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숙 근작시를 논함

엄정자 약력: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길시10중학교,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원, 길림신문사 기자 역임,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에 재직 중.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대표 겸 회장. 동북아신문 일본지사 대표. 연변작가협회 이사, 일본조선학회 회원.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평론집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엑소더스》(연변인민출판사2014년), 제9회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제10호 《동포문학》 평론부문 대상, 제40회 《연변문학》 평론상 수상.
엄정자 약력: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길시10중학교,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원, 길림신문사 기자 역임,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에 재직 중.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대표 겸 회장. 동북아신문 일본지사 대표. 연변작가협회 이사, 일본조선학회 회원.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평론집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엑소더스》(연변인민출판사2014년), 제9회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제10호 《동포문학》 평론부문 대상, 제40회 《연변문학》 평론상 수상.

김화숙은 재일본조선족문단의 대표적 시인이다. 우리글로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단일언어 국가인 일본이라는 이국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의 존재적 조건은 부조리한 것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가 코로나가 만연된 팬데믹이라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불안은 감성지능이 뛰어난 시인에게 더 민감하게 감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깊은 생각과 성찰을 할 수밖에 없다.

송화강에 실린 김화숙의 근작시를 보면 그런 실존에 대한 깊은 고민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방법으로 실존한다. 스스로의 의식을 끝없이 가늠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김화숙의 시에는 성찰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선택과 이런 선택을 통해서 실존적 가능성을 열어가는 시인의 삶의 자세가 잘 드러나고 있다.

필자는 김화숙 시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시에 내포된 깊은 함의를 풀이하는 동시에 시인이 추구하는 시풍이 어떤 시적 형상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1. 새로운 심상心象을 통해서 전개되는 시상詩想

김화숙은 남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시인이다. 시가 이 세상에 전해진 역사만 해도 몇 천년이 되어 시인은 바뀌었지만 그들이 보고 있던 사물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같은 하늘, 같은 산, 같은 물, 같은 나무와 꽃 …, 사람은 늙어도 자연은 늙지 않고 거기 그 자리에 살아있다. 그래서 이미 수많은 시인들이 그려낸 헤아릴 수없이 많은 시들과 심상이 겹치지 않은 시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은 많지만 명시가 많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김화숙 시인은 그런 일반적인 심상을 초월해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시 〈소쇄하다〉가 그런 시이다. 우선 가는 봄 잡느라 /오는 겨울 막느라 /한 해 헛되이 바빴다고 첫 연에서 세월을 거슬러서 뭔가 해내려고 애쓰는 시적화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람은 아무리 애쓴다 해도 가는 봄을 잡을 수 없고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다. 그 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가다’, ‘오다라는 대조적인 동사를 잡다’, ‘막다라는 행위동사와 어울려서 씀으로써 가니까 잡으려고 하고 오니까 막으려고 하는 거슬러가는 행위의 이미지를 동적으로 잘 그려냈다. 그렇게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서 뭔가 이룩하려고 했기에 결국은 모든 것이 헛되이된 것이다. 시적화자는 상처를 받아 심신이 지치고 마음이 심란할 수밖에 없다. 실존의 불안이 보인다.

그런 불안과 복잡한 마음을 비우고 싶은 심적 갈망으로 돋아나 꽃피울 때까지 백 년 /창자마저 텅 비운 채 /청정하게 살아가는 대나무를 떠올린다. 대나무는 매화, 난초, 국화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로 불리며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로 인하여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윤선도(尹善道)의 「오우가(五友歌)」도 곧고 속이 비고 사시장철 푸른 대나무의 성격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이 명시에서도 속은 어니 뷔연ᄂᆞ다(속은 어이 비였는다)”고 사물을 보이는 모습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김화숙 시인은 창자마저 텅 비운 채라고 독특한 의인화를 하였다. 대나무가 인격화 되면서 대나무와 시적화자의 통일된 심상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망, 집착을 버리고 싶은 마음 즉 시상이 대나무로 형상화되어 전개될 수 있었다.

대나무를 닮고 싶은 시적화자는 남은 생 짧을지언정 /물어뜯고 뜯기는 세상을 피해 /푸르게 직립할 수는 없을까하고 질문을 던진다. 질문속에 시끄러운 세속에서 벗어나서 강직하게 살려는 시적화자의 선택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서 푸르게라는 색상을 나타내는 시각적 심상이 행동을 나타내는 직립하다로 이어짐으로써 곧게 선 푸른 대나무라는 종합적인 심상이 그려질 수 있었다.

