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아르투어 슈니츨러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zler 1862--1931)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젊은 빈'파의 대표적 작가로 빈에서 영위되는 세기말적인 애욕의 세계를 정신분석의 수법을 써가면서 묘사해 나갔다. 작품에 희곡 《초록 앵무새》, 장편소설 《테레제, 어떤 여자의 일생》 등이 있다.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zler 1862--1931)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젊은 빈'파의 대표적 작가로 빈에서 영위되는 세기말적인 애욕의 세계를 정신분석의 수법을 써가면서 묘사해 나갔다. 작품에 희곡 《초록 앵무새》, 장편소설 《테레제, 어떤 여자의 일생》 등이 있다.

 

단편소설

이 무슨 멜로디인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오스트리아]

 

동화같이 들리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어떤 소년 하나가 시골집 창가에 앉아서 눈 아래 넓게 펼쳐진 숲을 이따금씩 내려다보았다. 숲은 그 시골집과 경계를 이루며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숲 어느 곳에서도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졸음이 밀려오는 여름날 오후였고, 뜨겁고 검푸른 공기가 대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소년은 창문턱에 악보용지를 올려놓고, 머릿속에 막 떠오르는 악상을 무턱대로 적어 나갔다.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악상들을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의 손만큼은 아주 기계적인 동작으로 갖가지의 멜로디를 적어 나갔다.

일종의 어린애 같은 흥분에 빠진 채 박자, 올림표 등을 마지막 줄까지 채워 넣었다. 그런 후에 고개를 들고 자신이 해놓은 장난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소년은 눈앞의 종이 위에 적혀 있는 것에 아무런 예감도 갖지 못했다. 열려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후덥지근한 공기가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는 손에서 연필을 내려놓고 앞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뜬 채 꿈을 꾸었다.

아주 부드러운, 정말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와 창밖으로 악보를 날려 보냈지만, 소년은 아무 미련 없이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처음에는 악보가 나뭇가지에 걸리더니 미끄러지듯 천천히 숲속의 좁은 샛길, 길 가장자리 위에 떨어졌다. 소년은 이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 피아노에 앉아 음계연습을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젊은이가 숲속에 나타났다. 그는 숲속의 샛길을 가로질러서 큰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겉모습만 얼핏 보아도 그는 분명히 예술가 지망생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예술 애호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슨 노래인지를 흥얼거리며 길을 걷다가 문득 길가에 떨어진 종이 한 장에 시선이 닿았다. 바람에 날려갔었던 그 종이는 악보가 적혀 있는 면이 젊은이 쪽을 향해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서 종이를 잽싸게 집어 들고 호기심에 찬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어이쿠, 이것 좀 봐라!" 그는 익살을 부렸다.

"그러니까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 숲속에서도 내가 유일무이한 작곡가는 아니다, 바로 그런 말씀이렷다! 어디 보자, 이것은 정말 괴발개발 휘갈겨 쓴 악보로군. 알 수 없는 친구 하나가 여기 이 나무 그늘에 앉아 끄적거려 놓았음이 분명해!"

어느새 그는 정신을 집중하여 습작 악보에서 멜로디를 천천히 읽어 가며 한 구절 한 구절씩 콧노래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제법이야! 정말, 의심할 여지가 없군, 이 악보에는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어! 이런 것을 팽개쳐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머릿속은 아직도 다른 멜로디들로 가득 차 있을 거야, 만일 나에게 이런 멜로디가 떠올랐다면 결코 숲속에다 버려두진 않겠어, 정말 하느님께 맹세하겠어."

