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호웅 연변대학교 교수

우리 문단에서는 리원길, 정세봉, 박선석 선생을 두고 “농민작가”라고 부르는 이들도 더러 있다. 정세봉, 박선석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원길 선생 자신은 별로 수긍하는 것 같지 않다. 나도 그렇다. 비록 매하구 시골에서 자랐지만 20대 중반에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북대황에 가서 단련을 받다가 고향에 돌아가 중학교 부교장을 지냈고 1978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한 뒤 첫 패로 중앙민족대학 연구생으로 되고 북경대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중앙민족대학 강사로 교편을 잡다가 연변으로 나와 연변작가협회 전직작가 겸 부주석으로 일했다. 그후로는 출판사 부총편을 거쳐 중앙민족대학에 도로 가서 교편을 잡았다. 대학교 교수로 정년을 했으니 “농민작가”라 한다면 좀 어페가 아닐가? 

아무튼 원길 선생은 농촌과 농민들을 사랑한다. 또한 전반기 그의 소설의 배경은 농촌이요, 그의 주인공들은 다 무지렁이 같은 순박한 농민들이다. 특히 이러한 배경과 사건, 성격들을 통한 그의 소설의 기본 주제는 어디까지나 민본사상, 요즘 말로 한다면 이인위본(以人为本)의 사상이다. 원길 선생은 총명하나 꾀를 부리지 않고 밤 새도록 말해도 끝이 없는 말장수이지만 제 자랑을 하거나 허세를 부릴 줄 모른다. 웬만한 벼슬은 다 했지만 위인이 좀 어수룩하고 우직하다. 술은 즐겨서 마시는 게 아니라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아서 마시는 것 같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낚시질이다. 연길에 오면 호형호제하는 리성권 사장과 강으로, 호수로 나가서 허구한 세월 강태공 낚시질을 한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이 잡은 고기를 맛본 적 없기 때문에 "강태공 낚시질"이라 한다. 잡은 고기로 한 번 근사하게 지지고 볶고 해서 대접한다면 진짜 낚시군으로 모시고 한 수 배우겠지만.

우리 광주 김씨 형제들은 원길 선생의 안팎을 거의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왜냐하면 우리 큰형 봉웅과 원길 선생는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공부할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원길 선생은 연길에 있을 때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왔고 우리 집안의 일이라면 대소사를 불문하고 꼭꼭 참가해 부조를 하고 도움을 주었다. 한편 우리 큰형은 1943년 생으로서 원길 선생보다는 나이도, 학년도 한해 선배인지라 원길 선생을 각별히 아끼고 좋아했다. 큰형은 늘 우리 동생들을 앉혀놓고
“원길이는 천재야. 공부도 전 학년에서 으뜸이고 조선어와 한어를 다 얼음에 박 밀듯 한단 말이야. 이제 두고 봐, 원길이가 큰일을 칠 거야! 동생들도 원길이의 독서력과 글재주는 배워야 해.”

그래서 우리 큰형은 가족의 호적을 북경에 붙이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원길 선생을 연변으로 불러들였고 그의 처녀작 <다시 찾은 청춘>의 산파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일명경인(一鸣惊人)이라고 한 번 울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는 말도 있지만 원길 선생이 우리 문단에 큰 충격을 준 것은 아마도 1980년 《연변문예》에 <백성의 마음>이라는 긴 단편을 발표한 일이라 하겠다. 그 무렵 《연변문예》 소설편집으로 한수동이라는 어른이 계셨는데 원길 선생이 투고한 <백성의 마음>을 읽어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리원길"이라고 그야말로 초아침 장에 보지도 못하던 사람인데 소설적 언어가 일품이 아닌가. 재미있는 별명과 구수한 비유로 풍성하고 성격들이 하나같이 살아 움직였던 것이다. 그때는 김학철 선생도 금방 복권이 되여 주로 <항전별곡>과 같은 회상기를 쓰던 때라 한수동 선생은 한 무명작가의 작품에 그만 혼백을 빼앗긴 나머지 여기저기 전화를 걸면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우리 문단에 리기영이 태여났소, 리기영이!” 

리기영은 1930년대 조선 프로문학의 기수요, <민촌>, <서화>, 《고향》, 《땅》, 《두만강》과 같은 소설로 조선 현대문학을 빛낸 언어의 거장이요, 농촌소설의 명작들을 속속 펴낸 문호가 아닌가. 기실 원길 선생은 리기영의 문학은 더 말할 것 없고 천세봉, 석윤기의 소설도 많이 읽은 것 같았다. 지금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원길 선생네 댁에 놀러갔을 때 보니까 거의 너덜너덜해서 페기처분해야 할 천세봉의 《석개울의 새봄》과 석윤기의 《시대의 탄생》과 같은 작품들이 허름한 책장에 얹혀있었다. 김학철 선생이 벽초 홍명희의 《림꺽정》을 수없이 읽었다면 리원길 선생은 리기영을 비롯한 조선 현대소설이라는 “곰탕”을 그 뼈를 우려 국물까지 다 마신 것 같았다. 물론 옛이야기들을 들려준 어머님의 영향이나 주로 평안도방언을 구사하는 일가친척들의 언어적 영향도 컸겠지만 원길 선생의 폭넓은 독서력이 “큰일”을 친 것 같다.