성찰을 거쳐서 시인은 명상속에서 대나무와 일체가 된다. “살포시 눈 감으니 /태화강 대나무숲 일렁임이 /물결 되어 나를 삼킨다”. 시적화자가 있는 현재의 위치로부터 공간적 이동을 통해서 태화강 대나무숲의 이미지를 시적화자의 마음속으로 이끌어 옴으로써 대나무는 시적화자의 마음의 물결이 되어 일렁임이 된다. 대상과 시적 주체가 서로 역전하는 존재상을 보여준다. 시적 화자는 대나무와 교유하면서, 대나무 그 자체로 변화된다. 이러한 대상과의 동일시는 시의 형상화를 높여주고 시상이 선명해지게 한다.

이같이 이미 가지고 있던 대나무의 이미지가 세속의 아귀다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시상과 맞물리는 순간 창자마저 텅 비운 채 /청정하게 살아가는” ‘소쇄한 대나무라는 새로운 심상이 생기며 시로 승화할 수 있었다.

〈고독은 꽉 찬 것이다〉 이 시에서도 고독이라는 시상을 여러가지 복합적인 심상을 통해서 전개하고 있다. 고독孤獨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없이 홀로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외로움은 이러한 고독 상태로부터 느끼는 쓸쓸한 감정이다. 그래서 시인은 외로움은 누군가로 해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고독은 무색무향으로 /타인이 배제된 체질적 선택이다고 쓰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고독타인이 배제된 체질적 선택이다.” 그래서 가볍지 않고 위엄이 있고 중력즉 무게가 있으며 움직이지 않는 강바닥같다. 시인은 고독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은유를 통하여 형상화된 심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다른 시각으로 부각된 고독의 이미지이다. 강물은 흘러가고 말지만 강바닥같은 고독은 그 자리에 남아있다. 흘러가버리면 허무하겠지만 그 자리에서 끄덕 없이 그대로 있기에 고독은 충만한 것이고 인간성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가벼움과 천박함으로 /인생을 포장하기 위해 /고독을 논하지 말라고 질호하고 있다.

이처럼 고독이라는 시상은 고독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시작하여 고독의 본질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심상을 통해서 보여주면서 고독인간성의 완성에로 전개하였고 마지막에는 신이 내리는 축복에까지 끌어올렸다.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예술가는 고독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에게 있어서 고독은 “신이 내리는 축복”이었을 것이다.

〈자연의 손〉은 바다에 대해 쓴 시이다. ‘바다는 이미 사람들에게 고정된 이미지로 정착되어 있다. 특히 바다는 탄생과 죽음, 정화와 속죄, 생의 순환이라는 원형적 상징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깊이 박혀 있다. 그런데도 김화숙이 보고 있는 바다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3프로의 소금물이라는 데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오물들을 절이고 씻어서 /깨끗한 얼굴로 /새로이 태어나게 하는이 일련의 소독과정, 정화과정이 눈앞에 보이는듯 생생하게 그려지었다. 의식이 없는 자연에 절이고’ ‘씻고하는 인간적인 이미지를 심어 줌으로써 정화를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는 바다의 새로운 심상이 만들어지었다. 이 시는 시 전반이 상징적 심상으로 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품어 안고 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하고 위로하는 그런 삶을 살려는 시인의 인생관이 바다라는 심상에 전이되었다.

  1. 땅을 딛고 진리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

젊은 시절의 시인은 자유를 갈망하고 날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화숙의 제3시집의 제목은 《날개는 꿈이 아니다》이다. 하지만 성찰이 깊어질수록 시인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발을 붙이고 땅을 딛고 한발한발 진리에 다가가야 함을 느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을 시적 존재로 삼고 자기체험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본성을 깊이 느끼는 내면화 과정을 거쳐서 시상을 얻고 전개하였다.

시인은 자기가 보고 느낀 외적세계를 내면에 흡수하여 성찰을 거쳐서 자기 존재적 의미의 답을 찾는 내면화 과정을 거치는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동일화 되고 타자화 되며 통일되고 분열한다.

〈삶의 노래〉에서 시인은 커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는 일상을 그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을 만날 때는 /저녁이지만 커피를 마시고 /어떤 사람은 한낮에 만나도 /맥주집을 찾게 된다고 커피를 마시는나’와 맥주를 마시는나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곤함을 없애거나 기운을 돋우기 위해서 커피를 마시므로 주로 낮에 마신다. 밤에 마시면 불면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신 하루 일이 끝난 저녁에는 피로를 풀기 위해서 맥주를 마시는데 알코올로 릴랙스하게 긴장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시적화자는 낮과 밤이 거꾸로 되었는가? 그것은 마주한 상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커피와 마주한 사람과는 /지난 얘기를 많이 하고 /맥주를 사이에 두고서는 다가올 날들을 자주 채색한다”. 과거를 같이 한 사람과는 자연히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고 이제부터 같이 해야 할 사람과는 미래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시적화자는 현재를 잃고 말았다. 인간은 과거를 사는 것도 아니고 미래를 사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공간, 이 시간의 존재인 것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미래의 의 삶도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커피든 맥주든 홀로 즐긴다는 선택을 한다.

