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정룡 다가치포럼 대표

들어가면서

김정룡 다가치포럼 대표
김정룡 다가치포럼 대표

‘무지개를 수놓는 사람들’은 책 이름이다. 이 책은 한중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조선족기업가 30인의 성공스토리를 담은 귀중한 자료집이다. 필자는 이 책을 한국에서 출판하는데 교정을 보고 최종 검열을 맡아 한국출판사에 완성고를 교부하는 전반 과정을 거쳐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 내용을 자세하게 숙지하는 행운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어 굉장한 영광이었다.

본문은 때마침 필자가 대표를 맡고 있는 ‘多가치포럼’이 한중수교 30주년 특별기획 경제분야 포럼이 8월 26일 오후 개최하게 되어 <조선족기업가 30인의 취재실록을 통해 바라본 한중관계>라는 주제로 작성한 사례발표문이다.

‘무지개를 수놓는 사람들’은 19명의 조선족 기자들이 동원되어 인터뷰를 맡고 원고를 작성하여 이뤄진 책이다. 필자는 본 발표문에서 기자들의 서술을 많이 인용하였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어느덧 중한 수교 30년이라고 한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벌써 세 번이나 변한 세월! 그동안 대체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 격변의 현장을 열심히 경작해온 주역들을 만나보면서 어느 정도 답안을 찾을 수가 있었다. 모든 기사 작성을 끝내던 날, ‘시대가 영웅을 낳고 영웅이 시대를 짓는다!’는 어느 선인의 말씀이 귓가에 메아리쳐 가슴을 크게 울렁거리기도 했다. 산 넘어 바다건너 천리타향 날아온 일편단심 민들레 홀씨처럼 중한 수교 30년이라는 연리지(連理枝)에 노랗게 행복의 꽃송이를 피워 올리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신국철 기자의 취재소감 일부)”

대저 중국조선족기업가들이 어떻게 격변의 시대를 경작해왔는지?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례들을 통해 만나 보자.

사례1. 1980년대 후반기부터 베이징조선족사회는 한국과의 교류가 있었다.

중국 정부가 한국인들에게 관광비자를 발급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라고 한다면 한국인들의 중국으로의 비즈니스 출장은 사실 더 오래전인 1980년대 말부터 이미 민간차원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 외교부는 날로 늘어나는 민간교류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베이징의 관련 기관으로부터 통번역 인재들을 긴급 선발하여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의진 회장이다.

1987년 베이징 중앙번역국에서 근무하던 김의진은 외교부 아시아국(洲司)의 호출을 받고 한국인 관광통역 교육을 받게 되었다.

"외교부가 직접 여행안내 통역원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게 된 것은 당시 양국이 미 수교국가인 여러 특수성에 비롯된 것이다. 이런 사례는 중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드물 것이다." 김의진의 말이다. 그는 “그 교육과정에서 한국과의 민간교류의 중요성을 터득하였으며 '관광통역원은 민간외교관’이라는 대목을 가슴깊이 새겼다.”고 한다.

그때 교육받고 한국관광객을 맞이해 좋은 인상을 남긴 조선족들은 수도 각 국영여행사에 스카웃되어 ‘철밥통’을 버리고 하해(下海)하여 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한국관광객이 중국여행붐이 일자 새로운 관광 상품 개발이 필요했다. 김의진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장쟈제(張家界)라는 관광 상품을 개발하여 한국관광객을 유치해 큰 성공을 거뒀다.

김의진은 베이징조선족기업가협회 초대회장, 중국아주경제발전 협회 상무 부회장, 중앙민족대학 특별 초빙교수, 민족교육 발전기금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2018년 대한민국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사례2.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베이징조선족사회를 변화시켜

사람들은 흔히 한중교류 시점을 1992년 8월 24일 양국 간 수교를 계기로 삼는다. 정치, 경제, 문화 제반 분야에서의 교류를 보면 맞는 것이지만 베이징조선족사회와 한국과의 ‘교류’는 그보다 2년 전인 1990년 제11회 베이징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필자는 이 변화를 한국 덕분에 베이징조선족사회가 ‘대지진’을 맞이했을 만큼 천지개벽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전까지 극히 소수를 제외한 이들은 자신의 업무에 충실했을 뿐 다른 분야에 눈길을 팔 객관적인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 쉽게 말하자면 이들은 대외적으로 다른 길을, 특히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듯 베이징조선족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바로 아시안게임이었다.

1990년 제11회 베이징아시안게임에 한국 스포츠 각 종목 선수와 코치 및 의료진은 물론 수많은 기자단과 정부 관료들이 대거 중국을 방문하였고 게임관람 및 중국관광지 여행을 목적을 위해 중국에 온 한국관광객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 많은 한국인의 통역을 맡으려면 베이징 조선족엘리트를 전부 동원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온 두 인물을 소개해보자.

 

인물1. 중국국제여행사 한국처 처장 이주원

이주원은 창춘에서 음악인 가정에서 출생하여 중앙민족학원 음악부를 졸업하고 중앙민족가무단에서 트럼본 연주자로 활약했다. 세속의 때를 묻히지 않고 음악이란 외길을 걷던 그에게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이었다.

