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달관의 경지, 초탈의 미학

—변창렬시인의 시 세계를 진맥해본다

□ 김현순

 

 

어찌 보면 인생은 잠깐 들렸다 가는 생명존재의 흔적으로 세상에 낙인찍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찰나의 우주를 움켜잡고 모질음 쓰는 깨달음의 과정이, 정제된 삶을 걸러내어, 영혼의 하늘을 별 박아두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 심처에서 사금파리들을 한데 모아 깨달음의 이미지로 세상을 재조명하는 작업, 그것이 곧 예술의 탄생에 덧거름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마음 속에 무지개는 있다. 하지만 그 색상으로 현실을 조명하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언어를 통한 예술의 실천, 그것이 찬란한 시 탄생을 야기시킨다.

오늘날 열린 글로벌시대에 한 줄 시로 세상을 숨 쉬는 시인이 있다면 그가 바로 변창렬시인이라는 현실 앞에 머리 숙여 경의를 표시할 뿐이다.

시(詩)는 언어로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주지하는바 사찰은 인간이 하늘과 대화를 나누는 숭엄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는 하늘의 계시를 받아 적는 깨달음의 징표이기도 하리라.

시에는 시인의 하늘이 그려져 있다. 또한 그 하늘을 넘나드는 우주에는 시인의 인생관과 철학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시는 곧 그 시인자체라고 일컬어 왔다.

큰 별이 되어 눈부신 빛을 산발하는 변창렬시인, 그의 시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세상과 대화 나누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그 신비의 베일을 벗겨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보자.

2022년 “송화강”문학지 제2호에 발표된 변창렬 시인의 시작(詩作) 네 수가 필자의 가슴에 감동으로 새겨진 원인은 그 시작(詩作)들이 담고 있는 사상적 내함보다도 그것에 대한 표현기법이 각별히 구미를 동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예술이란 삶에 대한 느낌, 감수, 생각 따위를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류사회에 문명이 개입되면서부터 인간은 자신의 심성을 은닉시켜 상징으로 펼쳐 보이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것의 세련과 발전은 모든 예술의 기저(基底)로 인지(認知) 되어온 까닭에, 시에서는 특히 화자의 내함을 언어를 통한 표현기교로써 펼쳐 보일 것을 원칙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변창렬 시인은 바로 이 점에서 남다른 스타일을 시 속에 용해시킨 전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변창렬 시인의 네 수의 시 가운데서 「나도 밖에서 안으로 산다」, 이 한 수를 각별히 핀센트로 집어 그 세포를 해부해 보련다.

… …

소화계통의 통로를 바깥이라 한다

먹은 것이 입으로 들어 가

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겉에서 밖으로 빠지는 과정이다

오히려 항문이 속이다

방귀 소리가 우렁찬 것은 안에서 나오기 때문이란다

—詩 「나도 밖에서 안으로 산다」에서

살이에 대한 화자의 형이상적 이념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하지만 그냥 이념의 발설로만 안겨오지 않는 것은 그 이념을 장면의 상징처리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먹은 것이 입으로 들어가/ 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겉에서 밖으로 빠지는 과정”이라는 이 형상적인 묘술(描術)을 통하여 헛도는 삶의 허무함을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역설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화자는 “소화계통의 통로를 바깥이라 한다”라고 서슴없이 역점 찍어 말해주고 있다.

이 대목에서 “소화계통의 통로를 바깥이라 한다”는 표현은 이념의 역설로 보여준 직설인 듯 싶지만, 화자는 그것에 대한 이해를 “먹은 것은 겉에서 밖으로 빠진다”는 표현과 “방귀소리”가 “안에서 나오기 때문”에 “우렁찬” 것이라는 해학적 표현으로 그 가시화 실현을 이룩해낸다. 이런 표현기법은 추상적인 이념을 형상적인 이념전달로 전환시키는 보다 좋은 효과달성에 점수를 따낸다.

… …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서로가 끌어안는 것은 안이다

입맞춤은 바깥과 바깥이 어울리는

형식의 하나일 뿐

바깥을 속이라고 서로 빨지만

겉을 빨고 얼굴이 붉어지는 표현 아닌가

—詩 「나도 밖에서 안으로 산다」에서

이 대목에서도 비누방울처럼 세상이 겉도는 이치를 해학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서로가 끌어안는 것은 안이다”는 구절에서 마음과 마음의 융합을 “서로가 끌어안는” 가시화된 형상으로 상징처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허위적인 일면도 “겉을 빨고 얼굴이 불어지는” 형상으로 에둘러 보여주고 있다.

