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Caraz(카라즈)컵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응모글

일본에서 쓰는 아리랑의 노래

글 / 김광림

심금을 울려주는 《아리랑의 노래》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Edgar Snow)가 1936년에 연안을 방문하여 장정을 방금 마친 모택동 등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을 취재하여 쓴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은 중국공산당과 홍군의 진실을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역사적인 명작이다. 그런데 에드거 스노의 부인이며 저널리스트인 님 웨일즈(Nym Wales) 가 같은 시기 연안에서 조선인 혁명가 김산 (본명 장지락)을 만나 쓴 책《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은 1941년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는데 그리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에 대학교의 독서교재로 지정되고 재미한국인 사회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1960년대에 대단히 인기있는 책이 되었고 진보적인 청년층이 많이 읽게 되었다. 한국에서 1980년대에 출판되어 인쇄를 몇십번 거듭하면서 진보적인 지식인과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중국에서도 1986년에 이 책이 조선어로 출판되어 많은 조선족들이 읽게 되었다. 아마 이 책처럼 조선인들의 일본의 지배에 대한 치열한 저항과 불굴의 투쟁을 생동하게 그려낸 책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저자 님 웨일즈의 조선과 조선민족에 대한 애정이 다분히 담겨있다.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하나의 빛나는 고전적인 명작으로 평가하고 싶다.

 

이 책이 태어나게 된 경과는 의외의 만남에서부터이다. 님 웨일즈는 1937년 초여름에 연안의 노신도서관에서 이 도서관의 많지 않은 영문도서와 잡지를 수십권씩 빌려가는 사람이 명단을 발견하여 그가 누군가 물어봤더니 연안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고 있는 조선대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호기심이 생겨 그를 찾아보게 되고 그와 22번 인터뷰를 거치면서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김산은 님 웨일즈와 인터뷰를 마친 이듬해에 반혁명, 스파이라는 불투명한 죄명으로 연안에서 처형되었다. 아마 이 책이 출간되지 않았다면 장지락이라는 조선혁명가는 역사의 기억속에서 망각되고 말았을 것이다. [珍藏版] "아리랑의 노래"(님 웨일즈 · 김산)

 

나는 1988년에 일본에 유학왔다. 25살 나이에 일본에 와서 이제 오십대 마감에 들어섰으니, 30여년 넘어되는 세월을 일본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의 청춘기, 중년기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지내면서 수많은 조선족과 만나고 교류하고, 여러 단체활동을 통하여 의미있는 시간을 같이 보냈다. 그 사이 중국에 자주 다니면서 국내 조선족의 변화하는 모습을 애써 관찰했고, 미국, 영국에 2년간 체류하면서 그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조선족의 모습도 목격하게 되었다. 30여년 사이에 만난 수많은 조선족의 다정한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스치고, 가지가지의 에피소드가 여울목 물소리처럼 귓가에 아른거린다. 우리가 조선족으로서 살아온 이야기, 청춘과 중년의 시절 국경을 넘나들며서 뜨겁게 살아온 이야기, 이것도 분명히 또 하나의《아리랑의 노래》가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어서 우리의 보람있는 삶을 기록에 남기려는 사명감으로 일본에서 한편의 아리랑의 노래를 써보려 한다. 

 

초창기의 조선족의 단체활동

나는 1988년 10월에 일본에 유학하여 처음 1년반을 도쿄 외곽에 있는 쓰쿠바대학에서 연구생으로 지냈다. 그 때 쓰쿠바대학에는 여러명의 조선족이 유학하고 있었는데 신기스럽게도 서로 누가 조선족이라는 것을 재빨리 확인하게 되고 같이 어울리면서 사이좋게 지냈다. 해외에 나오게 되면 조선족 사이의 연대감이 강화되어 서로 모르던 사이에도 인츰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1990년 4월부터 도쿄대학교의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도쿄에 이주했는데 이때부터 정말이지 많은 조선족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해 5월에 도쿄에서 연변대학교 교수출신자들과 북경에서 온 조선족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동방학우회》라는 유학생, 학자모임이 결성되었는데 이 모임이 생기면서 도쿄지역에서 조선족들이 자주 모였다. 

