아연방정부였고 문화의 충격이었다 - 우리의 정치적 신랄함도 유행어를 줄줄이 엮는 우리의 유창한 말솜씨도 그 이른 아침 그를 죽음의 세례로 이끌고 간 안팎의 힘의 결합에 접근하게 할 수는 없으리라. ‘이것이 밝혀져야 하는 것은 사적인 관심에서가 아니다.’ 엘리아스는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그 해가 저물 무렵 돌아왔다 ‘그’는 시골에서 몇 주일을 지낸 다음 나를 보러 왔다 - 나는 그가 돌아왔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극단은 이미 해산된 상태였다. 그가 나한테 와서 말하려고 했던 주된 이유는 그것이었던 듯하다. 그는 자신이 극단을 새로 일으킬 만한 돈이 공동 적립금 중에 남아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는 미국에서 배워온 전문기능 (그의 말)을 발휘할 기회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는 그 때 진짜 뚱보가 되어 있었고 대단히 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경주용 상의와 플라스틱 장화와 남서아프리카산 양모로 만든 것 같은 아프리카형 가발, 나는 가발을 가지고 짓궂게 놀렸다- 적어도 그 점에서 우리는 좋은 친구였다.

오프 브로드웨이가 아니라 사실은 게릴라와 함께 지낸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당시 이곳에서는 남서아프리카를 통해 침투하려 했던 남아연방의 정치망명자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이었다). 그가 “아 그냥 재미로 이렇게 해본 거예요, 근사하지 않습니까?”라고 아주 기분좋게 말했을 때 나는 그의 취향에 간섭한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너무 소심해서 그 문제 - 엘리아스의 문제를 화제로 끌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피할 수 없게 되자 나는 예의 상투적인 말을 했고 그는내 말에 머리를 저으며 “제기랄”하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후 그는 그래서 자신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 엘리아스가 죽어서 쓰지 않게 된 비행기표로, ‘그’의 장학금에는 여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여비는 직접 물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편도 비행기표만 가지고 있었는데 엘리아스의 장학금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요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항공사에서 이름을 바꾸는 일은 어려웠다. 그는 장학재단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그들은 친절하게도 그걸 그의 것으로 바꾸어주었다.

그가 이 모든 이야기를 너무나 정직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경찰 앞잡이라는소문이 떠돌았을 때 나는 몹시 분개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죽은 사람의 비행기표로, 출국 허가증만 갖고 있어서 왕복표를 다 사용할 수 없었던 죽은 사람의 비행기표로 돌아올 만큼 냉혹한 심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아무튼 누가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분명 ‘그’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흑인의 그가 어떻게 남아연방 및 다른 나라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지를 해명해야만 했다. 그에게는 여권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어떻게 ‘그’가 여권을 가질 수 있는가? 요새 어떤 흑인이 여권을 얻는가?

정말 나는 화가 났고 그래서 엘리아스의 비행기표를 대신 사용한 바로 그 꾸밈없는 순진성을 증거로 그를 옹호했다 - 흑인은 백인의 멋진 섬세한 까다로움을 가질 수 없으므로 평생 재난을 이용해야 할 필요성에 익숙해 있다. 그가 엘리아스의 비행기표를 가로챈 것은 그 자신은 살아있고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추위를 막으려고 엘리아스의 외투를 집어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리 극단에 남아 있는 단원 중 몇몇 사람은 이제 공공연히 그를 피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언급할 때면 뒤따르는 무얼 알고 있다는 투의 희미한 공모와도 같은 미소에 가담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있었다.

그와 나는 물론 한번도 가까운 친구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는 수시로 내게 들렸다. 그는 극장 일을 찾을 수 없어 흑인지구에서 이동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었다. 우리를 찾아올 때면 그는 어린 남자아이들을 서너 명 씩 데려오곤 했다. 그 아이들은 매우 얌전했고 행동 가짐도 조용했으며 꼬마 양복을 잘 차려 입고 있었다 - 맨발로 사는 우리 집 아이들은 그아이들을 두려움에 차서 빤히 쳐다보았다. 그 아이들은 그의 아이들과 또 그가 살고 있는 집의 아이들일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했다. 우리는 주로 그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 그의 낡은 자동차는 믿을 수 없다는 것, 만일 미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삯만 마련할 수 있다면 시카고의 어떤 레퍼터리 극단에 가입하라는 제안을 수락할 수 있다는 것 등등 이었다 - 그러는 동안 내 아내는 말이 없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케익을 먹였고 내 아이들은 의무감 때문에 손님 아이들을 정원에 있는 그네에 한 사람씩 태우곤 하였다.

