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남룡해 지음

제4장  못 말리는 엄마의 유별난 이야기(1)

 

판단력 결단력 추진력

 

    어머니는 공부는 못했지만 상당히 명석한 판단력을 가지신 분이셨다. 자식들을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겠다는 그 일념만으로 도문에서 연길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밀어붙인 건 지금 돌이켜 봐도 기가 막힌 선택이자 판단력이다. 거기에 일단은 자기만의 주의가 서면 벽이라도 밀고 나가는 그런 파워와 추진력까지 겸비한 분이다. 어머니한테 우유부단이란 말만은 아예 통하지 않는다.

    맏아들이 태어나자 어머님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여보, 우리 연길로 이사를 갑시다. 앞으로 애들을 대학에 보내려 거든 대학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서 살아야지 않겠어요?”

    아버지는 들었는지 먹었는지 묵묵부답이다.

                                  맏아들을 안고 도문거리에 나선 멋쟁이 부부(1954년).
                                  맏아들을 안고 도문거리에 나선 멋쟁이 부부(1954년).

 

    3년이 지나 둘째가 태어나자 어머니는 전에 했던 말을 또 곱씹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화끈한 태도표시를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아버지는 도문자동차공회, 도문시총공회 령도 강위에 있다가 한때는 타이어 보수를 주업으로 한 개체공상업자로 있었고 또 후에는 도문기계공장(机电厂) 구입원으로 거의 기층에 내려가 사무를 보지 않으면 많이는 출장을 다니다보니 한 달에 두세 번 집에 들르는 손님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나서(1955년)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나서(1955년)

 

 그 뒤 또 3년이 지나 셋째가 태어났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나서 도문에서연길로 이사를 결심했다.(1958년)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나서 도문에서연길로 이사를 결심했다.(1958년)

 

  그 당시 아버지는 아예 집을 떠나 개산툰탄광 공단장(工段长)으로 내려가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연길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던 어머니로 말하면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아하니 떠돌이 인생을 사는 남편을 믿다가는 애들이 다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떡 정신을 차린 것이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새끼 셋을 낳아놓고 또 뭘 기다린다고 망설이는 거지?…)

    어머니는 생각이 굳어지자 곧장 도문의 집부터 경매에 내놓았다. 당시 3형제가 태어난 집이 도문진 중산가 16조 23번지였는데 일제 때 지은 일식양철기와집으로 도문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근사한 단독주택이었다. 

    마당에는 아버지가 몰고 다니는 소련제 카스차도 있었다. 그 자동차는 동북해방전쟁이 결속되면서 정부에서 아버지에게 ‘공로상’으로 준거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만큼 아버지는 한때 송강군구 포병퇀 소속으로 할빈, 아성 일대를 전전하면서 부대 후근사업에 공헌했고 그 뒤 부대를 따라 도문에 와서도 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한 후방사업에 공헌이 컸다는 얘기가 되겠다. 아버지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 후 공산당에도 들었고 국가간부가 되어 하는 일마다에서 솔선수범을 보였다. 한때 우리 집은 아버지가 받아 온 상장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우리 삼형제는 자주 그 자동차 운전석에 비집고 들어가 앉아 부르릉 - 엔진소리를 내며 자동차를 운전하는 시늉을 했었다. 핸들을 누가 먼저 잡느냐를 두고 자리다툼도 많이 했다. 그때 그 자동차 기름 냄새가 왜 그리도 좋았던지… 

    뿐만 아니라 그 단독주택 정원에는 어머니가 자식들 건강을 념려해서 키우는 염소도 두 마리 있었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 그 염소젖을 많이 먹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다들 먹을 것이 귀해 배고픈 고생을 많이 하면서 자랐음에도 우리 형제는 그나마 배는 골치 않고 무탈하게 잘 자랐던 것 같다.

    그렇게 정이 든 집이건만 어머니는 그 쾌적한 환경을 포기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다행히 집은 경매에 내놓자 바람으로 임자가 나졌다.

    어머니는 항상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우유부단하지 않았고 외려 신심과 열정으로 충만 돼 있었다. 나라는 대약진을 하느라 야단법석인데 한 가정부가 아이 셋을 거느리고 이런 담대한 선택을 했다는 게 지금 돌이켜봐도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시골로 이사를 가자해도 먼저 이사 가려는 동네에 찾아가 이사 동기를 밝히고 그 지역 파출소의 동의서를 받아낸 다음 낙호증(落户正) 정도는 끊어 와야 이사가 가능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런저런 껄끄러운 절차 따위에 대해서는 따져보지도 않고 그냥 막무가내로 이사를 강행한 것이다.

