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연변대학교 교수 

해방전 중국에서 빛나는 활약상을 보인 우리 민족 명인들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한족 여성과 결혼해서 서로 믿고 사랑하고 빛나는 업적을 일구어내며 아름다운 일화들을 남겼다. 항일투사이며 농학자인 류자명(柳子明, 1894-1985)이 그러했고 영화 황제 김염(金焰, 1910-1983)과 작곡가 정율성(郑律成, 1914-1976)이 그러했다. 아마도 해방 후 한족 여성과 결혼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우리 민족 교육과 문학의 발전을 위해 불멸의 업적을 남긴 분으로는 아무래도 정판룡 교수를 첫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정판룡 교수의 문하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았고 그분을  모시고 18년간 공부하고 일했기에 그들 내외분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 여러 편의 글도 쓴 적 있다. 하지만 요즘 정판룡 교수 내외분의 자료를 진일보 수집하는 가운데서 처음으로 정판룡 교수의 ‘나와 나의 안해’(민족출판사, 2002)라는 책자를 구해서 통독하게 되었다. 조선족과 한족이라는 두 민족 청춘 남녀의 만남과 사랑의 이야기는 정판룡 선생의 유명한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과 왕유 여사의 자서전 ‘남방에서 북방에 와 70년 세월(从南到北七十载)’에도 일부 나오지만 ‘나와 나의 안해’는 두 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더욱 구체적으로 진솔하게 쓴 작품이요, 참된 사랑의 서사시를 방불케 한다고 하겠다. 여기서는 두 분의 첫 만남, 연애와 결혼, 그리고 연변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만 보기로 하자.

21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연변대학 교원이 된 정판룡, 잇달아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은 모스크바대학 유학을 마친 정판룡에게는 혼처를 주선하는 사람도 많았고 은근히 다가서는 처녀도 여럿 있었다. 연길 서시장 부근의 하숙집 주인이 주선한 왕청의 처녀, 연변조선족자치주 선전부장 배극과 황구헌 내외가 알심들여 자택에 마련한 북경 민족가무단 여배우들과의 만찬, 연변가무단의 흑룡강출신 처녀와의 사귐이 그러하고 모스크바대학 유학 초기 대담하게 나젊은 정판룡에게 주동적으로 다가온 모스크바 자동차 공장 선반공 따마라와 그루지야의 여가수 스펠라와의 만남이 그러하다. 하지만 정판룡은 공부를 더 해야 했기에 연애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에게는 남다른 사랑의 철학이 있었다. 좀 길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한번 읽어볼 만한 것이기에 여기에 줄여서 옮긴다.

서방의 어느 시인은 “사랑은 봄철에 꽃이 피듯이 자연스럽게 찾아오거니, 그 가슴이 울렁이는 순간은 인간 세상의 영원한 신비이니라.”라고 노래했다. 하기에 적잖은 사람들은 사랑은 격정이며 신비한 정신 상태라고 하면서 사랑에는 이성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사랑 속에 치밀한 이해관계나 타산과 같은 이성적인 것이 섞여있다면 순수한 사랑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해야 할 나이가 되어 생활의 동반자를 찾아 가정을 만들려고 할 때 이성을 배제하고 격정만 가진다면 흔히 실패를 자초하게 된다. 한 쌍의 부부가 조화롭게 생활하고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될 때가지 행복하게 살자면 단순한 부부가 될 게 아니라 생활의 동반자가 되고 사업의 동지와 벗이 돼야 한다. 이러한 대상을 찾는다고 할 때 이성의 참여가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 물론 결혼은 사랑을 기초로 한다. 격정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니다.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자기 마음속에 있는 사람에 대해 애모의 격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격정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 사람들의 사랑의 격정은 가장 길어야 18개월에서 30개월간 지속된다고 한다. 그 뒤에는 이런 격정이 사라진다. 설사 젊은 부부라 해도 이 기간이 지나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부부 관계는 언제나 격정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이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 부부는 상대를 연인으로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관심하고 생활의 동반자, 동지와 벗으로 보아야 한다. 요컨대 사랑은 격정도 있어야 하지만 이성도 있어야 한다…….   

정판룡과 왕유의 만남은 우연스럽지만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1954년 여름 정판룡은 연변대학에서, 왕유는 서남사범대학에서 교육부의 선발을 받고 쏘련에 가서 유학하게 되었다. 이들은 먼저 북경러시아어전과학원(지금의 북경외국어학원)에 가서 러시아어 연수를 받았다. 정판룡은 쏘련에 가서 대학원 공부를 해야 하는 22반에, 왕유는 본과 공부를 해야 하는 18반에 귀속되어 거의 1년간 같은 캠퍼스에 있었지만 서로 풋면목도 익히지 못했다. 

