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남룡해 지음

 

제2장 국자가에서의 재도약(1)

 

운명의 갈림길에서

 

일행이 탄 기차는 그해(1945년) 11월이 막가는 어느 날 새벽 5시 경에야 연길역에 당도하였다. 다들 쓰러질 힘조차 없는 몸을 지탱하면서 어떻게 개찰구를 빠져나왔는지 기억조차 없다.

지난 세기 30년대 국자가 대합실의 옛 모습

 

땡전 한 푼 없는 몸이니 인력거를 불러 탈 엄두도 못 내고 기진맥진한데다가 며칠째 굶은 몸이라 반은 기다시피 하여 시가지 쪽으로 향했다.

 

당시 연길 역에서부터 하남다리까지는 거의 개벌이 아니면 논밭이었는데 그 사이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기억이 아리숭하다. 지금의 신문청사 로타리 부근이 제정 때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운수공사 자리였는데 거기까지 오고 나니 날이 훤히 밝았다. 황 씨 일가는 이미 길옆에 쓰러져 혼수상태에 처한 채 누구 하나 일어날 념을 못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단꼬바지를 입은 청년이 멈춰 서서 관심조로 이게 무슨 짓거리들인가 하면서 다들 일어들 나라고 호통친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청년이 훗날 조선에 건너가 청진시 시장을 지낸 리희일이었다.

 

“나는 여기에 새로 선 청년동맹 맹원이오. 당신들은 뭘 하는 사람들인데 이 시간에 여기에 쓰러져 있는거요? 우리 청년동맹은 공산당이 령도하는 조직인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단 말이오. 다들 일어나시오.”

일행 중 그래도 의지력이 강한 황화순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사정 얘기를 하니 그 청년이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한다. 그래서 따라 간 곳이 지금의 연변대학 정문 옆 접수실 부근에 위치한 일본인 난민수용소였다. 

 

수백 명에 달하는 일본인 난민들이 거기에 운집해있었다. 보아하니 거개가 아낙네들이 아니면 아이들이였고 일부 전선에서 부상을 입은 부상자들이나 로약자들이었다.

전쟁이 남기고 간 ‘페허’나 다름 없는 그 인파 속에 섞이게 된 황 씨 일가는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못되는 지라 그냥 들어서자 다시 드러누워버리고 말았다.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몇 시간 내내 숙면을 취하고 나서야 다들 겨우 눈까풀이 떠졌다.

 

점심인지 저녁인지도 모르는 데 하여간 난민수용소에서 ‘고량죽’을 준다고 해서 밖에 나가 줄을 섰다. 눈은 떴으니 입에 풀칠은 해야 했다. 황화순은 그 사이 어디서 주어 온 다 찌그러진 대야에 죽을 담아가지고 와서는 온 집 식구가 마주앉아 숟가락도 없이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젓가락으로 먹었다. 세상에 살다살다 멀건 ‘고량죽’이 그렇게 맛나기는 처음이다. 하여간 황 씨 일가는 천신만고 끝에 그나마 엉덩이를 들여놓을 자리는 마련한 셈이다.

지난 세기 초 국자가의 모습

 

당시 그에 앞서 중공중앙에서는 항일전쟁 승리의 열매를 보호하기 위하여 3만 명의 간부와 10여만 명의 팔로군, 신사군을 동북에 급파하였다.

누가 동북을 먼저 차지하는가 쟁점으로 떠오른 시점이다. 당시 풍요로운 동북은 국공 양당이 힘을 겨루는 주요한 쟁탈지로 되었고 또한 소련과 미국 량대 세력이 눈독을 들이는 지역이었다.

 

중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 앞에는 두 가지 운명의 갈림길이 놓이게 되었다. 장개석을 위수로 한 국민당은 대지주와 대자산계급이 통치하는 독재정권을 수립하려했고 공산당은 력사적인 조류에 순응하면서 민주적인 련합정부 설립, 말하자면 새로운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했다. 이 같은 운명의 갈림길에서 도대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 지가 모든 조선인들 앞에 놓인 과제였다.

