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남룡해 지음

 

제3장 사랑의 로맨스(1)

 

천생연분

 

    위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1947년도에 있은 길동군구 산하 모범인물 표창대회에 황정자는 피복공장 모범이 되어 참석하게 되었고 당시 도문자동차공회의 모범으로 남영철군이 참석하게 되어 두 남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당시가 국내적으로 말하면 제3차 국내혁명전쟁시기로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항일전쟁 승리의 과실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시기였다. 그 량대 세력 간 투쟁의 쟁점이 동북근거지를 공고히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번 싸움에 황정자와 남영철 모두가 군 후방에서 한 몫을 하는 인물로 각광을 받게 되다보니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무대에 올라가 표창장을 받는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이거야말로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당시 피복공장 리공장장(李厂长)이었다. 그는 은근 슬쩍 두 사람 사이에 오작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리공장장하면 남영철하고는 소싯적부터 두만강 넘어 한 동네에서 함께 지내 온 송아지친구였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도문과 연길 사이를 오가며 자주 만나 술자리를 같이 하군 했는데 리공장장이 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공장에서 손부리가 가장 야무지고 예쁘장하게 생긴 처녀를 남군에게 소개해준다고 희떠운 소리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씨가 된 건지 본의 아니게 이런 모임에서 두 남녀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에 리공장장이 장난삼아 했던 얘기가 딱히 황정자양을 념두에 두고 한 얘기는 아니었는데 무대에 올라가 나란히 표창장을 받는 두 사람을 보는 순간 하늘이 정해 준 운명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거역할 수 없는 인연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황 씨 집안 어르신이 한사코 두 사람의 혼인을 반대해 나섰다. 리유라면 우선은 신랑 나이가 11살이나 위였고 게다가 사윗감이 남쪽에서 온 정체불명의 사나이라는 것이다. 북선 치면 몰라도 ‘남도치’는 리유 불문하고 싫다는 것이 황 씨 집안의 강경한 태도였다.

    하지만 황정자는 그때 이미 남군에게 마음이 쏠려있었다. 이목구비가 의젓하고 키도 훤칠한 남영철에게 한 눈에 반한 지라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사랑이 무르익어갔다.

    언젠가 우스개삼아 엄마에게 넌지시 물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외조부님이 한사코 반대하는 혼인을 왜서 극구 하려했냐고 말이다.

    그러자 어머님이 하는 말이 그 당시 아버지 키가 1.80이 넘었는데 이목구비가 의젓하고 참으로 멋졌다고 한다.

    거기에다 자동차 운전도 할 줄 알았고 흘러간 옛 노래도 아주 건들어지게 불렀는데 참으로 멋쟁이였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격이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장인어른께서 막무가내로 반대하고 나서니 두 사람의 고민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미 30대중반을 훌쩍 넘긴 남군으로 말하면 벼랑 끝에 선 심정이라 이제 더는 미룰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이판사판으로 이번 혼인만은 밀어붙이고 봐야 했었다.

 

남남북녀

 

    어찌 보면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는 말이 신통방통하게 통하리만치 남원 황 씨 네와 의령 남 씨네 원초적인 시조의 뿌리가 어상사했다. 의령 남씨 역시 중국 당나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중국 후한(後漢)의 유신이었던 황락 장군이 건무 4년에 이웃나라 교지국(交趾國)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가던 도중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平海)에 정착하게 되면서 황 씨의 시조가 되었다면 남 씨 또한 중국의 김 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리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던 김충(金忠)이 서기 755년에 안렴사(安廉使)로 일본에 파견되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고조선 신라의 유린지(有隣地: 경북 영덕군)에 표착되어 오도 가도 못하고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중국 여남(汝南)에서 왔다고 하여 성을 남(南)씨로, 이름을 민(敏)으로 신라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남민의 제7대손인 진용(鎭勇)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그 세 아들이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으로 각각 관향을 정하면서 각 파의 일세조(一世祖)가 되었는데 남영철은 그 의령남씨의 23대 장손이다.

    여기에서 유추해보면 남원 황 씨나 의령 남 씨 시조 모두는 중국의 한나라나 당나라에서 사신으로 파견되어 인근 국에 다녀오던 중 풍랑을 만나 본의 아니게 조선반도에 표착하게 되면서 그 씨족(氏族)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두 씨족이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건너 온 시간도 비슷하고 북만을 무대로 살아왔던 파란만장한 가족사도 어상사 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두 주인공 모두가 본의 아니게 군에 입대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토지개혁의 선줄군이 되어 활약했고 해방전쟁 전선원호라는 같은 맥락에서 두 사람 다 군복을 입지않은 후방에서  동고동락해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끈이 되어 두 사람의 숙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고 또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해 나갈 가족 관계가 형성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 남과 북이 정치적으로 리념이 갈리면서 3.8선이 그어지다 보니 남북의 대립이 수화상극으로 치닫게 된다. 그 미열이 제3국에 정착해 사는 후세대들에게까지 미쳐 같은 민족으로서 동질성을 공유할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국계가 없는 사랑조차도 나눌 수 없는 ‘벽’이 이루어져 저으기 안타까웠다.

