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으로
인물로 보는 중국 조선족 미국 30년 이민사(1)

류설화 이성렬

넋은 생명의 우라늄이다 
——제목에 부쳐

 

2022년「인물로 보는 중국조선족 미국30년 이민사」기획 및 취재 시작;

2010-2022년까지 본인 시집, 르포, 평론, 경영학 등 80여 권 출간;

2021년 까지 아시아시인상 4회 주최, 세계 각국 40여 명 중견시인, 평론가, 북 디자이너들이 수상;

2020년 대만 臺北 紅塵출판사 창립, 총편집;

2019년 뉴욕에서 『국제시단(계간)』잡지 창간, 지금까지 9기출간;

2018년 일본 도쿄 帝文출판사 창립, 총편집

2018년 5월 16일 미국 뉴욕시 국제펜클럽대회에서 뉴욕국제펜클럽 출판부 부장으로 임명;

2018년 뉴욕에서 있은 플러싱(NY Flushing)시인대회에 중국계 조선족으로는 유일한 기획자 및 대표로 참석;

2018년 5월 25일, 미국 뉴욕주 플러싱시에서 화교계시인 4인작품집 출판 기념회 조직;

2018년1월부터 5월까지 『신세기詩報총서』라는 이름으로 중국 50 여명 시인들의 시집 60여권 출판 발행;

2017년 중국 신시 백년 영향력 시인 100명에 입선;

2017년 7월24일, 한국 서울에서 중한시인정상포럼 개최;

2017년 8월, 뉴욕국제작가&예술가협회 창립;

2017년 4월 1일, 《조선족, 노을처럼 아름답고 태양처럼 정열차네》 라는 제목으로 조선족을 소개한 글이 인민일보 국제판 6면에 전면에 걸쳐 게재;

2017년 7월24일, 한국 서울에서 중한시인정상포럼 개최;

2017년 8월, 뉴욕국제작가 & 예술가협회 창립;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자기가 운영하는 신세기출판사에서 세계각국 작가들의 작품집과 전문서 500여권 출판 발행;

2016년 7월부터 2018년 5월까지『신세기중국시인선』『정상시선』 『중국당대시인선』등 이름으로 중국 40여명 시인들의 40여권 시집 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 발행;

2016년 한국 신세기출판사 창립, 주간;

2016년 미국에서『신세기시보』시 전문지를 창간;

2015년 미국 뉴욕 신세기출판사 창립, 출판인;

홍군식 시인
홍군식 시인

중국 정상시인들의 시집 서평 20여편이 중국「星星詩刊(理論)」, 대만 「창세기」, 홍콩「홍콩문학」, 미국「신대륙」등 영향력있는 문학지에 발표, 시작품과 에세이가「詩刊」「星星詩刊」「文藝報」등에 발표;

이것이 최근 몇년간 홍군식이 해놓은 눈에 보이는 일들이다.

중국계 조선족으로 미국 뉴욕문단에서 활약하면서 중국 시인들의 시와 문인들의 작품집들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하고 미국에서 중문으 로 출간하여 미국 화교계문단에 광범위하게 소개하는 한편, 미국, 독일, 이 탈리아, 일본 등 나라에 있는 인맥을 활용하여 중국 시인들의 작품들을 영 어, 독일어, 한국어, 일어, 이탈리아어로 번역하여 다종 의 언어로 같지 않 는 나라들에 광범위하게 소개하고 있는 홍군식이다.

어찌보면 2010년에 금방 결혼한 안해 박정화와 미국 뉴욕에 이주하여 4,5년간 칩거하면서 외계와는 거의 접촉을 하지 않다가 문화의 에너지를 충분하게 저축하고나서 순간적인 폭발력으로 영향력을 발산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옛말에서 말했듯이 “3년 동안 조용히 있다가 한 번 소리를 지르면 하늘 땅을 진감”하는 식이요, 우리말 속담처럼 멀리 뛰기 위해서는 무릅을 구부리고 힘을 저축하는 과정인 것이다.

홍군식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가렬처절한 영혼의 몸부림을 했고, 땀으로 얼룩진 생명의 거리를 지나 왔으며 방황과 실망을 거듭했었고 뼈저린 고뇌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탐구의 길이었다.