그때 한국 응원단의 통역안내를 맡을 사람이 필요하지만 베이징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제한되어 있었다. 이주원은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중국국제여행사 총사의 요청을 받고 난생 처음으로 통역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젊은 이주원은 통역 업무 자체보다는 아시안게임을 공짜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더 가슴이 부풀었다. 아시안게임 입장권 가격은 사회초년생인 이주원의 월급에 거의 맞먹는 액수였기 때문이다.

그 번의 통역 안내가 이주원의 인생행로를 바꾸어놓을 줄은 자신도 몰랐던 것이다. 그때 중국에 여행 왔던 한국 사람들이 이주원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던지라 그 후 중국에 들어오는 때마다 국제여행사를 통해 그를 찾았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국제여행사에서는 이주원에게 스카웃 제의를 하게 되었다.

젊은 그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이란 외길만을 걸어온 그에게 여행사 업무는 도전이었고 한편 기회이기도 했을 터였다. 그러나 중앙민족가무단이라는 많은 예술인의 전당인 소중한 직장을 포기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은사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진심으로 제자의 진로에 대해 같이 고민을 해주셨던 은사님은 세계 글로벌화가 진행 중에 있고 중국도 점차 대외개방을 확대해 갈 것이니 여행업은 미래가 밝은 직종이 될 것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이듬해인 1991년 이주원은 중국국제여행사 한국처 처장으로 직을 옮겼다. 이주원은 중국에서 한국관광객을 맞이하는 업무 외에 중국관광객을 한국에 송출하는 인바운드 업무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이주원은 한국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중국인을 모집했을 뿐만 아니라 안재욱 팬 단체관광, 스포츠행사 관람 여행단체 등 이벤트형 중국인관광객을 한국에 송출하였다.

이주원은 특히 MICE 관광객 모집에 심형을 기울였다. MICE(기업회의, 포상관광, 컨벤션, 전시의 네 분야를 통틀어 말하는 서비스 산업)은 일반 관광객에 비해 통상적으로 소비 수준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MICE관광단체 유치 시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훨씬 크다. 2004년부터 완메이(完美)일용품유한공사 직원 500여 명, 2006년에 중국인수(中寿) 임직원 680명, 2007년 타이캉인수(泰康人寿)임직원 1,200명, Novatis 제작회사 인센티브 단체 600명, 2006년과 2007년 베이징 현대자동차 대리점 고객, 시승운전요원 등 1,000명, 2009년 무한극(无限)일용품유한공사 임직원 1,800명, 2010년 완메이일용품유한공사 임직원 1,500명, 2011년에는 바오젠(保健)일용품유한공사 인센티브 단체 11,000명 등 상기의 8개 인센티브 단체 18,280명이 한국을 방문하여 소비한 금액은 393억 원(한국관광공사 발표)으로 통계되었다.

이주원은 2009한국관광공사 MICE 전문가 표창, 2010한국 제주도특별자치도 감사패, 2011아시아나항공 MICE 최고세일러상, 2015한국언론기자협회 <세계평화언론대상>, 2020한국관광공사 공로패를 수상했다.

 

인물2. 베이징금평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김연숙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어요. 저는 줄곧 저의 재능을 사회에 기부할 기회를 찾고 있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아시안게임의 한국일보 기자단의 통역 지원자 자격을 얻게 된 김 변호사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기자들에게 통번역 업무와 각종 비용처리 등 행정 업무를 전담하였다.

한국기자단을 위해 봉사하는 과정에 그들의 뛰어난 업무 실력과 프로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은 김 변호사는 이듬해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때는 중한 수교 전이라 그녀는 어렵게 친척방문 비자를 발급 받아 한국땅을 밟았다.

두 달 동안 한국에 체류하면서 수많은 한국 현지의 언론매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MBC방송사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귀국하면 한국기업이 중국 진출을 위한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겠다고 발표하였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한국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해 11월 베이징 변호사협회와 서울 변호사협회는 자매결연을 맺었다. 두 변호사협회의 교류과정에서 김 변호사의 활약은 빛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제6차 교류회에서 서울 변호사협회는 그녀에게 중한 양국의 법률교류를 상징하는 황금열쇠상과 감사패를 수여했다.

1994년 11월 19일, 김변호사는 동업자들과 함께 최초로 한국 관련 법률 업무에 초점을 맞추는 금평법률사무소를 출범하고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변호사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금평법률사무소는 설립 이래 한국 현대, 대우, 삼성,SK,LG 등 글로벌 기업들의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법률 기초를 마련해 주었으며 중국 투자와 무역에서 봉착하게 된 여러 가지 난제 해결은 물론 해외진출 컨설팅, 법률정책 연구, 공익활동, 법학교육 등 시대 변화에 따라 법률전문가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으로 그 역할을 확장해 명실상부 중한 양국에서 인정받는 최고 법률서비스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김 변호사는 그 동안 중국 내에서 생긴 분쟁 사건에서 ‘마늘 파동’과 같은 대형사건에서 한국 측 법률대리를 맡아 한국인들의 손실을 막아주는데 큰 기여를 했다.

