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련 약력 : 1991년 흑룡강성밀산시 출생. 2013년 연변대학 사상정치교육 학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녕안시조선족중학교에서 사장정치교원으로 재직중. 자신의 희로애락을 담은 수필 쓰기를 선호함.
고향련 약력 : 1991년 흑룡강성밀산시 출생. 2013년 연변대학 사상정치교육 학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녕안시조선족중학교에서 사장정치교원으로 재직중. 자신의 희로애락을 담은 수필 쓰기를 선호함.

누군가의 딸로부터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다. 처음부터 엄마인 사람은 없다. 내 새끼,내 보배단지, 내 귀염둥이…이런 말도 처음부터 터져나오는 사랑고백이 아니었다. 출산의 고통과 함께 뒤따라온 육아의 고달픔은 나의 감정을 잠시 메마르게 했다. 대를 이어가는 위대한 어머니가 되였다고 주변에서 다들 축하해주지만 육신의 피곤함과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산후우울증이 증세를 보이기시작한 후로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다. 천사같은 아이가 내곁에서 쌔근쌔근 숨쉬며 잠을 자고있지만 나는 그 아이를 보며 혼자 울고만 있었다. 그냥 아무 리유없이 눈물이 났다.특히 밤이면 더 그랬다.

출산후 첫 두달은 너무 힘들었다. 아이가 미숙아로 태여나서 인큐베이터안에서 보름남짓 보내야만 했는데 그동안 아이 얼굴도 보지못하고 그냥 집에서 매일매일 유축기로 젖을 짜서 병원에 보내야만 했다. 어쩌면 내 스스로 만나려 하지않았던것 같다.한주일에 딱 십분만 면회시간이 있었건만  마음 독하게 먹고 한번도 보러가지 않았다. 한번만이라도 보면 자꾸 눈에 밟혀 못견딜것 같아서 말이다. 그러다가 불현듯 밀려오는 것이 과연 내가 아이를 낳았단 말인가?해산한 실감이 나지않았다. 수술실에서 간간히 들려왔던 아들의 응애 울음소리도 전부 거짓같았다. 대신 속절없이 부풀어오는 젖가슴과 제왕절개로 인한 허물과 아픔만이 나의 해산을 증명해주었다. 수많은 밤 홀로 눈물을 흘리며 보냈다. 언제면 내 아들을 볼수있을련지,2.3키로밖에 안되는 작은 생명이 외롭게 인큐베이터안에서 살아보겠다고 허덕이는 것을 생각하노라면 정말 가슴이 찢어질것 같았다. 수없이 혼자 아들 이름을 불러보았다. 시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리화안.많이 불러라 하신다.이름을 자주 부르면 화안이한테 좋다하셨다. 건강해라는 념원을 담아 지은 이름, 수없이 혼자 불러보았다. 나의 부름이 화안이에게 들릴것만 같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보름만에 화안이의 퇴원소식을 받았다. 그동안 곁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하실가봐 한번도 겉으로 내색하지않고 잘 버텨왔지만 쌓이고 쌓였던 불안과 걱정과 죄스러움이 한순간에 몰려와 나를 무너뜨렸다. 엄마를 부둥켜안고 엉엉 소리내서 아이처럼 울었다. 엄마도 나를 끌어안으며 그동안 참고 견디느라 고생했다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친정아버지는 겉으로는 내색을 안해도 속으로는 또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드디여 화안이가 내곁에 왔다. 노르끄레한 얼굴에 다섯근도 안되는 몸뚱이는 쭈글쭈글한 것이 너무 가냘퍼보였다. 미숙아로 태여나 자체호흡이 곤란해서 산소공급기를 사용했던 흔적이 떡하니 코밑에 고스란히 박혀있어 내 마음을 또 한번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자기도 먹고 살겠다고 조그마한 입을 짝짝 벌리며 응애응애 울어대니 나는 자기도 모르게 윗옷을 걷어올리고 화안이에게 젖가슴을 내주었다. 하지만 너무 작아서 젖을 먹을 힘이 부족한지 혀바닥을 낼름낼름거릴뿐 그냥 울어대기만 했다. 부풀어 오른 젖가슴에서는 젖이 넘쳐 흘러내리건만 화안이는 그것을 맘껏 먹을수 없었다. 또 눈물이 났다.미숙아로 태여나게한 내 자신이 죄인인것 같았다. 날이 다 차서 태여난 애들도 젖을 먹기가 힘들다하던데 요놈은 어찌할꼬…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유축기를 들었다. 령혼까지 끌어모아 젖을 짜내는 일에 몰두했다.

