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시조선족교육애심회에서 해마다 주최하는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역사문화탐방활동은 천진에서 자라난 조선족 자녀들이 민족 언어와 민족 역사 문화풍속을 익히고 민족의 뿌리 찾기 일환으로 동북 연변-장백산행 탐방행사를  진행해왔다. 올해는 코로나사태의 영향으로 천진에서 가까이 떨어진  한단(邯郸)행을 결정했다. 역사문화탐방활동은 한국 재외동포재단의 후원 하에 천진시조선족교육애심회에서 주최하는 "우수인재양성프로젝트" 활동 중 하나이다. 

한단행 단체 사진
한단행 단체 사진

   한단(邯郸)은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자주 등장하는 곳이지만 조선족과의 연관성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의용군의 제2고향으로 불리울 정도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포했던 날이기도 하다. 이번 문화탐방은 천진시조선족교육애심회와 천진사범대학교 천진한국학씨앗형사업단 의 공동 기획으로 이루어졌다. 문화탐방팀은 천진시조선족교육애심회의 문화탐방 책임자이자 부위원장인 김애화 교수, 천진사범대학교 천진한국학씨앗형사업단 전월매 교수, 정향란 교수 그리고 조선족학생과 학부모,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들로 묶어졌다.

상영생(尚荣生) 선생님의 해설을 듣는 우리 일행
상영생(尚荣生) 선생님의 해설을 듣는 우리 일행

   문화탐방을 떠나기 전에 조선의용군의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하북성 한단시 조선의용군기념관 상영생(尚荣生) 관장을 모시고 《조선의용군의 제2고향인 한단》이라는 주제로 온라인 특강을 조직하여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한단 문화탐방의 역사적 배경과 조선의용군의 사적을 공부하게 되었다. 특강을 통해 모르고 있었던 조선의용군에 대해 알게 되었고  사전에 준비한 ‘한단행’ 이라는 책자도 열독하면서 8월 15일 아침 8시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한단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해설을 해주시는 상영생(尚荣生) 선생님
해설을 해주시는 상영생(尚荣生) 선생님

   한단시에 도착한 일행은 우선 "진.기.로.예 열사능원"(晋冀鲁豫烈士陵园)을 참관하면서 항일전쟁시기에 목숨 바쳐 평화를 지켜온 팔로군 열사들의 애국주의 정신 뿐만 아니라 조선의용군 열사들의 불굴의 투혼 이야기를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진.기.로.예 열사능원"(晋冀鲁豫烈士陵园)은 산서성과 하북성, 산동성, 하남성 등 4개 성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진.기.로.예 열사능원"(晋冀鲁豫烈士陵园)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진.기.로.예 열사능원"(晋冀鲁豫烈士陵园)기념비
"진.기.로.예 열사능원"(晋冀鲁豫烈士陵园)기념비

    능원에는 항일전쟁시기의 우수한 혁명가인 좌권장군(左权将军)과 조선의용군 지도자인 진광화(陈光华)열사, 석정 (石鼎)열사 그리고 항일영웅 범축선(范筑先)열사 등 분들을 고이 모시고 있다.

좌권장군과 진광화 열사를 모신 곳
좌권장군과 진광화 열사를 모신 곳

    열사묘 앞에서 무거운 심정으로 국화꽃에 추모의 마음을 담아 세번 절을 하며 인사를 드렸다.    

좌권 장군 묘
좌권 장군 묘

    이어서 한단시 섭현(涉县)에 위치해 있는 129사 총 지휘부 옛 터(一二九师总指挥部旧址)를 참관했다. 마을 가운데에는 "류등과 그의 전우들"(刘邓和他的战友们) 이라고 이름 지어진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면 마을 곳곳에 역사의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일행은 남장마을“南庄村”에 도착했다. 먼저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안겨오는 것은 남장문화활동센터라는 간판이었다.  "중조한우의기념대"라는 글도 위에 새겨져 있었다.

남장마을 문화활동센터
남장마을 문화활동센터

   마을 안쪽에 조선의용군 총부,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가 남아 있었다. 학교 옛터 안에는 커다란 칠판 2개가 걸려 있었다. 위에는 여러가지 색갈의 조선어 짤막글들이 가득했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코로나 발발 전에 해마다 이곳을 찾아오는 조선족 혹은 한국 유람객들이 이곳에 들려 기념으로 글을 남기고 간 것이라고 했다. 

   16일 아침 일찍 "십자령 좌권 장군께서 희생한 곳"(十字岭左权将军牺牲处)으로 떠났다. 좌권 장군은 항일 전쟁에서 희생된 중국 공산당 측 최고위급 직위를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문 저명한 군사 이론가이다.  산 정상에 지어진 자그마한 기념정에 도착하여 참관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유적 보호 중이라  멀리서만 보고 돌아왔다.

