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춘 언론출판인, 작가

국자가(局子街)!

백년역사를 담은 연길시 상징거리이다.

청나라 광서년간에 연길청이 들어앉으면서 관서(官署)의 대명사로 통하다가 1936년에 ‘연자로(延字路)’로 개칭되고 1953년에는 ‘전진로’로, 20세기 50년대말에는 ‘민주가’로,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연길로’로, 1973년에는 ‘흥안로’로 부르다가 1982년 다시 ‘국자가’ 호칭을 되찾은 역사의 거리이다.

1902년에 연길청이 설치되면서 국자가가 생겨 올해로 120년 되는 연길의 풍운력사를 견증하는 백년거리이다.

그런데 이번에 자치주 70돐 헌례공사의 ‘넘버원’으로 해볕을 볼 줄 알았던 국자가 백년거리의 복원개조가 뒤전으로 밀리웠다. 물론 국자가의 애단로 북쪽 8채 건물이 ‘정품거리 경관승격공사’에 편입됐다고 하나 그것은 거론돼 온 국자가 복원개조와는 전혀 성격이 틀린 도료착색의 ‘미화공사’에 불과했다.

5년 전 연길시는 ‘역사문맥 발굴, 연길기억 찾기’ 문화캠페인을 벌리여 ‘문화풍경유적지’ 12곳을 선정한 적이 있다. 현장답사와 시민참여, 매체공모로 추천된 169곳 후보명단에서 엄선된 유적지였다. 그 가운데서 국자가 ‘백년거리’는 단연 ‘문화풍경유적지’ 제1호 반렬에 올랐다. 필자는 당시 본지 칼럼에서 이 캠페인의 발상을 절찬한 바 있다. 하지만 그번 ‘연길기억 찾기’ 문화캠페인은 다만 ‘기억찾기’에 머무르는 아쉬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필자는 ‘백년거리’가 복원과 재건으로 이어졌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가 하는 유감을 그냥 안고 있었는데 이번 자치주 70돐 헌례공사에서도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오늘날 연길 국자가에서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견증하는 ‘백년거리’와 얽힌 그 어떤 맥박과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다. 타지방의 관광객들은 물론이고 연길시의 상당 시민들한테도 ‘국자가’는 낯선 호칭일 뿐이다. 시민들이 자기 고향 력사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의무감은 ‘알게 하는’ 정부의 대책 마련으로 보완돼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국자가의 복원이 중요시돼야 하는 리유이다.

 우선 국자가의 복원과 재건의 좌표에 대한 옳바른 이념이 선행돼야 한다. “도로 량켠의 기성 건물에 청나라 때 분위기에 걸맞는 자홍색, 재회색 페인트칠을 한다 해서 옛 거리가 부활되는 게 아니다. 무대 세트장이 아니라 인간 삶의 특이한 력사공간을 조성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복원의 함의를 리해해야 한다. 국자가를 청나라말 사회풍토와 인정세태가 철철 흐르는 여러 민족 삶의 체험공간으로 만듦에 있어서 적재적소의 부지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필자: <연길기억 찾기 발상론>)

국자가라 하면 국자교부터 북대까지의 긴 구간을 떠올린다. 이 긴 구간을 옛 국자가로 복원시킨다는 것은 무리이고 역사시각과 현대도시 건설 차원에서 보더라도 비과학적이고 무의미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120년 전 연길청을 중심으로 무간국, 세무국, 전신국 등 ‘국’ 자가 붙은 기관들이 들어앉으면서 국자가라 부르게 되였다면 그 당시 무간총국의 옛터인 원 해방로상점이 자리잡은 보행거리 입구에서 동쪽으로 연길청 청사의 옛터(지금의 진학소학교)까지의 보행거리 전 구간만을 국자가 복원, 재건의 목표로 조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말해 이 구간은 국자가의 옛 심장부이고 이미 보행거리로 꾸며져있으며 전 구간이 길지않아 복원개조에는 제격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연길 도심과도 린접해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 수도의 중심지 정양문성루 앞 전문(前门)거리에 재현된 명, 청조 때의 고풍스런 옛거리나 한국 서울 종로의 인사동 보행거리를 보더라도 모두 도심에서 짧은 거리를 선택하여 ‘옛날옛적’의 삶의 형태를 복원시킴으로써 근처의 현대거리와의 력사적인 만남, 미래지향적인 도시 리념과 고전민속적인 도회지 추억이 잘 어울린 조화로움을 선물하고 있다.

역사는 인간의 기억 우에 시간에 의해 씌여진 전설시라고 말한다. 도시력사문맥은 도시 성격을 형성하고 루적하는 문화유전자라고 할 수 있다. 한 도시의 특성이 생태, 력사, 전통, 문화에 힘입은 자연스런 신장으로 이뤄진다고 할 때 ‘백년거리’ 국자가 가 담고 있는 유구한 ‘생태, 력사, 전통, 문화’ 콘텐츠를 잘 발굴하여 복원시키는 것은 연길의 품위를 전격 업그레이드시키는 명지한 대안이 될 것이다.

연변 역사의 축소판인 연길 국자가 옛 거리 복원의 중심에는 ‘인문’이 부각되어야 한다.

150년 전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온 조선족들이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내지에서 ‘촹꽌뚱(闯关东)’한 한족 및 기타 민족들과 어깨 겯고 공동으로 개척한 력사가 ‘백년거리’에 고즈넉히 배여있다. 파란만장한 세월 정권교체를 수없이 겪고 수난의 년대를 함께 하면서 중화민족 운명공동체의 조선족과 한족 및 기타 민족들은 서로를 ‘싼뚱빵즈(山东棒子)’, ‘꼬리빵즈(高丽棒子)’로 무람없이 호칭하며 그야말로 ‘미운 정, 고운 정’을 다하면서 형제처럼 살아왔다.

조선반도 이주민과 산동반도 이주민들이 ‘백년거리’에서의 숙명적 만남은 이 지역 주어진 자연풍토에 따른 상호 포용으로 점철되게 하면서 새로운 탈 반도 연변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양상을 낳게 하였다. 여기에 연변의 특수한 매력이 있다.

 ‘백년거리’ 국자가 복원은 연변 부흥의 필연적 추세라고 생각한다. 연길 도시발전 방향이 어느 쪽으로 가닥을 잡던 ‘백년거리’ 국자가 복원은 핵심의제로 다뤄져야 한다. 백여년 전 산동반도 이주민과 조선반도 이주민들이 피와 땀으로 함께 개척한 삶의 공간을 완벽하게 복원시키는 것은 우리의 백여년 력사에 책임지는 장엄한 공사이면서 동시에 중화민족 운명공동체 의식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향후 려정의 영원한 교과서가 되지 않을가?

 ‘백년거리’ 국자가, 가슴 뭉클한 120년 전 력사현장이 복원될 그날을 기대해본다.

연변일보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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