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 수필가
박영진 수필가

 “야, 진짜 오래간만이다. 영팔아, 정말 반갑구나.”, “그래, 벌써 30년도 넘는구나. 세월이 참 빠르네.”, “중국에서도 못 만나던 동창들을 이렇게 한국에서 보게 되는구나!”, “한국 땅이 참 좁고 한국이 정말 작기는 작은가본다.”

36년 만에 만난 고중시절 동창들이 뜨겁게 인사를 나누며 반가와 야단들이다.

베이징에 있는 한국기업에서 부장으로 일하는 방홍범이 서울본사에 출장을 나왔다가 동창들 보고 싶어 얼굴 좀 보자고 해서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그동안 모임을 자제하다가 3년 만에 다시 만나는 동창모임이다. 통성명을 할 때면 항상 자기는 조선의 명재상 유성룡의 후손인 버들 유씨(柳)라고 밝히는 유한식 회장이 즐거운 식사자리를 마련했다며 누이동생네 가게인 봉천동에 있는 동해샤브샤브로 우리를 초대했다.

서울지하철 2호선 봉천역 2번출구 근처에 있는 이 가게는 우리 왕청2중 동창들 만남의 장소(거점)이다. 동창생 누이동생 가게여서 내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기분 좋은 덕담을 나누고 즐거운 식사도 하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남길 수 있어 나는 그게 그렇게도 좋았다. 어머니가 한국국적인 연고로 20년 전에 벌써 한국에 나와 국적을 취득하고 건설현장에서 탄탄한 삶의 터전을 마련한 성공한 목수오야지라고 자부하는 유회장은 10억도 넘는 아파트에서 9살 연하의 예쁜 마누라와 재혼해 살고 있는데 동창모임 식사비용은 번마다 자기가 계산한다. 그리고 공짜를 진짜로 싫어하는 내가 2차 유흥비를 결제해서 동창들이 낸 회비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동창회 초대회장인 박남철 서울지점장이 한국파견근무(9년)를 마치고 장춘에 있는 중국은행으로 복귀하면서 자기가 없어도 너무 섭섭해 말고 동창모임을 자주 가지며 우정의 꽃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재미나게 잘 살라고 200만원이나 되는 후원금을 주었다. 동창들은 이 돈으로 시간을 내서 좋은 곳으로 2박3일 여행을 가자고 계획했다.

그런데 재수 없는 영팔이 때문에 300만원 회비를 한꺼번에 날려버리고 여행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코로나19 위기가 터지기 전, 동창들이 모여 송년회를 가졌었다. 친척방문차로 한국에 온 동창들인 연길시 연신소학교 교사 방미화와 왕청 하마탕촌 김정봉촌장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이인복부회장이 지인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영팔이를 만났는데 이번 동창모임에 그도 초대했다. 

최나발이라는 별명을 가진 영팔이는 학창시절부터 엄청난 말썽꾸러기였다. 나보다 네 살 이상인 그는 묵은돼지라는 불미스런 별칭도 갖고 있다. 습관적으로 입을 씨물씨물한다고 씨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늘 이상한 짓과 엉뚱한 소리를 해서 선생님을 화나게 했다. 어느 한번은 수학시험지에 이름 쓸 때 장난치며 최영팔을 최08이라고 쓰기도 했다. 또 선생님이 “넌 왜 자꾸 왕청같은 소리만 하느냐?”고 하면 ‘나는 왕청 사람이기에 왕청같은 소리를 합니다.’고 기를 채웠다. 왕청현 왕청촌 태생인 영팔이는 어쩐지 왕청같은 생각에 왕청같은 말만 하며 왕청같은 짓을 찾아하는 왕청같은 사람 같았다. 

동창모임에서 영팔이를 만났더니 처음에는 너무너무 반갑다며 나팔처럼 생긴 나발 입을 나불대며 떠들어 대다가 술이 좀 거나하게 되니 내 손을 꼭 잡고 짜증나게 자기를 형님이라고 하란다. 나보다 나이가 네 살이나 많다고 말이다. 영팔이가 형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나이차이가 많아도 동창은 동창이지 않는가? 지금 다 같이 늙어가는 판에 나이를 따져선 뭘 하려는지. 정말 기분 나쁘고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창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삐져서 간다는 소리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진, 술에 취한 영팔이를 찾느라고 유회장이 봉고차를 몰고 봉천역에 나갔다가 재수 없이 교통경찰의 음주운전단속에 딱 걸렸다. 후에 법원에서 범칙금 300만원과 운전면허정지 1년 판결을 받고 엄청 고생을 했다. 동창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범칙금은 우리가 회비로 해결했다. 유회장이 극구 만류했지만 이인복이 동창들 성의라면서 대신 전해달라고 돈을 누이동생에 전달했다. 지난 8월, 여름휴가철에 유회장이 감사의 인사로 우리를 초대하여 영종도 을왕리해수욕장에 가서 해수욕도 즐기고 요트도 타고 바닷가 전망 좋은 횟집에서 조개구이와 회를 먹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무산된 2박3일 여행을 대체한 당일여행이었다.    

세상은 쉽게 변해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남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 좋아 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날 일로 동창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싫어하니 영팔이는 동창회 위챗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에 온 방홍범이 한동네에 살던 영팔이도 함께 보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를 초대했다. 동창들이 어쩌다 만나면 서로 덕담도 나누고 좋은 말만 하면서 분위기 좋은 시간을 보내면 좋은데 꼭 별난 사람, 이상한 사람, 네가지 없는 사람(싸가지 없는 사람)이 있어 기분을 망치게 할 때가 있다. 최나발 영팔이처럼 말이다. 