                   국자가에 오기전 도문에서 친분이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1958년)
                   국자가에 오기전 도문에서 친분이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1958년)

 

도문에서 연길로

 

    성격적으로 보면 어머니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겁 없는 화끈한 스타일이다. 작달막한 키에 비해 생각하는 스케일은 엄청 컸다. 거기에 똥담도 이만저만이 아닌데다 배짱도 두둑했다. 그 면에서 보면 외조부님을 많이 빼 닮은 모양이다. 당장 12급 태풍이 불어친다 해도 끄덕 하지 않는 그런 배포와 여유를 가진 분이다.

    그해 여름 어머니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젖먹이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요긴하게 써야 할 가장집물만 챙겨 한 보따리 이고 큰형님과 나를 앞세워가지고 도문역에서 연길 행 기차에 올랐다. 새끼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무작정 대학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게 공부 못한 ‘무대포’ 어머니의 단순한 이사 동기였다. 

    기차가 연길역에 들어서자 개찰구를 빠져나 온 네 식구는 대합실에서 마차 한 대를 세 내 가지고 시가지 쪽으로 향했다. 그 당시 연길역에서 하남다리까지는 거개가 논이었는데 울퉁불퉁한 흙길이어서 달리는 마차 뒤로 뽀얀 먼지가 일었다. 

    달리던 마차가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는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웬 사람들이 마중 나와 혀를 끌끌 차며 오느라 고생했다고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는 더운 물을 받아 온다, 저녁 진지를 챙겨 준다 하면서 야단법석이다. 난생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너무 반갑게 대해주니 마음이 더 없이 흡족했다. 

    썩 후에야 안 일이지만 우리가 연길에 도착해서 짐짝을 풀어놓은 그 집이 전에 어머님이 근무하셨던 길동군구피복공장 리공장장 댁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혼사를 중매시켜 준 그 리공장장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리공장장하면 아버지하고는 한 고향 내기이자 소싯적 친구인데다 어머니한테는 한 때 직접 상사였으니 인연치고는 보통 인연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잠시 리공장장 네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서히 연길에 안주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연길에서 홀로 동분서주하면서 내 집 마련을 위한 좌충우돌 ‘정정’을 시작하였다. 세 아들을 슬하에 둔 어머니는 그때 이미 억척녀로 변해있었다. 애오라지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매일 국자가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내 집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섯 식솔 중 유일한 녀인이었지만 누구보다 강했던 가문의 ‘왕’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이미 아름다움을 뽐내며 살아가기를 포기한 그냥 못 말리는 엄마였다. 바로 그 때로부터 명을 마감하는 그 시각까지 그는 언제 한번 립스틱을 짙게 바른 적이 없었고 그냥 일 년에 두세 번 싸구려 파마를 하는 게 다였다. 그 숱한 옷을 재단하고 만들면서도 언제 한번 자신의 옷을 지어입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 볼 겨들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불태워 가면서 가족을 위해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자체를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창업

 

    연길에서 독불장군으로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보금자리를 찾아 동분서주하던 어느 날 어머니는 신화서점 부근에서 마음에 드는 안성맞춤한 집을 접하게 되었다. 도문에서 살던 단독주택하고는 비교가 아니 되고 또한 길 역 집도 아니지만 한 세간이 살기에는 그나마 쾌적한 공간이었다. 더 근사한 집을 사고 싶었지만 이 참에 뭐니 뭐니 해도 재봉침만은 마련해야겠기에 안성맞춤한 평수를 골라 잡은 것이다. 

지난 세기 중반, 국자가-해방로-광명가가 'ㄷ'자로 교차된 옛 신화서점 뒷골목에서 우리 일가는 살았다.
지난 세기 중반, 국자가-해방로-광명가가 'ㄷ'자로 교차된 옛 신화서점 뒷골목에서 우리 일가는 살았다.

 

    어머니는 나머지 돈으로 〈나비표〉재봉침 한 대를 사들였다. 텔레비가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 가장집물에서 재봉침이 가장 선호하는 ‘보물 1호’였다. 어머니는 재봉침만 있으면 최소한 집식구들을 헐벗게는 하지 아니 할 자신이 있었다.