 

넋이여, 어디에 있나

 

바로 그때가 조선족문단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6년, 흑룡강신문사와 녕안시선전부, 녕안시방송국에서 조직한 녕 안시조선족통신원 강습반이 흑룡강성 녕안시 마하향 마련하촌에서 열렸다. 당시 홍군식이 살던 녕안시 동경성진 봉화촌에서 통신원을 모집할 때 마침 한족시단에 금방 발들 들여놓기 시작한 홍군식을 찾았고, 이어서 홍군식을 그번 강습반에 보내어 학습하게 하였다.

비록 조선족마을에서 자라났지만 한족들과 인연을 더 깊이 쌓았던 홍군식은 조선족들과는 접촉이 거의 없었고, 조선족신문계와 문단과는 더구나 접촉이 없었다.

이번 강습반에서 홍군식은 흑룡강신문사 문예편집이었던 한춘, 임국현, 한광천, 이태복 등 문인들을 알게 되었고, 녕안시 방송국에 있었던 전경업, 박용일과도 면목을 익히게 되면서 조선족문인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조선족 문단의 활약상도 어느 정도 감각하게 되었다.

이때 홍군식은 벌써 중문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목단강시에서 출간되었던「횃불시보(执火者诗报)」는 홍군식의 시를 2면에 걸쳐 대서특 필로 소개했으며 특별인터뷰까지 냈었다. 뿐더러 홍군식의 시들은「星星 詩刊」등  당시 중국문단에서 이름이 높았던 간행물들에 얼굴을 보이기 시 작했으며 목단강시단, 나아가 흑룡강시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족으로써 조선족문단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던지, 홍군식은 1986년 8월의 어느날, 자기가 쓴 시 500여수를 가지고 당시 녕안시방송국 조선어편집부를 찾았다.

한족학교로 다녔던 홍군식은 조선어에 능숙하지 못했고, 조선어로 창작하기에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다.

홍군식이 녕안시방송국조선어편집부를 찾은 이유는 자기의 시들이 조선족문단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 혹시 한글로 번역할 수 있다면 그 번 역하는 과정에 한글을 배우고 조선어로 창작을 하려는 마음이다.

드디어 1987년 년초, 홍군식의 시는 흑룡강신문 진달래 부간에 실리게 되었고 이로부터 홍군식은 중문시단에서 조선족시단에로의 화려한 변신 을 하기 시작했다. 홍군식의 시들은 저명한 시인, 한춘선생(당시 흑룡강신 문 진달래문예부간 주임)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여러 신문잡지에 추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홍군식의 시와 단평, 수필들은 흑룡강신문, 연변일보, 료녕조 선문보, 길림신문, 연변문학, 장백산, 송화강, 도라지 등 신문과 잡지에서 자주 보이기 시 작했다.

따라서 초기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자기가 창작한 중문시들을 조선어로 번역하던데로부터 199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직접 조선어로 창작하기 시작했으며 중국문단과는 인연을 끊지 않으면서도 조선어 문학창작을 위주 로 하게 되었다.

조선어로 구사하여 조선어로 창작하는 길은 홍군식이 자기가 피줄을 타고 태여난 조선족이라는 이 민족공동체에 대한 재 인식의 길이었으며 조선족문화에 대한 재학습과 재발견, 재 습득의 길이었다.

이로부터 홍군식은 자기가 살고 있는 동경성진에서 녕안시, 목단강 (목단강시에는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가 있었다), 할빈(흑룡강신문사와 흑룡 강방송국 조선말방송국이 있었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게 되었다.

언젠가, 홍군식의 어머니께서 너무 많이 돌아다니기에 홍군식이 외출하는 날은 달력에 빨간 볼펜으로 표기를 했다. 결국, 1991년, 홍군식 어머 님의 달력은 빨간 날들로 가득 찼었고, 외출한 회수가 54회, 외지에서 보 낸 날이 200일을 넘었다.

“휴~, 아무리 친구들이라고 하지만, 휴일날에는 쉬어야 할 것이 아니냐.”

