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 (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이남철 (경제학 박사,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전 파라과이교육과학부 자문관)

유엔은 2022년 6월 1일 ‘터키’의 국호를 ‘투르키예’로 변경·승인하였다. ‘터키인의 땅’을 의미하는 투르키예는 영어 단어 터키 (Turkey)가 터키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칠면조를 가리키는 데다 겁쟁이, 패배자 등을 뜻하는 속어로도 사용되는 것에 터키인들은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한국에서 ‘터키탕’을 퇴폐 목욕탕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996년 주한 터키 대사관과 당시 주한 터키 대리대사의 문제 지적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현재의 명칭인 ‘증기탕’으로 변경하였다. 국제사회에서 국명을 바꾼 여러 사례가 있다. 마케도니아가 북마케도니아, 페르시아가 이란, 시암이 태국, 버마가 미얀마, 크메르가 캄보디아, 로디지아가 짐바브웨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필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미국학회 논문 발표하러 갔을 때 중간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이스탄불 유적지를 여러 곳을 다녀보았다. 또한 이란 테헤란에서 국책연구사업 공동추진 협의를 위해 전 한국경제학회장 구교수님과 함께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스탄불에서 스탑오버 (공항 경유시 24시간 이상 체류)를 이용하여 이스탄불 시내를 구경할 기회를 가졌다.

이스탄불은 터키 서부에 있고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운데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쳐 있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중동에서 인구규모가 가장 큰 도시이자,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렀으며 오스만 제국 때까지 수도로 존속하다가 현재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1923년 이후로는 앙카라가 터키의 수도가 되었다. 1985년 유네스코는 이스탄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갈라타 대교로 아시아와 유렵 대륙을 연결함. 터키는 97퍼센트가 아시아 대륙이며 이스탄불을 포함한 3퍼센트가 유렵 대륙임.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음. 다리 1층에는 시장과 식당이 있어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음.
갈라타 대교로 아시아와 유렵 대륙을 연결함. 터키는 97퍼센트가 아시아 대륙이며 이스탄불을 포함한 3퍼센트가 유렵 대륙임.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음. 다리 1층에는 시장과 식당이 있어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음.

필자는 아야소피아 박물관과 술탄 아흐메트 자미, 톱카프 궁전, 선착장, 탁심 광장과 이스티크랄 거리 구경과 페리를 타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여행하였다. 이는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잇고,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터키의 해협이다. 길이는 30km이며, 폭은 가장 좁은 곳이 750m이다. 깊이는 36에서 120m 사이이다. 오랫동안 군사적인 요충지로 알려져 왔고, 18세기 이후에는다르다넬스 해협과 함께 해협의 항행권을 둘러싼 ‘해협문제’로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터키의 유럽 영토와 아시아 영토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로 나뉜다. 1973년에 완성된 해협 횡단의 보스포러스 다리는 세계 유수의 현수교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간선도로이다. 해협을 횡단하는 3개의 다리가 건설되어 있으며, 2013년 해저 터널을 통과해 이 해협 아래를 지나는 마르마라이 철도가 개통되어 운행 중이다.

평소에 호기심이 많은 필자는 터키, 그리스와 불가리아 접경지역을 가보고 싶었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인터넷 검색을 한 후 기대감과 불안감을 가지고 국경지역인 에디르네로 갈 수 있는 버스터미널을 찾아 갔다. 서울고속터미널과 비슷한 규모로 전국으로 가는 버스 노선이 있어서인지 엄청나게 혼잡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대합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 국경 가는 버스를 알려달라고 물었지만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많은 노력 끝에 젊은 학생의 안내로 국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스탄불에서 고속버스로 3시간 30분, 240㎞ 떨어져 있는 에디르네로 향했다. 이스탄불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 3시간 이상 해바라기가 지천에 깔려있다. 국민성은 해바라기 성향이 아닌 강렬한 다혈질 국민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많은 해바라기를 심었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사실 경제적 가치가 가장 높은 식물 중 하나인 해바라기는 세계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터키에서도 농업 생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버스 안에서 잘 생기 젊은 남자 승무원이 가는 동안 중간 중간 커피, 음료수와 과자도 나누어 주었다. 고속버스 초창기 운행시 필자는 고향 가는 고속버스에서 여자 승무원들이 나누어 준 물과 커피를 얻어 마셨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에디르네는 그리스, 불가리아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터키 속의 유럽’이다. 에디르네는 터키의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로 에디르네 주의 주도이다. 영어권에서는 아드리아노플로 알려져 있다. 동로마 제국 비잔틴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이스탄불)을 점령하기 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수도이자 발칸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다.