                                              어머님의 손때 묻은 나비표 재봉틀
                                              어머님의 손때 묻은 나비표 재봉틀

 

      어머니는 성급하게 복장점을 개업하지 않았다. 그냥 수중에 있는 재봉침을 가지고 어느 한 개체복장점에 들어가 바느질을 시작했다. 워낙에 바느질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터라 어머니한테 찾아오는 손님들이 차츰 많아졌다. 손님들은 하나 같이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차츰 단골손님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단골들은 여하를 불문하고 어머님이 직접 자기 옷감을 맡아주기를 원했다 그러다보니 복장점 일감중 반 이상이 어머니 몫이라 복장점 주인이 누구신지 헷갈려 할 정도로 민망할 때도 있었다.

    (에라, 이참에 나도 복장점이나 차려 볼가?)

    어머니한테 서서히 이런 욕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막내 동생을 낳고나서 가장으로서의 부담이 막중해지자 더더구나 복장점 개업의 꿈을 현실에 옮겨 볼 타산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살던 집을 340원에 팔아 넘기고 거기에 꼬깃꼬깃 모아두었던 돈을 합쳐 680원 주고 널찍한 집 한 채를 사들였다. 서시장 번화가에 위치한 주거도 가능하고 영업도 가능한 집, 어머니는 그 집에서 드디어 복장점을 시작한 것이다. 

    그 때까지도 아버지는 조양천뜨락또르공장에 내려가 근무하면서 연길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네 아들에 어머님이 세대주가 되어 남 씨 집안의 가세를 떠맡아 가고 있있다. 

    다섯 식구가 거주하는 그 공간이 낮에는 복장점으로 변해버리기에 집안은 늘 시끌벅적했다. 저녁이 되어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야 조금은 고즈넉해진다. 하지만 어머님은 여전히 바삐 돌아쳐야 했다. 네 자식에게 끼니를 챙겨 줄라니 밀린 바느질을 도맡아 할라니 참으로 눈 코 뜰 사이 없었다. 나와 형님이 눈치를 봐가면서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면서 어머니를 도와드린다고 설쳐댔지만 워낙에 장난 끼 심할 나이인지라 도우면 얼마나 도와드렸으랴 싶다. 셋째는 막내를 돌보는 일을 전담했던 기억이 난다.

    복장점은 순수 어머님의 야무진 솜씨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세간에 많이 알려져 차츰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졌다. 하루가 멀다하게 일감이 들어오면서 어머니는 일군도 받아들이고 차츰 규모를 넓혀갔다. 그 당시 옷 한 벌 주문 제작하는데 몇 주씩 걸렸다. 그만큼 일감이 밀리다보니 어머니는 밤에 낮을 이어 일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재봉틀에 마주앉으면 저녁 6시까지 거의 숨 돌릴 겨를이 없이 돌아친다. 그 와중에 자식들의 아침은 물론 점심도시락까지 챙겨줘야 한다. 게다가 해가 서산에 기울기 시작하면 식구들의 저녁끼니를 서둘러 챙겨야 한다. 그런데 손님들은 나름 퇴근하는 길에 복장점에 들르다보니 때로는 저녁 7~8시까지도 시끌벅적할 때가 많다. 일감이 매일 밀리고 또 밀려 무져놓은 원단이 구석구석 산더미를 이루었다. 그 복잡다단한 작업을 어머니는 특별한 메모 없이 그냥 어림짐작으로 잘 풀어나갔다. 어머님의 일상은 거의 이런 똑 같은 스케줄로 반복되었다.

    그러는 어머님의 사정을 몰라봤던 우리 철부지들은 저녁이 조금만 늦어져도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치군 하였다. 명절 때가 되면 더더구나 눈 코 뜰 사이 없었다. 학교들에서는 집단무 표현이 있어 단체복 주문을 의뢰하는데 그때면 아예 밤을 패가면서 일해야 한다. 이럴 땐 아예 재봉틀을 마주하고 쪽잠을 자는 경우가 다반사다.

    매년 6.1절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더 바쁘다. 공원 뒤산 체육장에서 성대한 경축행사가 펼쳐진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모인다. 주위서기도 주장도 그날만은 어린이들 속에서 동심으로 돌아가 하루를 즐긴다. 여러 운동종목을 곁들인 운동회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대형집단무 표현을 할 때도 있다. 이럴 때면 어련히 통일복장을 해 입다보니 단체주문이 밀려든다. 가가호호들에서도 6.1절이라고 애들에게 색다른 옷을 지어 입히려 하다 보니 복장점을 찾는 손님들이 평소보다 훨씬 많다. 어머니는 련속해서 몇날 며칠 밤에 낮을 이어 작업에 몰입한다. 하루 한두 시간 잠자는 게 보통이다.  