홍군식 어머님의 말씀이었지만 말띠라서 말의 혼을 타고 났던지, 홍군식은 막무가내였다.

신문을 통해서 문인들을 알게 되고 알게 된 문인과 시인들은 직접 찾 아가 만나서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지어 다투고 싸우기까지 하면 서 홍군식은 자기의 탐구를 계속 했다.

홍군식의 이런 떠돌이식 탐구는 어떤 시각에서 보면 자아 본체의 본심을 찾는 길이요, 자기의 현주소를 찾는 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어데서 왔나”, 이것이 홍군식에게는 항상 커다란 의문부호였다.

중학 시절, 어느날 홍군식은 갑자기 자기를 키워준 부모가 자기를 낳아준 친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날벼락같은 소문이었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임을 양부모는 홍군식에세 알려 주었다.

그래서 홍군식은 자기의 현주소가 흐릿해지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마음이 들뜨게 되고 떠돌게 되면서 몸도 따라 헤매이게 되었다.

언젠가 한 번, 홍군식은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만날 번 했고, 만날 수 있었지만,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다나니 자기를 낳은 어머니가 목단강 교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곳은 목단강보다는 녕안진과 더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홍군식은 한번 꼭 찾아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고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싶었다. 녕안에 있는 친구의 집으로 갔다가  30여리 길을 철길을 타고 걸어 자기를 낳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마을까지 찾아 갔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집을 찾았다.

멀리서 보니 중년의 녀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고, 뜨락에서는 어린애 들이 놀고 있었다. 코마루가 찡해나고 눈물이 핑글 돌았다.

울컥 오열을 토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그렇게 홍군식은 묵묵히 서서 한나절이나 보다가 발길을 돌려, 다시 철길을 타고 30리 길을 걸어 녕안 친구네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말도 없이 술을 취토록 마시고 실신했다.

과연, 뿌리는 어데에 있고, 넋은 어데에 있었던가!

기실, 홍군식의 나들이는 뿌리를 찾는 길이였고, 그 뿌리를 찾아 헤매는 길이였다. 생명의 뿌리, 사색의 뿌리, 정서의 뿌리, 사상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었다.

비록 친 어머니와 단 한 마디 말이라도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번 걸음 에 홍군식은 드디어 뿌리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뿌리라고 함은 꼭 혈맥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어울리고 문화와 접목을 했을 때 새라 새로이 스스로의 뿌리를 박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친어머니가 생명을 주었다면 키워준 어머니, 양어머니는 무엇을 주었 을가? 20 여년이라는 생명의 노정에서 친어머니와 양어머니는 무엇을 주었 던가? 친어머니는 생명을 주었고 양어머니는 정과 문화를 주셨다. 생명은 정과 문화와 이어질 때만이 그 가치를 가지게 되고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였던가! 이렇게 보았을 때 낳은 어머니는 생명의 씨앗을 주었을 뿐이고 양어머니는 생명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기반을 마련해주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는 조선족이라는 천입민족이라는 특이한 족속의 운명과도 어 지간히 비슷한 점이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홍군식의 마음은 다시 확 틔이기 시작했고 더는 뿌리와 친부모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되았다.

나에게 차례지는 모든 것들, 그런 것들을 주고 그런 것들을 키우고, 그런 것들을 위해 생명을 함께 해오는 모든 것들이 다 뿌리로 될 수 있고 생 명의 터전으로 될 수 있다는 느낌에 막혔던 신경줄기들이 다 활짝 열릴 수 있게 되었다. 하여 그로부터 홍군식은 협애한 민족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 고 더욱 많은 족속들의 사상을 쉽게 받아 들일수 있게 되었고 중국 문화와 더욱 흔적없이 어울릴 수 있게 되였고 같지 않은 민족의 같지않은 문화와 같지않은 계층의 같지 않은 주장들을 스스럼없이 포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였다.  

이 역시 홍군식이 미국에 이주해서도 중국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접수 할 수 있고 중국 조선족이면서도 미국의 문화를 배척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원이기도 하다.

넋이여, 어디로 가나

 

하다면 어데로 가야 할까, 어떻게 가야 하나?