너무 오래동안 죄책감에 덕였다.자체 임신성고혈압때문에 두달남짓 앞당겨 세상 빛을 보게 된 화안이, 그로 인해 혼자 인큐베이터안에 남겨진 화안이, 자체 호흡곤란 때문에 산소공급기로 숨을 쉬여야만 했던 화안이, 저체중아로 태여나 힘이 부족해서 젖을 마음껏 빨아먹을수 없어 젖병으로만 모유를 먹어야만 했던 화안이,내가 갑자기 열이올라 약을 먹은 바람에 모유대신 분유를 먹고 소화불량에 시달려야만 했던 화안이, 저녁에 한번 잠들면 아무리 옆에서 울부짖어도 깨여나지 못하는 나때문에 두려움에 떨었을 화안이…엄마를 잘못만나 이런 고생을 한다고 나는 혼자만의 죄책감에 잡혀 스스로를 원망하고 미워했다. 누구도 나를 탓하는 사람이 없는데 나 혼자 갑속에 들어 힘겨워했다. 세상을 등에 지고서 기어코 혼자 깜깜한 동굴속으로 들어 가려했던 마음이 가난한 나였다. 하지만 나보다 더 씩씩한 화안이였다. 미숙아같지 않게 한시가 다르도록 성장이 빨랐다.

처음엔 화안이는 시어머니의 손끝에서 옹근 두달을 살아왔다. 신생아면 보통 다 겪게 되는 영아산통때문에 밤마다 울어대는 화안이를 안고 긴긴 밤을 벽에 기대앉은채 달래주었던 할머니가 계셨길래 힘든 시기를 잘 버틸수 있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던데로부터 이젠 제법 또릿또릿 한 눈길로 나의 애간장을 녹이는 화안이,졸리면 눈을 부빌줄 알고 아침에 잠에서 깨여나면 나를 보며 눈을 찡긋하며 웃어도 잘준다.처음엔 젖을 먹기만 하면 토하던데로부터 이젠 이유식까지도 제법 잘 먹고 잘 소화한다.처음 화안이를 안고 목욕할때 나와 시어머니께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온 몸이 땀에 푹 젖었던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지금은 욕조에서 혼자 제법 물놀이도 잘한다. 집에서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것을 지켜보던 화안이가 지금은 매일마다 바깥나들이를 하며 세상구경도 잘한다.