    한번은 6.1절 전날 꼬박 밤을 지샌 어머님이 새벽녘에 문을 열었는데 학부모님들이 벌써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 지은 옷을 찾아가지고 야유회에 가야 하기에 일찍 와서 기다리는 모양이다. 어머니는 급한 불부터 꺼야 하기에 그런 부모님들에게 밤새 만든 옷을 챙겨주느라 자식들의 아침은 잊고 있다. 아니 챙겨주고 싶어도 그럴 겨를이 전혀 없다. 다들 알아서 거리에 나가 빵조각이나 만두에 죽을 사다 떼우고는 부랴부랴 학교로 향한다. 

    명절 때가 되면 우리 형제들은 거지반 아침을 먹지 못한 채 학교로 간다. 이젠 길들여져 어련히 그러려니 하고 투덜대지도 않는다. 어머니에게는 항상 손님이 우선이다.

    어느 해 6.1절 날 공원 뒤산 체육장에서 성대한 운동대회가 펼쳐지게 되었다. 매 학급을 단위로 오색기를 해 들고 긴긴 대열을 지어 체육장으로 향한다. 체육장으로 가자면 그 대열이 어련히 우리 집 앞 해방로를 경유하게 된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부랴부랴 네 자식의 점심도시락을 챙겨가지고 문 앞에 나와 우리 형제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 꼬리에 꼬리를 문 대오 속에서 어머니는 용케 큰아들을 찾아내고 이어서 둘째인 나를 찾아낸다. 조반을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에 계란이나 빵 같은 걸 추가로 넣었다고 하면서 점심도시락을 건네준다. 그러면서 넌지시 용돈도 얼마간 챙겨준다. 도시락을 넘겨 받으면서 어머니하고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어쩐지 코마루가 찡해난다. 밤새 눈 한번 부치지 못해 충혈 된 두 눈에 피곤기과 꽉 차있다. 어머니는 금새 빠져나와 뒤에 따라오는 대열 속에서 셋째와 막내를 찾아낸다. 아직도 손에는 두 동생에게 챙겨 줄 도시락이 쥐여져있다.

    네 자식에게 늦게나마 도시락을 다 챙겨주고는 또 다시 재봉틀에 마주 앉아 일을 시작한다. 어떤 손님들은 제 때에 옷을 받아가지 못하게 되어 독촉이 성화같다. 간혹 가다 불만을 토로하는 손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님은 대충 해 넘기는 경우가 전혀 없다. 그럴 수록 더구나 최선을 다해 맞춰드린다. 짜증내던 손님들이지만 몸에 신통히 들어 맞는 옷을 받았을 때는 다들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어린다. 실은 그런 까탈스러운 손님들이 다시 복장점을 찾는다. 때로는 친척이나 아는 친구 분들까지 데리고 와서 옷을 맞추고 홍보해준다.

                              '마선쟁이'엄마가 있어 남씨 4형제의 동년은 행복했다(1964년)
                              '마선쟁이'엄마가 있어 남씨 4형제의 동년은 행복했다(1964년)

 

    당시 서민들의 생활수준이 그닥 높지 못하다보니 명절 때가 되어서야 새 옷을 맞춰 입는다. 간혹 가문에 결혼식이 있거나 환갑잔치가 있으면 가족을 단위로 와서 옷을 맞추는 경우도 있다. 이런 옷은 여하를 불문하고 제시간에 맞춰드려야 한다. 안 그러면 고객한테 신의를 저버리는 건 둘째 치고 남의 집 희사를 그르치게 된다.

    훗날 나와 형님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어느 정도 셈이 들어 어머님의 일손을 도와 나섰다. 청소도 하고 밥도 짓고 빨래도 하면서 하여간 어머님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매일 반복되는 어머님의 일상은 만부하로 돌아갔다. 낮에 밤을 이어서 말이다. 한 밤중에 목이 말라 일어나보면 어머니는 그냥 재봉틀을 마주하고 있다. 아예 바느질하던 그 맵시로 혼곤히 잠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한번은 쏟아지는 졸음을 버텨가면서 두터운 솜옷을 박다가‘앗!’하는 소리가 나더니 미싱이 아예 멈춰버렸다. 마선바늘에 바른손 중지가 빨려 들어가 박혀버린 것이다. 금새 시커먼 피가 괴여오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서두르지 않고 그냥 옆에 있는 솜으로 상한 손가락을 꼭 싸쥐고 알음소리 한마디 내지 않고 지혈시키느라 애쓴다. 그런데 워낙에 심하게 들이 박힌지라 지혈이 잠간 되었다가는 다시 피가 괴여 나온다. 일을 그만두면 몰라도 그 손을 해가지고 그냥 작업을 해야 하니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재봉틀 밑에 뻘겋게 피멍이 든 솜뭉치가 한다발이나 된다. 어머니는 그 손을 해가지고 밤 늦게까지 작업을 한 것이다. 고객과의 약속은 여하를 불문하고 지켜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경영철학이었으니 말이다.