에디르네는 근대에 이르러 수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외국의 지배를 받고 파괴되어 점차 쇠퇴해갔다. 러시아가 1829년과 1878년에, 불가리아가 1913년 제1차 발칸전쟁 중에 에디르네를 점령한 후 다시 터키로 넘어갔다. 1920년 터키 독립전쟁 중에는 그리스에 빼앗겼으나, 1922년 결국 다시 터키로 넘어왔다. 에디르네는 파란만장한 수난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에디르네에 있는 셀리미예 모스크. 1574년에 지어졌으며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음.
에디르네에 있는 셀리미예 모스크. 1574년에 지어졌으며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음.

에디르네에는 유서 깊은 사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여행 중에 찾아 본 사원 등 관광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면상 한계가 있어 이름 정도만 밝힌다. 1414년 건축된 에디르네 에스키 사원, 이스탄불에서 가장 높은 철탑을 가진 쉴레마니예 사원, 이스탄불의 상징인 동로마 제국의 아야소피아 박물관, 블루모스크, 전통시장 그랜드바자르 등이다.

터키에 천재 건축가 시난의 작품이 많지만 최고의 작품은 에디르네에 있는 이슬람 사원이다. 16세기 오스만 제국 건축의 정점이다. 미마르 시난은 한평생 477개의 건축물을 남겼으며 9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2011년 유네스코는 에디르네에 있는 ‘셀리미예(1574)’ 사원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였다. 시난이 86세 때 지은 사원이다. 시난 스스로도 “평생의 연습을 마무리하는 장인이 되어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했다.