좌권장군이 희생된 십자령
좌권장군이 희생된 십자령

    산에서 내려온 후 산서성 좌권현 마전진(麻田镇)에 위치해 있는" 마전팔로군 본부 옛터"(麻田八路军总部旧址)를 참관하러 갔다. 이곳에서 투쟁하고 생활해 왔던 사람들 속에 공화국의 원수 여섯 명, 대장 여섯 명, 상장 19명, 중장 48명, 소장 300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안쪽으로 들어가보면  자그마한 마당에 여러 과로 칸을 나누었다.

   이곳이 바로 팽덕회, 등소평, 유백승, 좌권 등 유명한 항일영웅들이 오랫동안 생활하고 작전을 지휘했던 곳이다.

운두저(云头底)에 있는 조선의용군 옛터
운두저(云头底)에 있는 조선의용군 옛터

   그 다음으로는 운두저마을“云头底村”로 길을 떠났다. 봉화가 끊기지 않고 초연이 자욱한 항일전쟁 시기, 중국인민들이 일본 왜구와 온갖 힘을 다해 항쟁할 때 조선의용군들이 중국으로 와서 피땀과 생명으로 중국인민을 도와 함께 분투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많은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마지막에 이곳에서 희생되었다. 조선의용군은 산서성 좌권현 운두저촌에 머물면서 수많은 조선어로 쓴 항일 구호를 내보냈다고 한다. 운두저촌 남쪽 건축물 위에는 "강제로  끌려나온 동포들! 팔로군이  있는 곳 마다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늘로 향하여 쏘시요!"라는 글귀가  씌어져 있는데 소중한 역사사료로 남아 있다.

운두저(云头底)에 있는 조선어 항일구호
운두저(云头底)에 있는 조선어 항일구호

   17일 날 아침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으로 향했다. 조선의용군 열사기념관 윗쪽 길을 따라 올라가보면, 좌권과 진광화, 석정 열사가 고이 잠들고 있는 곳이 있었다. 일행은 진광화, 석정 열사에게 머리 숙여 인사를 드리고 국화꽃도 한송이 씩 올렸다. 영웅들을 참배한 뒤, 길을 따라 내려와서 조선의용군 기념관을 찾았다. 평소에는 문을 열지 않지만, 특별히 방문단이 있을 때만이 문을 열 곤 했다. 

   하북성 한단시 섭현에 위치해 있는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은 2004년에 건립되었다. 기념관 속에는 조선의용군이 태항산지역에서 항전한 역사를 전면적으로 전시하고 소개했으며, 국내 최초로 조선의용군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전시관이다. 기념관안에는 조선의용군이 중국에서 팔로군과 어깨를 나란히 힘을 합쳐 일본침략군과 싸우고 용감하게 저항한 사적들을 전시했다. 이 전시관 속에는 상용생 관장이 조선의용군 역사를 연구하면서 수집한 사료와 손수 찾아낸 하나하나의 유물과 유적지들에 대한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참관을 마치고 탐방의 종착역인 장자령(庄子岭)으로 길을 떠났다.  장자령에는 영웅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 선열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고 , 태항산에서 가장 붉은 기억을 지닌 곳이다. 이곳은 "팔로군 어머니"로 불리우는  이재청(李才清)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조난을 당한 조선의용군 석정(石鼎)열사와 진광화(陈光华)열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도 있다.

진광화와 석정 윤세주 열사가 희생된 장자령
진광화와 석정 윤세주 열사가 희생된 장자령

   이번 탐방은 번화한 대도시를 뒤로 하고, 핸드폰 신호가 끊길 정도로 정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웅들을 찾아뵙고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뜻깊은 수학여행이었다. 1938년 10월10일, 무한 한구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이 조선의용대를 창립하였으며, 1941년 5월에 항일전쟁의 최전방으로 가겠다는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태항산에 도착하면서, 이 지역 주민과 동거동락하면서 황무지도 개건하고 생산과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분들이 타이항산을 떠날 때 ‘여기는 우리의 제2의 고향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천진사범대 한국학 씨앗형 사업단과 공동 기획 단체 사진
천진사범대 한국학 씨앗형 사업단과 공동 기획 단체 사진

   이번 탐방을 끝으로 참여한 학생들이 자신의 소감을 적어서 하나의 작은 책자로 묶었다. 우리 민족 영웅들을 잊지 않고 오래오래 마음속에 기억하고 오늘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으며, 우리 민족의 언어와 역사 문화를 더욱 잘 알아야 할 필요성과 중요성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글쓴이:  림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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