“저는 그동안 법률이 허용한 범위에서 의뢰인의 권익을 최대로 보장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해 왔어요. 고객들이 아마 저의 이런 신념을 인정해 주고 신뢰해 주셨기 때문에 제가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김 변호사의 말이다.

 

사례3. 한국복장 수입으로부터 명브랜드 창출로 상장기업이 된 랑시그룹

랑시그룹 신동일 회장은 2000년 4월 중국 최고급 백화점인 베이징옌사백화점에 랑시브랜드 1호점을 오픈했다. 처음에는 주로 한국으로부터 여성복을 수입해다 팔았는데 랑시복장은 세련된 스타일과 우수한 품질로 대도시 고소득층 여성소비자들 중에서 인기도가 급상승했다. 랑시는 출시 3년 만에 이미 국내 동종업계의 명브랜드로 자리매김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매장을 전국 각지로 넓혀나갔다.

처음엔 한국복장 판매로부터 2004년부터 자체로 디자인하고 생산하는 업체로 거듭났고 2007년 랑시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2014년 신회장은 한국 아가방앤컴퍼니를 인수하였다. 랑시 브랜드는 발전과정에서 한국의 영향을 여러모로 받았으며 '한국특혜'를 톡톡히 누려왔다. 랑시그룹은 현재 사업분야가 크게 네 가지로 나뉘는데 앞에서 언급한 여성복과 영유아 영역 이외에 메디칼뷰티, 자산관리 등 방면에서도 한국 기업과 손잡고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으며 한국 관련 업무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랑시그룹은 조선족 기업가 중 몇 안 되는 상장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사례4. 한국식 건축문화를 중국에 도입해 성공한 인물

인물1. ‘루반상’()을 수상한 지린천우건설그룹 전규상 총재

‘루반상’()은 중국건축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되는 인물에게 수여하는 상인데 조선족 건축가가 이 상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묵직한 이 상을 받게 된 데는 한국건축문화 도입이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규상 총재는 1992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공대식이라는 기업인을 알게 되었다. 공자님의 후손이라고 소개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사실 양국의 민간교류는 오래전부터 있은 것이 아닌가?! 귀국 후 그분이 가정용보일러를 선물로 보내왔다. 연탄 보일러였지만 당시 옌벤에서는 구경할 수가 없는 '선진'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 보일러를 모델로 다량 생산해 옌벤의 가정집들에 보급했는데 크게 환영받았다. 지금 중국의 동서남북 거주문화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온돌 구들인 바닥난방도 그랬다. 전규상 총재가 첫 사람으로 한국의 재료(PVC 파이프)와 기술을 인입, 생산해 전국에 보급했다. 현재 중국의 바닥난방 기술표준은 죄다 옌벤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 1998년, 전국 자치주급 건축회사 중 최초로 중국건축계의 최고상인 ‘루반상(魯班狀)’을 획득한 대우대종호텔 역시 한국의 대우건설과 합작해 탄생시킨 걸작이다. 2004년, 한국유일설계사무소와 협력해 건설한 천우생태가원은 15만 제곱미터의 건축면적에 1,600세대가 입주하면서 도시인들의 새 거주문화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개인 기업을 운영해오는 동안 많은 한국기업인, 한국기업체와 합작하고 협력해 좋은 성과들을 거두었다.

전규상 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은 한국의 많은 선진적인 기술과 갈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비록 현재 중국이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이전처럼 한국에 대한 의존성이 많이 희석됐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 따라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인물2. 한국 온수관을 수입해 베이징에 온돌문화를 보급시킨 이주확

친환경이란 새로운 화두에 일찍 눈을 뜬 이주확은 회수가 가능한 건축자재에 남달리 신경 썼다. 그가 처음 시작한 품목은 온수관 시설이었다. 100% 회수가 가능한 친환경 소재였다. 북방 도시에서 고찰을 한 결과 중국의 온수관 시설은 매우 낙후한 상태였다. 그는 한국에서 수입한 시설로 건축재료온수파이프 등 관련된 제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베이징 시민들은 이런 ‘선진기술’에 대해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그때만 해도 특별한 기준이 없었고 시장 자체가 성숙되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온돌문화가 없는 중국인들에게 온수관 보일러는 바로 확 당기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기회에 양로원에 온수관 시설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어르신들은 관절 등 질환이 있어 무엇보다 따뜻한 바닥을 선호했던 것이다. 그런 어르신들에게 따뜻한 바닥난방시설은 그 무엇보다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체험이었다. 그렇게 입소문을 타서 3년 만에 온수관은 완전히 시장에서 히트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이주확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조선족이라서 이중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게 우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내에서 다른 민족보다 먼저 한국을 비롯한 외국에 나가보게 되었고 또 조금 발달한 나라의 상황을 보면서 눈을 떴으니까요.”

그가 베이징으로 와서 본격적으로 온수관 사업을 시작한 1998년은 특수한 해이기도 하였다. 그때 한국은 IMF가 터진 직후라 나라 경제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그때 마침 온수관 사업을 시작한 이주확 사장은 한국에서 자재들을 들여다가 국내에 판매함으로써 마진을 올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수출난으로 허덕이고 있는 한국 회사의 숨통도 틔워주게 되었다.

