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3장 사랑의 로맨스(2)

 

방황

 

    중국에 건너와 처음 정착한 곳이 목단강 일대였다. 당시는 우물을 인공으로 파던 시기였는데 그곳에서 우물 파는 일도 했고 아무튼 돈이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런데 어디 가나 일제 치하의 세상이라 돈벌이가 그렇게 예상대로 되지를 않았다. 잡공으로 이 일 저 일 많이 찾아하느라 했지만 사람만 지쳐가고 돈은 좀처럼 모아지지 않았다. 가장으로서 집을 몰리고 떠나 온 몸인지라 아무튼 돈은 벌어야 했다. 

    예상대로 돈벌이가 잘 안되자 별 수 없다고 생각한 남영철은 다시 귀향길에 올랐다. 몇날 며칠을 걷고 또 걸어서 두만강가에 이르렀는데 차마 그 강을 건너 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들어 설 생각을 하니 사내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한국에는 노문하신 부모님도 계셨고 또 떠나기 바로 전에 따님이 태어났다는 걸 알고 월강한 몸이라 더욱 발걸음이 무거웠다.  

    남영철은 두만강가에서 한참이나 서성이다가 끝내는 월강을 못하고 다시 뒤돌아서고야 말았다. 그렇게 다시 벌리현을 걸쳐 돌아들어 간 곳이 할빈 일대였다.

    할빈에 와서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잡다한 일을 하다가 요행 찾은 직업이 일본인이 운영하는 운수회사 보조기사였다. 트럭을 모는 일이라 상당히 고달픈 직업이기는 하나 배워두었던 기술을 써 먹을 수 있어서 좋았고 그보다는 고생한 만큼 수입이 짭짤해 좋았다. 그 후 여기저기 운수회사를 전전하면서 트럭기사로 경력을 쌓아가다가 나중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업체에 들어가 한 시기 학도로도 있었다. 주로는 자동차 타이어 보수, 페인트 도장, 디젤유 교체 등 일을 하면서 가끔씩 일이 있으면 운전도 하게 되었다.

                                                    북만 땅에서 방황하던 시절의 남영철
                                                    북만 땅에서 방황하던 시절의 남영철

 

    남영철은 22살에 자동차 운전면허와 정비기술을 익힌 뒤 일진양행에 들어가 일찍부터 자동차를 만지게 되었다. 그 뒤 후지(富士)자동차부, 가네다(金田)운수회사, 구마모도(熊本)운수회사, 동아물산 등 업체를 전전하면서 자동차 정비와 운수 쪽 일을 전담하였다.  

    워낙에 키꼴이 훤칠하고 성품이 어질고 운전도 잘 하는지라 동아물산에 근무할 적에 일본 지배인이 은근히 마음에 들어했다. 

    당시 지배인한테 자가용이 있었는데 어느 날 남군을 불러들이더니 그 자가용을 몰아보라는 것이었다. 남영철은 어정쩡한 마음에 핸들을 잡고 정비업체 주변을 한 바퀴 휘익 돌아왔다. 운전 솜씨가 어지간함을 체크한 지배인은 다음날부터 평일에는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가족운전기사 노릇을 하게 하고 남은 시간에는 택시를 해서 돈을 벌어보라고 하였다. 그 당시로 말하면 자가용을 운전한다는 것이 참으로 사치스러우면서도 신사스러운 직종이었다. 그때부터 맨날 기름투성이 작업복을 입고 다니던 남영철이 근사한 정장차림에 손에는 새하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당시 일본지배인 슬하에 하나꼬(花子)라 부르는 예쁘장하게 생긴 따님이 있었는데 가끔씩 술 한 잔 마시면 “너 내 사위 할래?”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호의를 보이군 했다. 하지만 남영철은 그 당시 한국에 두고 온 가족이 있는지라 그렇다 할 태도표시는 못하고 그냥 하인답게 수걱수걱 일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배인이 “우리 이젠 가족이나 다름 없는데 기념사진이나 한 장 남기는 게 어때?”라고 했다. 남군도 별로 싫은 제의가 아닌지라 기꺼이 응해 나섰다. 고용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어련히 그렇게 해야 했었다. 그렇게 되어 그 손때 묻은 자가용을 배경으로 지배인 내외하고 따님, 손아래 남동생까지 다섯이서 ‘찰칵’ 사진 한 장 남겼다. 

