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 약력 : 심양 출생. 동북사범대학 졸업. 전 심양시 예술사범학교 및 료녕성조선족사범학교 교사. 현재 일본 코리아국제학원 교사. 료녕성조선족문학회회원. 수필, 시 다수 발표.
최진실 약력 : 심양 출생. 동북사범대학 졸업. 전 심양시 예술사범학교 및 료녕성조선족사범학교 교사. 현재 일본 코리아국제학원 교사. 료녕성조선족문학회회원. 수필, 시 다수 발표.

울긋불긋 국화꽃이 여기저기 피는 가을이 오면 나는 하늘나라에 간지 30여 년이나 할머니 생각을 불쑥불쑥 떠올린다. 곱슬곱슬한 꽃잎을 오무리고 동그랗게 피는 하얀 국화꽃은 우리 할머니 머리 정교하게 동그랗게 틀어올린 모습과 너무도 닮아 할머니가 하얀 국화꽃으로 환생하지 않았나 싶다. 어찌 그뿐인가, 오래오래 풍기는 국화꽃의 그윽한 향기는 나로하여금 오랜 세월이 흘러도 맘속 깊이 풍기며 가셔지지 않는 할머니 향기를 연상케 한다.

할머니는 13세에 경남 거창군 와락면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에 오셨다. 어린 나이에 수영할줄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른들을 따라 깊이도 가늠할수 없는 푸른 출렁이는 압록강을 건네느라 얼마나 공포에 질렸겠는가 짐작할수는 있지만 할머니가 그토록 평생을 두고 압록강 건느던 얘기를 하는데는 다른 까닭이 있었다. 정녕 할머니가 그때의 기억을 지우지 못한것은 눈앞에 벌어진 다른 하나의 정경이였다. 압록강 건늘때 다른 가족도 있었는데 손에 손잡고 강을 건느다 가장 변두리에 있던 17세되는 딸이 다른 한손에 보따리가 떠나려가는걸 잡겠다고 엉겁결에 잡았던 어머니 손을 놓치는 바람에 거센 물살에 떠나려가 버리고말았다 한다. "후유, 꽃다운 나이에 그렇게 부모와 생이별을 당하다니, 어디에서 살고는 있을가?" 할머니는 가끔씩 넋을 잃고 나직히 곧잘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13세에 만주로 간 박원례 할머니
13세에 만주로 간 박원례 할머니

열세살에 중국에 오셔서 이른다섯에 소천하셨으니 중국이란 땅에서 세월이 훨씬 길지만 할머니는 태여난 모국의 고향을 꿈에도 그렸던것 같았다. 70년대 초반기 중국의 시골에서는 어르신들의 생신 잔치를 집에서 하였다. 할머니 생신때는 언제나 동네 어르신들을 집에 모셔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는데 그때면 어느 누군가가 자기 집에 오신 년세가 비슷한 손님을 함께 모시고 오셨다. 할머니는 생면부지인 손님의 손을 잡으며 " 오셨어요, 고향이 어디죠?" 라고 하며 같은 인사말을 하며 반겨 주셨다. 만약 손님의 고향이 같은 경남이거나 경남과 가까운 경북이면 할머니는 몇십년만에 친인을 만난것처럼 아주 기뻐하셨다. 어르신들의 생신잔치는 그야말로 지금의 장기자랑대회와 같았다. 판소리로 <심청전> <춘향전>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강수> <아리랑> 민요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런 기회를 빌어 옛날 일세대 어르신들이 고향에 대한 회포의 정을 한껏 나누었다었다는걸 뒤늦게야 깨닫게 되였다.

할머니는 어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조선족만 사는 동네에 살았지만 중국어 실력이 남보다 뛰여나게 좋았고 중국인 벗을 사귀기도 즐겼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2리길 떨어진 곳에 한족들이 살았는데 한족들은 자주 우리 동네 상점에 와서 쇼핑을 했었다. 할머니는 오고가는 그들을 집에 불러 쉬여 가라 하였고 마른 목을 축이라고 마실 물도 주셨다. 한족인은 그런 할머니가 너무 따뜻해서 고맙다며 설마다 우리집에 인사 하러 오셨고 할머니를 큰엄마라 부르며 무척 가깝게 지냈다.

할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심성이 비단결처럼 고우셨던 것 같았다. 우리 사람들은 별로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할머니만은 집을 잃고 돌아다니는 고양이에게 불쌍하다고 밥을 주고 우리집 고양이로 키웠다. 지금은 하얀 털을 가진 이쁜 고양이들이 많지만 그때는 얼룩줄무늬의 호랑이새끼 같은 고양이 뿐이여서 보기만해도 흉해보였다. 특히 나는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는 고양이가 언짢았고 고양이 뱃속에서 나는 꼬르륵꼬르록 하는 소리도 무척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나는 고양이가 내곁에 다가 오기만한면 "저리 비켜! "하며 고함을 질렀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못마땅히 여겼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사람뿐이 아니란다. 동물이 잉태하고 출산하고 어미가 새끼를 품는걸 보면 할미는 사람이 잘난척하면 안되고 동물도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는 어린 내가 알아듣던말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다. 학교 문앞도 가보지 못하고 간신히 야학공부를 해서 한글을 뜯어볼 있었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어떻게 이런 철리가 깊이 담긴 얘기를 할수 있었는지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가운데, 1911년 만주로 간 증조부 최종대 할아버지와 증조모. 앞줄 제일 오른 쪽이 부친, 그리고 그 뒤가 11살에 아버지 최종대를 따라 만주 간 최관호 할아버지. 앞줄 왼쪽이 고모, 그 뒤가 할머니.

생각해보면 우리 할머니는 디아스포라의 삶의 본보기였다. 기나긴 세월 향수에 젖은 달랠길 없었지만 생사고비를 넘기며 압록강 건너 땅이기에 더욱 열심히 살아야 했고 다른 민족과도 사이좋게 지내야 했다는걸 할머니는 삶의 일상을 통해 나에게 가르쳐 주셨다. 지구에 공존 공생하는 모든 종족과 심지어 다른 동물 생물과도 어울리며 살아야 한다는 평화주의 상생의 이념은 현시대 글로벌시대의 시대정신이라 할수 있는걸 할머니는 삼십여년전 혹은 일찌기 삶을 통해 이미 터득했었다.

너도나도 앞다투어 피는 봄꽃과 달리 뭇꽃들이 지는 가을에 조용하고 느긋하게 피는 국하꽃, 모양 내음을 음미하면서 나는 오늘 할머니가 나의 삶에 오래도록 퓽겨왔던 향기도 다시 흠향해 본다.

국화꽃 할머니, 나는 우리 할머니를 기꺼이 자랑스럽게 그렇게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할머니의 그윽한 향기는 국화꽃 향기처럼 오래오래 풍기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 아마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는 정녕 가셔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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