화안이의 이런 성장과정이 모두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화안이의 모든것이 다 보통애들과 비해 더뎠다.병원에가서 발달검사를 했더니 결과가 좋지 않았다. 발달이 느리단다.전문가의 간섭을 받아야 한다고 통보까지 받았다. 3개월이면 머리를 들고 몸을 뒤집는 친구네 아들을 보니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혹시 미숙아로 태여나서 어디 부족한것은 아닌지…급한 마음에 반듯하게 누워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빌을 보며 어이어이 소리내는 화안이를 침대에 엎뎌 놓았다. 머리 들 힘이 없어 침대에 머리를 틀어박고 허덕이는 화안이를 보며 얼른 머리들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내 마음도 모르고 화안이는 침대에 엎뎌있기만 한채 아무것도 할줄 몰랐다.조급해하는 나를 바라보던 시어머니께서는 나더러 급해하지 말란다. 필경 뱃속에서 두달이나 먼저 나온 아이인데 나더러 모든것을 다 두달로 미뤄서 화안이를 대해라하셨다. 아니나 다를가,화안이가 다섯개월 되던 어느 아침,내가 침대를 정리하는 사이에 내 곁에서 성공적으로 뒤집기를 했다.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화안이를 안고 격동된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시어머니의 말이 옳으셨다.급해서 되는 일이 아니였다. 화안이 이유식을 언제 먹이는가에도 참 어리석었다. 친구네 애들은 4개월이니까 쌀미음도 먹이고 과일도 먹이며 키우던데 나도 하루빨리 화안이에게 세상의 맛난 음식을 먹여주고 싶었다.하지만 시어머니께서 이것만은 견결히 반대하셨다.화안이를 어떻게 달수가 다 차서 난 애들과 비교하는가고,애가 아직 너무 어려서 소화가 잘 안된다며 7개월까지 기다려라 하셨다. 달수가 차지 않아서…나는 이 말이 너무 싫었다. 잘 먹고 잘 크는 화안이를 계속 달수 안 찬 애라고 “차별시”하는 것이 너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시어머니 말을 듣고 7개월까지 꾹 참았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다른 집 애들은 이유식을 먹고 변비왔네 소화불량왔네 하던데 화안이는 처음부터 이유식을 너무 잘 받아먹고 지금까지 아무탈이 없었다. 또한번은 봄이 오니 날씨가 따뜻해진거 같길래 시어머니보고 화안이를 바깥구경시켜보자고 졸랐다. 이번에도 시어머니는 화안이가 달수 안 찬 애라서 갑자기 바깥공기를 마시면 탈이난다고 단호하게 나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마음속으로는 이런 제기랄!내 아들을 내 맘대로 키우지 못하는게 짜증났어도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했다. 그러다가 5월이 되여 기온이 쭉쭉 올라가니 그제서야 시어머니께서는 화안이를 데리고 나가도 된다고 하시면서 같이 집앞 광장에 산책가자고 채비를 하셨다. 그런 덕분에 화안이는 지금까지 한번도 아픈데 없었고 환절기에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며칠전에 온 식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니도 났다. 보통 6개월이면 첫니가 나는데 화안이는 8개월을 기다렸다. 지금은 또 온가족이 우리 화안이가 기여다니기를 또 기다린다.못난 에미손에서 온갖 고생만 했을 화안이가 자기에게 온갖 정성을 몰붓는 할머니 때문에 참 다행이였고 참 복을 받았다.

화안이가 8개월이 되여 이젠 9개월로 성장한다.예전에 나는 아이를 낳기만 하면 엄마가 되는줄 알았다.화안이가 2.3키로로부터 9키로로 성장하기까지 나는 수많은 불가능한 상상을 해왔다. 훤칠하게 성장한 20대의 화안이와 우아하게 나이들어가는 내가 어느 나른한 오후 다정하게 손을 잡고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상을.저녁에 눈을 감고 잠이 들어 새날이 밝아와 눈을 떠보니 화안이가 20대의 멋진 남자로 되여 있는 상상을…

요즘들어 시어머니께서 화안이만 보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화안이는 자고나면 새 힘이 펄떡펄떡 치솟는데 이 할미는 자고나면 힘이 빠진다오,하하하!”화안이가 이침마다 신나하는것을 보며 좋아서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그 말이 참 나를 아프게 한다.시어머니도 친정엄마도 한잠 자고 깨나보니 지금의 화안이아빠와 나를 마주한것이 아니다. 두 분도 어쩌면 긴긴 어두운 터널을 지나 외로이 밤하늘의 별을 하나 둘 씩 헤며 새로운 아침을 수없이 맞이해서야 휜칠하게 또 어여쁘게 성장한 아들 딸과 만났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여난 사람은 없다.수많은 죄책감과 회의감과 자괴감들이 서로 얼키고 설켜 넝쿨이 되여 나를 집어삼켜 숨조차 쉬기 힘들어도 화안이의 웃음소리에,나를 반기는 몸짓에 나는 있는 힘껏 넝쿵를 헤치고 화안이에게 달려간다.

흐릿한 어두운 밤일지라도 구름을 걷어보면 별이 보이듯,별을 헤다보면 아침이 밝아오듯,언젠가 나도 멋지게 성장한 나의 화안이와 맞이할수 있을거란 부푼 희망에 오늘도 힘을 내 본다.

 

엄마의 세상

 

딱히 할 일 없는 심심한 주말에 뭐할까 고민하다가 괜스레 엄마생각이 나면서 옷장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에 옷장을 열어보았다. 예전부터 엄마는 옷장안에 옷을 전부 꺼내서 다시 정리하고 또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오래동안 입지 않았던 옷은 다시 꺼내서 입어보다가 혹 생각지도 못했던 예쁜 옷들이 나올때는 마치 보물을 캐낸것 처럼 혼자 기뻐하기도 했다. 그런 즐거운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로서는 도무지 리해되지 않는 옷장정리가 나름 좋기만 하기도 했다.솔직히 말해서 철따라 차곡차곡 정리해놓는 옷장이 뭐 굳이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는지. 