그러다가 1957년 여름, 제6차 세계청년련환절이 모스크바에서 열렸는데 정판룡과 왕유는 다 같이 중국 청년대표단을 위한 후근 사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왕유는 성격이 활발하고 명랑해서 모든 남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특히 그녀는 옷차림은 수수했지만 살결이 남달리 희고 몸매가 날씬한 전형적인 남방미인이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사범학원 중국 유학생 공청단지부의 서기로 있으면서 사회활동에 적극 참가했고 농구도 잘 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재간둥이었다.    

두 번째로 왕유를 만난 것은 1958년 여름이었다. 모스크바시 공청단 위원회에서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조직해 30일간 볼가강 연안의 도시들을 돌아보게 했다. 중국의 장강이나 황하와 마찬가지로 볼가강은 쏘련의 어머니 강인데 짜리러시아시대의 고색창연한 성곽들이 모두 이 강의 양안에 있었다. 볼가강에서 다시 만난 정판룡과 왕유는 더없이 기뻤고 서로의 출신과 현재 상황을 두고 적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왕유는 조선족을 만난 게 정판룡이 처음이라고 했고 여행하는 내내 방긋방긋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때 모스크바대학 신문학과에 와서 연수하던 인도네시아 기자가 유람선 난간을 잡고 서있는 묘령의 중국 아가씨 왕유를 찍었는데 그 사진이 오늘도 처녀시절 그녀의 꽃다운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세 번째로 왕유를 만난 것은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농장에 가서 일할 때였다. 둘은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풀을 뽑거나 채소를 캐고 버섯을 땄다. 밤에는 우등불을 피워놓고 ‘카츄샤’, ‘군항의 밤’, ‘공청단원의 노래’, ‘모스크바 교외의 밤’을 불렀다. 왕유는 악보도 볼 줄 알았거니와 노래도 썩 잘 불렀다. 정판룡은 어느새 왕유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고맙게도 형님뻘 되는 호맹호(胡孟浩, 후에는 상해 외국어 대학 교장 역임)씨가 정판룡과 왕유의 속사정을 알고 슬그머니 다리를 놓아 준 덕분에 둘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정판룡은 남모르는 근심을 하게 되었다. 한족 아가씨와 사랑을 속삭이고 가정을 이룬다? 나는 조선족이고 앞으로 연변에 돌아가야 한다. 한족 아가씨와 연애하고 결혼한다면 앞으로 여러 가지 곤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유학생의 몸값이 올라서 적잖은 유학생들은 심양이나 장춘과 같은 동북의 대도시에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왕유가 나를 따라 구석진 연변에 가려고 할까? 

그런데 이는 전부 공연한 근심이었으며 이는 왕유의 자서전에서 잘 나타나있다. 왕유는 자서전에서 조선족이면 어떻단 말인가? 기껏해야 남방 사람과 북방 사람의 차이가 아닌가? 판룡씨가 좀 촌스럽게 생겼다고 하지만 남달리 총명하고 성실하고 정직하다. 레프 톨스토이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게 아니라 사랑스럽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여러 날 고민 끝에 정판룡은 왕유에게 편지를 썼고 모스크바대학에 놀러 오라고 했다. 왕유가 쾌히 승낙했고 마침내 둘은 모스크바대학에서 만났으며 암실에 들어가 사진을 현상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둘은 자연스럽게 첫 키스를 했던 것이다. 
“나는 왕유가 놀러 온 날 밤, 창문에다 모포를 치고 어둡게 한 뒤 그와 함께 교외 농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만들었다. 내가 필름을 확대기에 넣고 감광지에다 영상시킨 뒤 현상액에 넣으면 왕유가 건져서 말리는 일을 했다. 나는 기실 사진을 만든다는 것보다 왕유와 단둘이서 이 작업을 하는 것이 더 기뻤다. 

한 번은 같이 사진을 만들다가 얼굴이 가까워졌다. 우리는 그만 키스를 하고 말았다. 첫 키스는 정말 달콤하고 신비스러웠다. 미국 보리스 대학 연구원 츌 링크는 300명 중산계급에 대한 조사에서 첫 키스가 첫 성생활보다 더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첫 성생활은 사랑의 상태에서 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첫 키스는 절대적으로 사랑의 상태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나의 체험을 보아도 그렇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는 첫 키스의 모든 세부와 느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키스를 한 뒤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느껴졌으며 기쁨을 누룰 수 없어 큰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물론 미치광이처럼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 가장 강렬한 사랑의 격정과 행복을 느낀 것만은 사실이다.”