말 한 마디 천량 빚 갚는다고 했던가. 여기서 우리 형제가, 특히 관웅형과 내가 원길 선생의 사랑과 도움을 톡톡히 받은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 1990년대 초반 원길 선생과 우리 큰형은 한국 동광출판사와 신원문화사의 부탁을 받고 《화산론검(华山论剑)》이요, 《옹정검협도(雍正剑侠图)》요 하는 대하무협소설들을 번역하였는데 관웅형과 나도 끼워주었다. "4인방번역소조"인데 원길 형이 조장이요, 우리 큰형이 부조장인 셈이였다. 200자 원고지 한 매 당 10원씩 번역료를 받은 것 같은데 하루에 30매 정도 번역하면 300원은 벌 수 있었다. 그 무렵 300원이면 우리 강사나부랭이들의 반 달 로임에 맞먹는 큰돈이다. 아무튼 두 분의 덕에 어려운 박사과정을 마치면서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었고 또한 그 번역작업을 통해 우리 큰형과 원길 선생의 문장력과 번역기교를 배울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몰랐던 때라 원고지에 육필로 번역해놓으면 두 어른이 수정을 했고 그걸 다시 보면 큰 공부가 되였다. 특히 한국 쪽에서 번역료가 오면 일한만큼 나누어주었고 원길 선생네 댁이나 큰형네 댁에서 “생활개선”을 하는데 특히 원길 선생네 댁은 음식도 좋거니와 형수님의 말대접이 좋았다. 형수님은 종가집 며느리처럼 씨억씨억한 성품인데 우리 큰형을 반드시 아주버님이라 불렀고 관웅형과 나를 두고는 생원이라고 불렀다. 생원이란 조선시대에 소과의 하나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던가. 광웅형과 나는 그 호칭이 좀 촌스러우면서도 정답게 느껴졌다. 

형수님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귀뺨 하나 맞을 셈 하고 원길 선생과 형수님의 련애사를 만천하에 공개해야 하겠다. 물론 우리 큰형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그 진위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요즘 병상에 누워있는 연변대학의 최건 교수(이들은 모두 북대황시절의 절친한 친구들이다)에게 “원길 선생에 관한 재미나는 일화 좀 없어요?” 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원길이의 약혼 이야기가 압권이지!” 하고 아래와 같은 문자를 보내왔다.

“원길이는 문혁시기 연변군관회(延边军管会)의 파견으로 왕청주둔부대의 좌피지지 상황을 알아보러 왕청현으로 갔다가 당시 고중 재학중인 지금의 부인을 알게 되였고 그 후 련애도 별로 못해 보고 급히 그녀와 약혼을 하고 북대황군대농장에 가게 되였다네. 그녀의 부친은 당시 석현제지공장의 8급로동자였는데 일제때 세운 초대형 굴뚝을 옮기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네. 북대황 부대농장에 있을 때 우린 원길이가 갖고 온 처녀의 사진을 보았어. 동실동실한 얼굴이 꽤나 예쁘게 생겼더군. 그런데 어느 날 원길이가 나와 봉웅이를 불러놓고 장인한테서 온 편지를 보여주면서 조언을 구했네. 원길이가 무슨 쏙새바람이 불었는지 처녀한테 그만두자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던 모양이야. 이 일을 알고 그녀의 부친이 노발대발해서 편지를 보내왔지 뭐야. ‘원길이, 너두 대학생이였더냐? 한 혓바닥으로 몇 가지 소리를 하는 거냐?’ 하고 부대농장에 찾아오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단 말이야. 우린 그 편지를 보고 아연실색했지. 로동자 출신이요, 초대형 굴뚝도 성냥가치 옮기듯 하는 그 어르신이 우리 농장으로 찾아올 게 불 보듯 뻔했거든. 우리는 원길에게 사과의 편지를 써서 보내라고 충고했지. 원길이도 안 되겠는지 그 처녀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회과자신을 하겠다는 편지를 써서 보냈던 모양이야. 원길이의 련애풍파는 이로써 막을 내렸다네.”