어릴적부터 나의 옷장은 언제나 엄마몫이였다. 공부하는 내가 신경쓸 일이 아니라며 아예 손도 못대게 했다. 하지만 엄마랑 떨어져 산지도 어언 8년,오래동안 엄마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나의 옷장을 열어보기로 결심했다.겨울점퍼와 여름 티셔츠랑 마구마구 뒤엉켜서 참말로 “조화”를 이룬 나의 옷장을 보는 순간 한숨밖에 안나왔다.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옷장안의 옷을 전부 꺼내 놓고는 신나는 음악도 틀고 본격적으로 옷장정리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였다.다행히도 에전에 엄마가 혼자 옷을 정리하면서 심심하셨던지 나에게 옷은 어떻게 정리해야 한다고 말해준 생각이 나서 그대로 해보았다. 먼저 철따라 네 무더기로 나눠놓는 일이였는데 그것도 거의 반시간이 걸렸다.다음으로는 색깔별로 분류해놓는 일이였는데 여기까지는 나름 좋았다. 마지막으로 윗옷,아래옷,등등 사용별도로 분류하고 개이는 일이였는데 성미가 급한 나에게는 이 과정이 참 고역이 아닐수가 없었다.어릴때 본 엄마의 옷장정리하는 모습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해 보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짜증만 날까.예쁘게 개여지지 않는 옷들한테 괜히 화풀이 하면서 그래도 끝을 보았다.침대위에 차곡차곡 정리된 나의 옷들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뿌듯해지면서 마치 큰일을 해낸것 마냥 나 자신이 대견해 보였다.그러면서 엄마가 왜 즐겁게 옷장을 정리하는지 조금은 알것만 같았는데 아마도 옷장을 정리하고난 뒤에 몰려오는 성취감,만족감때문이라고 짐작이 갔다.

그러다가 괜히 궁금한 마음에 엄마와 아버지의 공용옷장을 들여다 봤다.부모님이 한국으로 떠나시고는 한번도 들여다 본적이 없는 옷장.아니,여태껏 들여다 본적이 없는 부모님의 옷장이다.옷장을 여는 순간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기로운 엄마의 냄새가 나를 기분좋게 만들었다.향수냄새도 아닌,어떤 화학제품의 향기도 아닌,오로지 우리 엄마만이 가지고 있었던 정겨운 살결냄새였다.그다음으로는 아버지 옷 절반,엄마옷 절반으로 가지런히 개여 놓은 옷들이 한눈에 안겨왔다. 사계절로 나눠,색깔별로 나눠, 용도별로 나눠 정리 해논 옷들은 엄마의 손길과 체취가 담겨져 살아 숨쉬고 있는듯 싶었다.한국에 더러 가져간 탓으로 그렇게 많지 않은 엄마의 옷들,하지만 옷 한벌한벌마다에 엄마의 깔끔함이 묻어나고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나는 옷장은 잠시나마 나를 행복하게 해줬다.

생각해보면 엄마가 이렇게 살아온 것도 다 리유가 있었던것 같다.  못먹은 티는 안나도 못입은 티는 난나고 없는 살림일지라도 자존심강한 녀성이라 입고다니는 옷은 남들과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깨끗하고 정갈해야한다는 집념으로 항상 모두 손수 빨아서 정리해두곤 했다. 특히 아버지의 셔츠며 바지는 손빨래로도 모자라 번번히 다리미로 각을 내서 차곡차곡 정리해두곤 하셨다.구석구석 엄마의 손길이 닿아있는 옷을 보니 소학교때 생각이 나서 한동안 마음을 추스리지 못했다.

