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들의 깊은 사랑이야기...
"하늘이 명한 성품性에 따라 우리는 그 性을 수행하면서 살아가야 자신만의 인생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것이다."란 구절도 되새김질해볼만 합니다.  

천숙 : 수필가.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동포문학 수필 최우수상 등 수상 다수. 수필, 수기 수십 편 발표.
천숙 : 수필가.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동포문학 수필 최우수상 등 수상 다수. 수필, 수기 수십 편 발표.

봄은 새싹만을 발아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발아하게 한다. 하늘과 땅이 사귀어 만물이 생성하기에 모든 생명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자연의 발아하는 것들을 마주할 때 사랑이라는 감정이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 중에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나를 둘러싼 공기가 따뜻해지고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이 있는 느낌이기도 하다. 

사랑의 인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본성이다. 그러면 사랑의 본성은 무엇일까?

2014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손바닥 크기보다도 더 작은 술잔 한 점이 홍콩 돈 2.8억이라는 높은 가격으로 낙찰되면서 도자기 경매 역사의 비싼 기록을 쇄신했는데 그 어용御用술잔에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명나라 제8대 황제의 사랑 이야기가 은근히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명나라 제8대 황제인 성화(成化)는 명영종 주기진(正統황제)의 장자이다. 명나라가 토목의 변(土木之變)이 일어나면서 명조 제6대 황제인 正統황제는 몽골에 포로로 잡히게 된다. 그리하여 이복동생인 景泰(기원 1450년~1457년)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때 다섯 살 밖에 안된 朱見深(성화황제의 이름)은 두 살 때부터 자신을 돌봐 주던 萬氏여인과 함께 궁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성화황제의 동년은 따뜻함이 없는 고독과 자비감이 가득했다. 어릴 때 심리적인 질병으로 말을 더듬는가 하면 반응도 비교적 무디었다.

그때 그에게 유독 관심과 따뜻한 정을 준 사람은 오직 주견심 (朱見深)보다 17살이나 많은 만씨萬氏 여인이었다. 그녀는 궁 안에 있을 때부터 어린 황태자에게 하얀 젖가슴을 살짝 열어 보여 주고 그의 고사리 같은 부드러운 손으로 만지게 함으로써 매우 빠르게 주견심을 유혹해버렸다. 두려움에 빠져 있던 주견심은 그녀만 옆에 있으면 안정감을 느꼈다.

1년 남짓이 포로로 잡혀 있던 정통황제는 협상으로 풀려나게 된다. 

1456년 경태景泰황제가 병으로 죽고, 1457년 정월 탈문지변奪門之變을 통하여 주기진은 다시 제위를 되찾았으며 연호를 천순天順으로 고친다.

천순天順 8년(1464년), 38세의 나이로 영종이 세상을 떠나자 17세인 주견심이 황제가 된다. 연호는 성화成化였다. 

성화황제는 왕위에 오르자 자신을 어릴 때부터 돌봐준 만씨 여인을 황후로 삼고 싶었지만 태후와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그렇게는 하지 못하고 후궁의 직위 중 하나인 귀비로 책봉해 만씨 여인은 그때부터 만귀비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속셈이 깊었던 만귀비는 어떻게 하면 황제를 구슬릴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귀비였지만, 그녀는 성화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그녀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황후 앞에서도 예의 없이 굴었을 정도였다. 결국 화가 난 황후가 만귀비를 법도로 다스리려고 시도했지만 성화황제는 주저없이 만귀비를 위해 황후를 폐위시켜 버렸다.

성화황제는 서화를 아주 즐겼다. 한 번은 송대 그림 "자모계도子母鷄圖"를 감상하다가 엄마 닭이 여러 마리의 병아리들을 데리고 먹이를 찾는 장면을 보고 모성애에 매우 감동하면서 그 자리에서 시를 써서 엄마 닭이 병아리에 대한 사랑의 정을 표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투채鬪彩 술잔인 계항배鷄缸盃를 만들려는 염원이 싹이 텄다. 그렇게 "계항배鷄缸盃"는 탄생하게 되었다.
"계항배"에는 성화황제를 어릴 때부터 엄마처럼 돌봐준 만씨 여인에 대한 사랑의 정이 듬뿍 담겨져 있었다.

성화황제는 만씨 여인을 위해 경덕진에 많은 작고 정교한 도자기들을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계항배"는 그중의 하나였다.

1487년, 58세인 만귀비는 세상을 떠났다. 성화황제는 비보를 듣고 놀란 나머지, 너무 비통해하며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자 겨우 장탄식하면서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만귀비가 저승으로 떠났으니 내가 살아 뭐 하겠소."하는 발언을 남기며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같은 해에 성화황제도 만귀비를 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역사는 우리에게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사실 만귀비는 성화황제의 어린 시절부터 지극히 돌봐준 엄마처럼 따뜻했던 여인이었지만, 귀비로 된 후에는 악녀로 변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요절하고 다시는 회임을 하지 못하자 다른 후궁들이 임신한 사실을 알기만 하면 억지로 약을 먹여 낙태시키곤 하였다. 그녀는 감시인을 폭넓게 심어 두었지만 요행 민가에서 몰래 양육되어 살아남은 자식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주우탱이고 훗날 홍치弘治제이다.

만귀비는 주우탱도 죽이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 이후로 지쳤는지 다른 후궁들이 임신을 해도 유산시키려고 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주우탱이 태자로 된 후 성화황제는 총 14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두게 되었다.

옛날부터 황제의 후궁비 삼천설이 있었지만, 비의 수가 너무 많아 황제가 한 명 한 명과 함께 단독으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각 비는 황제에 대해 경외심만 가지고 있었을 뿐, 대부분 황제는 "정"이란 무엇인지를 실제로 경험하기가 어려웠다.

중국 역사는 진시황부터 청말 푸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494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그중에 전총을 좋아하는 자는 실재하지만, 만귀비와 명현종 두 사람처럼 환난의 깊음을 함께 겪으며, 나이차이가 크고, 사랑 연대의 길이가 긴, 절절한 사랑은 중국 고대 황제의 사랑 생활에서 어느 것도 없었다고 통계되어 있다. 

하늘은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각각 다른 성품性을 주었다. 주견심이 황태자로 태어난 것도 하늘이 준 것이고, 아버지 황제가 인질로 잡혀간 후로 환난을 겪은 것도, 17살 더 많은 만씨 여인의 도움을 받은 것도 또한 만씨 여인과 사랑에 빠진 것도 모두 하늘이 준 것이다.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라고 했다. 하늘이 명한 성품性에 따라 우리는 그 性을 수행하면서 살아가야 자신만의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성화황제도 그러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 여느 황제보다 다른 사랑의 이야기를 남겼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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