혼자 마시는 커피며 맥주는 /타국이지만 고향 같은 /이 땅에 나와 함께 스며들어 /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삶의 노래가 되어준다.” 현재의 타국이지만 고향 같은 /이 땅에발을 딛고 굳게 서서 현존재인 의 삶을 살아가니 낮에 맥주를 마시고 밤에 커피를 마시는 전도된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고 과거만 말하며 땅속에 파고들거나 미래만 말하며 하늘에 붕 떠서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는 낮과 밤을 제대로 살아가는 원래의 ’-현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커피맥주를 마시는 일상적인 현상을 빌어서 원래의 와 분열된 현존재의 존재적 의미를 시간성적으로 해명한 철학시라고 볼 수 있다.

〈젖어 살자〉도 시금치목욕이란 일상을 통해서 삶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지가 늘어진 시금치를 /찬물에 담가놓으니 /파랗게 다시 일어선다”. 그것을 본 시적화자는 자신도 욕조에 물을 받아 /시금치 되어 들어가 앉는다”. ‘시금치가 동일화 되었다. “마른 나무뿌리 같던 /손끝 발끝을 거쳐 온몸으로 /물기가 촉촉이 스며든다” ‘마른이라는 시각적 심상으로부터 촉촉이라는 촉각적 심상으로 전이하여 마른 몸이 젖어 가는 모습을 형상적으로 그려냈다.

여기에서 시인은 표면적 현상으로부터 내면에로 시각을 바꾼다. 악착스러움이 빠져나간 틈새마다 /그리움이 눈물처럼 고여 /숲속 안개처럼 금세 자욱하다”. ‘악착스럽다는 것은 매우 모질고 끈덕지게 일을 해 나간다는 뜻인데 거기에는 집착도 들어있는 것이다. 노폐물과 땀이 땀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모습과 “악착스러움이 빠져나간다는 의미가 동일화 되었고 욕실에 수증기가 찬 모습을 그리움이 눈물처럼 고여 /숲속 안개처럼 금세 자욱하다” 하고 정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우니 눈물이 나고 눈물은 물이니 안개로 그것도 숲속 안개로 자욱하게 되고, 그렇게 변화되는 내면세계를 은유적인 시적 형상화로 보여주었다.

그런 성찰을 거쳐 시적화자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 살아있는 동안 젖어 살자는 선택을 한다. 무엇에 집착하여 악착스럽게 살아가는 삶은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상처를 받게 한다. 그런 삶은 몸도 마음도 메마르게 할 뿐이다. 그래서 시적화자는 생의 시작과 끝을 /하나인 너와 나 사이를 /촉촉함으로 메워가자.”고 다진다. 집착과 악착스러움을 버림으로써 삶 전체를, 그리고 너와 나사이를 사랑으로 메워가려고 한다. 선택을 거쳐서 실존의 본질이 변했다.

〈눈꺼풀 스위치〉는 유머러스 한 묘사로 시인의 삶의 자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한쪽 귀는 두려움을 듣고 /한쪽 귀는 희망을 듣는다”. 사람의 귀가 두개인 것은 서로 다른 소리를 들으라고 해서가 아니라 잘 들으라고 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각기 다른 것을 듣는다고 역설逆說하고 있다. 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리 역시 한쪽 다리는 /평지를 걸으면서도 휘청하고 /한쪽 다리는 /오르막길도 내리막 같이 쉽다고 묘사하였다. ‘때문에 마음이 괴롭고 다리때문에 몸이 괴롭다. 그러니 불화의 소지는 몸안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불화는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있다. 시인이 내린 처방은 두 귀를 베개 양 켠에 뉘이고 /눈꺼풀로 스위치를 끄는 것이다. 눈을 감고 자면 시끄러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고 다리가 꼬여서 넘어지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상을 보지도 말고 관심도 갖지도 말라는 말인가? 아니다. “스위치를 눌러 끄는 일은 /중심을 세우는 일 /경계에 머무르는 일이다.”고 시적화자는 말한다. “중심을 세우는 일이라는 것은 삶의 원칙을 세우고 타인에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고 경계에 머무르는 일은 타인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었을 때 사물은 더 똑똑히 전모가 보이고 그 적정선을 넘지 않으면 불화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리는 번갈아 포개며 /농담처럼 불화를 잊게 할 것이다. 사람이 자는 사이에 다리를 뒤척이는 것은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억지로 무엇을 풀려고 하지 말고 주체성을 가지고 순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옳은 삶의 자세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리듬에 대하여〉에서는 스무 해 넘게 매일 아침 /단골카페에 나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는 시적화자의 생활방식을 묘사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따분하고 단조로운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일상에서 시인은 삶의 리듬을 읽어낸다. 사람이 잠깐의 리듬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스무 해가 넘게 같은 리듬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같이 오래고 긴 리듬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강력한 의지와 자신에게 엄격한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리듬이란 반복이다 /리듬은 흐름이며 과정이며 /멈춤이 없으며 건너가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점층법을 씀으로써 리듬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생활방식을 성찰하면서 얻어낸 답, 즉 존재적 의미이다.