 

동북에 온 공산당간부들은 각지에 공산당조직을 세움과 동시에 광범한 인민을 단합시키기 위해 군중조직인 동북인민민주대동맹을 조직하였다. 황 씨 일가는 운 좋게 탈진상태에서 그 산하 조직인 청년동맹의 맹원을 만나 조직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련히 어느 정권이 좋고 나쁨을 가늠할 선택의 여지조차 없이 결연히 민주대동맹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이미 지희겸을 위원장으로 하는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이 결성되어 군중사업을 폭넓게 진행하고 있었고 강신태, 김만익을 대장으로 하는 연길경비대가 조직되어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잇따라 연변 각지에서 조선인무장조직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지희겸(池喜兼, 1901~미상). 조선 함경북도 어랑군 태생. 1925년 녕안현 성립제4중학교 졸업. 선후로 조선공산당 서기, 주하현위 서기로 있다가 1945년 후 연변민주동맹 위원장, 토지개혁공작대 대장 력임. 1949년부터 연변대학 력사학부에서 교편을 잡음. 연변정협 2, 3, 4, 5기 부주석. 제1기 길림성정협 상무위원 력임.

 

강신태(姜信泰,1918~1950). 조선 경상북도 태생. 1936년부터 동북항일련군 련대, 경위대, 교도려 정치위원 겸 영장 력임. 일본 패망 후 만주로 파견되여 동북민주련군 길동군구 사령관을 지내면서 조선인부대를 이끌고 동북해방작전에 참여. 1946년 여름 조선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역임.

 

김만익(金万益, 1917~1950). 해방전 왕청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길동군분구 사령부 군계과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에서 요직에 있다가 1950년 9월 8일에 전사.


 

민주동맹 산하에는 저격산처리위원회가 설립되어 일제와 그 주구들의 재물을 걷어 들여 인민대중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약삭빠른 황범송은 어린 나이임에도 리희일의 소개로 청년동맹에 들어가 저격산처리위원회의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공원 안에 세워진 일제 앞잡이 김동산의 동상을 넘어뜨려 저격산위원회 변소에 처넣고 도흥은행과 길동은행 장부를 봉쇄하라는 임무를 맡아 실행하는 중이었다.

 

한창 임무를 수행하던 중 보험공사 건물 안에서 멋진 양복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 청년 문정일을 만나게 되었다. 

 


문정일(文正一,1914~2003). 길림성 훈춘 태생. 원명 이운용. 1934년, 남경(南京)에서‘10월회’와 조선공산주의동맹에 가입하면서 194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그후 조선의용군 제2지대 분대장, 중공연길현회 부서기, 길동군구 정치부 부비서장,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부비서장, 연변전원공서 전원 겸 연길현 현장 력임. 1950년에 항미원조전쟁에 참여했다가 귀국하여 중앙민족사무위원회 재경사 부사장에 이어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력임.


 

그 당시 문정일은 늘 그런 멋진 차림에 사진기를 휴대하고 다녔는데 그게 끈이 되어 금강사진관 학도로 있는 황범송이하고는 만나는 기회가 잦아졌다. 아니 문정일이 찍은 사진을 많이는 황범송이 금강사진관 암실에서 인화해주었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꽤나 친하게 지냈다.

 

황 씨 일가가 연길에 입적한 거의 같은 시기에 문정일이 거느린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견부대가 연길에 진주하여 조선의용군 연변판사처를 설립하였다. 뒤이어 조양천에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교도대를 설립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그 소식을 들은 황신애의 가슴은 몹시 설레이였다. 그 지긋지긋했던 ‘부엌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동생이 선손을 써 청년동맹에 들어 맹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니 더구나 마음이 싱숭생숭해났다. 도저히 그 감방 같은 난민수용소에 눌러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신애는 그냥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끼어들어서는 동정을 살피고 시국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해 면밀히 파악하면서 자신의 출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황신애가 황정자로

 

그 당시 국자가는 꼭 마치도 조선인들 세상이었고 1945년이 력사적인 한 해였던 만큼 집회도 많았고 행사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우리 말을 하는 지역에서 우리의 군대가 자기들의 조직을 만들어놓고 서민들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게 가슴 설레는 화두였다. 거기에다 토지개혁이 시작되면서 ‘밭갈이하는 자에게 땅을 준다’는 공산당의 토지정책이 하달되면서 이거야말로 살맛 나는 세상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다리를 금방 지났는데 웬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동해 그리로 뛰어갔다.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중국공산당을 옹호하고 지방토비를 숙청하고 중소우의, 중조우의를 가강해야 한다는 내용의 선전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은 피를 나눈 한 집안이라고 하면서 일면 팔로군이 백성을 사랑하는 ‘3대 규율 8항주의’에 대해서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워낙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진정할 길 없었던 신애는 더더구나 가슴이 설레이였다.