온수관 시설을 생산하면서 이주확은 조금씩 보온외벽재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때 생산하고 있는 외벽재 역시 친환경 제품으로 대리석과 똑같은 문양과 무게감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어 여러 가지 외관의 시각적 요구를 만족시켜 주었다. 베이하이건재유한회사에서 생산한 보온외벽은 단열층, 제습층, 방습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소음방지효과가 뛰어나고 특별한 기술 없이도 조립이 가능한 등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베이하이건재유한회사에서 생산한 외벽소재는 유럽, 한국, 일본 등 20여 개 국에 수출되었다. 회사 제품의 60%는 수출된다고 한다. 그만큼 해외에서도 경쟁력을 갖추었다는 얘기다. 국내 시장 개발에서도 꾸준한 성과를 올렸는데 현재까지 회사는 국가급 성급 프로젝트 20여개, 시장 프로젝트 400여개를 완수했다. 뿐만 아니라 국가 건설부로부터 과학기술프로젝트로 인정받았으며 동시에 유럽의 인증도 보유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사례5. 한국회사 직원으로부터 오너가 된 인물

인물1. 중국 패션시계 중심에 우뚝 선 박용남

중국 지린성 룽징시 지신태생인 박용남은 1988년 대학입시에서 낙방된 후 어머니가 재수하라고 챙겨 준 돈 700위안을 가지고 부모 몰래 선전행 기차에 올랐다. ‘큰물’에 가서 헤엄쳐보고 싶다는 오기 하나로 선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가 선전시에서 찾은 첫 직장은 조선족이 운영하는 구멍가게에서 시계줄을 조립하는 '품팔이'였다. 그 구멍가계 옆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완구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자꾸 눈길이 쏠렸다. 은근히 지켜보다가 하루는 사장인 듯한 분이 점심 드시러 나가는 길목을 막아서며 막무가내로 “이 회사에서 받아주면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라고 용기를 내어 취직의향을 밝혔다. 그 회사에 취직하게 된 박용남은 한국의 선진적인 기업문화도 익히고 또 한국인 사장님을 모시고 가이드 겸 통역으로 따라다니다 보니 차츰 세상이 얼마나 넓고 할 일이 많은 지도 폐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게 끈이 되어 훗날 한국에서 무역공부도 하게 되었고 서울과 선전을 오가면서 떠리옷장사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련한 종자돈으로 선전시 번화가에 커피숍을 차리게 되었고 차츰 대도시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운명은 우연하게 바뀌는 경우가 있나보다. 한국에서 시계사업을 하는 이정균 사장이 박용남의 커피숍을 찾았는데 첫눈에 믿음이 갔는지 시간나면 짬짬이 자기를 도와서 시계부품을 구매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박용남은 고지식하게 마진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도와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신뢰가 쌓여가게 되자 이정균 사장은 시계조립사업을 같이하자는 제의를 하게 된다.

드디어 1999년 9월, 박용남을 법인으로 하는 시계공장이 선전에서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생산된 상품은 전부 한국에 수출되었다. 그러다가 중국 내수시장에 눈길을 돌렸다. 여러 가지 우회곡절이 있었지만 2015년에 영업액 2억 위안을 달성한 기세를 몰아 해마다 그 전해보다 1억 위안 이상의 영업액을 더 올려가면서 충실한 고객층을 확보해나갔다. 지금은 온라인 판매와 오프라인 판매 비율이 75대 25로 온라인 판매가 오히려 더 크게 확대되었다. 그동안 내수시장이 상승단계에 오르면서 80% 이상의 성장세를 보였다. 해외시장도 한국, 일본, 베트남, 태국 등 30여개 나라로 수출되고 있다. 줄리어스의 브랜드 인지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장차 해외시장에서도 커다란 상승공간을 열어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줄리어스 패션시계의 주고객은 80%이상이 젊은 여성들이다. 펴션옷과 어울리게 ‘줄리어스’를 착용하는 ‘멋진 애장품’으로 젊은 여성층에서 널리 애용되고 있다.

현재 박용남은 한국디자이너만 30여 명을 고용하고 있고 중국디자이너도 수십 명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회사는 1,300여 종의 모델을 개발하여 언제든 수요에 따른 생산라인이 깔려 있다. 그중 어떤 모델은 이미 100만개 이상이 팔려나가 단일 모델로 기록을 쇄신하고 있으며 출시된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10만개 이상 팔려 인기가 떨어질 줄 모른다.

국내 패션시계의 유망주로 떠오른 줄리어스는 지금 300명의 임직원을 두고 있는데 이는 창립초기의 10배에 해당한다. 현재 산하에 100여개 하청업체를 두고 있으며 전국 중점 도시와 각 성 소재지에 도합 1,000여개의 매장을 두고 있다. 이 외에도 한국, 독일, 태국 등 30여개 나라에 지사와 협력사를 두고 있다.