직설 아닌 에두름기법으로 화자의 이념표출을 실현해나가는 놀라운 기법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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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고 피를 만드는 일 외

손으로 못 만지는 곳이

밖이다

눈에 보이는 안이란 얼굴뿐이다

읽어도 밖만 읽어지는 껍질의 안

그 속에 우주를 감춘 눈동자가 제일 깊다

—詩 「나도 밖에서 안으로 산다」에서

이 시의 마지막 대목으로서의 이 부분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 전부가 진실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전부가 허위가 아님”을 역설로 펼친다. “밥 먹고 피를 만드는 일 외/ 손으로 못 만지는 곳이/ 밖이다” 라는 형상적 비유는 상대적 진실의 이치를 “밥 먹고 피를 만들고” “손으로 못 만지는” 장면의 움직임으로 기술처리를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안이란 얼굴뿐”, “읽어도 밖만 읽어지는 껍질의 안”, “우주를 감춘 눈동자가 제일 깊다”, 이런 표현은 죄다 세상에 대한 화자 달관의 경지를 형상의 상징으로 유력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수의 시가 세상에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이처럼 내함의 적나라한 직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함에 대한 체현을 상징의 형상화로 최대한 이룩해내는데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상징의 형상화는 장면의 환각적 흐름조합으로 그 정체의 질서가 형성되는데, 이른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의 감각론」에 그 이치를 두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감각을 발단으로 한 관념적 요인이 결정적 역할을 일으킨다는, 초월적 이데아(idea)가 변창렬 시인의 시학관을 움직이고 있는 듯 싶다.

감각적 상관물로 구성된 가시적인 세계와 별도로 정신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이데아계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볼 때, 이데아(idea)야말로 궁극적인 참된 실재라고 느끼는 관념시(주지시) 계열의 시인들은 삶과 생에 대한 현실초탈의 영혼경지를 계몽적 이념으로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한 수의 시에서 감명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도가 있다.

화폭의 조합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스토리의 조합으로 정감의 높이를 끌어올리는 것, 그리고 이념의 조합으로 화자의 경지구축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이것들은 세상의 공감대를 울려주는 것으로써 그 자체의 존재가치를 완성해나간다.

변창렬시인의 시  「나도 밖에서 안으로 산다」의 경우 완전 철두철미한 이념조합의 경우라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보여주고저 한 이념을 형상의 상징조합으로 성취해냈다는 것이 기존의 관념시(주지시)의 룰을 격파한, 탈령토의 초탈의식 체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변창렬시인의 시작(詩作)들은 상기의 시작(詩作)과 같이 신관념이 빛발치는가 하면 서정의 흐름을 탄 스토리식 관념도 이채를 띠고 있다.

… …

가난으로 늦어 결혼하신 아버지

일곱을 낳고 다섯만 키웠는데

또 하나를 먼저 보내야 했던 아버지

떨리는 뼛속에 자식을 묻으셨다

—「단추를 꺼꾸로 채워라」에서

가난에 찌들은 한생을 살아온 아버지의 겸허한 사랑을 읇조린 이 시는 그냥 눈물어린 스토리를 엮어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속에 삶에 대해 득도한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도 화자는 그냥 스토리식 나열로 엮어나간 것이 아니라, 변형이미지의 상징을 재치 있게 펴 보이고 있다. “떨리는 뼛속에 자식을 묻으셨다”는 구절은 자식을 앞서 보낸 아버지의 피 터지는 심정을 형상적으로 보여준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뼛속에 자식을 묻는” 표현은 웬간한 상상적 기질이 없이는 도저히 구사해낼 수 없는 시구(詩句)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가슴에 묻는 것도 아니고 기억 속에 묻는 것 도 아닌, 뼛속에 묻는다는 형상은 화자 영혼의 경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수의 시에서 화자의 경지를 보여주는 장면내지 형상은 화자 득도의 경지와 정비례 된다. 변차렬 시인의 시에서 이런 표현은 거의 매 편의 작품마다에 그 흔적을 역력히 비춰 보이고 있다. 이는 시인의 심후한 내공과 영혼승화의 질서와 갈라놓을 수 없다.

이외에도 화폭조합을 통한 이념체현의 시작품들도 있지만, 짧은 편폭의 이 글에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변창렬 시인은 당대 조선족시인들 가운데서 놀라운 의력으로 다산을 꽃피우는 시인이다. 시어 구사에서 외래어를 배척하고 순수 고유 우리글 언어의 높은 함금량으로 이미지구축을 선호하는 시인이라고 볼 수 있다. 메마른 감정으로 감상에 젖은 생활용어거나 구호 따위를 시의 형식에 맞추어, 행과 련을 나누어 마구 란발하는 시풍과는 담을 쌓고, 오로지 예술경지에로의 무한 접근을 시도하는 모습이 유난히 돋보인다.

에디슨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1%의 영감이 없으면 99%의 노력도 소용없다.>고 말하였다. 무엇을 하든 자기가 행하는 일에 혼신을 바쳐가며 <미쳐야만> 예기했던 바를 성취해낸다는 의미심장한 가르침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시인은 노력의 토대 위에 타고난 천부적 재질도 갖추어야 함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 되리라.  변창렬시인은 생명의 매순간을 오로지 시 쓰는 일에 불태우는 시인이며 뛰어난 감성으로 시의 하늘을 닦아가는 보기 드문 천재시인이라고 필자는 스스로 감탄해본다.

조선족시단에서 이처럼 열심히 시를 쓰며 보석처럼 빛나는 시를 남겨 세상을 밝혀주는 사람은 아마 열손가락안으로 헤아려야 할 것이다. 남다른 시각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초탈의 미학으로 인생달관의 경지를 펼쳐보이는 변창렬시인과 그의 시세계, 바야흐로 동터오는 시문학의 하늘을 밝게 비추는 등탑으로 명멸하리라 굳게 믿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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