 

하늘이 비어있듯 길이 열려있듯

리듬을 타는 생은

집착과 소유에서 벗어나

공空에 이르는 길이며

존재를 키워가는 일이다.

―〈리듬에 대하여〉의 마지막부분

 

불교에서 스님이 매일 같은 시간에 경을 읽고 도가에서 도사가 같은 시간에 명상을 하는 것은 그런 단일하면서도 변화가 없는 행위속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잡념을 버릴 수 있어서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도 같은 도리이다. 책에 담긴 도리를 흡수하고 자신을 성찰하며 인생의 답을 구하는 과정이 시인의 리듬이고 그렇게 얻은 답이 시가 되고 그 시는 다른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 된다. 긴 리듬속에서 얻어낸 답, 그것이 김화숙의 시이고 그렇게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이 곧 그의 삶의 자세이다.

 

  1. 낯선 구조의 시제목과 단순화되고 함축된 시어

문학이 언어를 그 표현 매체로 하는 예술이라고 한다면, 시는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형상화를 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시어는 함축적 특성, 정서적 기능, 모호성을 띠게 된다.

김화숙의 시어는 간결하지만 외연적外延的 의미를 초월한 내포적內包的 의미를 가진 언어 즉 정서적이고 암시적이고 간접적이며 주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낯선 구조의 시 제목

그의 시 제목들을 살펴보아도 〈고독은 꽉 찬 것이다〉, 〈자연의 손〉, 〈젖어 살자〉, 〈눈꺼풀 스위치〉는 외연적 의미를 초월하는 주관적 의미가 부여된 낯선 구조를 가진 시어로 만들어지고 있다.

고독하면 사람들은 텅 빈 마음, 텅 빈 주위를 연상하겠지만 김화숙은 〈고독은 꽉 찬 것이다〉 하고 제목을 달았다. ‘고독의 내포적 의미에 고독은 위엄이며 /강물이 아닌 강바닥이며 /결핍과 소외가 아닌 충만함이며 /인간성의 완성이다하고 시인 자신이 느끼는 주관적인 정서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고독의 심상을 ‘꽉 찬 것’으로 만들었다. 독자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새로운 이미지를 줌으로써 제목부터 시선을 확 끈다.

〈자연의 손〉이란 제목은 시 전반을 읽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시인은 이 없는 바다에 우리 어머니들이 뭔가 절이고 씻어서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이로부터 유추하면 출렁이는 파도는 “절이고 씻어서” 깨끗하게 만드는 어머니들의 같은 이미지가 생성되며 그렇게 바다의 손자연의 손이라는 시어가 형성된다. ‘한글자에 이 시의 시상이 내포되고 있다. 함축성이 있는 시어이다.

〈젖어 살자〉도 논리적으로는 통하지 않는 문구이다. 촉각적 심상인 젖다는 추상적 의미를 내포한 살자의 상황어가 될 수 없다. ‘살다는 만질 수 없는 삶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젖다는 사랑에 촉촉한 삶의 양상을 연상하게 한다.

〈눈꺼풀 스위치〉에서 눈꺼풀은 몸의 일부이고 스위치는 전기나 가스를 켜고 끄는 장치이다. 그러나 눈꺼풀의 눈을 감으면 세상과 차단된다는 본질은 스위치를 끄면 전기나 가스가 차단된다는 본질과 동일하다. 그런 동일성으로부터 〈눈꺼풀 스위치〉라는 시어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같이 김화숙의 시 제목은 독자를 낯설게 하는시어를 쓰고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는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선 구조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예술은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느끼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즉 너무나 친숙해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물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쉬클로프스키는 예술의 이러한 기능을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혹은 estrangement)”라고 명명하였다. 제목은 시의 얼굴이다. 김화숙은 이와 같이 문법적으로는 통하지 않는 낯선 언어구조를 씀으로써 사람들에게 예술적 향수를 주고 독자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다.