필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박용남은 고등학교 학력이란 가방 끈이 짧지만 대단히 성공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인물2. 화이트칼라 점심을 해결해주는 강성민

베이징,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의 화이트칼라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하는 문제가 있다. 오늘 점심은 어디서 먹지? 요즘 야근이 잦은데 저녁식사는 어느 식당에서 해결할까? 시간이 금싸락 같은 화이트칼라족에게 있어서 직장 부근에서 입맛에도 맞고 위생도 깨끗하며 건강에도 좋고 가격대도 맞춤한 음식점을 찾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화이트칼라족들의 이런 고민거리를 시원히 해결해주는 기업이 있는데 그가 바로 미스터핫('Mr.HOT')그룹이다. 강성민 회장(47세)이 이끄는 미스터핫그룹은 대도시 화이트칼라족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중국 국내 유명한 요식업계 브랜드관리 회사이다. 미스터핫그룹에서 운영하는 오피스텔 푸드코트에 오면 중식, 일식, 한식, 서양식의 다양한 음식점 및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며 특히 화이트칼라층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강성민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직장은 중한합자기업이었다. 그러나 이 회사는 얼마 못가고 부도났다. 그 후 그는 한국타이어, 삼성전자 등 회사에서 영업팀 매니저, 마케팅 팀장 등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면서 10년 남짓이 비즈니스 경험을 쌓아왔다.

강 회장은 한국타이어에서 근무하면서 자본금이 얼마간 모아지자 회사를 사직하고 홀로서기에 나섰다. 그때 당시 일본의 소프트웨어 개발 실력이 중국에 비해 뒤떨어졌다는 정보를 접하게 된 강성민은 자신이 IT쪽을 잘 모르는 상황임에도 주저 없이 IT회사를 차리게 된다. 베이징의 중관춘(中)에 위치한 하이룽청사에 사무실을 내고 일본회사의 주문을 받아서 베이징대학, 칭화대학의 연구생들을 모집해 개발에 나섰다. 후에는 회사경영범위를 넓혀 국제IP전화 서비스업무에도 달라붙었다. 한국으로부터 가치가 수십만 달러에 달하는 국제IP전화 관련설비 12대를 수입하여 한번 통 크게 해보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2003년에 사스가 터졌다. 반년 남짓한 동안 한국과의 인적교류가 단절되고 업무가 흐지부지해지면서 부득이 이 사업을 접게 되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회사생활을 하던 시절 항상 식사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일이 머리에 떠올라 이것을 하기로 작심했습니다.”

강 회장은 화이트칼라족들의 이런 고민을 해결해줄 목적으로 미스터핫 브랜드를 창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스터핫은 10여 년간의 노력 끝에 회사단체급식, 미식광장, 레저공간, 종합비즈니스, 특색음식체인, 문화산업이 일체화된 그룹으로 거듭났다.

강 회장은 기업을 이렇게 크게 성장시킬 수 있은 것은 한국의 선진적인 기업문화와 운영 노하우를 배우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강 회장은 지난 30년간 중한 두 나라는 교류와 협력이 주류를 이루었고 조선족은 그런 협력에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해왔다. 향후에도 성형외과, 의학, 건강양로, IT, 엔터테이먼트 등 한국이 세계적으로 앞서가는 업종들이 중국에 진출하는데 있어서 조선족 기업인들의 역할이 돋보일 것으로 전망한다.

 

사례6. 한식의 현지화에서 세계화로 추진자, 한라산그룹 장문덕 회장

한라산그룹은 중국에서 한식의 현지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요식업체다. 2001년 베이징에 첫 불고기집을 개점한 것을 시작으로 20여 년간 중국 요식업계에서 부대끼며 실력을 갈고 닦아 현재는 16개 요식 브랜드를 가지고 베이징, 텐진, 상하이, 선전, 광저우 등 80여개 도시에 직영점과 체인점 300집을 넘어선 대형 요식업체로 성장했다. 북쪽의 후허호우터(呼和浩特)에서 남쪽의 하이난도까지, 동쪽의 연해도시에서 서쪽의 우루무치까지(乌鲁), 한라산 식당은 중국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소비자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1990년대 대학교 재학시절 가이드 알바로 번 돈으로 식당을 개업했다. ‘시골집’이라는 조선족음식점이었다. 생각 밖으로 큰돈을 벌자 2001년 폐업을 앞둔 사천요리 식당을 인수해 400만 위안을 들여 ‘한라산숯불구이’를 개업했다. 한국 인터리어 디자인을 초빙해 전통 한식의 분위기로 꾸미고 종업원들에게는 철저한 한국식 서비스교육을 시켰다. 식당 실내는 한국식당의 분위기로 꾸몄으나 메뉴는 전통 한식 불고기집과는 다른 현지화 전략을 펼쳤다.

장문덕은 선양에서 현지화의 모델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의 식당은 불고기 외에 다른 메뉴들도 취급했다. 고객들은 돼지고기, 소고기, 생선 등을 주문해 구워먹고 볶음요리도 주문했다. 좀 혼잡해 보였으나 이는 중국인들의 음식습관에 맞았다. 중국인들은 일반식당에 가도 여러 볶음요리를 두루두루 시켜 먹으며 샤브샤브도 고기류, 채소류, 면류를 다종다양하게 주문해 한상 가득히 차려놓고 먹기를 즐긴다. 한식도 이러한 방식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장문덕은 '한라산'의 메뉴를 설계하였다.

