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자 박사 시평 ] 순간의 영원성

변창렬 시인
변창렬 시인

가을 끝에 남은 1초                     

변창렬 

 

민들레는 
질 때도 노랗게 진다
점과 점으로 널려있는 동전
온 세상을 사고 싶었을 거다

하늘이 높아지면서
남은 1초가 안타깝다
대궁 하나로 벋히는 마지막 1초
진액은 그래서 쓰겁구나

떡잎마저 시드는 마지막 1초
홀씨가 날아 갈 때
어떤 상처를 품고 갔는지 알고 싶다

오그라든 가을이 춥구나
남은 1초에 홀씨는 뿌리 내렸을까
1초라는 순간에 
민들레는 한 생을 지쳤구나
눈이 오려나 가을이 짧다

푸름을 잊고 떠나는 홀씨
발톱도 1초를 다투고저  뾰족하다
어디에 꽂힐까 
떨어지는 순간도 1초아닌가

 


비보이는 현실이다

 

균형을 깨트리는데 절주가 있다
꺼구로 흔드는 몸집따라
내리 꼰지는 자세도 격에 맞는 멋이다

바로 놀든 뒤집어 놀든
눈치코치가 필요없는 너희들 세상
활기를 만드는 것으로 충격을 남긴다

약간 삐딱해도 생을 망치는 요즘
흔들며 들썩이는 게 부럽다
붙잡은 밥줄마저 빼앗길가봐
줄을 서도 살펴야하는 요즘아닌가
발바닥이 떨리는 졸병이 더 많아
나도 말단 인격피해자의 하나다

산다는 것은 어느 장르에 귀속될까
혼잡한 절주를 즐기는 신시대들
트롯트로 추는 비보이는 없다
평지에 벼랑을 세우는 게 너희들이다

속옷을 겉옷으로 입었다고
펜티를 모자로 뒤집어 썼다고
비보이가 아니다
흔들어도 균형을 이루는 기적이 새롭다
나까지 비보이로 살게 이끄는 자연생태이다
완벽한 거래를 하는 현실이 좋다

 
건너 뛰는 서정의 철학성

 

시는 
죽은 모기의 시체에서
피를 되찾아 오는 도둑질이다

시는 
헌 옷을 찢어
누비 저고리 만드는 솜씨로
엄마의 속치마를 재단하는 
거지 자식의 불행이다

시는 
논에 떨어진 벼이삭을 줍어
풋바심이 하여
눅거리 때시걱으로 배채운 점심이다

시는 
왼발이 오른발의 국경을 넘나드는
걸림돌의 왕국에서
밥 벌이하는 신사들 걸음걸이로
모로 가도 탁 틔인 지평선이다

 

 

시달리던 게임을 끝나고 나서
누구도 못느낄 속도를 알았다

너를 차려고 벼르던 발은
발바닥 지문을
날아갈 곡선으로 지도가 되게 
너의 표면 테두리에 남겼다

날아가면 화살이다
호선으로 날아가면서 깨달았으리
점이 곡선으로 날 때는 힘이 강하단 걸
그 힘이 게임의 고조가 된다는 걸

혼자서는 움직일 수가 없어
누군가의 발이 그리울 거다
날고싶은 날 어찌 한두 번일가
둥근 몸체는 둥글게 나는 운명이다

하늘에 떠 있으면 점 하나다
바닥의 점에서
허공의 점 하나로 솟으면
속도가 생기는데
그 속도가 호를 그릴 때 철학이다

 


하늘에서 신풀이 개간하는 아버지

 

밭에서 논으로
흙에서 하늘로 떠돌이 사신 아버지
우주로 가시어
왼 발은 로케트 밟으시고
오른 발은 인조위성을 딛고 
집을 지으시였다

먼저 가신 조상들 이끌고
신들의 휴게소를 만드셨다

미국 로씨아 여러 나라의 우주비행기도
아버지 휴게소에서 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살아진다는 우주
아버지의 지팡이가 지휘봉이다

잔뼈에 베긴 부지런함은
하늘로 가셔도 쉴줄 모르시고
별들의 모든 빛을 
이 땅에 뿌려 주시는 아버지
별을 낟알로 내려주신다

후세들도 찾아가게 되면
우주 휴게소로 오라고
달과 별을 징검다리로 놓으셨다
징검다리 사이사이에
논밭을 일구어 신풀이하신 아버지

 
 

맨머리 그 친구

 

