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민족은 일률로 평등하다. 소수민족의 권익을 보장하고 각 민족의 화합을 발전시킨다. 그 어느 민족에 대해서도 기시(歧视)와 압박을 금지한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4조에 씌어진 법율조항이다. 

중국은 소수민족정책이 아주 잘 되어 있는 나라이다. 그 어느 나라도 이에 비길 수 없다.

조선족이 모여 사는 지방 마다 소학, 중학이 있고, 2백만도 안 되는 인구이지만 민족 대학, 방송국이 있고 신문, 잡지 발행이 이어지고 있다.   
하건만 이에 자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민족자심감을 잃고 조선어(한국어)를 싫어서, 민족학교를 지척에 두고도 자녀를 한족(汉族)학교로 떠밀었다. 중국 땅에서 한어를 해야 손해 안 보고 출세한다고 보았다. 

나 자신도 소학, 중학을 조선족학교를 나왔지만 한족 학교를 나와 한어(汉语)를 멋지게 구사하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여하튼 ‘대 한족’ 주류 사회에서 소수 민족이 밀려나는 듯한 생각을 가끔씩 해 왔다. 한족이 많은 곳에서 조선말을 하는 것도 좀 꺼려했다. 조선말을 하면 한족의 ‘눈총’을 받고 이상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당의 훌륭한 민족 정책을 인정했지만, 은근히 조선족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은 털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가 겪었던 사실이 오랫동안 가졌던 그런 생각을 누그러뜨리게 했다.    

지난 정월 초사흘, 차자(次子)가 운전하는 차가 다른 차와의 접촉사고가 있었다. 빨간 교통신호등을 보고 멈춰 세우려고 할 때, 옆길에서 달려오는 차가 우리가 탄 차를 들이 박아 놓았다. 차자가 핸드폰으로 교통경찰을 호출했다. 교경(交警)이 현장기록사진을 남기고 우리더러 한주일을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집에 와서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면 됐지, 접촉사고를 낸 여 기사에게 너무 각박하게 요구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조선족이기게 교경도 한족의 편에 설 것 이라고 말했다. 
“민족은 다 평등합니다!”
둘째가 심드렁 해서 한 말이다.
“여기서는 소수민족- 조선족을 더 우대해 봐요.”
나의 한족 며느리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 한족들 많은 데서도 언제나 조선말로 대화하는 둘째아들녀석이 이해 되기도 했다.

1주 후, 교통안전과의 통지를 받았다. 접촉사고를 낸 젊은 여 기사 쪽에서 책임을 몽땅 떠안았다. 차 수리에 든 비용 6천위안을 여 기사가 지불했다. 당시 했던 소수민족 ‘차별’생각은 부질없었다. 소수민족으로서의 떳떳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아울러 공산당의 소수민족 우대 정책들을 다시 생각 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족이 조선족에 대해 우호적이고 똑 같이 대한다는 것을 확고했다. 그러면서 국경을 넘어서 받았던 기시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한 핏줄이라고 찾아 온 동포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참말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2015년2월27일, 나와 아내가 한국 천안에 새 아파트를 산 둘째 여동생의 집 구경을 갔었다. 엘리별트에 오르면서 아내의 음성이 좀 컸다. 
“형님, 목소리를 좀 낮추오. 말씨만 들어도 동포인 것을 아오. “
여동생이 주의 주듯 한 말이다. 동포라면 한국인이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국인이 동포를 혐오하는 데는 다각적 요소가 있다. 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든 지, 살인범행을 저지른다든지. 그런 것에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사실 90년대 중국 동포들도 한국의 브로커의 피해를 받고, 가정이 풍비박산되고 절망에 자살한 사람도 많다.

한국인이 동포를 배척하는 데는 반화(反华)감정이 크게 작용한다. 중국 사회 체제를 뼛속부터 미워한다. 한국 전쟁도 체제가 다르기에 동족상잔이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배척하고 사회주의를 실시하더니 못산다고 비꼰다. 그런 ‘공산 사회’를 두 손 들고 옹호하다가 ‘가난’하니까 한국에 와 ‘꿀’을 빨아간다고 말한다. 저들 기업이 인권비 저렴한 중국 땅에 와서 돈을 벌고 있다는 점은 잘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중국은 ‘일당 독재’, 민주가 없다고들 말한다. 자기 나라에서는 투표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와서 투표한다고 투덜거리는 사람, 정치인들이 있다. 투표참가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다. 국적은 투표의 권리를 향수 할 수 있다. 국적은 중국 정부에서 준 것도 아니다. 