장문덕의 현지화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한라산'은 한식 불고기를 위주로 하되 최대로 150~160개의 주식, 반찬을 제공했으며 달마다 새로운 메뉴를 출시하였기에 중국인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오픈 첫날부터 손님들이 줄지어 제 차례를 기다리는 호황을 누렸고 개업 1년 만에 투자를 전부 회수하고 흑자가 생겼다.

2015년 장 회장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한국산 식자재를 수입유통에 뛰어들었다. 2020년 초 그는 또 한국쌀가공식품협회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한국 쌀가공 제품들을 수입했다. 물량이 늘어나자 베이징 순의구(順义区)에 매입한 땅에 3만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물류센터를 세워 한국 제품의 수입과 유통에 사용하였다.

 

사례7. 한국 바나나 유유 중국시장 개척자 박진희 회장

1997년 박진희는 우연하게 어느 한 장소에서 한국직원들끼리 하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중국음식이 이젠 질려, 언제면 우리 한국식품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을른지?”

한국 기업에 근무하는 한국 직원들이 무심히 나누는 대화 속에서 생애 첫 상업아이템이 박진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국식품전매상점을 차려보자.

그는 그동안 모아온 자금에 형제들 돈을 좀씩 꾸어서 옌타이부두가에 자그마한 한국식품가게를 차렸다. 이름은 칭양마트,박진희 사장의 한국 식품 중국판매사업이 드디어 개장을 한 것이다. 그해가 1997년이었다.

한국산 신라면, 김, 간장, 고추장, 된장, 다시다, 참치통졸임 등 식품류가 주종을 이루었다. 이 외에도 진로소주, OB맥주 등 주류에 이어 쿠쿠밥솥 등 주방용품으로 품목을 확대해갔다.

사업이 잘 되자 시야를 청도에 돌렸다. 한국빙그레회사와 손잡고 바나나우유를 중국시장에 유통시켰다. 코로나 시국에도 연간 매출액 2억 위안을 넘어서고 있다.

그가 서립한 루이청그룸(瑞成集團)은 현재 영업액이 4억 위안을 돌파하고 있다.

 

사례8. 중국 건조기 제조업계에서 앞자리 차지하는 박해평

선양시 허핑구(沈 和平)만융공업원에 회사 본부를 두고 있는 료오닝해제승기계유한회사는 공장부지 면적 5만여 제곱미터에 건물면적 2만여 제곱미터나 되는 회사 건물을 가지고 있다. 600여명의 정규직과 500여명의 유동판매원들을 두고 있는 이 회사는 안정적인 성장을 이룩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향해 한 단계씩 성장하고 있다. 그 외 2012년에 건립한 료오닝해제승과학기술유한회사는 쑤쟈툰구 딩샹가(家屯 丁香街)에 위치해 있는데 부지면적 5만 제곱미터에 공장 건축면적이 13,000여 제곱미터이며 1만 제곱미터의 다기능 고급사무실도 갖고 있다.

2006년 박 회장은 한국시장에 진출했다. 당시 IMF외환위기가 터진 후 기름값이 너무 비싸져서 한국 농촌지역의 사우나업체나 비닐하우스를 사용하는 농민들은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기름연료보다 석탄연료를 이용한 보일러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박회장은 한국 파트너와 함께 공동으로 한화 300억 원을 투자하여 한국에 전자동석탄보일러판매회사와 필렛(生物能)보일러판매회사를 설립하였다. 료오닝해제승유한회사에서 생산한 보일러 부품을 한국에 가져다 조립하여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이 두 회사는 2014년까지 해마다 생산판매량이 늘어났으며 평균 한화 10억 원의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2016년까지 10년간 벌어들인 수익은 도합 한화 150억 원이었으며 한국 진출에서 짭짤한 재미를 보게 되었다.

박회장은 창업초기 한국의 회사들과 기술제휴를 통하여 선진기술을 인입하고 한국 기술자들을 초빙해 중국 실정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는데 주력했다. 한국 기업들과의 협력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라면 제조업에서 기술력이 곧 생산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례9. 골프로 하나 되게 만든 손진석 회장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양국 간에는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다 방면에서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중국 조선족은 우리말과 글에 익숙한 우세로 한국 기업에 취직하거나 사업 파트너로 양국 교류의 최전방에서 활약했다. 상호간의 왕래가 확대되는 과정 속에 골프문화 역시 서서히 조선족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중국 땅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손진석은 중국 전역에서 조선족 경제인들이 기타 민족의 기업인들보다 훨씬 빠르게 골프를 시작한 이유가 한국과의 교류, 정확히 말하면 한국 사업가들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한국 기업인들은 기술, 자본 그리고 경영 노하우와 함께 골프문화를 중국에 접목시키는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옌벤조선족자치주에서는 골프장이 생기기 전에 골프협회가 먼저 세워졌다. 옌벤에 진출한 한국 사업가들은 현지에 골프장이 없는 상황에서도 조선족 경제인들에게 골프기술을 전수하였다. 현재까지도 실화로 전해지고 있는 사건은 옌벤에서 골프를 치기 위해 골프애호가들이 여러 곳을 고찰한 끝에 옌지시 근처 야산의 한모퉁이를 빌려 '야생 골프장'을 손수 만들었다. 큰 잡초들은 낫으로 베여내고 티샷하는 매트는 메고 다니면서 티업하는 나름대로의 묘미를 찾아냈다. 골프장이라고 하기에는 구차할 정도였지만 나름 재미가 쏠쏠했다.