                       일본 지배인 가족의 운전기사로 있던 시절에 남긴 기념사진
                       일본 지배인 가족의 운전기사로 있던 시절에 남긴 기념사진

 

    그 희한한 사진을 찍은 지 불과 얼마 안 되어 일본이 무조건 투항서에 조인하다보니 갑자기 동아시아권의 판도가 뒤집혀진 건 둘째 치고 국제 정세에도 큰 이변이 일어났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탄을 투하하였고 8월 9일 〈얄타협정〉에 따라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면서 일본군국주의가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소련군은 당초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 관동군을 쉽게 격파하면서 제1극동방면군 산하 제25군 소속의 보조 공격부대가 10일 조선반도에 진주하여 12일에는 웅기와 라진, 14일에는 청진에 진격하였다.

    당시 오키나와(沖繩)까지 진격했던 미군은 소련군이 급속히 남하하고 일본의 항복선언이 확실시되자 조선반도 전체가 소련의 군사점령하에 들어 갈 것을 우려하여 38선 분할을 제안했다.

    돈 벌어 가족을 영유하려고 간도 땅을 밟은 영철군은 이국땅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국의 땅덩어리가 두 쪽으로 갈리는 뼈저린 경험을 하게 된다. 남영철은 하늘을 우러러 그 허탈함을 달랠 길이 없어 그저 막연한 한숨만 길게 내 쉴 뿐이었다.

    이제 돈 벌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과 상봉할 그날만을 고대하면서 차곡차곡 준비된 삶을 살아왔는데 그것이 날이 갈 수록 막연한 환상으로 되고 만 것이다. 그 뒤 3.8선이 그어지고 남쪽하고 대륙이 정치적으로 리념이 갈리면서 남영철의 귀향길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총을 들지 않은 군인

 

    그러던 차 남영철한테 운전기술이 있는지라 할빈시 송강군구 포병퇀에서 입대제의가 들어왔다. 그 때가 1946년 4월이라 남영철의 나이 28살이었다. 

    그 당시 할빈이나 아성 일대의 산과 들에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전쟁도구로 사용하다가 도망가면서 패대기쳐버린 군용자동차나 대포, 땅크가 꽤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지역이야말로 예전부터 소련군과 일본군 간에 자주 충돌이 일어나는 지역이라 지역의 산과 들에 병영이 설치되어 있고 무기가 배치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무기들이 일제가 물러나면서 임자 없는 물건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하나하나 몰아다 정비해서 해방전쟁 전선원호에 내보내야 하는데 그런 기술력을 가진 인재가 급히 수요 되었다. 자동차나 기계정비 관련 분야라면 남영철이 둘도 없는 베테랑이라 본의 아니게 참군하게 된 것이다.  

    남영철은 밤에 낮을 여러 동료들과 함께 할빈, 아성, 계서 일대에 아무렇게나 버려져있는 자동차며 땅크를 몰아오는 일에 바삐 돌아쳤다. 사실 땅크는 몰아 본 경력조차 없었지만 그냥 기계작동이 어림짐작으로 자동차와 같은 원리일거라는 생각으로 시운전을 해보았는데 역시나 거기서 거기였다. 거기에 정비기술력까지 겸비하다보니 남영철은 일약 부대에서 각광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그 ‘전리품’들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깐깐하게 정비한 다음 다시 해방전쟁에 내보내는 일을 하게 되었다. 총을 들지 않은 군인으로 후방에서 한몫을 한 것이다.

    그 뒤 해방전쟁이 백열화되면서 남영철이 소속되어 있던 포병퇀이 남하하게 되었는데 남영철도 그 대오를 따라 목단강을 거쳐 도문으로 나오게 되였다.

    1947년 2월에 도문에 진입해서 공화국이 설립될 때까지 도문시자동차공회 조직위원회 주임 겸 도문시총공회 집행위원으로 있으면서 상당한 활약을 보였다. 그 당시가 해방전쟁 막바지 단계에 들어선 때라 승리의 희열을 코 앞에 둔 군민들의 혁명열조가 하늘을 찌를 태세였다. 영철군도 그 기세 드높은 혁명열조 속에 엇섞여 새 시대의 젊은이로 성장하면서 서서히 중국의 조선족으로 자리매김이 되었다. 남영철은 거의 해마다 자동차공회나 총공회 선진사업일군 아니면 로동모범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러다가 공화국이 성립되어서부터 한시기 도문운수공사에서 개인차 동업형식으로 운전기사 노릇도 하였다. 그런데 맨날 지정된 시간에 매여서 출퇴근을 하면서 고정구간을 달리는 기사직업이 신물이 나도록 싫었다. 그래서 1951년 3월부터는 아예 개체로 타이어수리부를 운영했다. 그 당시 도문에 몇 집 안 되는 정비업체인지라 수입도 쏠쏠했다. 그런데 1952년 말에 접어들면서 중앙으로부터 새로운 정신이 하달되면서 개체로 하던 타이어정비업체를 접고 다시 도문기계공장에 들어가 대약진이 시작되기 바로 전해까지 기술원으로 있었다. 