누구나 경험하겠지만 해외여행 중 언어소통 문제는 필연적으로 겪어야하는 고생 중 한부분일 것이다. 필자는 국경 인근 버스터미널에 내려 두리번거리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될 것 같다고 생각되는 약국으로 들어가 뚱뚱한 마음씨 좋게 보이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리스 국경을 어떻게 가느냐고? 하얀 가운을 입은 약사 같은 두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다. 필자를 대화의 상대로 해 준 이분이 사장 약사인 것 같았다. 자기와는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전화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를 소개해 주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너무 나도 고마웠다. 귀국해서도 통역해준 분과 약사 분에게 감사인사를 하면서 한참동안 멜로 안부인사도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연락이 두절된 상태이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접촉을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필자는 그리스 국경으로 가는 택시를 영어 선생에게 부탁했다. 도착한 운전사 아저씨도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차타기 전 영어를 하는 사람의 자세한 안내로 필자를 그리스 국경까지 데려다 주었다. 약 20분 정도 택시타고 국경에 도착하였다. 국경 가는 주변에는 인적과 차량통행도 없고 사방에 무성한 나무들의 모습은 필자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오른 쪽 횐 차 건너편이 터키 군이 지키고 있는 국경경비 초소이고 그 길로 10m가면 그리스 군인들이 완전문장하고 지키고 있는 터키와 그리스 국경임. 사진 왼쪽에 필자가 서있음.
오른 쪽 횐 차 건너편이 터키 군이 지키고 있는 국경경비 초소이고 그 길로 10m가면 그리스 군인들이 완전문장하고 지키고 있는 터키와 그리스 국경임. 사진 왼쪽에 필자가 서있음.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면서 국경선에서 몰래 사진을 찍었다. 절대 사진 찍으면 안 된다고 경고문이 크게 붙어있지만 필자의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택시에서 국경 근방 경비초소 앞에 내려 여권 검열을 터키에서 받고 그리스로 들어가 다시 여권 심사를 받았다. 입국 심사를 받는 동안 츨입국 담당 공무원은 친절하게 “왜 이곳을 통해 그리스로 들어가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미국 학회 논문 발표를 마치고 고대 문명의 발상지, 그리스 땅을 밟아보고 싶어서 이스탄불에서 왔다고 하였다. 터키와 그리스 국경 경비대들은 의아한 눈치였다. 필자의 직감으로 동양인이 특별한 목적도 없이 무더운 날씨에 무엇 하러 걸어서 터키를 넘어서 그리스로 가려고 하는가! 잠시 후 두 나라 국경경비 초소에서 아무 이상 없이 입국 심사를 해 주어 근처 구경거리도 없는 곳을 왕복 2시간 정도 무작정 걸었다. 걸으면서도 필자 자신도 이상한 일을 하고 있지는 않나하고 혼자 생각하면서 무작정 그리스 내륙을 걸었다. 사실 좀 생뚱맞은 행동이지만 필자는 그리스의 화려한 고대문화와 영광을 이룬 나라의 망해간 땅을 한번 밟아보고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고 싶었다. 땅을 밟아보고 고민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여행은 힘든 것이고 편안하지 않음으로써 정신적 육체적으로 삶의 생동감의 동기부여가 된다고 생각하면서 필자는 여행을 즐기고 있다. 

인간에게 생로병사가 숙명이듯, 국가의 흥망성쇠도 불가피하다. 그리스는 1980년까지만 해도 남유럽 최강국 중 하나였다. 탄탄한 재정 (국가부채 비율 22.5퍼센트)과 건실한 제조업 기반 (남코자동차, 핏소스전자 등)을 앞세워 스페인, 포르투갈보다 5년 앞선 1981년에 유럽연합 (EU)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 (EEC)에 가입했을 정도였다. 이러했던 그리스를 ‘유럽의 천덕꾸러기’로 끌어내린 건 포퓰리즘 (대중 인기 영합주의)이었다. 1981년 집권한 사회당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는 최저임금 대폭 인상, 전 계층 무상의료, 무상교육, 연금 수령액 인상 등 선심성 정책을 잇달아 내놨다. 노사분규 등의 여파로 민간 기업들이 파산 위기에 몰리거나 공장을 해외로 옮기자 공무원을 늘리고 민간 기업을 국영화하는 식으로 일자리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나라와 비교하니 우울한 마음이 든다.

터키는 한국전쟁 시,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큰 규모로 파병하였다. 이 전쟁으로 유엔군 사망자는 3만7천902명 중 미군 사망자는 3만3천686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이어 영국군 (1천78명), 터키군 (966명), 캐나다군 (516명) 순으로 많았다. 두 나라의 관계에는 ‘형제의 나라’라는 표현이 즐겨 사용된다. 터키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칸 카루다슈 코리아” (피로 맺어진 형제, 한국)라 부른다. 

현재 터키의 경제 성장률은 여러 내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둔화되고 있다. 유럽 신용 평가기구 스코프 레이팅스 (Scope Ratings)는 터키의 경제 성장률이 2021년 11.0퍼센트에서 2022년 2.4퍼센트로 감소하고, 2023년에는 2.3퍼센트에 불과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2023년 6월, 터키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이러한 국내 정치적 영향은 향후 터키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2023년 이후 대한민국 혈맹의 나라 ‘투르키예’! 재집권이든 정권교체이든 정국이 안정되어 국명을 바꾼 리브랜딩에 효과가 국가 신용도 회복과 경제성장에 기여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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