가발 쓰고 양복을 입으면
도시 신사가 되어 핸들이 가볍지만
쉬는 날에는 다 벗어 던지고
운동장으로 간다다

누군가 맨머리 깔고 앉아 올라간다면
더 없이 괘씸해 
차버리고 싶은 축구장
뽈이랑 함께 날아 갈 기분
민머리엔 땀방울이 흥건했다

눈부시어 쳐다 볼수도 없는
높이를 바라고 살던 친구는
이마에 비친 아파트가 뽈만한 걸 모른다
모든 높이는 맨머리에서 미끄러질 듯

겉 늙음을 속이는 가발에는
남의 눈을 편하게 해주는
주름살은 없어도
환하게 내비치는 밝음이 있어
보는 이가 더 뜨거울수 있으나
맨머리로 살기엔 버거운 조심스럼이 
가끔씩 빗나갈때가 많았다

그럴 때
멋데로 솟는 뽈이 부럽다
맨머리도 그렇게 날고 싶을 때가
어찌 한두번이라 할까
맨머리도 하늘이 되고 싶지

 

12월

 

손 떨리던 그 때 그 달이
때묻은 속옷으로 구겨졌으나
어느 구석에 있을지도 모를 그런 달이라
해쌀이 싸늘하게 꼬여 있던 막달이 떠 오른다

아버지가 곰방대만 두드리면
헛간의 빈 쌀 궤가 보기 싫던 달이라
그 때는 한 장이라도 뜯기 아까워
고무줄 끈에 꿰여 놓았다가
뒤 볼 때 엉덩이 딲던 달력장이였어

문풍지가 떨면 삐걱소리가 무서워서
아버지 눈치만 살피다가
마루끝에서 꼬부리고 잠들던 그 때라
꽁다리 연필도 얼었던 겨울방학의 달이고

엄마가 밥 먹자고 깨우면
누렇게 낡어 버린 달력장이 되여
이불에 오줌을 싸놓아
키짝을 뒤집어 쓰고 옆집으로 
소금 꾸러 가던 그런 때라
헝겁으로 기웠던 엄마 코신 끌고 가다가
미끄러워 자빠지던 날이고

서른을 넘긴 딸에게 얘기를 했더니
정말 그랬어
눈이 동그레지는 옛 달이라
잊으려해도 귀밑머리가 기억해 놓아
고향쪽으로 저절로 고개가 돌아 가는 
막달
함박눈이 맛나서 차지는 달이라

 

시평 

순간의 영원성
                 

류경자

 

류경자 박사
류경자 박사

시란 무엇인가?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문제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답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이라고 해서 선뜻 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의 인생과 철학이 자연스럽게 예술로 발현되는 과정이다. 변창렬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인생과 철학에 대한 그의 고민이 그대로 드러난다. 

1. 폐허에서 구축하기

시는 
죽은 모기의 시체에서
피를 되찾아오는 도둑질이다

시는 
헌 옷을 찢어
누비저고리 만드는 솜씨로
엄마의 속치마를 재단하는 
거지 자식의 불행이다

시는 
논에 떨어진 벼이삭을 주어
풋바심하여
눅거리 때시걱으로 배 채운 점심이다

시는 
왼발이 오른발의 국경을 넘나드는
걸림돌의 왕국에서
밥벌이하는 신사들 걸음걸이로
모로 가도 탁 틔인 지평선이다

- <건너뛰는 서정의 철학성>

이 시는 정확하게 ‘시는 ……이다’라는 구조를 가지며 이 구조를 4번 반복하고 있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시인 나름대로 찾은 답인 것이다. 간단하게 줄여 보면 시는 도둑질이자 불행이며, 점심이자 지평선이다. 문법적으로 전혀 맞지 않아 보이는 이 시에서 시인이 던진 화두는 ‘시’라기보다는 ‘시 쓰기’이다. 즉 ‘시를 쓴다는 것’은 ‘도둑질’이라는 행위인 동시에 ‘불행’이라는 행위의 결과이기도 하며, 또 ‘점심 식사’와 ‘지평선’ 같은 것이기도 하다. 우선 결론적으로 봤을 때 변창렬 시인에게 시란 다양하게 변주하는 그 무엇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시인은 어떤 의미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일까?