‘나와 나의 안해’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슬쩍 감추고 에둘러 암시하면서 멋지게 의론을 전개했으니 저명한 문학 교수다운 글솜씨라 하겠다. 아무튼 1년 만에 정판룡은 왕유와의 사랑에 골인했고 모스크바대학 학생 숙사 9동에 있는 회의실에서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왕유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고비가 또 하나 남았다. 1960년 2월 정판룡은  “아 톨스토이의 3부작  ‘고난의 길’의 인민 묘사 원칙”으로 부 박사학위를 받고 5년 만에 북경에 돌아왔고 친구인 전중문 (钱中文) 내외의 알선으로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 연구소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판룡은 은사와 친구들의 부름을 거역할 수도 없었거니와 연변대학을 잘 꾸리기 위해 연변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렇다면 왕유는 어찌한단 말인가? 왕유는 나를 따라 변강인 연변으로 가서 간고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 연변대학에 러시아어학과가 없으니 전공도 바꾸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정판룡은 모스크바에 있는 왕유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국하기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조선족 지식인이니까 연변대학에 돌아가서 일해야 한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이니 당신은 나를 따라 연변에 갈 필요가 없다. 나 때문에 당신의 전도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 먼저 두 곳에 갈라져서 지내면서 차차 상황을 보아서 처리하자. 하지만 예전과 마찬가지로 왕유는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당연히 연변대학에 가서 일해야 해요. 당신이 이미 선택을 했다면 저는 무조건 따라갈 겁니다. 적잖은 한족들이 오랫동안 연변에 살고 있는데 저라고 왜 살 수 없겠어요. ” 
이게 바로 왕유의 “위대한 단순성”이었고 정판룡은 바로 여기서 또다시 깊이 감동됐다.

일부에서는 왕유를 중국 4대 미인의 하나인 왕소군(王昭君)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하겠다. 왕소군은 흉노에 잡혀 억지로 끌려간 셈이지만 왕유는 정판룡을 믿고 연변에 찾아와 헌신적으로 남편을 내조했으며 그 자신도 연변대학의 대표적인 교수로 되었다. 또 그만큼 정판룡은 부인을 사랑했고 일찍부터 부인을 위해 세 가지 일을 성사시켜주리라 생각했다. 첫째로 뛴다 난다 하는 남개 중학교나 서남사범대학 동창생들보다 먼저 교수 직함을 가지도록 노력하리라, 둘째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보게 하고 국제적 시야를 갖게 하리라, 셋째로 왕유의 전기를 써주리라. 이 세 가지인데 앞의 두 가지는 대체로 실현한 셈이나 날마다 학문 연구와 공무에 시달리다보니 전기를 쓰는 일은 많이 지체되였다. 암 투병생활 기간에야 ‘연변녀성’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30가지의 이야기를 매 기마다 5000자씩 쓰기로 했다. 2000년 제5기에 첫 편의 글이 나갔고 병상에서 집필을 다그쳐 20편, 약 10만 자를 쓰고는 더 쓰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왕유가 정판룡의 구술에 근거해 6편을 더 써야 했다. 정판룡이 부인을 보고 “적잖은 편폭을 썼는데 나의 한족 친척들과 한어 독자들이 볼 수 없구려. 이 책을 한어로 번역했으면 좋겠소. 그들도 우리 둘의 이야기들을 알아야 할 게 아니요?”라고 했다. 그래서 저명한 번역가 뢰자금(雷子金)선생이 번역하여 2002년 북경 민족출판사를 통해 출간하게 된 것이다.

요즘 도시화 바람으로 우리 조선족의 적잖은 젊은이들이 타민족과 통혼하고 있다. 필자의 동창들 중에도 타민족 아가씨나 젊은이를 며느리로 삼거나 사위로 삼고 난색을 짓는 친구들이 일부 있다. 난색을 지을 필요가 없다. 그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에서 같은 민족의 결혼 상대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또 다른 민족과 살더라도 넓은 흉금과 사랑을 가지고 상대를 품어주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이 방면에서 정판룡 교수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한편 이런 의미에서 ‘나와 나의 안해’를 한어로 번역한 것은 아주 잘된 일이며 ‘나와 나의 안해’와 함께 왕유 교수의 ‘남방에서 북방으로 와 70년 세월’도 조선어로 번역 출판되어 많은 조선족 독자들 특히 조선족 젊은이들에게 읽히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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