    어머니의 바른손 중지는 수십 번 재봉침에 빨려 들어가 바늘에 찔리다보니 아예 손톱조차 무드러져 없어졌다. 제일 길어야 할 중지가 새끼손가락 길이와 맞먹는다. 손톱이 없는 중지 끝은 까까머리모양으로 보기가 흉하다. 말짱하던 손부리가 얼마나 봉제바늘에 찔렸으면 기럭지가 한 삼지나 짧을 정도로 무드러졌겠는가?! 그 와중에 피는 또 얼마나 흘렸고?! 하지만 어머님은 매번 붕대로 대충 자가 처치를 하고는 아무 내색을 내지 않고 계속해서 일한다.   

                 봉제바늘에 밖혀 '까까머리'가 된 엄마의 손가락을 보면 가슴이 짠해 난다
                 봉제바늘에 밖혀 '까까머리'가 된 엄마의 손가락을 보면 가슴이 짠해 난다

   

   어머님의 바른손 중지의 상처는 한생을 바느질로 살아 온 어머니 삶에 대한 흔적이자 ‘감탄표’이고 또한 ‘공로패’이기도 하다. 그 못 생긴 손가락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알싸해난다. 때로는 손님들의 옷을 달여주느라 다리미를 올려놓고 다른 일에 몰두하다보니 옷이 다 타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가차 없이 그 손해를 부담하고 다시 천을 끊어다 새롭게 맞춰드린다. 분망히 돌아치는 만큼 수입 또한 짭잘했다. 그 때문에 우리 자식들은 학교 다니면서 해진 옷 입어본적이 없었고 돈 그리운 줄 모르고 살았다. 대신 삼시 세끼 따스한 밥을 먹은 기억은 별로 없다. 그만큼 일손이 딸렸으니 자식들의 끼니를 신경 써 챙겨 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항상 보면 배추김치에 된장국 아니면 미역국이다. 형제 중 셋째가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맨날 대충 해 먹인다고 투덜거리기가 일쑤다.

    그 당시 우리 가문에 왕청에 사는 먼 친척이 계셨는데 음식솜씨가 아주 좋았다. 우리 형제들은 그분을 ‘왕청마다매’라고 불렀는데 가끔씩 우리 집에 놀러오면 진수성찬을 해주어 우리 형제들이 많이 따랐다. 그 ‘왕청마다매’오는 날이면 생활개선을 하는 날이었다. 하여 형제들은 어머니보다 그 ‘왕청마다매’를 더 좋아했고 맨날 주말이 되면 그분이 오기를 많이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음식 솜씨 하면 어머니도 웬만한 프로 뺨 치는 수준급이였는데 그 한 해는 그럴 겨를이 눈꼽 만치도 없었다. 어머니도 그러는 자신의 삶이 곤혹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신흥복장

 

    어머니가 운영하는 복장점이 꽤나 유명세를 타던 그 시절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순식간에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잡아내고 이른바 개체공상호를 ‘자본주의 꼬리’라고 잘라버려야 한다면서 개체공상업을 제한하였다. 