죽은 모기의 시체에서 되찾아온 피는 원래 ‘내 것’이다. ‘내 것’이기 때문에 ‘되찾아올 수 있는 것’이고, ‘되찾아오는’ 행위는 ‘도둑질’이 아니다. 그러나 원래 나의 것이던 피가 모기에게 가자 모기의 것이 된다. 내가 다시 모기의 시체에서 가져온 피는 ‘되찾아온 것’이지만 그것은 ‘도둑질’이 된다. 내가 당당하게 나의 것을 되찾아오는데 ‘도둑질’이라고 하는 것은 도둑질이라는 남몰래 하는 행위로써 남의 시선을 의식한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피는 원래 나의 피인 것을 왜 모기를 거쳐 남의 시선을 피해 ‘도둑질’이라는 행위를 통해 다시 되찾아와야 하는 걸까? 그것은 한 사람이 태어나 인생의 온갖 고난을 겪고 어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듯이, 시 쓰기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영혼이 담겨 시가 비로소 새롭게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고난을 겪은 그 ‘피’는 영혼이 담긴 ‘피’라고 할 수 있으며, 시가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에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언어를 재조립하는 재구성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2, 3, 4연에서 표현된 ‘헌 옷’, ‘논에 떨어진 벼이삭’, ‘걸림돌의 왕국’ 등은 ‘죽은 모기’와 비슷한 이미지이다. “헌 옷을 찢어 누비저고리 만드는 솜씨로 엄마의 속치마를 재단하는 거지 자식의 불행”은 훌륭한 ‘솜씨’가 돋보인다. 이는 ‘거지 자식의 불행’이지만 시를 쓰는 ‘솜씨’, 즉 능력이 더욱 강조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만은 아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금수저’가 아닌 ‘거지 자식’으로 태어나 어쩔 수 없는 제한된 조건에서 시 쓰는 과정은 불행이기도 하다. 겨우 논에 떨어진 벼이삭을 주어 풋바심해도 눅거리 때시걱이지만 그래도 배를 채울 수 있는 점심이다. 제대로 걷기도 힘든 ‘왼발이 오른발의 국경을 넘나드는’ 걸림돌의 왕국에서 이제는 제법 밥벌이하는 신사들 걸음걸이로 모로 간다고 해도 ‘탁 틔인’ 새로운 지평선이 열린다. 죽은 모기의 시체를 거쳐 피를 되찾아오는 과정, 헌옷이 새 옷으로, 논에 떨어진 벼이삭이 배를 채울 수 있는 한끼 식사로 재탄생하는 과정, 걸림돌의 왕국에서 모로 가도 탁 틔인 지평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리 힘들고 지난한 과정일지라도 결국은 그 힘겨운 과정을 지나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변창렬 시인에게 시 쓰기란 바로 온갖 시련을 겪고 피안으로 가는 길, 그렇게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이다. 

시인의 이러한 인식은 발터 벤야민의 역사 재구성 방식과 닮아있다. 벤야민은 역사가 사건의 연쇄가 잔해가 되어 쌓인 파국이라고 설명하며 이 폐허에서 역사의 파편들을 끌어 모아 다시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이 폐허에는 소멸과 생성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으며, 잔해로 가득찬 이 폐허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 폐허나 다름없는 ‘죽은 모기의 시체’, ‘찢어진 헌 옷’, ‘논에 떨어진 벼이삭’, ‘걸림돌로 가득찬 왕국’에서 시인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창조를 한다. 즉 피를 되찾고, 새로운 옷이 만들어지며, 끼니를 채울 수 있는 한끼 식사가 마련되고, 새로운 지평선이 열린다. 여기서 1연에서 4연까지 ‘도둑질-불행-점심-지평선’으로 표현된 ‘시 쓰기’는 4연으로 갈 수록 시 쓰기의 결과인 그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변한다. 심지어 “모로 가도 탁 트인 지평선” 너머로 새 희망이 보인다. 시 쓰기가 처음에는 겨우 도둑질 같은 정도밖에 되지 않다가 힘든 불행이 되며 나중에는 한끼 배를 채울 수 있는 점심이 되고 마지막에는 지평선이 보인다. 이것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시 쓰기가 점차 성숙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물론 그 지평선이 보이기까지는 여전히 험난한 과정이다. 성숙해진 후에도 시를 쓰는 것이란 역시 ‘걸림돌의 왕국’에서 힘겹게 행진해야 하는 것이지만 희망은 있다. 무에서 유로, 죽음에서 탄생으로 ‘건너뛰는’ ‘서정’은 시인의 손끝에서 감각적인 필치로 그 기표들이 하나하나 살아난다. 이렇듯 시인에게 시는 서정으로 대변되는 감정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철학을 말하는 이성의 발로이기도 하다. 