일찍 중국 공산당도 서방 국가들의 민주 형식을 본받아 여러 차례 ‘1인1표’ 투표를 했던 적도 있다. 1929년, 홍군이 위급한 처지에 봉착하여, 유명한 복건 ‘고전회의’ (古田会议)를 가졌다. 12월28~29일, 3000명 당원들이 모여, 마오쩌둥(毛泽东)과 천이(陈毅)에 투표를 진행했다. 천이가 압도적 표차로 마오쩌둥을 눌러 홍군 전위 서기로 선출되었다. 너무도 아이러니하고 뜻밖인 지라 저우언라이(周恩来)가 천이를 찾아가 물었다.
“마오쩌둥의 수평 능력이 어떻습니까?” 
천이는 민족의 해방 사업과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는 진정한 공산당원이다. 
“솔직히 말해 마오쩌둥은 전략 전술과 지도 수준이 천이를 초월하지요.”

저우언라이의 물은 의도를 알아차린 진의는 당중앙에 서신을 띄우기도 하면서 주동적으로 퇴임했다. 마오쩌둥이 다시 홍군전위서기를 회복하면서 당을 구하고 홍군을 구했다. 

사회단체에 총명한 사람, 전략적 시야를 가진 사람은 필경 소수다. ‘보통 사람, 비전문가’들이 하는 ‘1인1표’ 투표는 매우 ‘위험’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은 언제나 민주집중제를 실시해 오고 있다. 즉 민주기초상의 집중과 집중지도하의 민주결합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운용 원리라 자본사회에서는 비난을 일삼는다.  

사회주의는 토지,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토지도 집체 소유, 국가 소유이다. 그 누구도 사고 팔 수 없게 되어 있다. 아울러 국가에서 토지 정용(征用)을 순조롭게 할 수 있다. 그러니 베이징_상하이에 기나긴 고속 철도도 부설 할 수 있었다. 토지가 사인 소유로 된 미국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거다. 수 십만 자본가들이 달라 붙어 법 놀음 하고, 고가로 토지를 매매하려고 펄쩍 뛸 것이다. 정부는 그런 곳에 1키로의 철길도 깔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편전쟁, 중일 갑오 전쟁은 중국 인민을 납작 엎드리게 만들었다. 숨도 바로 못 쉬고, 고개도 바로 들지 못했다. 신해혁명을 걸치면서 중국인민은 궐기했다. 항일 전쟁에서 과거의 ‘동아 병부’가 세계 강국과 맞붙어 기적을 이루어 냈다. 이것은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만이 해낼 수 있었다. 지금 중국은 세계의 강국으로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되었다. 중국 인민이 사회 체제를 수호하고, 동포들이 중국 공산당을 옹호하는 데는 모두 저만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국 국민이 60년대에 일어난 ‘한강 기적’, 박정희 시대를 그리는 것도 모두 이유가 있다. 근 30년 강철, 전자, 조선, 자동차로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로 부상했다. 경제 비약을 가져 와 ‘아시아 4소룡’, 아시아 ‘경제 맹주’가 되었다. 이에 자호를 느끼는 한국인을 이해 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의 역사를 알고, 한국인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한국인도 중국을 더 잘 알려고 하고, 중국 공산당에 대한 역사 공부를 좀 더 한다면, 일본 보다 더 낮은 ‘중국 호감도’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동포에 대해서도 그렇게 밉게는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서 영원한 적은 없다. 오직 영원한 이익뿐 이다. 대한민국도 북조선과 마찬가지 이다. 중국과는 모두 떨어질 수 없는 ‘설린’(舌麟)의 관계이다. 서로 윈윈(双赢)의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면, 두 나라 인민(국민)은 더 행복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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