 

이 모임이 결성될 때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의 김호웅선생이 연락이 가능한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에게 편지를 띄웠는데 편지글의 “자! 백의동포들이여! 우리 손잡고 뭉칩시다!! ” 라는 글귀가 참으로 감동스러웠다. 그 때는 유학생, 학자들마다 전화가 있은 것도 아니어서 편지로 안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모든 안내를 손쉽게 보낼 수 있는 지금이 신선같은 시대이다.  

 

이 모임이 성립된지 얼마 안되는 1990년 7월에 도쿄지역의 조선족 20여명이 사이타마현에 있는 옛 고구려 왕족을 모시는 고려신사를 견학했다. 고려신사는 고구려의 멸망시 일본에 망명한 왕족의 영혼을 모시는 시설이고, 그 지역에 716년에 고려군(高麗郡)이라는 고구려인들을 위한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2천명에 가까운 고구려인들이 모여살았다고 한다. 산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망명 고구려인들의 정착지를 찾아 현재도 남아있는 후손들과 고려(高麗), 고려천(高麗川)이라는 지명과 만나게 되어 그날 참가자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이후 일본에서 조선족의 단체활동을 하는 경우 이 고려신사를 자주 찾는다.  

 

그해 8월에는 오사카에서 개최된 국제고려학회 대형심포지엄에 참가하여 중국에서 참가한 조선족 지식인들과 조선, 한국, 기타 해외에서 참가한 코리아민족의 학자들과 의미있는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동방학우회》에서 가졌던 또 하나의 보람찬 활동이 1990년 여름에 20여명의 유학생, 학자와 가족들이 한국으로 10여일간의 고국방문을 다녀온 것이다. 고베에서 배를 타고 밤중에 대마도를 지나 이른 아침에 부산항에 도착하던 그 때의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일행중 대부분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부산, 포항, 경주, 서울, 판문점을 방문했는데 좋은 인상을 많이 받아 오늘까지 고국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로 남아있다. 

 

동방학우회 회원 고려신사 견학사진(1990년 7월)  

 

《동방학우회》는 초기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다가 골간들이 일본에서 연구를 마치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면서 활동이 뜸해졌다. 그 사이 1992년 6월에 일본에 유학, 또는 연구차 방문하던 연변대학교 교수출신자들이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를 새로 설립하였다. 그리고 나서 공부모임, 친목모임, 여행을 많이 조직했는데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는 어느덧 올해로 성립 30주년을 맞이하는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조선족의 단체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조선족단체인 연변대학일본학우회 성립대회(1992년 6월)

 

《동방학우회》,《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에서 활동하던 조선족중에서 중국과 일본의 학계에서 활약하는 인물이 많이 나왔고, 나는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조선족에 인재가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됐다.

 

1995년에 도쿄의 고락쿠료(後楽寮)라는 중국유학생, 학자회관에 들어있던 조선족 여러명이 같이 모이면서 《천지클럽》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이 차츰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중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998년 봄부터《천지클럽》과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의 멤버들이 손잡고 《천지클럽》을 일본의 조선족사회의 중심단체로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 때 《천지클럽》이 내건 슬로건이〈교류, 협력, 공동발전〉이었는데 30대 초반에서 중반 연령의 조선족들이 이 모임의 골간이 되어 일본속에서 명실상부한 조선족단체를 만들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 때도 초기에는 온라인 시대가 아니어서 많은 안내를 편지나 엽서로 보냈는데 그 때의 안내문이나 회의기록문을 지금 다시 읽어봐도 다들 얼마나 진지하게 《천지클럽》을 키우려 했는지 생생한 감동이 아직도 전해진다.

 

나는 초창기의《동방학우회》와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의 모임에 참가하다가 1998년에《천지클럽》의 확대, 발전기에 같이 참가하면서 이 모임이 조선족사회에서 신선하고 희망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음을 느꼈다. 일본사회에서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조선족단체를 키우려는 의지가 명확했고, 조선족들이 모이면 술이나 마시는 기풍을 없애려고 술모임을 거의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모일때마다 참가비 500엔을 거두어 중국의 조선족 청소년들의 장학금으로 쓰기로 했다.《천지클럽》은 1998년부터 수년사이 좋은 활동들을 많이 조직했다.