 

의령 남 씨

 

    아버지 남영철은 한국 충청북도 청주시(옛 청주군) 강서 2동 남촌이라는 곳에서 1917년 4월 10일(음력)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20세기 초하면 조선반도가 이미 일제치하의 강제병탄이 이루어져 황민화교육이 실시된 지 여러 해가 되던 때였다. 남영철은 마을에 꾸려진 서당에 들어가 한글을 배우고 천자문도 익혔다. 서당공부를 마치자 곧 이어 일제가 반포한 황민화교육대강이 실시되면서 일제치하의 국민우급학교에 들어가 노화교육을 받게 되었다. 

    남영철은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못한 터라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한때 농사일에 전념했다. 하지만 농사에 매달려서는 운명을 개변할 수 없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단은 강서면에 있는 일본어학당에 들어가 열심히 일본어를 배웠다. 일본어를 익히고 나니 취직도 잘 되는 지라 한 때 수산물 상가에서 일하다가 또 한 때는 제과점에 들어 가 로동자가 되어 운명을 개변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행운의 기회는 늘 그를 비켜갔다. 그가 제과점 점원으로 있던 시절 독일 베를린에서 제11회 하계올림픽이 열리였다. 그 번 올림픽에서 조선인 선수 손기정(11)이 마라톤경합에 나가 2시간 29분 19초의 신기록을 쇄신하면서 챔피언을 한 것이다. 조선인으로서는 최초 올림픽 금메달 획득자가 된 것이다. 그것도 세계무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인으로 말이다.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영국의 하퍼, 핀란드의 타미라 등 쟁쟁한 우승후보를 물리치고 우승을 한 것이다.

손기정(孫基禎, 1912~2002). 국제올림픽 메달리스트. 조선 신의주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남. 어려서 달리기를 비롯한 스포츠 경기에 재능을 보임, 남승용과 함께 일본 올림픽 마라톤 대표 선수로 선발. 조선인 최초로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 획득.

 

온 나라가 환희로 들끓어야 할 경사였지만 시상식 게양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국가가 연주되면서 손 선수는 물론 온 나라가 침울한 심연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없앤 손 선수의 사진을 실어 통분함을 호소했고 그것이 열혈청춘들에게 민족 혼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제치하의 학교를 다니면서 늘 달리기선수로 활약해왔던 남영철도 격분함을 금치 못했고 나라가 주권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원통해 했다.

    (에라, 이놈의 나라를 벗어나 돈이라도 왕청 벌어야지!)

    남영철은 그때부터 일단은 조선반도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이다.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서 떳떳하게 살려거든 뭐니 뭐니 해도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자신을 둘러봐도 내세울만한 뭐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화김에 제과점 점원도 때려 치우고 진로선택을 두고 한때 고민도 많이 했고 방황도 많이 했었다.

    그러다가 일단은 운전기사 자격증을 따기로 한 것이었다. 자동차운전만 할 수 있다면 돈도 벌고 구겨진 가문의 기도 살려낼 수 있을 듯 싶었다.

    그래서 1939년 3월부터 한 달 간 서울에 내려가 경성자동차학교에 들어가 자동차 정비기술 및 운전면허 공부에 전념했다. 그 당시로 말하면 상당히 앞선 의식의 발로였다.

    한 달 남짓한 고심 끝에 운전면허는 따놓았는데 운전할 자동차가 보이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옹근 경성바닥에 자동차가 손가락 셀 정도로 몇 대 안 되었으니 무경력자인 그에게 핸들을 맡길 업체가 있을 리 만무했다.

                                      경성에서 자동차운전먼허를 따고 남긴 기념사진
                                      경성에서 자동차운전먼허를 따고 남긴 기념사진

 

    누군가 자동차를 몰려거든 '만주국' 소재지(신경) 아니면 북만의 할빈 쯤 들어가야 한다고 귀뜀해주었다. 그래서 남영철은 자나 깨나 탈출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집안 어른들끼리 말떼기를 하여 이웃마을에 사는 한 녀인과 혼인을 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가장이 되었다. 남 씨 가문의 장손으로 가장이 된 데다가 아내한테 태기가 있게 되면서 가장으로서 어디 나가 돈이라도 왕창 벌어와야겠다는 생각을 자꾸 하다 보니 날이 갈수록 탈출계획이 무르익어갔다.

    그러던 1939년 한여름 경성시내를 돌아다니며 운수업체란 운수업체는 다 체크하면서 면접보러 다니는데 따님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듣게 되었다. 기술은 배웠는데 취직은 묘연하고 거기에 식구는 늘어나고… 어딘가 앞이 막막하고 묘연하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남영철은 홧김에 그냥 집에 돌아가지 않고 그 걸음에 막무가내로 중국 북간도로 건너오게 되었다. 일단은 만주 땅에 와서 굿이라도 보자는 심사였다. 어찌 보면 현실도피인 셈이다. 그때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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