1987년, 홍군식에게는 좋은 기회가 차례지게 되었다. 아무런 생각을 가지지 않고 신청을 했는데, 생각밖으로 魯迅문학원의 입학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그만큼 홍군식의 작품이 사회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문단의 인정 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배양할만한 문학인이라는 말이였다.

남들이면 다들 기뻐서 환호할 일이였지만, 그리고 문학에 뜻을 둔 홍 군식을 놓고 말하면 너무나도 놀랍고, 당황할 정도로 생각밖의 일이었지만, 홍군식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학교에 갈 돈은 어데서 구할 것인지? 자기 가 학교로 가서 2~3년간 학업에 몰두하다나면 년로한 어머님은 누가 보살 필 수 있고, 어린 여동생과 어머님을 누가 부양할 것인지? 도무지 방도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홍군식은 촌에 서 주는 2백원을 가지고 무작정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으로 출발하면서, 홍군식은 북경으로 직행한 것이 아니라 녕안시, 목단강시, 할빈, 치치할, 대경을 들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결국, 촌과 친구들, 그리고 단체들에세 부조해 준 돈을 가지고 이 리저리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배움의 길이라는 것이 그 렇게 쉬운 일은 아니였다. 시장경제시대에 들어서서, 열정만으로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고, 자기의 꿈을 이룰 수 없음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들끓는 정열에서 침체의 나락을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2~3년간, 홍군식은 독서에 매몰되고 말았다. 오로지 독서로 만이 텅 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고 독서로만이 고갈된 심정을 달랠 수 있었다.

홍군식의 독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빠르다. 하루에 시집 서 너 권 쯤은 술을 마시면서 볼 정도, 남들이 다 읽기 힘들다는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같은 경우도 몇 일에 끝내는 정도다.

홍군식은 나름대로 독서를 자기 식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책을 본 다”이고,  다른 하나는 “책을 읽는다”이다. “책을 본다”는 말은 말 그대로 책을 번지면서 보는 것이다. 깊이 내용을 터득하려 하지 않고, 기억하려고 도 하지 않고 다만 소일거리, 아니면 심심풀이로 보던가, 특정된 목표로 보는 것, 즉 구성을 보거나, 스토리에만 국한 하거나, 아니면 역사사건의 시간만을 알아본다는 식이다. 때문에 자기의 목표를 제외한 내용에는 관 심이 없어 속도기 기적이라 할 정도로 빠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물론 지식의 섭취거나 내용의 이해에 목적을 둔 독서이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 와는 많이 속도가 더디고, 지어 책 한 권을 몇 번에 나누어 보거나, 필기를 하고 책 머리에 주해를 달고, 심득을 다는 식으로 읽는 것이다.

이 2~3년간의 침체로 하여 독서에 매몰된 자습으로 홍군식의 지식량 은 노신문학원에 가서 배운 것 보다 못지 않을 정도로 폭발성적인 성장을 가져 왔고, 이 시기에 홍군식은 문학과 시에 대한 자기의 기반을 굳건히 닦에 되었다.

그러던 1993년, 홍군식은 창업의 꿈을 안고, 아니, 밥벌이의 꿈을 안고 천진으로 향했다. 말이 “하해”이지 “하해”한 바다사람들의 밥벌이는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경직한 성미로 무슨 일이던 보는 그대로 말을 하고 표달을 하는 홍군식에게서는 더욱 그러했다.

1993년 가을, 그가 취직했던 한국 독자기업인 어느 주방용품회사, 늦여름의 어느날 아침 홍군식은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아침 식사 시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식당에 가 식사를 하려고 밥상 을 마주하고 보니 장국이 어제 저녁에 먹고 남은 장국에서 쉰내가 물씬 풍겼다. 자기 혼자의 감각이 틀린것이나 아닌지 하여 곁 사람에게 물어보 니 다들 쉰 장국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내지 못 했다. 사장의 위엄에 혹 말이 빗나갔다가 회사에서 쫓겨날까 무서워 누구 도 나서서 말을 하지 못했다.