 

정기적인 교류회, 취직・성공경험교류회, 무도회, 야유회, 송년회, 운동회 등 모임을 많이 가졌는데 그 때부터 여러해에 걸쳐 도쿄지역의 조선족사회의 중심단체로서의 역할을《천지클럽》(이후《천지협회》로 명칭변경)이 톡톡히 했다. 이 모임의 초창기에 같이 활동한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온 20, 30대의 젊은이들이었는데 다들 꿈이 많고 조선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대단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서 그 때 같이 활동하던 멤버들을 보면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이 나왔다.

 

나로서 이 모임에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천지인문》이라는 잡지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모두들 무보수로 밤늦게까지 잡지를 만들고 때로는 자기들 돈을 들여가면서 잡지를 발행했던 것이다. 그 때 일본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의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의욕이 대단했고, 순수하고 좋은 내용의 잡지를 2년정도 유지했던 것이다.

 

1999년에는 일본에 유학하던 연변대학 교수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조선족연구회》를 설립하여 조선족에 대한 연구활동을 진행하다가  2007년에《조선족연구학회》로 발전하였는데 이 모임에 주로 학자, 대학원생들이 모이면서 일본에서 조선족연구단체로 자리를 잡았고, 규모가 큰 국제학술모임도 여러차려 개최하였다. 우리말 속담에 시작이 절반이라고 처음에 소수의 멤버들이 연구모임으로 시작한 것이 꾸준이 이어져오는 사이 일본에서의 조선족연구의 구심점이 되었다. 

 

발전을 거듭하는 조선족사회

1980년대부터 중국조선족의 일본진출이 시작됐는데 그로부터 40여년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인구수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일본의 중국조선족의 인구수에 대하여 아주 정확한 통계는 없고, 수만명 이상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거의 틀림없을 것 같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사람, 일본에 귀화한 사람, 또는 한국국적을 취득한 사람 등 다국적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국적이 변해도 일본의 제1세대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태여났고, 같은 조선민족으로서의 동질성과 공통의 감정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면서 학우회, 동향회 및 각종 기능별 단체를 만들고 일본속에서 조선족공동체를 형성해가는 경향이 근년에 뚜렸하게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에는 《동방학우회》《연변대학일본학우회》《천지협회》《조선족연구학회》 등 조선족이 중심이 된 단체가 몇개밖에 없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쉼터미디어》《세계한인무역협회치바지회》《재일조선족축구협회》등 조선족이 중심이 된 단체가 여러개 늘어나고,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재일조선족경영자협회》《연변일중일본학우회》《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우리세미나》《재일조선족심목회》등 새로운 단체가 많이 생겼다. 

 

현재 일본에는 30개가 넘어되는 조선족이 중심이 된 단체가 있다. 대학교학우회, 고중동창회, 각 기능별 단체외에도 동향회, 종친회까지 생겨 일본의 조선족 사회가 학연, 지연, 혈연을 중시하는 경향도 나타내고 있다. 

 

이상의 조선족의 단체활동에서《쉼터미디어》를 통한 조선족의 활발한 교류, 《조선족연구학회》에 의한 여러차례의 국제심포지엄의 개최,《세계한인무역협회치바지회》의 차세대비지니스스쿨의 개최, 《동경샘물학교》《간사이조선족총회》의 조선족 어린이들에 대한 다언어교육 등은 일본조선족 단체활동의 모범사례로 볼 수 있다. 

 

일본에 체류하는 조선족이 늘어나고 조선족사회가 형성되면서 대형이벤트가 개최되고, 단체활동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도쿄와 오사카에서 이미 여러번 개최된 조선족운동회는 일본내의 조선족들이 다수가 참가하는 축제의 마당이 되여가고 있고, 2019년 11월에는 도쿄에서 <세계조선족문화절>이 개최되여 일본, 중국, 한국에서 조선족들이 많이 모이게 되였고, 조선족 예술인들이 다수 출연한 문화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일본의 현재의 여러 조선족단체가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고 보다 큰 차원에서 일본에 거주하는 중국조선족동포들이 친목과 화합, 상부상조를 도모하고 중국, 한국 ,미국 등 세계 각 지역의 조선족 사회와도 소통과 협력을 촉진할 필요성을 느껴 나와 연변대학일본학우회 장경호 회장이 발기인이 되어  2019년 2월 23일에 도쿄에서 <일본내 조선족단체발전을 위한 협의회>를 소집, 개최하였다. 