연변에는 남자 나이 45세 되면 철이 든다는 말이 있는데 이제는 지천명나이까지 먹었는데도 영팔이는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동안 한국 노가다건설현장에서 멍청해 진건지 아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정신이 잘못된 건지 참 안타깝기만 하다. 순이 부친이 한 달 전에 한국에서 돌아가셨는데 묘소도 못 쓰고 골회를 날렸다고 하니 자기 부모님을 개나 돼지가 죽은 것처럼 마구 버리면 쓰냐고 핀잔을 준다. 정성껏 잘 모셔야 한단다. 그래야 자식들도 잘 되고 하는 일도 척척 잘 풀린다고 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한치 앞의 일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날, 영팔이가 장난으로 한 불쾌한 말이 란자와 정자의 기분도 엉망으로 만들었다. 여성들의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란자야, 정자야 하면서 말이다. 학창시절에도 이 이름 때문에 란자와 정자는 엄청 놀림을 당했었다. 란자는 한국에 와서 김연우로 개명했고 정자도 썩 오래전에 중국에서 돈을 써가면서 좋은 이름으로 고쳤는데 사람들이 새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정자란 이름을 그냥 쓰고 있단다.
 선순이도 홍순이라 개명했다고 하니 영팔이가 또 “왜 똥순이라고는 고치지 않았느냐? 이름을 바꾸면 새사람이 되고 뭐 운명이 바뀌고 팔자도 좋아 진다더냐!”고 해서 선순이를 화나게 했다. 인복이도 주연(姝延)이라고 이름을 고쳤다는데 왜들 다 그렇게 자기 좋은 이름을 바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복중의 복은 인복, 복중의 최고 복도 인복(인연복)이라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번에는 인복이가 정치적인 말을 해서 내 기분을 망쳤다. 이미 고인이 된 박원순 전임 특별시장의 성추행사건을 끄집어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돈 있고 권력만 있으면 다 나쁘게 변한단다. 서울특별시장이라고 뭐 다르겠느냐고. 여자는 돈 없으면 나쁘게 변하고 남자는 돈 있으면 나쁘게 변한다면서 우스개도 피우면서 말이다. 인권변호사로 한평생 사회활동에 헌신한, 제집까지 팔아가면서 남을 도와주고 36억이나 기부하며 가족에게는 7억 빚만 남기고 간 그런 분을 모독하다니. 억울하게 떠나간 슬픈 분을 위해 ‘님 가시는 마지막 길에’란 애도의 글을 그 당시에 동북아신문에 발표했던 나였다. 내가 존경하는 분을 내가 사랑하는 인복이가 함부로 비난하니깐 말이다.

내가 인복에게 애모의 감정이 싹터서 짝사랑 하게 된 것은 이팔청춘 16세 사춘기였다. 인연이라고 할까 나보다 한 살 이상인 인복이와 나의 고모사촌 인숙이는 어렸을 때부터 한동네에서 함께 커왔고 나의 친누나 영복이와는 초중 때 친구였는데 우리 집에도 여러 번 놀러 왔었다. 그리고 왕청2중 때는 나와 한반을 다니는 동창이었다. 인복이라는 이름도 두 누님의 이름과도 비슷하다. 이런 인연도 참 드물다. 

인복이 말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울적해 있던 내가 방홍범의 말을 듣자 흘러간 옛일이 생각나 금시 웃음이 나오고 기분도 좋아졌다. 우리의 고중시절, 그 당시에는 대학고시에 합격되어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으면 동네잔치를 벌이는 게 유행이었다. 방홍범이는 자기 아버지가 돈이 아까워 부들부들 떨면서 개 한 마리도 못 잡아주어 몹시 서운했는데 배초구에 사는 배포가 큰 영진이네 아버지는 통도 크게 소를 척 잡아서 동네잔치를 벌리는 것을 보고 엄청 놀라고 부러웠다고 했다. 하긴 나도 그런 즐거운 추억이 있어 하늘나라에 계시는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난다. 그 후에도 내가 결혼할 때 아버지는 또 소를 잡았고 누님이 시집 갈 때는 왜서인지 소는 안 잡고 돼지를 잡았었다. 우리 박가네 가문이 뼈대 있는 현장가문이어서 사람도 배포가 크고 통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 피는 못 속이니깐.

몇 해 전에 성좌문학사 카톡방에 내가 이전에 아버지가 소를 잡은 이야기를 자랑삼아 올렸더니 다들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문우(文友) 송미옥 수필가는 소가 얼마나 비싼데 아들이 대학에 붙었다고 소를 잡느냐면서 뻥친다고 댓글을 달기도 했다. 1988년, 그때 소고기 육질이 최상급인 3살짜리 연변황소는 1000원쯤 했다. 소고기 양이 너무 많아서 잔치에 다 쓰지 못하니 일부 소고기는 팔기도 했다.

한국가요 ‘잘났어, 정말’이라는 노래가 나의 애창가 18번지이다. 네가 잘나 일색이더냐 내가 못나 바보였더냐,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어울리며 사는 거지, 잘나면 잘났지 못나면 못났지 제멋에 사는 거지, 그저 사는 게 행복한 거지! 배포가 크나 통이 크나 깍쟁이로 사나 좀생이로 사나 산다는 건 행복한 거지!

우리들의 동창모임, 그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동창모임에서 내가 피부로 느낀 반드시 주의할 점 몇 가지를 말하고 싶다. 정치와 종교에 관한 말이나 불쾌한 말은 하지 말고 남의 허물과 흉은 보지 말며 되도록 덕담과 좋은 말만 많이 하면서 건설적인 대화와 우아한 언어로 품위 있고 격이 있는 만남이 되어야 한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모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의 모든 분들도 즐거운 동창모임을 자주 가지며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우정의 푸른 소나무 영원하리라!(友情之松, 萬古長靑!)

                             2022. 08 28 전북 김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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