2. 순간이 영원으로

민들레는 
질 때도 노랗게 진다
점과 점으로 널려있는 동전
온 세상을 사고 싶겠지

하늘이 높아지면서
남은 1초가 안타깝다
대궁 하나로 뻗히는 마지막 1초
진액은 그래서 쓰겁구나

떡잎마저 시드는 마지막 1초
홀씨가 날아 갈 때
어떤 상처를 품고 갔는지 알고 싶구나

오그라든 가을이 춥구나
남은 1초에 홀씨는 뿌리를 내렸을까
1초라는 순간에 
민들레는 한생을 지쳤구나
눈이 오려나 
가을이 짧다

푸름을 잊고 떠나는 홀씨
발톱도 1초를 다투어  뾰족하다
어디에 꽂힐까 
떨어지는 순간도 1초 아닌가

- <가을 끝에 남은 1초>

<건너뛰는 서정의 철학성>에서 시가 폐허에서 구축되고 죽음을 통과하여 새롭게 탄생되는 것이라면, <가을 끝에 남은 1초>에서 ‘1초’ 라는 시간은 생명이 부여되는 순간이자 죽음과 동시에 새로운 생성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동전처럼 널려있는 민들레는 온 세상을 사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다. 그렇지만 가을이 깊어지면서 인생에 마지막 남은 1초가 안타깝다. 그래서 모든 힘을 모아 홀씨를 뿌릴 준비를 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진액은 쓰거우며 날아 가는 홀씨 또한 어떤 상처를 품고 갔는지 알 수 없다. 짧은 가을의 마지막 남은 1초에 홀씨가 뿌리를 내렸을지 걱정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1초라는 순간에 ‘한생을 지쳤음’을 자각한다. 푸름을 잊고 떠나는 홀씨는 1초를 다투어 뾰족한 발톱을 내밀며 다음 생을 기약한다. 새로이 잉태되는 순간 또한 1초만 주어지면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그 홀씨는 1초 전에 원래 자신의 몸을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것은 현생인지 다음 생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홀씨가 뿌리를 내리는 순간 다음 생이 시작되는 걸까? 아니면 ‘푸름을 잊고 떠나는’ 순간 전생이 끝나는 걸까? 전생, 현생, 다음 생에서 민들레는 어느 것을 사는 걸까? 1초라는 그 순간에는 영원히 현생을 사는 것이지만 홀씨가 원래의 몸체를 떠나는 순간은 전생을 벗어나는 걸까? 그 홀씨가 바로 전생의 몸체 그 자체인 것을. 영원히 홀씨로 현생을 이어가는 민들레에게는 1초라는 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순간’의 의미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과거와 미래가 서로 다른 길로 진행하면서 결국 만나는 장소가 바로 ‘지금의 순간’이다. 과거와 미래는 영원으로 통한다. 이때 그 과거와 미래는 개개의 순간의 영원화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개개의 순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각 순간들은 필연적이고 가치가 충만하다. 따라서 생성의 모든 순간은 유의미하고 필연적이며,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긍정이다. ‘대궁 하나로 뻗히는 마지막 1초’, ‘떡잎마저 시드는 마지막 1초’, ‘한생을 지친 민들레의 마지막 1초’, ‘발톱을 뾰족하게 다투어 내미는 1초’, ‘뿌리를 내리는 홀씨의 마지막 1초’, 이 모든 순간이 필연적이고 유의미하며 영원으로 이어진다. 

민들레는 왕성하고 질기며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뽑히고 밟혀도 꿋꿋이 일어서는 민초의 상징으로 많이 사용된다. 이 시에서는 그 강한 생명력을 가지는 데에 단 1초 만의 순간을 통해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 1초라는 순간이 오기까지 수많은 1초가 필연적으로 만나 이루어진다. 지금의 순간을 통과하여 미래로 이어지는 개개의 순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3. 삐딱한 현실, 그리고 한 폭의 풍속화

<비보이는 현실이다>와 <맨머리 그 친구>는 현대 도시에 사는 비보이와 맨머리의 상반된 현실 대응방식을 보여준다. <비보이는 현실이다>에서 보여주는 현대사회는 눈치를 봐야 하고 약간 삐딱해도 생을 망칠 수 있으며 붙잡은 밥줄마저 빼앗길가 봐 전전긍긍해야 하는 공간이다. 비보이는 혼잡한 절주를 즐기는 신세대로써 눈치 보는 현실과 대조되는 삶을 살고 있다. 흔히 제멋대로 행동하는 신세대로 인식되는 비보이는 ‘바로 놀든 뒤집어 놀든’ 그들만의 삶의 철학이 있다. 균형을 깨뜨리는데도 ‘절주가 있으며’ 거꾸로 흔드는 몸집을 따라 내리 꼰지는 자세도 ‘격에 맞다’. 그들은 활기를 만드는 것으로 이 세상에 충격을 남긴다. 비보이의 이러한 자세에 화자는 부럽기만 하다. 화자는 붙잡은 밥줄마저 빼앗길가 봐 줄을 서서도 전전긍긍해야 한다. 왜냐하면 화자는 말단 인격피해자 중의 한 명이기때문이다. 비보이의 대처법을 보고 화자는 ‘산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삶을 다시 사색하게 된다. 화자는 흔들어도 균형을 이루는 기적이 새롭게 느껴지는 비보이에게서 삶의 모델을 발견한다. 그들은 외적인 형식만 갖춘 것이 아니다. ‘트로트로 추는 비보이는 없다’는 표현처럼 그들은 타협이라는 것을 모르며 ‘평지에 벼랑을 세우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자기들만의 원칙과 철학을 꿋꿋이 지켜 나간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 부조리한 세상을 뒤집는다. 삐딱한 현실에서 삐딱한 방식으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철학을 실행에 옮기는 이들이다. 