홍군식은 일어서서 주방장에게 왜서 쉰 장국을 직원들에게 먹이나, 이 여름에 쉰 장국을 먹고 병이라도 나면 누가 책임져 주나, 라고 질문을 들 이대니 주방장은 없는 주제에 주는 대로 먹을 것이지 무슨 잔소리냐고 했 다. 이렇게 옥신각신 다투다나니 서로 화가 동해 언성이 높아졌고, 화가난 홍군식은 손길이 가는대로 밥상을 뒤번져 버렸다. 마침 식당을 지나가던 사장이 요란한 동정을 듣고 들어오다가 홍군식이 밥상을 뒤집어 엎는 정경을 목격했다. 사장은 쏜살같이 달려와 대야로 홍군식의 머리를 내리쳤 다.

머리 가죽이 금방 강타에 찢겨져 피가 쏟아졌고, 그 자리에서 홍군식 은 폭 꼬꾸러 졌다. 깨어나니 벌써 병원에서 처치를 한 다음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홍군식은 실망하고 말았다. 직원들의 정당한 이익을 위해 자기가 나서 싸웠는데 직원들은 외려 사장의 편을 했고 자기가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무감각했고, 누구하나 나서는 자가 없었다. 외려 주제넘다고 손가락질을 했고 비웃기만 했다.

완전 실망한 홍군식은 친구의 도움으로 보상금을 받은 다음 사직을 하고 천진에서 류랑하다가 남하하여 청도로 내려갔다.

 

넋이여, 자리를 찾나

 

청도는 홍군식이 탈피를 한 다른 한 곳이기도 하다.

언젠가, 어린 시절, 고향에서 초중을 다닐 때, 문학에 취미를 둔 홍군 식은 시를 몇 수 써가지고 당시 이름이 있는 어느 시인을 찾아가 시가 어 떤지를 보아달라고 하면서 학생으로 받아달락고 간절히 요구했다. 하지만 생각밖으로 좀은 안면이 있는 그 시인은 홍군식에게 너는 시를 쓸 애가 아니다, 애초에 시에 대해 생각을 하지 말라, 문학은 포기하라고 판결 을 내렸다.

하지만 홍군식은 실망을 하지 않고 고집스레, 전보다 더 열심히 문학 에 몰두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청도에 갔을 때 누구도 홍군식을 곱게,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런 성격이, 그런 방식으로 무슨 일을 해내겠느냐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산선 수전 겪을 대로 겪은 홍군식이 그런 말에 맥을 풀 사람이 아니였다. 홍군식은 끈질기게 자기가 할 일들을 하기에만 열심했다.

1999년, 이 회사, 저 회사를 전전하던 홍군식은 컴퓨터판매를 위주로 하는 IT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사장은 홍군식 자신보다는 서너 살 아래 인 젊은 한족친구였다.

큰 컴퓨터 판매회사와는 달리 수익은 한 달에 월급을 주고나면 몇 천 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일년에 고작해야 몇 만원 버는 정도였다.

홍군식은 젊은 사장에게 제의했다. 컴퓨터를 파노라 시간을 허비하기 보다는 광고지를 하는 편이 수익이 훨씬 낫을 것이다, 투자도 더 할 필요 없이 있는 컴퓨터와 있는 직원들을 데리고 광고지를 운영하면 된다, 그리 고 광고지를 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 얼마든지 뒷심이 되여 줄 수 있을 것 이라고 했다.

컴퓨터회사의 젊은 사장은 홍군식과 함께 일주일 간 시장조사를 하고 가능성 검토를 하고나서 결국은 컴퓨터판매업을 접고 광고지를 하기로 결 심을 했다. 하여 홍군식이 컴퓨터회사에 입사하여 한 달 반이 되기도 전에 컴퓨터회사는 갑자기 원래의 주업을 접고 광고지를 운영하는 데로 목표를 바꾸었다.

물론 광고수주는 홍군식이 주력이 되었다.

“제가 보기에는 말입니다. 저 거리에 있는 간판들이 다 돈입니다.”