생전에 우리 큰형도 이 일을 여러 번 재미있게 이야기한 적 있고 최건 교수도 이를 증언했으니 원길 선생은 이 한 단락의 련애풍파를 시인해야 할 것이다. 원길 선생이 시인하건 말건 그때 형수님과 갈라졌더라면 얼마나 큰 랑패를 보았을가? 지어는 리원길이라는 작가가 존재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간다. 두 딸에 아들 하나를 보란듯이 낳고 키워주지 않았던가. 심지어 중년에 상처한 시형네 딸자식까지 맡아서 시집을 보내주고 나이 어린 시동생을 키워 장가를 보내고 시아버님이 천수를 다 누릴 때까지 효성을 다 한 게 누구였던가. 낚시질은 좀 하는 줄로 알지만 집안 일은 별로 안 하는 골방샌님 같은 남편을 일구월심 보살펴준 게 누구였던가. 원길 선생도 이를 알고 있는 것 같다. 꽤나 주견이 세서, 못된 놈에게는 곁도 주지 않는 원길 형님이지만 형수님 앞에서는 꾸뻑 죽어지내는 시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길 선생에게는 미스터리가 또 하나 있다. 1995년 <직녀야 니나 내려다고!>란 단편소설을 발표한 후부터 2017년까지 20여년 간은 "리원길 문학의 공백기"라는 점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추측이 란무한다. 매하구를 떠난 후 농촌소재를 더는 다를 수 없고 그렇다고 도시소재는 아직 익숙하지 못해서라고도 하고, 대학 교수로서 이젠 교과서나 연구론문 쓰기에 바빠서 창작을 할 틈이 없었다고도 한다. 실은 이 20여 년 간 원길 선생은 하루도 쉬지 않고 중국 고전의 번역에 매진해 왔음을 시중에 나오는 변역작품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차피 다 글쓰기인데 왜 창작을 접고 번역에만 매진했을가? 3년 전에야 나는 그 비밀을 알 수 있었다.

원길 선생네 내외가 여름이면 피서 삼아 무더운 북경을 떠나 연길에 있는 큰 딸네 집에 와서 달포씩 지내는 줄 아는지라 연변대학에 오셔서 중조번역에 관한 특강을 좀 해줍시사 하고 부탁을 했다. 요즘 번역에 관한 리론이 무성하지만 번역이야 원문에 대한 충실성과 역문에 대한 순통성이 기본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주로 당신이 《삼국연의》, 《수호전》, 《홍루몽》과 같은 중국의 고전명작을 번역하면서 느낀 바를 이야기하는데 한어와 조선어의 차이, 특히 한어와 조선어의 어순 차이 등에 대한 견해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였다. 그날 따라 원길 선생의 목소리가 갈앉아서 좀 안타까웠지만 리론과 실천이 똑 부러지게 들어맞는 소중한 강연고를 남기고 가서 지금도 나는 가끔 이 그 강연고를 이리저리 재단해서 쓰기도 한다. 그날 연변대학 측에서 근사한 만찬을 준비했지만 원길 선생은 다른 요긴한 일이 있다고 해서 내가 연변대학 앞에 있는 랭면집에 모시고 가서 점심식사를 간단히 대접하게 되였다. 그 자리에서 내가
“똑같은 글쓰기인데 왜 소설창작은 하지 않고 번역만 하셨수?"
하고 물으매 원길 선생은 젓가락으로 집었던 소고기 편육을 든 채로 "이 아우가 뻔히 알면서 묻네그려. 자네 형수와 나는 말이야. 좀 남아선호사상이 있어서 아들 하나 보고자 자식 셋을 낳았어. 큰딸은 의과대를 나와 의사 노릇을 하고 연길에 살고 있으니 별문제야. 허지만 북경에 데리고 간 작은 딸과 아들놈에게는 시집, 장가를 보내고 아파트를 사주어야 할 게 아니야. 창작원고료는 몇 푼 안 나오지 그래서 번역을 했지. 아마 줄잡아 60권은 번역했을 거야. 그래서 우리 내외가 사는 아파트를 사고 나서 작은 딸과 아들놈에게 각각 아파트 하나씩 사준 거야. 이젠 알겠지!"