 

자기 눈으로 우리 말을 하는 의용군을 직접 보았고 그들이 팔로군과 한 마음 한 뜻임을 폐부로 느끼기까지 했으니 더 이상 알고 싶은 것도 없었다. 신애는 여하를 불문하고 그 조직에 가담하고 싶었다.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그 자리에서 교도대에 입대지원을 하려고 책임자를 찾아갔다. 마침 교도대가 대원확충사업을 추진하던 중이라 황신애에 대한 간단한 면접이 있은 뒤 등기부를 내주었다.

 

그때까지 학교 문이라는데 가보지도 못한 신애는 전에 야학을 다닌 밑천을 살려 난생처음으로 등기부에 자기의 이름자를 적어 넣게 되었다. 그런데 애명을 적어 넣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호적에 등록되어 있는 황신학이란 이름도 저으기 마음에 걸렸다. 부르기에도 남자이름이어서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 보다는 그 지긋지긋했던 지난날의 허무한 삶을 죄다 지워 버리고 새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입대등록부에 ‘황정자’라는 새 이름 석 자를 적어 넣은 것이다. 그때로부터 황신학, 아니 황신애가 황정자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토지개혁 선전원

 

이런 격변의 년대에 교도대에 입대한 황정자의 가슴은 혁명에 대한 만강의 열정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태항산이나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 온 조선의용군 5지대의 정위 박일우나 사령원 리익성, 연변판사처 주임 문정일이 시도 때도 없이 교도대에 찾아와 신입대원들에게 격정에 넘치는 형세보고를 하였다. 우리 조선인들이 오로지 공산당을 따르는 길만이 민족을 구하고 나라의 독립을 이루어내는 광명한 길이라고 말이다.

 


박일우(朴一禹, 1903~1955년). 조선 함경북도 회령 태생. 간도에서 국민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항일에 투신. 1942년 조선독립동맹 창립에 참여. 연안군정대학(延安軍政大學) 교관을 력임, 같은 해 7월에는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에 선임. 1945년 11월 입북한 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내무상,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군사위원회위원, 전선사령부 부사령관, 정치보위상 등 요직 력임.

 

리익성(李益星, 1911~1946). 함경북도 경성군 태생.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 군관훈련반 수료. 1934년 8월 남경본교 제10기보병과에 입학했고 같은 시기에 김구특무대에 가입. 조선혁명동지회 주용 맴버로 1938년에 조선민족혁명당 후보집행위원에 선임. 조선의용대 제2구대 대장, 화북지대 제2대 대장 력임. 1946년 순국.


 

모든 사람들이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을 때 그들이 한 선동연설은 조선인들의 가슴에 공산당을 옹호하고 당을 따라 일심협력해야 우리 민족의 앞길에 푸른 등이 켜지게 될 거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당시 교도대 산하에 선전대가 있었는데 황정자는 그 선전대 산하 연극조에 편입이 되어 의무선전원을 하게 되었다. 그 선전대가 주로 전선원호사업을 하는 한편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선동역활을 하게 되었다.

 

황정자는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연극에도 출연하면서 자주 무대에 올랐다. 그 와중에 짬만 있으면 토지개혁에 대한 선전도 함께 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주 토지개혁선전을 나가는 그들을 보고 일명 ‘토지개혁선전대’라고도 부르는 이도 있었다.

황정자는 토지개혁선전원으로 흥안, 이란, 조양천, 팔도 등 지역을 다니며 순회공연을 많이 했다.

 

연변은 항일전쟁시기 항일유격대가 비교적 활발히 활동했던 곳이고 조선족군중속에 공산당조직이 지속적으로 존속해있었기에 군중토대가 아주 좋았다.

 

이와 같은 믿음직한 군중조직과 당 조직이 있었기에 연변에 도착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신속히 확대되어 강신태가 거느린 3개 경비퇀과 훈춘보안퇀을 합쳐 조선의용군 제15퇀, 제16퇀, 제17퇀, 포병퇀으로 신속히 확충되었다.

 

그 열혈청년들 속에 ‘부엌데기’ 삶을 살던 18세 소녀 황정자도 끼이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설렜고 그 혁명열정이 어떻게 불타올랐을지가 가히 짐작이 간다. 황정자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으로 매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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