    그 사이 수차 시에서 조직한 당원학습반에 참가하면서 조직에 대한 갈망도 갈급했던지라 1956년 3월 29일에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말하자면 남영철은 중국의 조선족으로 호적등록이 되면서 서서히 고향 남녘땅을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판사판

 

    그러던 어느 날 길동군구 모범인물 표창모임에 갔다가 운명적으로 황정자 양을 만나게 된 것이다. 장인어른이 아무리 반기를 들고 나와도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사랑의 싹이 터서 이제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남영철로 말하면 벼랑 끝에 선 심정이라 이제 더는 미룰 수도 지체할 수도 없었다. 이판사판으로 밀어붙이는 게 상수였다. 

    어느 날, 영철군이 남에서 건너 온 같은 처지의 의형제들을 거느리고 장인어른 앞에 나타났다. 남영철은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고 말했다.  

   “부디 댁의 따님을 저한테 주십시오, 하늘이 두 쪽으로 갈리는 한이 있더라도 따님만은 꼭 지켜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선글라스를 낀 의형제들도 같이 무릎을 꿇고 “아버님, 이번만은 저의 형님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저희들이 두 분 사랑의 보증을 서 드리겠습니다!”

    이거 어찌 보면 영화에서나 봐온 장면이다. 그 의형제들 속에 피복공장 리공장장도 끼어있었다는 얘기다.

    장인 황화순은 소탈하게 한바탕 웃고 나서 “그래, 내 자네 소원 들어주리다. 자네야 말로 진짜 사나이로구먼!”라고 하면서 껄껄 웃었다.

    이렇게 되어 조선전쟁의 포화가 한창이던 그해(1950년)에 30대 중반에 접어든 신랑 남영철군과 20대 중반에 접어든 애 띤 신부 황정자 양이 도문시 모 혼례청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사랑의 싹을 틔워 장장 4년 만에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외가 편으로 말하면 외조부님, 외조모님을 비롯해 형제자매들이 꽤 많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혈혈단신으로 중국에 건너 온 아버님 측으로 말하면 신랑 본인과 그림자 뿐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포병퇀 시절부터 도문자동차공회 부주석을 거쳐 개체공상업자로 살면서 늘 핸들을 놓지 않고 살아 온 남군한테 일가친척은 없었지만 대신 수백 명에 달하는 친구들이 하객이 되어 왁자지껄하는 통에 결혼식장 분위기가 전에 없이 흥성흥성했다고 한다. 따님의 혼사를 두고 늘 언짢아했던 외조부님께서 그 번 예식장 분위기를 두고 “어허, 사위 하나 잘 삼았수다.”라고 주변에서 하도 칭찬을 하기에 선입견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사이 중국은 중국공산당이 제3차 국내혁명전쟁의 승리를 안아오면서 중국에서의 제국주의 통치를 끝내고 국민당 반동정부를 때려 엎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맞이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은 사실상 신민주주의혁명단계가 기본상 결속되고 사회주의혁명단계가 시작되었다는 표징으로 되었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국자가에는 조선민족의 대학이 설립되면서 장안에 화제가 되었고 결혼한 바로 이듬해 여름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면서 또 한 번 화제를 몰아왔다.

    뒤이어 자치주는 국민경제 회복시기를 경유하면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한데 이어 항미원조, 토지개혁, 반혁명진압 등 운동의 승리를 취득하면서 온보적인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저의 부모님들은 새 중국 력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그런 격변의 년대에 ‘남남북녀’로 만나 결혼을 하여 변강도시 도문에서 아름다운 신혼을 시작하게 되었다. 

                                         도문에서 신혼을 시작한 부모님과 큰 형
                                         도문에서 신혼을 시작한 부모님과 큰 형

 

    결혼한 그해 의령 남 씨 가문의 24대 장손 남룡운이 태여났고 3년 뒤에 둘째 남룡해가 태어났고 또 3년 뒤인 1957년에 셋째 남룡이 태어났다. (계속)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