 

이 협의회에 일본의 18개 이상의 조선족단체 대표들이 모였는데 일본속에 조선족의 중심단체를 설립하는데 공감을 표시하여 그 자리에서 조선족단체발전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로부터 5차례의 조선족단체발전추진위원회가 개최됐고 매번 모임마다 긴 시간을 들이면서 일본전국규모의 조선족연합회를 구상하고, 단체의 정관을 만들고, 이사회를 구성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19년 9월 8일 재일본중국조선족 22개 단체 대표가 도쿄에 모여 제1차 이사회를 개최했고, 이사회에서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회장,부회장, 사무총장 등 임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2019년 11월 3일 도쿄에서 200여명이 모여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성립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이 성립식에는 중국, 한국에서 조선족 기업가, 문화인, 예술가가 많이 참가했고, 다들 진심으로 축복해주었다.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는 일본속의 조선족의 중심단체로서 일본에서 조선족공동체를 형성하고 세계 각지의 조선족 사회와 교류,협력해가는데 있어서 금후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2019년 2월 일본내 조선족단체발전을 위한 협의회 기념사진(김권철 촬영)

 

미국과 영국에서 만난 조선족

1980년대부터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 이래, 중국조선족의 제일 뚜렷한 변화가 전통적인 거주지인 동북지역을 떠나 연해지역으로, 해외로 이동하는 현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조선족의 가치관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고, 현대의 조선족들은 보다 열린 환경에서, 다원문화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숙명처럼 되여가고 있다. 이런 환경의 대변화속에서 우리 조선족들은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돈을 겪게 되고, 지금까지 잘 유지되어왔던 민족공동체에도 위기가 많이 생겼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조선족의 새로운 성공모델을 찾아서 거기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경향이 비교적 짙다. 그 성공모델이란 회사경영으로 사업에 성공했다거나, 연구분야에서 중국이나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았다거나, 음악이나 체육분야에서 명성을 많이 떨쳤다거나 하는 얘기로 많이 귀결된다. 또는 과거의 조선족의 유명인물들의 사적을 발굴하여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려는 경향도 뚜렸하게 나타나고 있다.

 

내가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몇 명의 조선족들은 아직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옳바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겠는가 하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나는 2009년에서 2011년 사이에 일본의 소속대학교의 연구활동으로 미국과 영국에 2년간 체류하면서 현지에서 여러명의 조선족을 만나고,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 3명의 조선족을 소개하려 한다. 글의 내용이 보다 진실성을 띄게 하기 위하여 여기서 소개하는 3명의 조선족에 대하여 실명을 들려고 한다. 틀린 점이 있으면 이들과 독자들의 아량을 바라는 바이다.

 