2000년 10월말 베이징에서 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초청경기를 처음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전국 6개 지역에서 온 40여명의 조선족 골프선수들과 한국인 골퍼 10여명이 함께 경기에 참가하였다. 예상외로 첫 골프모임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이듬해에 제2회 경기가 칭다오에서 열렸고 200명이 넘는 선수가 참가하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골프에 대한 조선족 기업가들의 열정을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힘입은 골프 애호가들은 해마다 정기적으로 진행하자는 합의에 이르렀고 2002년 텐진에서 제3회 전국 대회를 개최할 때는 300여명의 선수가 참가하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자 골프행사를 조직적으로 진행하자는 요구가 제기되었고 드디어 2003년 10월 상해에서 열린 제4회 전국 대회에서 정식으로 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가 설립되었다. 만장일치로 초대 회장에 당선된 손진석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전력을 다해 조직의 규범화관리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매번 전국 대회 때마다 400~50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로 진행되기에 표준 18홀 골프장 하나만 가지고는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회원들의 불편을 줄이고 공정경기를 진행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사전회의를 수없이 해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현재 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는 3,000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2019년 제20회 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초청경기를 서울에서 치를 때는 400여명이 참가하였으며 한국에 조선족의 성장을 알리는 장으로 큰 영향력을 펼치게 되었다. '조선족들이 지난 시간 쌓아온 실력과 성과를 한국인들에게 보여주자'는 의미도 담겨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례10. 중국 골프운동의 대중화에 나선 박성봉

중국의 골프운동 판도가 서서히 바뀌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골프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이 가능해짐에 따라 중국에서도 골프운동은 점차 '귀족운동'에서 '서민운동'으로 대중화의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부자들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도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부담 없이 여유롭게 골프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제가 실내스크린 골프사업에 뛰어든 계기입니다.”

바성봉의 말이다.

박대표는 올해 나이가 30대 초반인 나젊은 기업가다.

2018년 지인의 소개로 그는 한국 골프존 본부를 방문해 회사 경영상황을 알아보고 실내골프운동을 직접 체험해 보았다. 스크린 속 필드를 보면서 스윙을 날렸는데 실제 필드에서 치는 느낌 못지않게 진실감이 살아있었고 계속 해보고 싶은 느낌마저 들었다. 골프존 회장은 현재 한국 국내 스크린 골프장이 2,000곳을 넘겼고 아주 빠른 속도로 확장 중이라고 하였다. 홍콩에 돌아온 후 박성봉은 주택 근처의 골프존 스크린 골프장에 회원 등록을 하고 시간 나는 대로 가서 골프를 쳤다. '중국에서 이 사업을 해보면 어떨까?' 박대표의 미래 사업구상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2020년 베이징에 오픈 한 골프존은 현재 회원 2,000여명에 전국에 100곳 가맹점이 생겼다.

현재 차이나 골프존은 총상금 120만 위안을 걸고 대회를 치를 만큼 급성장하고 있다.

박대표는 향후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골프존 차이나는 중국골프협회와의 협력 하에 향후 10년 내에 실내골프장 1만개를 건설하고 이를 통해 5만~1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며 350억 원의 소비성장, 100억 원의 골프용품 판매액을 이끌어낼 계획입니다. 이제 골프존의 실내 골프장이 중국 곳곳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에 간편하고 빠르게 골프운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직장에 금방 입사한 젊은이들도 적지 않게 실내 골프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전민이 골프운동에 참여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사례11. 한국기업의 해결사 권순기 회장

1993년 중한경제발전협회를 발족하여 30년간 중한 경제협력과 만간교류를 위해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권회장은 2021년 2월 대한민국 훈장인 동백장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족으로서 대한민국의 정부상을 받은 첫 사람이기도 하다.

초창기 한국인들의 투자는 맹목성이 적지 않았는데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과 광활한 시장만 보고 원가계산도 주먹구구로 시작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중국의 법률 법규, 문화적 차이, 관습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일을 추진하다보니 얼마 안 가서 실패를 보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쌍방이 갈라설 때 면 많은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경제적인 피해가 막대했지요.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고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해결사’로 나서게 된 셈이다. 지금까지 컨설팅을 해준 한국 기업은 100개가 넘으며 현재 컨설팅을 해주고 있는 한국 기업은 30여개나 된다고 한다. 현대자동차의 중국 진출 성사, LG디스플레이가 중국 광저우(广州)에 투자한 110억 달러짜리 중대 프로젝트 중개, LS그룹의 쟝수성 우시(江)에 공장 설립 추진, 한국무역보험회사와 관련된 한국기업의 중국 수출 과정에 빚어진 갈등 해결, SK그룹의 산시성(山西省) 지방기업과 협력 결렬 문제 처리, 현대 조선소의 칭다오(青岛) 유치 주선, 대우 시멘트의 산둥성(山) 철거 문제 마무리, 한국 병원의 중국 현지 법인과 합작 관계 주선, 양국 대학 간 교류 정상화 실현 등 굵직굵직한 일들을 해냄으로써 진정한 '해결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국아주경제발전협회는 중국 외교부의 지도아래 설립되었으며 중국 민정부에 등록된 국가1급 사단법인기구로서 현재 100여 명의 현직 및 전임 장관급 간부들과 전임 중국 주외대사 등 저명인사들이 자문위원으로 있다. 산하에 100명의 기업인 회장단을 두고 있고 45개 분회로 나뉘어 다각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2만여 개 기업이 단체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협회는 아시아 48개 나라들과 민간차원의 경제교류 활동을 통해 상호 투자협력을 촉진하고 우의를 증진하는 취지하에 국가에서 추진하는 ‘일대일로’ 건설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협회 산하에 조선족기업가발전위원회를 설치하여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사례 12. 한중교류 교두보 역할에 앞장선 이선호 회장