젊은이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이제 전체 멜로디를 연결하여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소년이 아무런 생각 없이 종이에 끄적거려 놓았던 그 멜로디였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감동적이야, 매우 감동적이야, 아가씨들의 마음을, 아니 바로 내 애인 안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어!"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애인인 안나에게로 급히 달려갔다. 그녀는 아주 매혹적이고 상냥하기 짝이 없는 소녀였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과부가 된 그녀 어머니의 입장에서 이렇게 어여쁜 딸은 유일한 기쁨이자 축복이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눈부신 순결 그 자체였고, 젊은 예술가인 이 남자는 불같이 뜨거운 정열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순진무구한 어린 소녀는 그 남자의 정열 깊숙한 곳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전혀 눈을 뜨지 못했다. 이제 그는 그녀를 찾아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혼자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친척집에 가 있었던 것이다. 작곡가 청년은 그녀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곧바로 피아노에 앉아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고 즉흥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곁에 다가가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우아하고 다정다감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차분하게 들여다보며 피아노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몇 가지 음계와 화음이 연주되자 그녀의 얼굴 표정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긴장이 고조되어 더욱더 주의 깊게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창백한 두 뺨 위에 붉은 빛이 가볍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롱초롱하고 진지했던 그녀의 두 눈에서 이상야릇하게 촉촉한 광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격정적인 감정의 움직임이 그녀의 얼굴 표정에 뚜렷이 나타났다. 그녀는 온몸을 사로잡는 감동,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끝없는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이 무슨 멜로디인가!" 그녀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젊은 예술가는 이 멜로디를 계속 변주해 나갔다. 숲속에서 어처구니없는 우연이 그에게 가져다 준 테마, 바로 그 테마를 끊임없이 뛰어 넘어가며, 변주에 변주를 이어 나갔다. 그의 손가락은 건반으로부터 장중한 변주 음향을 불러내었다. 그리고 모든 변주 음향에는 수수께끼같이 신비한, 바로 그 멜로디가 배어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간절해져서, 그녀의 마음을 더욱더 사로잡았다. 그 어느 때의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었다. 이 무슨 멜로디인가! 천재가 아니라면 이런 것을 어떻게 생각해 내었을까! 이처럼 짧고 단순한 모티프가 이렇게 놀라운 효과를 내어, 듣는 사람을 극도의 황홀경 그 자체에 빠지게 하고 이 세상을 잊도록 만든다면, 이것은 분명 천재의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무슨 멜로디인가! 이제 젊은 예술가는 마지막으로 건반을 힘차게 때리면서 변주를 마감했다. 마지막 음향과 더불어서 멜로디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여운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가늘게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치 공기 중에서 감미로운 그 멜로디를 들이 마시고, 아예 도취되어 사라져 버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소녀는 아직도 넋을 잃고 천상의 꿈속에 빠져 있는 듯,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물론 몇 초 동안 그랬다. 그녀의 반짝이는 커다란 눈이 잠시도 그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 열정적인 감격이 드러나 있었다. 그가 마악 입을 벌려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녀는 벌써 그의 발밑에 쓰러지듯 몸을 던지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남자의 두 손을 잡아 그녀의 입술에 갖다 대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몸을 숙였다. 그러자 그녀가 한숨을 쉬며 그를 포옹했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열정은 다소 지나쳐 거칠기까지 하였다. 그녀에게서 이런 행동이 다 나오다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행동이었고,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겼다. 감미로운 그녀의 호흡이 그의 얼굴에 쏟아져 들어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무슨 멜로디인가! 그러나 이 멜로디는 한 쌍의 연인들에게는 끝없는 환희의 서곡이었다. 오오, 그렇다고, 자신이 이 여자와 당장 결혼을 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어떤 위대한 예술가가 이렇게 시시껄렁한 방식으로 자신의 가장 흥미진진한 모험을 시작도 하기 전에 끝장을 내어 버린다 말인가! 그렇지만 그는 한동안 그녀에게 충실하였다. 몇 달 동안은 그랬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는 한 편의 피아노 작품을 작곡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정말이지, 이것은 마치 하나의 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예술 애호가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그 멜로디 안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모티프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어떤 비평가는 '연주는 그저 재능이 넘치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 곡의 멜로디에 포함되어 있는 영감, 그것 하나만큼은 정말로 천재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음악계 전체는 온통 이 피아노곡으로 넘쳐흘렀고, 특히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것을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작곡해 내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로지 사랑 그 자체가 이런 멜로디를 창조해 내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정말이었다. 이런 멜로디는 이제 더 이상 숨겨진 테마가 아니었다. 특히 여성들에게 그랬다. 그러나 불쌍한 안나, 그녀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 첫 번째 여자였다!

이 작곡가가 다음에 발표하게 될 위대한 작품에 대해서 청중들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무슨 일이 되었든 간에 이처럼 터질 것 같은 긴장이 사람들을 사로잡은 사건은 정말 드물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다려도 다음 곡은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젊은이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창작자로서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칭송을 듣게 되고, 적지 않은 모임에서 하늘처럼 떠받들어 졌으며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들의 품속에서 곧 안나를 잊게 되었다. 그런 여자들은 예술가라는 명성을 가진 남자 앞에서는 돈을 정말 물 쓰듯 했다. 제공받은 향락에 대해서 보답을 베푸는 것이 그들의 즐거움이었다.

그의 피아노곡은 널리 보급되었다.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편곡도 나왔다. 그 모티프는 전 세계의 모든 음악홀을 돌아가면서 끊임없이 무대에 올려졌다. 그러나 얼마나 더 기다려야만 그가 무슨 곡이든 다시 쓰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실망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절묘한 그 멜로디의 모티프만을 기억하게 되었고, 그 작곡가의 이름은 점차로 잊혔다.

일 년쯤 지난 후에 이 도시에서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로 떠돌아다녔다. 바로 얼마 전에 그토록 열광적으로 환영받았던 그 작곡가가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아 자살하였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젊은 그 예술가는 정말 죽은 것이다! 그가 왜 권총자살을 하였는가? 그 남자 옆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이를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더불어서 위대한 것도 함께 사라져 버렸는지, 그 누가 이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작곡가의 자살사건을 그럴듯하게 설명해 주는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어두움이 밀려드는 시간이면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되살아 나오진 않았을까. 갑작스런 명성을 얻게 된 것에 대해서 그가 감사를 드려야 할 대상은 사실 자신의 독자적인 힘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기한 우연의 덕택, 바로 그 악보를 숲속에서 잃어버린 어떤 몽상가의, 행복에 겨운 생각의 덕을 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혹시 회한 아니면 병적인 허영심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그 멜로디를 창작해 낸 자에 대한 시기심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어쨌든 간에 그는 이 세상을 하직하였고, 그에 대한 기억은 그를 추앙하였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로 그 소년은 바로 이 멜로디를, 비록 무의식적인 것이긴 해도, 실제로 창작해 내었던 바로 그 소년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무슨 동화 같은 이야기인가. 마치 인간의 역사와도 같았다. 쓴 웃음이 나오게 만들면서도 어두침침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경악스러운 인간의 역사! 바로 그 소년은 그 유명한 피아노곡을 연주해 보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했기에 자신의 피아노 선생님이 연주하는 것을 그저 지켜 볼 뿐이었다.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소년은 자기 자리에 앉아 불가사의한 멜로디에 신경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 테마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던 그런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심정이 되었다.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세계가 그 멜로디에서 터져 나왔다.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존재하는 환상적인 장엄함, 이에 대한 예감이 소년에게 밀려들어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분명 이를 느끼고 있었지만, 말로는 거의 표현해 볼 수 없는 그러한 장엄함!

그의 몸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은 아득한 옛날 고대 그리스의 무한천공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이었다.

"이 무슨 멜로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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