김만수 박사

나는 2010년 8월부터 미국에서 처음에 1년간 연구활동하던 캘리포니아주의 버클리대학교 (UC Berkeley)를 떠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미국 동부의 보스턴에서 거처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보스턴에는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어 어떻게 새로운 거처를 찾을까 고민하다가 당시 내가 미국생활체험을 연재하고 있는《조글로》에 미국생활에 관한 글을 쓰고 있던 조선족 김만수 박사를 찾게 되었다. 김만수 박사는 그 때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관련 포스터닥(박사과정을 마친 후의 연구원과정)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메일을 보내니 대뜸 전화까지 걸어와서 미국에서 같은 조선족을 알게 된 반가움을 표시하고  내가 보스턴에서 거처를 찾는 문제를 크게 도와주었다. 내가 보스턴에 옮겨갈 때도 기차역까지 마중을 해주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연구를 하는 조선족연구원들을 모아서 나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런 사적인 교분에서 내가 김만수 박사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나는 김만수 박사의 근면한 노력과 과감한 도전정신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김만수박사는 연변출신으로, 연변대학교 농학원에서 수의학을 공부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기후(岐阜)대학교에서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의 국립연구소에서 몇 년간 연구원생활을 하다가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에서 포스터닥이라는 신분으로 4년간 동물의료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연구하는 기간에 김만수박사는 연구성과를 많이 내고, 특허를 두개나 따내게 되었으며 그런 성과를 인정받아 2011년 초봄에 약관 40세의 나이에 중국과학원동물연구소의 연구원, 박사지도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김만수 박사는 처음부터 최고의 엘리트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고, 근면한 노력과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한단계씩 발전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그가 일본에서 미국에 옮겨가는 과정에서 영어공부를 하느라고 집안 구석구석에 영어메모장을 붙혀놓고 있었다고 하며, 하버드대학교에서 4년간 연구하는 기간에 불철주야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자수성가라는 말이 김만수박사의 경우에 꼭 들어맞는 것 같다. 연변의 농촌마을 출신으로 부모의 후광을 크게 입은 것도 아니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가면서 연변대학교에서 일본유학을 하고 다시 하버드대학교에까지 가게 되고 중국 최고의 과학연구기관에서 당당하게 연구원, 박사지도교수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박영애 원장

나는 미국에서 2년간 체류하면서 미국생활을 여러 미디어에 연재하게 되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미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인터넷사이트인《조선투데이》의 운영자인 박영애 원장를 알게 되었다.

 

박영애 원장은 중국 길림성의 중의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지방의 여러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연변대학교 의학원을 졸업하고 북경의 중의대학교에서 연수를 마치고 나서 1990년부터 미국에 이민으로 건너가서 필라델피아에서 중의원을 개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박영애 원장은 중의원을 경영하면서 미국에서 더 공부를 하여 중의학 박사학위를 받게까지 되었다. 그녀의 이런 경력을 보면 상당한 학구열과 근면한 노력이 있었음을 쉽게 보아낼 수 있다. 특히 여성으로서 두 자식을 미국에서 키워서 공부시키고 자신은 병원경영으로 성공했다는 자체가 보통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박영애 원장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그의 사업에서의 성공보다 그가 사업에서 성공하고 나서 나눔의 정신을 솔선하여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영애 원장은 미국에서 딸애가 대학교를 다니던 과정에 방학이면 민간인들이 기부한 장학금으로 연수를 많이 다니는 것을 보고 본인도 그런 좋은 사업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미국에서 병원경영을 하는 과정에 재미한국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따져보면 결국 자신이 중국에서 조선족학교에 다니면서 조선어와 민족교육을 제대로 받은 덕분이 아닌가 생각하여 길림성 교하시 외곽에 있는 모교인 조선족소학교에 기부를 하여 우수학생과 우수교사를 지원하고 강의용품들을 사도록 하였다. 

 

몇 년간 모교에 기부를 해오다가 그 모교가 학생이 줄어들어 안타깝게도 페교가 되자 연변적십자회와 상의하여 도문시 농촌의 조선족소학교를 재정적으로 돕는 사업을 진행하였고 연변1중에도 재정지원을 하였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연변대학교에 장학금을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하고 연변대학교에서 조선족민족박물관을 짓게 되자 거기에도 자금지원을 했다. 박영애 원장은 지금까지 길림성의 조선족학교와 연변대학교에 인민페로 수십만원이 넘어되는 기부를 해왔다. 미국에서 중의원을 경영한다고 하지만 수입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금이 척척 남아도는 상황도 아닌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조선족의 민족교육에 대한 장학사업에 대단한 열성과 자긍심을 가지고 그 사업에 많은 시간과 재력을 들이고 있다.