  • 성찰을 거쳐서 단순화되고 함축된 시어

김화숙의 시의 가장 큰 특점이 거의 모든 시가 성찰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시인마다 추구하는 시풍이 달라서 각기 자기의 개성을 가지게 되지만 김화숙의 시품은 간결하고 알기 쉬운 언어로 깊은 삶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뜻한 비는 투명함으로

흔적 없이 스며들지만

세상 추운 것이

자신 탓이라는 듯

겨울비는 흰 이불이 되어

만물을 포근하게 덮어준다

아이들은 이불을 찢어

눈사람을 만들며 신나지만

어른들은 귀찮은 듯

이불을 걷어차기도 한다

이 포근함 덕분에

땅속에선 뭇 생명들이

세상모른 채 잠들어 있다

가장 차가운 것이

가장 따뜻함 일 수 있다.

〈겨울비〉의 전문

 

김화숙 시인은 〈겨울비〉라는 제목에서 먼저 독자들에게 착각을 줌으로써 본문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는 즐거움을 주었다. 독자들은 제목을 따라 겨울에 내리는 겨울비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시를 읽기 시작하지만 내용은 비가 아니라 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인은 눈을 직접 쓰지 않고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불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썼다. 그런데 이불만으로는 눈의 심상이 잘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의 상관물인 ‘눈사람’이란 힌트를 주었다. ‘이불눈사람이 이어지면서 에 대한 묘사임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아이들이 이불을 찢는 행위는 하얀 이불같이 티 없이 펼쳐진 눈밭 위를 눈뭉치를 굴리면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모습임을 상상할 수 있게 하였다. 이어서 그렇게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대조하여 귀찮은 듯 /이불을 걷어차기도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불이 같은 이미지라면 이는 눈을 걷어차는 모습일 것이다. 눈을 쳐내야 하는 어른들에게는 귀찮은존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일면 이불을 걷어찬다는 것은 이불이 덥기 때문이기에 따뜻하다는 이미지도 주고 있다.

이같이 아이들의 행위도 어른들의 행위도 이불이라는 상관물을 통해서 묘사하면서 계속 에 따뜻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포근함이란 촉각적 심상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 포근함 덕분에 /땅속에선 뭇 생명들이 /세상모른 채 잠들어 있다”. 봄을 기다리는 씨앗을 통해서 봄의 따뜻한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로부터 가장 차가운 것이 /가장 따뜻함 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시인 김화숙은 이 시에서 서로 상관되는 단어 따뜻하다’, ‘포근하다이불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차가운 이 생명을 키우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제목도 이라고 달면 차가운 이미지가 강조되기 때문에 눈에 비해서 따뜻한 이미지인 를 가져와 〈겨울비〉라고 닮으로써 차가운 이미지를 피하고 시상을 간접적이면서도 손상 없이 표현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직설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니라 유사한 대상물 즉 간접적인 상관물을 통해서 보여줌으로써 암시적인 상징성과 함축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가장 차가운 것이 가장 따뜻한 것일 수도 있다는 변증법적 도리와 차가운 외면을 가진 사람이라도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겨울비〉 외의 시들도 깊은 성찰을 거쳐서 도달한 깨달음을 쓰고 있지만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함축성이 있는 시어들을 쓰고 있다. 때문에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면서도 깊은 성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또다시 사색해야 하게 만든다.

 

결론

김화숙은 문학전공이 아니라 철학전공 출신이다. 이런 이력 때문인지 그의 시의 가장 뛰어난 점은 깊은 성찰을 거친 새로운 시적 발견이라 할 수 있겠다.

자연이나 일상을 통해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내면적 가치를 발견하고, 존재의 시공간을 사유하는 것을 통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김화숙 시인의 삶의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삶을 경험하고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주체성이 있는 명확한 정체성을 얻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생각, 상상, 감정이 없는 인간은 자기자신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영원한 삶은 세상 삶의 단순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질을 획득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인생을 성찰하고 시적 상상을 통해서 자기의 감정, 깨달음을 시로 만들어가는 김화숙 시인이 조선족문단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이 될 그날이 기대된다.

글 출처 『송화강』 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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