소학교 어느 무더운 하루였다. 교복바지만 입기싫어서 남들처럼 모양새도 이쁜 반바지를 사달라고 엄마를 졸랐는데 엄마는 잠시  고민하는것 같더니 얼른 집을 나가셨다. 해질무렵에도 들어오지 않은 엄마를 기다리며 자신을 많이 책망했다. 괜히 내가 떼질부려서 엄마가 화난것은 아닐까.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면서 나중에는 반바지하나도 통쾌히 사주지 못하는 엄마아빠가 밉다는 생각까지 들게되였다. 해가 다 지고 어둠이 짙어서야 엄마는 집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나한테 예쁜 노란색 반바지를 건네주셨다.입어보니 품도 딱 맞았고 너무 맘에 들었다. 그때 나의 머리속에는 온통 학교가서 자랑할 생각뿐이였지 엄마가 왜 늦게 들어오셨고 우리집 형편에 비해 비싼 반자지를 어떻게 사셨는지 나는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아니,아예 생각이 없었다.내가 고중때 쯤이던가,엄마가 옷장을 정리하면서 나의 그 반바지를 꺼내서 보여주셨는데 나는 그것을 왜 여태껏 간직하고있냐고 물었다. 너무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겠더란다. 입지도 못할것 왜 아까워 하시냐고 물어보니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얘기할수 있다며 지난 얘기를 꺼내셨다. 그날에 큰 맘을 먹고 집에 있는 전부 돈 120원을 탈탈 털어서 상점에 갔단다. 손에 쥔돈이 별로 없어서 이것저것 신중히 고르다보니 해가 진것도 모르셨단다. 집으로 돌아올때는 30분넘어 되는 거리를 쩔룩거리는 다리로 걸어오시느라 그또한 얼마나 힘들었을랴,그 반바지가 딱 120원짜리였으니까.여기까지 얘기하시면서 어머니는 일전 한푼 깍아주지않는 백화점직원이 정말 야박했다며 쓴 소리까지 덧붙였다.

눈물없이 들을수 없는 엄마의 과거는 정말로 많다. 녀자로 태여나서 한번도 반듯하게 부귀영화를 누려보지 못한 우리 엄마.하지만 평생 자식농사만은 제대로 풍년이라며 마음만은 누구보다 풍요로웠던 나의 림여사님, 지금에 와서 느끼게 된 그의 행복은 정리정돈에서 생기는 성취감 혹은 만족감에서 온것이 아니셨다.옷장을 정리하면서 뇌리에 스쳐지나는 옷 한견지마다에 담긴 세월의 흔적과 삶의 이야기를 되새겨보며 힘겨운 지난 날을 견뎌온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며 새로운 나날을 바라보는 희망때문이라고 본다.

얼마전 귀국하셔서 처음 하신 일이 아니나 다를까 바로 옷장을 정리하는 일이셨다. 엄마의 세상이자 삶 그 자체였던 옷장,엄마의 향기로 가득 차있는 엄마의 세상,그속에서 나는 나만의 작은 세상을 가꾸어 간다.

 

가난과 풍요 그리고 자존  
 

기억조차 하기 싫은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다. 다음날 학비를 준비하지 못해서 문고리를 잡고 엄마랑 떼질쓰다가 끝내 엄마한테 호되게 맞은 적이 있는데 엄마가 나에게 매질한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다. 간만에 입에 기름칠 한다고 돼지고기찜을 해먹던 어느 저녁 빚쟁이 아줌마의 갑작스런 방문에 괜히 미안한 아빠엄마의 얼굴에는 어색한 표정이 그려졌다. 빚도 못갚은 주제에 무슨 돼지고기 반찬이냐고 빈정댈가봐 조마조마해하는 엄마의 모습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때는 왜 그리도 가난했을가? 왜 그리도 가난해야만 했을가? 어린 마음에 늘 그것이 의문스러웠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인형을 나의 아기로 삼아 예쁜 옷을 만들어 입히면서 소꿉놀이 하고싶었는데 나의 장난감은 늘 마당의 흙뿐이였다.