 

박송림선생

나는 2011년 6월부터 3개월간 영국의 런던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영국에서 또 한명의 조선족을 만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나와 연변대학교 외국어학원에서 동료로 있던 박송림 선생을 영국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박송림선생은 연변대학교 외국어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있다가 1990년대에 영국에 유학하여 영국중부지역에 있는 랑카스터(Lancaster)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교에서 연구직으로 취직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에 유학한지 10여년이 넘어되고 이미 영국 국적을 취득하고 랑카스터시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아들애가 영국중부의 대도시인 만체스터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부부간이 랑카스터에서 주택을 구입하여 비교적 안정된 이민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송림선생의 요청으로 나는 2011년 7월에 3박 4일간 랑카스터에 여행가서 박송림선생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그 분한테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 박송림선생이 영국에서 정착하여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살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점이다. 

 

그는 여러 번 영국에서는 사회생활에서 정직함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며 요령을 부리거나 거짓이 이 사회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런 영국의 사회환경에서 살면서 박송림선생은 우직하다고 할만큼 정직한 삶을 추구하는 것 같았고 또 그 때문에 그의 영국에서의 이민생활은 순조로울 것 같았다. 

 

“정직함이 지혜” 라는 책의 제1장에 토머스 제퍼슨 미국 제3대 대통령의 말이 있다 싶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결국에는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기본자세일 것이다.

 

이상 내가 미국과 영국에서 만난 3명의 조선족들은 조선족들 가운데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정직하게 살고 있거나,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사는 방식, 근면하게 노력하면서 사는 방식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거치면서 가치관과 정체성에서 혼돈을 많이 경험하는 조선족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조선족은 어디로 가는가?

 오늘날 조선족가족중에 중국에서만 사는 경우가 적을 것이다. 중국, 한국, 일본, 미국 등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가족이 너무나도 흔하다. 나의 가족의 경우를 보아도 내가 1988년에 일본에 유학하고 일본에 정착한 관계로 형제의 자식들을 여러 해에 걸쳐 일본유학을 주선해주고 그들도 유학을 마치고 일본에 정착했는데 현재 일본에는 조카들 가족만 7가구가 된다. 

 

나의 형제들은 1990년대까지 외국에 나가는 법이 없었는데 2008년에 넷째 누님이 한국인과 결혼한 시누이의 주선으로 한국에 나갔고 그 후로 누님의 딸도 한국에 나가 가정을 이루고 어머니와 같이 한국에 장기체류하고 있다. 그 사이 매형이 막벌이 노동중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도 경험했다. 둘째 형님도 처가집 형제의 주선으로 2014년에 한국에 나가 형수와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장기체류하고 있고 그 사이 딸이 한국에 나가 부모와 같이 살고 아들 부부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이러다나니 생존해있는 형제들 중 이제는 큰 누님과 셋째 형님부부만 중국에 남아있고 여러 형제들의 자식들은 일본, 한국. 캐나다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오히려 중국에 소수의 친척만 남게 됐다.

 

이상이 나의 형제들 가족의 실상인데 조선족의 많은 가족의 실상이 엇비슷할 것이다.

 

조선족은 19세기 후반에 조선 함경도 지역의 대기근을 피하여 두만강 건너편의 간도로 이주한 것을 시초로 중국에서 150여년에 이르는 정착과정을 거쳤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조선족이라는 민족명칭이 생기고 집거지역에 민족자치제도가 실행되면서 중국의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민족공동체를 오래동안 유지해왔다. 

 

그러나 주지하다 싶이 1980년대부터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보다 좋은 삶을 찾아 동북의 전통적인 거주지역에서 연해지역으로 조선족의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고국인 한국으로 수십만의 조선족이 나가게 되었고, 자식벌세대는 일본, 미국 등 나라로 많이 나가게 되었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흩어지고, 디아스포라로서 살아가게 되었으니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오붓하게 민족공동체를 유지하던 시절이 옛날 얘기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조들이 피땀으로 개척하고 세운 땅과 마을이 일부 사라지고 고향을 상실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150여 년전에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서 살길을 찾았던 조선인, 중국에 정착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 정립된 사람들, 지금 또 한번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수십년 후의 조선족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조선족은 어디에서 살든지 보다 좋은 삶을 살아가고 조선민족으로서 민족성과 중국에 대한 애정을 항상 지닐 것이라 믿는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일본과 미국에서 조선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해보면서 조선족은 유난히 생명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디에 나가도 적응을 잘 하는편이고 뿌리를 잘 내린다. 미국같이 산설고 물설고 언어장애가 큰 나라에 가서 단기간에 정착을 해나가는 것을 보면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일본에서도 다들 맨손으로 바다를 건너와 사업을 일으키고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어엿한 조선족사회를 구축하고 있지 않는가?!