우리는 엘리아스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엘리아스가 죽기 몇 주일 전 뉴욕의 지하철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반대로 서서 자꾸만 위로 걸어 올라갔었다고 말해주었다. “난 그 친구가 그냥 장난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아세요? 그냥 그 계단을 올라 가고 있지만 아무 곳에도 가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는 향수를 느끼는 듯 미국식 표현에 집착했다. ‘어떤 곳’을 의미할 때 ‘아무 곳’이라고 말하는 아프리카인은 없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프리카식 머리털 가발은 던져버린 뒤였다. 우리가 엘리아스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머리털로 곱게 다듬어진 크고 잘 생긴 머리를 양손에 받치고 있었다. 절대로 명백해지지 않을 어떤 일을 좀더 명확히 생각해 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몸짓에 나는 돌연 그와 일체감을 느꼈고 그래서 “어서 계속해요”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는 엘리아스가 죽기 전에 저질렀던'우스운 짓‘의 예를 하나씩 하나씩 기억해냈다.

이렇게 오후면 들르곤 하던 그가 어느날 이런 말을 했다. “학교에서 학생들하고 있었던 일은 내가 아마 말하지 않았지요? 그 마지막 주말 - 그가 그것을 저지르기 직전 주말 이지요 - 그가 돌아다니면서 누구나 파티에 초대한 일이 있었어요. 그건 말하자면 축제라고 말하더군요. 누가 그러는데 그가 바비큐라고 했답니다 - 그게 뭔지 아시죠? 그런데 그 중 한사람이 나중에 나한테 말하기를 그가 진짜 아프리카식 축제를 열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이곳의 시골 사람들이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하는 축제를 보여 주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어디서 염소를 구할 수 없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

“염소?”

“네. 살아 있는 염소요. 그는 염소를 잡아서 통째로 구워주고 싶어했어요. 캠퍼스에서 말이죠.”

‘그’가 내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한 것은 대강 이 무렵이었다. 그런 꿍꿍잇속이 있어서 나를 찾아올 때 옷을 잘 차려입은 예쁜 아이들을 데려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내게 돈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자신의 의무와 책임의 배경을 장치해두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가 요청한 돈은 나 같은 재력의 사람에게는 상당한 액수였다. 그러나 그는 새 차가 없이는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또 마침 그 때 정말 좋은 중고차를 구입할 기회도 생겼다. 그때 막 떠돌던 새로운 소문에도 불구하고 - 어쩌면 오히려 그 소문 때문에 - 나는 그에게 돈을 주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함께 살고 있는가족의 집을 경찰이 덮치던 날 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법 정치조직의 모임에 참석한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변호사가 능란하게 밀정이 믿을 수 없는 증인임을, 즉 거짓말쟁이임을 입증하자 무죄방면되었다. 그들은 그 밀정의 증거에 따라 기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친구들은 즉각 신체적 금지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행동에 제한을 받고 또 집회에도 참석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만이 유일하게 자유인으로 남게 된사람이었다. 그것은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인 듯 보였다. 그런데도 이 친구들은 그를 계속 그 집에 남아있게 했다. 그것은 우리 백인들에게는 - 그리고 일부 흑인들에게도 -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수수께끼여서 그만 도전의 몸짓이야 무엇이든, 지난 한두 해 동안에 우리는 만일 어떤 사람이 흑인이며, 교육을 받았고, ‘정치적’친구들과 백인 친구들이 있고, ‘거기에다’여권이 있으면 그를 반드시 경찰의 끄나풀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역겨웠다 - 그것이 그에게 돈을 빌려준 이유였다 - 그러나 나는 또한 그 사실을 믿고있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말하자면 그런 사람이 자신을 입증할 방법은 꼭 하나 있다. 감옥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는 자유로운 상태였다. 솔직하게 말해주었던 친구들의 운명에 대해서 그는 약간 의기소침해 있었지만 엘리아스의 비행기표를 착복했던 일을 말했을 때처럼 그것을 꾸밈없이 말했고 언제나 처럼 돈 때문에 쪼들리고 있었지만 가엾은 그는 그러나 대체로 명랑했다. 그러나 엘리아스의 죽음 이후 진정 싹트기 시작했던 우리의 우정은 급속히 시들어갔다. 그렇게 만든 것은 돈이었다. 물론 그는 내가 돈을 갚으라고 말할까봐 두려워서 나의 ‘장소’로 오는 발걸음을 끊었다.