이 말이 홍군식이 그 시절 거의 매일마다, 식사할 때, 술을 마실 때 하는 명언이였다. 광고를 수주하려니 광고지 샘플이 없어 호텔 카운터 앞에 있는 중문광고지를 몇 개 가져다 들고 다니며 한국회사나 조선족들이 운영 하는 회사들에 뛰어 들었다. 물론 성공횟수는 적었지만 하루세 수 십 개의 회사를 다니다나니 광고수주가 늘어났다.

“이제이(Easy)”, 2001 년초, 60페이지, 전면동판지 칼라인쇄의 청도 최초의 중국인이 운영하는 한글 광고지가 발간되였다. 묵직한 전면 채색칼 라로 인쇄된, 자기가 직접 광고를 수주하고, 자기가 직접 편집하고, 자기 가 직접 배판하고 교정을 본 잡지를 보는 순간, 홍군식은 끈끈한 자부심 을 느꼈다. 너무도 묵직하여 전자저울 위에 놓아 보니 무게가 무려 6백그 램이나 되었다.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한 근 두 냥이나 되었다. 이로부터 홍군식은 출판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Easy가 출판되기 시작해서 제1기, 즉 창간호 의 순익이 6만원이나 되었고 2기 부터는 매 기의 수익이 10만 원을 넘어 섰다. 신심을 가진 젊은 사장은 마음이 부풀기 시작했고 따라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업무량보다 훨씬 넘쳐나는 직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 다.

홍군식은 한 걸음 한 걸음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겉으로 팽창하기 보다는 내실을 다지자고 조언하고 싶었지만 말을 삼가했다. 한창 팽창단계에 처한 사장이 홍군식의 건의를 접수할 수가 없었다.

4기까지 마무리 한 후, 홍군식은 사표를 냈다. 그가 사표를 내자마자 어느 조선족기업인이 광고지를 하겠으니 동업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6기 까지 출판해 수익이 오르기 시작하자 사장은 이 핑계 저 핑게로 홍군식이 사표를 내도록 핍박했다. 홍군식은 다시 사표를 냈고, 사표를 내자마자 다 른 기업인이 찾아와 동업을 제의했다. 이렇게 하다나니 청도에서 홍군식이 창간한 조선족광고지만도 5, 6종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 같이 홍군식이 사표를 낸 회사들은 다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이상하게 도 홍군식이 떠남과 함께 광고주들도 떠나고 홍군식이 입사를 하면 광고가 따라 입사를 했다.

“군식이 자체가 광고라니까.”

어느 청도에서 기업을 한 지 15년이 되는 어느 한 한국기업인의 말이었다.

광고지를 하다나니 신문, 잡지사들과 접촉이 잦아지게 되었고 또 접촉 을 많이 하다나니 그 업무에 익숙하게 되었다.

2004년, 월, 홍군식은 흑룡강신문사 청도지사에 입사를 하게 되면서 신문과 인연을 쌓게 되였다.

흑룡강신문 청도지사는 홍군식의 활동무대였고 홍군식이 사회와 접촉 하는 플랫폼이 되었다.

흑룡강신문 청도지사에 근무하는 기간, 홍군식은 편집과 기사를 쓰는 한편 많은 전문란과 취재기획을 했었고, 성과도 풍성했다.

전경업의「거꾸로 보는 도덕경」「중국진출36계」, 정용호의 장편소 설「히든카드」등이 홍군식의 기획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였다. 이뿐만 아 니였다.

청조 조선족기업인들을 기획조명한 실화문학「시대를 클릭하는 사람 들」은 청도에서 창업하고 실적을 올린 재청도조선족기업인 30여명을 기 획 조명한 청도 최초의 조선족기업인실화문학집이다. 여기에서 힘을 얻은 홍군식은 뒤이어 청도의 조선족녀성기업인들을 기획조명하여 조선족녀성 기업인들의 창업과 생활을 실화 형식으로 기록하여 신문에 발표함으로, 청 도 최초의 조선족녀성기업인 실화문학들이 세상을 보게 되였다.

이 시기 사업과 함께 창작활동도 왕성하여 시집「세기말의 음모」 「360 도 고독」 등이 출판되기도 했으며 신문 잡지들에 작품들도 수두룩 발표했다.