    어느날 신흥가두에서 주변의 개체복장점들을 규합하여 〈신흥복장점〉이라는 집체기업을 내온다고 했다. 어련히 어머니가 경영하던 복장점도 거기에 먹혀들게 되었다. 어머니 립장에서는 많이 서운했었을 일이지만 그 당시 체제하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어머니는 솔선수범하여 변화에 부응했고 가도 사업에 열성분자로 나섰다. 엄마마음이 어찌했을지는 몰라도 자식이 된 우리로서는 그게 외려 좋았다. 어머니가 밤을 새가면서 일하지 않아도 되었고 대신 출근하니까 삼시 세 끼 식구들에게 따뜻한 밥이라도 지어줄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바람에 어머니는 본의 아니게 신흥복장점 일원이 된 것이다. 그때로부터 10여 년간 맨날 시끌벅적하던 우리 집이 끝내는 살림집 같은 아늑하면서도 오붓한 분위기를 찾았다. 어머님이 복장점으로 활용하던 작업공간을 안성맞춤한 거실로 개조하다보니 우리 형제들이 단독으로 방 하나씩 차지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그것이 훗날 우리 형제가 대학입시공부를 잘 할 수 있었던 여건이 되기도 하였다. 누구보다 기뻐한 건 우리 형제들이다. 왜냐하면 그 특단의 조치가 우리 집 거주환경을 180도로 바꾸어 놓았고 우리 모두가 독립적인 학습공간이 차려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솜옷을 박을 때의 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어머니 (오른 쪽.1979년)
                        솜옷을 박을 때의 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어머니 (오른 쪽.1979년)

 

    당시 신흥복장점에 열대여섯 명 기능공들이 있었다. 거기서 기술적으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될 기능공이 한분 있었는데 이름이 장영순 재단사다. 듣는 말에 의하면 일본에 가서 제대로 재단을 배우고 온 분인데 웬 일로 조직의 견제대상이 되어 늘 침울한 기분에 젖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정치 분위기로 남보다 뾰족하거나 해외에 다녀 온 경력이 있으면 알게 모르게 이런 저런 ‘모자’가 씌어지게 돼 있었다. 장영순 재단사도 그런 억울함을 이겨내지 못해 얼굴에 웃음기가 없이 상당히 침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뭐니 뭐니 해도 복장점 리더가 되자면 재단기술을 장악해야 주목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장재단사를 자주 찾아가 ‘언니’라고 친절히 불러주면서 진심을 보였다. 직장에서 누구하고도 말을 섞지 않는 장재단사가 어머니한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곤경에 처한 자기한테 누군가가 관심을 보이고 살갑게 대해주는 그 자체가 고마웠던 것이다.

    한번은 집에까지 찾아가서 속심을 나누게 되었는데 저으기 흥분되자 래일부터 재단기술을 본격적으로 배워줄 터이니 어디 손잡고 잘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럴 수록 어머니는 장재단사를 더욱 존경하면서 그의 곁에 찰거마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그 심오한 재단기술을 눈대중으로 배워냈다.

    결과적으로 어머니는 신흥복장점이 생겨나서 얼마 안 되어 점장 겸 재단사로 승진했다. 

    신흥복장점에는 어머님이 손대중으로 마름질해놓은 재단용 옷 도본(샘플)들이 구석구석에 쌓여있었다. 얄팍한 마분지를 오려 만든 수십 가지 재단용 도본을 한곳에 쌓아놓으면 저그만치 어머니의 키를 넘는다. 옷의 종류에 따라 도본이 달랐고 신장 크기에 따라서도 달랐고 남녀로소는 물론 성별에 따라, 나이에 따라서도 각각이었다. 쉽게 말하면 모든 사람은 다 자기만의 체형을 가지고 있기에 다 자기만의 ‘도본’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는 없고 해서 대충은 성별이나 나이, 신장, 체형에 따라 ‘표준도본’을 떠서 거기에 맞추어 옷감을 마름질한다. 훗날 장영순 재단사한테서 재단기법을 배우고 나서는 도본이 없이 자와 분필을 가지고 재단했다.

                      신흥복장점 멤버들과 함께(1980년)
                      신흥복장점 멤버들과 함께(1980년)

 

    어머니는 복장점에 들어서는 손님을 힐끗 빗질해보고는 기본적인 치수만 재여 보고는 곧장 마름질에 들어갔다. 손님의 취향에 따라 조금은 헐렁하게, 아니면 조금은 호졸하게 감을 잡아 옷을 지었다. 

    어머니의 눈썰미는 그 자체가 거의 오차 없는 ‘표준잣대’였다. 그것이 어머님만의 옷 마름 ‘비법’이었다. 그 당시는 기계재단이 들어 온 시기가 아니어서 다들 이런 식으로 복장점에 찾아가 번번이 옷을 지어 입었다. 보통 보면 먼저 치수를 재이고 그에 알맞은 도본을 찾아 재단해서는 봉제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후에는 복장업계도 기계재단에 이어 기계화작업으로 생산능율을 높이다 보니 많은 개체복장점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어머니도 이미 정년을 넘긴지라 서서히 마음을 수습하고 공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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