아름답게 옷을 차려입고 행동이 반듯한 흑인 아이들과 함께 오는 일을 그쳤던 것이다. 한번은 그에게서 타이프 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내가 무슨 무역회사나 되는 것처럼 나의 고마운 협조에 진정한 마음으로 감사한다며 몇달 안에 돈을 갚겠다고 안심시키는 편지였다. 나는 답장으로 짤막한 글을 써 보내면서 물론 그가 빚진 돈을 언젠가 갚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지만 도대체 그렇다고 해서 어째서 그동안을 우리가 마치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이런 식으로 지내야 하느냐고 썼다. 빌어먹을! 단 몇 푼의 돈 때문에 내가 무슨 더러운 병이라도 앓고 있는 것처럼 나를 대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그러나 나는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나는 나 자신의 일로 너무 바빠져서- 아시다시피 지난 몇 해 동안 일어난 건축 붐으로 나는 몇 채의 상점가와 대규모 문화센터와 계약을 체결했다- 이따금 공연하는 옛 극단을 위해 아무 일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그 극단에는 별볼일이 없었다. 그가 세일즈맨으로서 일을 썩 잘해나가고 있고 재혼을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어떤 - 또 하나의 -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가 두베에 실제로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은 , 사유재산권을 갖고 있지 않고도 중산층이라고 간주될 경우, 흑인이 백인의 도시 바깥에 있는 흑인 주택지에서 구할 수 있는 견실한 중산층 교외주택단지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나는 그때는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돈 문제란 어떤 것인지 알 것이다 - 어쨌든 나는 그 빚에 대해서 약간 화가 나 있었다. 내가 그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도 이제는 그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우정으로 말하자면 그는 이미 그 가치를 내게 보여주었다. 백인이 경찰 앞잡이의 협력을 돈으로 사야 하는 것과 똑같이 우정은 백인이 돈으로 사야 할 어떤 것이 되었다. 엘리아스가 죽은 지도 5년이 되었다. 우리는 법률용어로 말하는 현재의 상황 속에 살고 있다. 다른 종류의 표현이 너무나 위험스러운 것이 될 때 사람들은 법률 용어를 쓰게 된다.

그런데 277일 전 새로운 소문이 떠돌았다. ‘그’가 어느 날 밤 그의 방에서 잡혀나가 투옥되었다. 그것은 여기서는 완벽하게 합법적인 것이다. 그것이 구금법 180조이다. 그가 많은 친구들 특히 흑백 양쪽의 저널리스트들 가운데 많은 친구들과 교류가 있는 유명인사라도 되니까 그 사실이 일반에 알려지게 된것이다. 만일 별 볼일 없는 사람이거나 소수 백인 자유주의자들의 세계에서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경찰에 잡혀갈 때 집이나 길거리에서 우연히 근처에 있게 되었다가 목격하게 된 사람들에 의해 그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때로는 몇달씩 구류되어 있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모두 ‘그’가 있는 곳을 안다. 감옥이다.

그 사람과, 같이 구금된 사람들과, 또 그들보다 오래 -371일간, 310일간 - 이 숫자는 그들이 일단 풀려나면 언제나 꼭 맞아 떨어진다 - 갇혀 있던 사람들에 대해 반국가죄가 준비 중에 있고 또 곧, 곧 그들이 한 짓이 무엇인지 우리가모르는 그 일로 - 사람들이 구금법으로 감옥에 들어가면 그들에게 구금의 이유를 말해주는 법이 없고 기소도 없기 때문에 -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고 지금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물론 우리들 사이에서는 추측이 나 돌고 있다.

그는 이중간첩이었을까? 말하자면 지하에서 활동하는 아프리카민족주의자로서의 진짜 활동을 더욱 잘하기 위해 경찰 끄나풀로서 통행증을 사용한 것이었을까? 그는 단지 친구 선택에 불운했던 것일까? 자신의 강한 신념 대신에 위험스러운 충성심으로 고통 받았던 것일까? 그것은 모두 전혀 우리가 추측할수 없는 개인적이고 짐작할 길 없는 유대 때문이었을까? 언제나 벌떡 일어나 레코드를 뒤집을 준비를 하고 있고 경주용 상의를 좋아하고 르 르롸존즈 ( Le Roi Jones미국의 극작가, 시인, 소설가, 반백인의 관점에서 흑인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작품을 씀) 의 오프 브로드웨이 작품을 공연했으면 하고 열망했던 두 번째로 믿을만 했던 그 명량한 젊은이, 경찰의 행동 대원처럼 보이지 않을 사람으로서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리라. 저 무성한 경찰 끄바풀의 소문은 제쳐두고서.

그러나 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안다. 감방 안에 있다. 대부분 독방에서 -감방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277일을 그는 그곳에 있다.

그래서 우리 백인 친구들은 소문의 수치로부터 깨끗이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다시 순결할 수 있다. 우리는 마침내 만족한다. 그는 감옥에 있다. 그가 스스로 입증했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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