나는 그제야 깨도가 되어 원길 형님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가무잡잡한 얼굴이 한결 겉늙어 보였다. 하지만 유순하면서도 예지로 빛나는 두 눈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안경너머로 나를 뻐금히 건너다보더니 소처럼 씩- 웃었다. 나는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아, 이게 오늘의 지식인 또는 소설가들의 모습인가! 20여 년 간 그 뛰여난 총기와 글재주를 아파트 세 채와 바꾸지 않으면 안 되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가난에 허덕이는 지식인의 모습을 그린 현진건의 단편소설 <빈처>에 나오는 남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최근에 원길 선생을 뵌 것은 2019년 5월 초이다. 한국문학번역원과 연변대학 조선문학연구소 공동 주최로 <기억하는 문학: 조선족문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학술모임과 중한작가대담을 하게 되였는데 워낙 참가하기로 했던 중앙민족대학 오상순 교수가 갑자기 건강이 여의치 않아 결석을 하게 된 것이다. 북경지역의 중량급 인사를 초청해야 하는 우리 주최 측으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리광일 소장이 료녕성에 강의 차 나가 있는 나에게 "이거 죄송합니다만 리원길 선생님을 모실 수 없을가요? 좀 알아봐 주세요." 하고 전화를 걸어왔다. 울며 겨자 먹기라고 할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라 할가, 나는 조심조심 원길 선생에게 전화를 드렸다.
"알았어. 거 오상순 선생 대신이든 뭐든 다 좋아. 나야 연길에 가서 아우랑 보고 싶은 여러 친구들 얼굴을 보는 게 중요하지. 꿩 대신 닭이든 뭐든 다 좋아!"

원길 선생이 회의에 참가했고 사흘 동안 사회를 보고 토론을 하고 한국의 작가들과 대담을 하면서 즐겁게 보냈음은 더 말할 것 없다. 농부처럼 틀거지를 부릴 줄 모르고 상하좌우 모든 이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원길 선생, 그 진솔하고 겸허한 성품이 원길 선생의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라는 점을 알게 되였다. 
글이 길어지니 북경으로 돌아간 후, 5월 10일 나에게 보내온 편지로 이 글을 끝맺기로 하자.

호웅 아우님:
전일 아우님의 덕으로 의미 있는 학술회에 참석하여 많은 좋은 얘기들을 들었고 또 최상등 대접까지 받아 대단히 감사하오다.
졸작 《치열(炽烈)》의 제1부인 《역관집 두 형제》 를 보내니 귀중한 시간이지만 할애하여 좀 자세히 심열해 주기 바라오. 상편은 역관집의 형이며 이 소설의 주인공의 하나인 경철이의 일이고 하편은 역관집의 아우이며 이 소설의 다른 한 주인공인 경식의 이야기요. 형의 이야기는 주로 동북해방전쟁에서의 조선족백성들의 이야기이고 아우의 일은 주로 동북해방전쟁시기 남만 조선족부대 리홍광지대의 이야기요.
신체적 여건이 되면 이 소설은 장차 3부작으로 쓸 계획이오. 제1부 《역관집 두 형제》는 1945년 8.15부터 1946년 2월 통화반혁명폭란진압까지이며, 제2부 《버드내사람들》은 1946년 봄부터 1946년 겨울까지 토비숙청을 비롯한 근거지 건립에서의 조선족 군민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이며, 제3부 《만발하는 산화》는 1946년 11월부터 시작된 "사보림강(四保临江)"전역으로부터 우리 군의 대반격으로 매하구해방까지의 리홍광지대와 통화지구 조선족 인민들의 가렬처절한 전투와 비장한 희생을 담으려고 하오. 각 부의 내용은 상대적인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련관되게 할 예정이오.

늘그막에 여러 아우님들의 충고도 불고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접었던 창작의 필을 다시 드는 것이 무리한 일이겠지만, 그리고 천금만금 소중한 아우님의 시간을 할애시키려는 것이 렴치없는 일이지만 아우님의 혜안으로 한번 보면 글의 약점이나 결점이 단번에 드러날 수 있다고 믿어지기에 작품을 진일보 완성시키려는 욕심으로 이런 어려운 부탁을 드리오. 중이 제 대가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지 않소? 더우기 생활의 론리나 서사시점의 변동이 합리한지 보아주기 바라오.
작품이 작품 같지 않으면 이제라도 그만 둘 각오는 하고 있으니 기탄없이 지적해주기 바라오.
제1부의 초고와 제3부까지의 자세한 제강과 간략한 내용소개는 후에 다 작성되면 보내겠소. 
아무쪼록 수고 좀 해주시오.
신체건강과 가내제절의 일안을 기원하오. 

그런데 후에 듣자니 신체상황 등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당분간은 장편소설의 총제목 《치열》을 쓰지 않고 각부의 단독 제목으로, 이를테면 장편소설 《역관집 두 형제》 식으로 발표하고 후에 3부가 모두 완성되여 책이 나가면 총제목을 달기로 편집부와 의논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20년 간의 공백기를 넘어, 아니 번역을 통한 언어적 재충전을 거쳐 내놓은 력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독자들과 더불어 꼼꼼히 읽어보고자 한다. 원길 선생 특유의 감칠맛 나는 소설적 언어와 해학과 유머, 정제된 구성의 미, 특히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여러 성격들이 벌써부터 우리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자, 그럼 우리 모두 원길 선생의 최신 대작 《역관집 두 형제》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장백산》2019년 제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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