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이남철 칼럼니스트 
이남철 칼럼니스트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조선시대 평균수명은 35세이며 왕은 46세이다. 근대화 이전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에서 출생아 세 명 중 한 명은 네 살까지 살지 못했고, 네 명 중 한 명은 첫돌조차 지내지 못했다. 100세 시대인 요즈음과 평균수명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한계가 있지만 26살 생의 마감은 너무나도 짧은 인생이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한국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됨으로써 성인위에 오른 김대건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면천 고을 솔뫼(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슬라의 장남으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1846년 9월 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 (용산구 이촌동)에서 군문효수형(참형이나 능지처참을 한 뒤 그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그 죄를 경계시킨 형벌)을 언도받고 순교하였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의 일이니 너무나도 아까운 삶이다.

김대건은 7살 되던 해에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베마실’산골로 이사해 15세 때인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상해(上海) 진쟈상(金家巷: 김가항) 성당에서 고 페레올 (1808.12.27.~1853.2.3일) 주교로부터 1845년 8월 17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최초의 방인사제, 선각자, 양학 유학자이다. 여행자로서 연평도에서 상해까지 항해한 최초의 서해 항로 개척자이기도 하다. 1845년 초 조선전도를 만들었으며, 저서로는 21편의 서한이 있고, 한국 교회사에 관한 비망록 등이 있다.

필자는 주말을 맞이하여 안성시에 위치한 미리내 성지를 찾았다. 40년 만의 방문이다. 미리내 성지는 신유박해(1801년)·기해박해(1839년) 때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어 살았는데, 밤이면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은하수’의 우리말)라고 불리게 되었다. 병오박해(1846년) 때 순교한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미리내에 안장되면서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성지에는 한국 순교자 103위시성 기념 성전, 79위 시복 기념 경당 등이 있으며, 미리내 성요셉 성당에 김대건 신부의 성해(聖骸)인 하악골(아래턱뼈)이 모셔져 있다.

필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 앞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종교적인 면보다 인간적인 면에서이다. 역사적, 사상적으로 김대건 신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지 않은 필자로서 종교적으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성당 앞에는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이자 김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페레올 주교의 묘가 있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새남터에서부터 이곳으로 옮겨 와 안장하고 선산을 교회에 봉헌한 이민식 (빈첸시오, 1808~1921)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 
1928년 7월 준공

빈첸시오는 김대건 신부의 복사(미사‧성찬예배‧감사성찬례를 드릴 때 사제를 도와 의식이 원활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사람)를 서며 사제를 꿈꾸던 17세 소년이었다. 그는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그는 머리와 몸이 토막 난 채 새남터 모래사장에 가매장된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40일 만에 수습한다. 이민식은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이불깃에 둘둘 싸맨 뒤 지게에 지고 새남터에서 산과 고개를 넘어 미리내까지 150리(60㎞)를 닷새 만에 당도한다. 

그는 태화산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추곡리에 위치) 기슭의 퉁점, 드렝이 고개를 거쳐 은이마을에 도착했고 은이마을에서 미리내까지 험한 고개를 넘어 마침내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시게 됐다.

이민식은 김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 모신 후 두려움 때문에 전라도로 잠시 몸을 피했다가 돌아와서 무덤을 보살폈다. 그 후 자신의 집을 공소로 기증하고 사제가 되기 위해 늦게서야 라틴어를 배우다가 포기, 종현성당에서 복사로 있으면서 교회 사업에 힘쓰다가 1921년12월9일 92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셔다 안장하고 지키며 사는 동안 결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손이 없다. 홀몸도 아니고 부패되었을 유해와 함께 포졸들에 발각될까 밤에만 몰래 거친 산길을 걸었던 소년 이민식의 험난한 행로를 생각하면 그의 용감함이 눈에 선하다. 물론 깊은 신앙심과 복사로서 강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성인 사제를 부모 모시듯 지극 정성으로 수습해 안장한 이민식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오월에는 어머니와 스승에 대한 은혜를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하게 한다. 젊은 나이에 심한 박해를 받고 26살에 순교했지만 후세들에게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사랑하는 어머니, 스승, 제자와 함께 자리한 안드레이 신부의 묘역을 뒤로하고 떠나는 필자는 사회생활하면서 남을 위해 조그마한 봉사라도 할 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되뇌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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