이로부터 홍군식의 인생길은 신문, 출판과 갈라놓을 수 없게 되였고 홍군식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신문, 출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넋이여, 이렇게 날고있나

분명, 홍군식은 날기 시작했고 날고 있고 더 높이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뉴욕에 거주한 지 30여년이 되는 정상의 문학인들도 하지 못하는 일 을 홍군식은 해내고 있다. 2017년, 홍군식은 자기가 살고 있는 플러싱에 거주하는 화교계 문학인들과 함께 「북미 시인시선」을 기획하여 편집, 출 판하여 뉴욕 각 매체에 올랐으며 화교계최대TV사에서는 전문취재와 더불어 특별인터뷰까지 내기도 했다.

홍군식은 자신의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중국화가들, 중국 시인들, 중국 문인들의 작품과 문화정신을 미국과 한국에 전파하기에 전념하였으며 이미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2017년 9월, 西安의 여류미술가 廖婉凝 화가의 작품전을 기획 추진 하여 플러싱도서관에서 진행했으며 중미우호협회 王渝 여사의 작품집출간 기념회를 기획, 진행하여 미국 최대 중문신문인 侨报에 최초로 두 개 면에 한 작가의 글, 즉 홍군식의 서평이 실리게 되어 그 영향력을 충분히 과시 했다.

미국에 이주 한 후 홍군식은 간병을 한 적이 있다. 80여세 되는, 반신 불수로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로인을 돌보았었다. 노인은 몸은 불편했지만 정신은 말뚱하여 쉴 새 없이 지난 일들을 말했고, 때로는 알아 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홍군식이 듣거나 말거나 자기가 할 말만 했다.

알아 들을 수 없어도 홍군식은 짜증을 내지 않고 들어주기만 했다. 그 들어주는 가운데서 홍군식은 많은 것들을 터득했다. 어떤 말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듣느냐도 중요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미국에 이주해서 처음으로 종교학 석사공부를 하고 종교학 석사를 끝낸 다음 철학 박사공부를 했던 홍군식은 말이 바로 신이라는 느 낌을 가지기도 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아무리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였 던가.

그래서 교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말이 바로 사람 사이 서 로 알게 할 수 있는 신이요, 말이 바로 교류의 다리이다.

그래서 홍군식은 신문과 출판에 더욱 열심한다.

홍군식은 출판을 시작해서 자기의 매년 목표를 적어도 중국 50명 시인들의 시를 북미 화교계문단에 소개하고 중국 시인들의 시 적어도 1000수를 한국어, 영어, 일본어, 이딸리아어, 독일어로 번역하여 발표하고 출판하는 것으로 잡았다.

홍군식의 친구들은 다들 미국에 이주한 화교계 사람들 중, 오로지 홍 군식 만이 중국식 作息法을 쓰고 있다고들 한다. 뉴욕과 북경시간의 시차 가 12시간이니, 중국에 거주하는 문인들과 교류를 하려면 홍군식은 뉴욕 시간으로 한 밤중, 중국시간으로는 낮에 해야 한다.

홍군식을 잘 아는 사람들은 홍군식이야말로 글로벌 평평한 시대를 가 장 잘 향수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홍군식은 미국 뉴욕에서 중국 시인들의 작품을 받아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번역을 한 다음 미국의 바코 드를 사용해 한국에서 출판한다. 전형적인 글로벌형 문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대1로의 시대”에 홍군식의 말을 따르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중국의 문학과 문화를 구미와 한일에 더욱 많이 소개하는 일이란다.

“외국에서는 아직 중국에 대해 너무나 아는 것이 적어요. 그래서 저희 들이 해야 할 작업이 너무나도 많고 숙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서로 잘 알아야 교류가 원활해 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홍군식은 열심히 뛰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뛸 것이라고 한다.

비록 지금 세계정세가 복잡하고 위험하지만, 홍군식은 그럴수록 자기 가 더 많을 일을 해야 하지 않나고 말한다. 정세가 복잡하고 모순이 많을 수록 교류와 서로의 만남이 필요하지 않은가?

홍군식은 그래서 밤낮 없이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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