소학교때 작문을 쓴적이 있는데 내용은 딱히 생각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이였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열이 펄펄 나고 감기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자 아버지는 나를 업고 병원으로 가려했는데 집에 돈이 없어서 이리저리 돈을 빌려서야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는 이야기였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를 업고 먼곳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는 아버지가 고마웠다는 내용도 있었던것 같다. 나의 아빠엄마는 소아마비로 인해 다리를 절룩거리는 장애인이였다. 반주임선생님은 나의 작문을 검사한 뒤로 나를 각별히 관심해주셨다. 맛있는거 있어도 남몰래 나에게 챙겨주셨고 나에게 맞는 옷이 생겨도 선물했다. 소학교 반주임선생님께서 몰래몰래 나에게 몰부은 사랑과 작문을 잘 쓴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것이 나로 하여금 어린 마음에도 가난에 위축되지 않고 늘 글로 마음을 달래줄 알게 된 것 같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빠엄마의 절룩거리는 다리가 나의 수치가 되여버렸다. 가장회를 해서 부득불 학교에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항상 멀리멀리 엄마를 피해다녔다. (가장회는 늘 엄마의 몫이였다. ) 혹시라도 친구들이 나의 엄마가 장애인이라는것을 알고 나를 놀릴가봐서였다. 하지만 나의 초중반주임이든 고중반주임이든 사사건건 엄마를 자주 찾으셨다. 그러면서 엄마때문에 반급관리가 쉬워진다면서 자주 칭찬도 해주셨다. 그로 인해 사춘기의 어리석었던 생각도 잠시뿐, 엄마가 반에 들어오셔서 학생들에게 반급비용이랑 존재하는 문제를 말할 때면 나보다 나의 친구들이 더 열렬히 박수를 쳐주고 환영했다. 엄마의 절룩거리는 다리는 더이상 나의 수치가 아닌 나의 마음 한구석을 저리게 하는 아픔이 되였고 또한 그 다리로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나의 크나큰 자랑이 되였다. 내가 학교다닐적에는 한창 한국바람으로 반에 애들은 거의 부모님이 곁에 없었으니까.

부모가 곁에 없는 친구들은 나를 늘 부러워했다. 소학교 음악시간에 "아버지께 드리는 노래"를 배운적 있었는데 노래를 합창하는 순간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였다. 친구들이 울면서 선생님더러 이 노래 배우지 말자며 떼쓰는것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같이 울었다. 친구가 울면 따라 울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집에 와서 아버지랑 음악시간에 벌어진 일을 말했더니 너는 왜 아빠가 곁에 있는데 바보처럼 울었냐고 나를 놀리셨다.

솔직히 어릴 때는 나의 부모님도 다른 친구들 부모님처럼 한국에 가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부모님이 한국에 계시는 친구들을 보면 항상 고급스런 보온이 되는 도시락을 들고 다녔는데 나는 늘 싸구려 철밥통에 반찬을 담아 먹었다. 친구들은 매일같이 예쁜 머리핀에 공주같은 원피스를 입고다녔는데 나는 늘 한결같은 똑 자른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고 다녔다. 친구들은 한국서적들도 많아서 반급에 많이 공헌했는데 나는 늘 반급책을 읽기만 하는 책벌레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모든것이 참 다행이다. 보온이 안되는 철밥통일지라도 엄마가 아침 일찍부터 분주히 만들어주신 정갈하고 맛난 반찬은 나로 하여금 늘 점심 식사시간에 어깨가 으쓱하게 하였고 지겹게 입었던 교복도 엄마가 자주 빨아주신 덕분에 언제나 깔끔한 차림으로 등교할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친구들이 가져다논 재미나는 이야기책들을 반복해 읽으면서 문학에 흥취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중 2학년까지 아빠엄마의 곁에서 삼시세끼 번갈아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나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뒤로 일년동안 하루하루 전쟁같았던 고3시절을 혼자 버틸수 있었던것은 그들의 사랑으로 물든 세월의 흔적이 매일 밤 혼자 공부하는 나를 위로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도록 독촉하였기때문이다.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니까 그제서야 아빠엄마는 서둘러서 한국으로 떠나셨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옹근 7년동안 부모님과 떨어져서 지냈다. 수년간 성치 않은 몸으로 타국에서 돈벌이하는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수 있다.

이젠 나까지 직업이 있는 마당에 한국일을 접고 집에 오셔서 편히 쉬라고 하고싶지만 못난 자식이 큰 출세를 하지 못해서 그런 엄두도 못낸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언젠가 우리 한집식구가 밥상에 둘러앉아 지난 세월을 추억할 그날을 그려본다. 사랑만 듬뿍듬뿍 받으며 자라온 나에게는 째지게 가난했던 세월도 풍요로운 삶이 될수 있었다. 가령 언젠가 나의 삶에 광풍이 몰아칠지라도 내가 받은 사랑이 삶의 든든한 방패가 되여 어떤 난관도 이겨낼수 있도록 도와줄것이다. 

받은 사랑에 감사하고 그 사랑 다시 베푸는 삶이고싶다.

(위의 수필은 조선말 맞춤법대로 씌어졌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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