 

캘리포니아의 어느 한국인 가게에서 중국의 조선족을 화제로 얘기를 나누었는데 가게주인이 중국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니 세상 어디에 가서 살 수 없겠는가하면서 조선족의 생명력을 높이 평가했다. 잘 생각해보면 조선족은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다. 조선민족으로서의 민족성을 항상 지니고 중국에서 자라서 유구한 문명의 지혜를 터득하고 또 국제사회에서 선진적인 문명의 제도와 규범을 빠르게 받아들인다. 다언어, 다문화의 소양을 잘 갖추어 어느 나라에서 살아도 적응할 수 있다. 

 

중국 국내와 한국, 일본, 미국 등 국제사회에 흩어져 살아가는 조선족의 모습을 널리 관찰해보면 우리들의 희망이 보인다. 우리민족의 민요에 나오는 '아리랑고개', 그것은 분명 희망을 찾아서 넘어가는 고개일 것이다.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면서 희망을 찾아서 넘어가는 '아리랑고개', 우리 모두는 지금 또 하나의 '아리랑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리라?!

 

 

<2022년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후원과 협찬 리스트

 

후원 단체 리스트

  1. 사단법인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2. 사단법인 일본조선족경영자협회

 

협찬 기업 리스트

1. 주식회사 A-YO상사(Caraz) : 전심혁 사장
2. 전일화부동산협회: 金山張虎 회장 
3. 글로벌일통 주식회사: 권호군 사장
4. 주식회사 에무에이: 마홍철사장
5. 주식회사 아시안익스크레스: 리룡식 사장
6. 주식회사 G&T: 박춘화 사장
7. 주식회사 플램핫: 리승희 사장
8. 쉼터물산: 김정남 사장
9. 주식회사 베스트엔터프라이즈: 리성호 사장
10. 삼구일품김치: 리성 사장
11. 시루바포또 유한회사: 서성일 사장
12. 주식회사JCBC: 엄문철 사장
13. 마즈도향양양(松戸香羊羊): 권룡산 사장
14. 주식회사 타겐고시스템연구소: 김만철 사장
15. 주식회사 위츠테크놀로지 전호남 사장
16. 주식회사 HANAWA: 리성룡 사장
17. 주식회사 아후로시: 上田一雄 사장
18. 동화(東和)솔루션엔지니어링구 주식회사: 최장록 사장
19. 주식회사 PLZ: 박금화 사장
20. 스튜디오 아키라: 변소화 사장
21. 카바야한방연구소: 로홍매 소장

개인 협찬 리스트

1. 최우림 박사: 중국농업대학 박사,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부회장
2. 장경호 회장: 신일본미술협회 심사위원, 연변대학일본학우회 회장
3. 리숙 사장: 주식회사미사끼(実咲) 사장
4. 리대원 회장: 재일장백산골프우호회 회장
5. 박춘익 사장: 주식회사BTU 사장
6. 구세국 회장: 재일조선족배구협회 회장
7. 박진우 본부장: 金子自動車 본부장 南越谷점장 국가2급정비사
8. 최운학 회장: 일본훈춘동향회 회장
9. 김광림 교수: 일본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일본도쿄대학교 박사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계좌안내:

銀行名:三菱UFJ銀行 日暮里支店(普) 0554611

名義: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

【ニホンチヨウセンゾクケイザイブンカコウリユウキヨウカイ】

후원과 협찬에 관한 문의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메일주소로 보내주세요.

메일주소: info@jkce.org

후원금과 협찬금은 입금을 확인한 후

【一般社団法人 日本朝鮮族経済文化交流協会】명의로

영수증을 발급해드립니다.

 

 지난 응모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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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38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 (조옥순)
응모39 삶의 무게 (배영춘)

응모40 타향살이(허은주)
응모41 모국방문 여행기 (사토우 시오리)
응모42 내 사랑스런 제자에게 (김미향)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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