비보이와 달리 <맨머리 그 친구>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을 할 줄 아는 부류이다. 가발 쓰고 양복 입는 날은 도시 신사가 되고 쉬는 날에는 그것을 다 벗어 던지고 운동장으로 간다. 맨머리는 축구장에서 뽈을 차며 흥건하게 땀방울을 흘리는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날린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맨머리를 비판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쳐다볼 수도 없는 높이를 바라고 살던 친구는 이마에 비친 아파트가 뽈만한 걸 모른다. 무엇이 진정 의미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고 맨머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신풀이 개간하는 아버지>와 <12월>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담겨있는 시이다. 이 두 시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 폭의 그림처럼 독자에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하늘에서 신풀이 개간하는 아버지>에서 아버지는 밭에서 논으로, 흙에서 하늘로 떠돌이 삶을 산 사람이다. ‘잔뼈에 배긴 부지런함’으로 하늘로 가서도 쉴 줄 모르고 후세들을 위해 별들의 모든 빛을 이 땅에 뿌려 주고 별을 낟알로 내려 준다. 항상 부지런하고 남을 위하는 아버지이기에 하늘에서도 논밭을 일구어 신풀이한다. 이 시에는 아버지에 대한 시인의 아름다운 염원이 담겨 있으며 시인의 상상력으로 하늘에서의 아버지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12월>은 고향에 대한 시인의 추억이 담겨 있는 한 폭의 풍속화이다. 시골 풍경을 그린 이 풍속화에는 아버지의 곰방대, 헛간의 빈 쌀 궤, 옛 달력장, 문풍지, 꽁다리 연필, 키, 헝겁으로 기운 코신 등이 등장한다.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사물들이다. 특히 이불에 오줌을 싸놓아 키를 뒤집어쓰고 옆집으로 소금 꾸러 가는 모습은 독자들을 그 현장으로 직접 안내하는 생생한 시골 풍경이다.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그때 그 추억이 당시에는 그렇게도 싫은 풍경이었다. 해살이 싸늘하게 꼬여있고 헛간의 빈 쌀 궤도 보기 싫으며, 엉덩이를 닦던 달력장에 문풍지가 바람에 떨면 삐걱 소리가 무서워서 마루 끝에서 꼬부리고 잠을 잤던 기억이다. 그러나 그렇게 싫었던 과거(12월)가 지금은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깃들어 있는 시간이 되었으며 지금 화자에게는 그리운 유토피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제 12월은 고향을 저절로 생각나게 하는 시간이다. 딸에게 옛 추억을 꺼내놓는 화자는 먼 훗날 ‘오늘’도 다시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시를 끝맺는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변창렬 시인의 시에는 문학에 대한 고민,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유,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 고향과 가족에 대한 추억과 사랑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는 시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고민과 사유를 말하며 이 세상과 소통해 나간다. 그의 시에서는 죽음의 순간에 새로운 탄생이 일어나고(<건너뛰는 서정의 철학성>), 생명이 스러지는 순간 아름다운 자태로 새 생명이 잉태되며(<가을 끝에 남은 1초>), 그는 거꾸로 세상을 보며 매 순간을 열심히 살고 눈치 보지 않는 삶을 추구하며(<비보이는 현실이다>, <맨머리 그 친구>), 12월인 세월의 끝에서 그 순간 시간을 거슬러 기억의 회로를 통해 ‘나’와 우주를 품은 아버지를 추억한다(<하늘에서 신풀이 개간하는 아버지>, <12월>). 이 하나하나의 순간들이 그의 시를 통해 살아나며 그것 또한 지금 이 순간 영원으로 남을 것이다. 

  - <도라지> 251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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