한국에 있는 중한실크로드국제교류협회 이선호 회장 사무실에 들어서면 수십 개에 달하는 사진액자가 눈에 띈다. 모두 이선호 회장이 반기문 전 유엔 총장을 비롯해 전 국회의장, 정당 대표, 국회의원, 기업 오너 등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거물급 인물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다. 그는 조선족사회에서 그 누구보다도 한국인들과의 인맥이 가장 두텁고 끈끈한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친구 하나 더 사귀면 길이 하나 더 생긴다.’는 중국 속담처럼 이선호 회장은 한국에서 수많은 '길'을 확보하고 있다. ‘친구가 많을수록 그만큼 자본(자산)이 더 많아진다.’는 한국 속담마냥 이선호 회장은 한국에서 많은 ‘자본(자산)’을 갖고 있다.

이선호 회장은 이런 인맥이 있기에 3년 전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2019실크로드 서울포럼’ 한중기업협력 논의에 800여 개 한국기업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뤘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주최 측인 중한실크로드국제교류협회가 사드사태에 의해 얼어붙었던 양국 간의 교류를 훈훈하게 녹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공자는 "삼십이립(三十而立) 이라고 말했다. 중한 수교가 30년을 맞고 있는 현재 이선호 회장은 확실하게 자리를 굳혀가고 있으며 미래 30년까지 구상하고 있다.

 

나가면서

필자는 2006년 3월부터 현재까지 재한동포사회 대변지 역할을 위해 꾸려온 중국동포타운신문에 근무해왔다. 지난 16년 동안 재한동포사회 흐름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한국사회에 뭔가 빚지고 사는 느낌이었고 우리 조선족사회는 한국사회에 뭔가 내세울 자랑거리가 별로 없어 늘 불편한 고민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던 와중에『무지개를 수놓는 사람들』의 한국에서의 출간 진행(교정, 최종 검열, 출판사 섭외)을 맡으면서 우리도 한국사회에 내세울 것이 있고 자랑거리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내심 감개가 무량했다.

“한국 기업이 있는 곳에 조선족들이 있었고 한국 제품이 있는 곳에 조선족들의 활약이 있었으며 한국인들이 생활하는 곳에 조선족 음식점이 있었다. 경제, 문화, 생활 등 다 방면에서 한국 기업인과 조선족 기업인들은 거의 동체가 되었으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상생의 관계로 굳어져갔다. 조선족 기업인들은 한국의 덕을 많이 본 사람들이며 한국 덕분에 생활이 윤택해졌다. 따라서 한국기업의 중국시장 확장에 조선족들의 역할이 남달랐기에 받기만 하던 데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며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각자의 역할을 다 하는 동반 성장의 길에 함께 하고 있다(이춘일 회장의 머리말 한 단락).”

이 책에 소개된 30인 중에 김의진, 박걸, 남기학, 오상교 등은 대한민국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권순기는 대한민국 훈장인 동백장을 받았다. 기타 기업가 중에 대한민국의 여러 가지 상을 수상했다.

본 발제의 마무리를 이은실 기자의 취재소감으로 대체하려 한다.

“올해는 중한수교 30년째가 되는 해이다. 그 사이 조선족들은 세계화의 급물살을 타고 이웃 국가이면서 고국인 한국에 대거 이주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3D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다. 그들이 일군 성과도 결코 얕볼 수 없지만 우리는 늘 뭔가 한국에서 수혜자의 입장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조선족은 가난하고 불우한 존재, 도움을 줘야 하는 존재이다. 그 사이 창작된 우리 조선족들의 소설을 살펴보아도 한국에 돈 벌러 갔다가 겪었던 설움, 울분 같은 것이 주를 이룬다.

중한 교류에서 톡톡히 한몫을 담당해 온 기업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이름 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우리도 늘 받기만 해온 존재는 아니었다는 것, 우리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였다는 점에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분들의 사례가 소개된바 없었다. 이 책을 통해 조선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게 된다면 좋겠다. 한국 분들께도 널리 알려 조선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할 것 같다(이은실 기자의 취재소감).”

한편 본문에서는 30인의 기업가 ‘실록’을 다 소개하지 못하고 분야별 14명만 선정하여 소개하였음을 밝힌다.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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