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남룡해 지음

4장  못 말리는 엄마의 유별난 이야기(2)

 

    복장점을 운영하는 내내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다. 복장점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는 주내에서 상당한 직분을 가진 간부가 있는가 하면 지식인도 있고, 로동자는 물론 농민도 있었다. 어머니 주위에는 항상 그런 사람들로 북적이었다.

    신흥복장점을 운영할 때에는 외곽에 사는 농민들이 자주 찾아왔다. 그들은 터 밭에 심은 남새 같은 걸 가져다 서시장에서 팔아서는 살림에 보탬했다. 그러다가도 돈닢이 좀 생기면 보함직한 옷감을 사가지고는 어머니의 복장점을 찾다보니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단골이 되었다. 

    본인의 옷을 위탁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남편이나 자식들의 옷도 의뢰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건 당사인이 오지도 않았는데 체중이며 신장 같은 정보만을 대충 얻어듣고도 어머니는 신통방통하게 옷을 지어드렸다. 아마도 그 면에는 타고난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골어머님들은 그런 옷 견지들을 찾아다 남편이나 자녀들에게 입혀보고는 신통히도 들어맞아 감사한 나머지 감자며 고구마 같은 걸 가져다주면서 인사를 건네는 경우도 있었다. 어머님의 복장점이 바로 서시장 입구이다보니 옷 지을 일이 있으면 어련히 그곳으로 찾아들게 돼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직분이 높으신 간부나 지식인들보다는 그런 소박한 시골아낙네들이 인상에 많이 남아있다. 어머니는 그런 분들에게 가급적이면 최상의 서비스를 해드리느라 신경을 많이 썼다. 가공비용은 거의 반으로 절충해서 받았다.

    혹여 살림이 어려워 그 돈마저 내기 어려워하는 분들에게는 외상을 걸어두어 가을에 돈이 생기면 물도록 특혜를 주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가을철이 되면 쌀 주머니를 메 오는 사람, 감자며 오이 같은 농산품을 감사의 인사로 갖고 오는 분들도 있었다.

    당연히 그 몇 푼 안 되는 외상값마저 물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들조차도 너그러이 받아주었다. 몇 해 지나 우연히 그런 분들을 만났어도 어머니는 전혀 내색을 내지 않고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들이 몸 둘 바를 몰라 죄송해 하면 사람이 살다보면 형편이 어려워 그럴 수도 있는 건데 뭐 그깐 일 가지고 그러냐면서 그냥 힘내라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그러다보니 어머니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아주머님들은 팔다 남은 물건을 맡겨두고 다음날에 찾아가서는 계속해서 장을 본다. 게다가 날씨가 쌀쌀해지면 무람없이 찾아들어와 몸도 녹이고 한가위에 밖에서 장사하다보면 가끔 허리 쉼도 해야 하는데 그 때면 어련히 어머니 가게에 모여 들어 허리 쉼도 하고 수다도 떤다.

    어머니는 그 바쁜 와중에도 그분들의 얘기에 귀 기울여 주고 참견한다. 그래서인지 서시장바닥에서 ‘황재단사’하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나이가 많든 적든 처음 만나면 ‘언니’로 불렀었는데 언젠가부터는 ‘왕언니’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만큼 서시장바닥에서는‘왕’으로 통한다는 얘기다.

                  연길서시장에서 황정자 모르면 '간첩'으로 통했던 그 시절의 어머니 (1982년)
연길서시장에서 황정자 모르면 '간첩'으로 통했던 그 시절의 어머니 (1982년)

    어머니는 늘 주변 사람들을 친자매처럼 대해주었다. 그러다보니 어떤 이는 물건 팔러 오는 기회에 우선은 병부터 봐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련히 그 무거운 짐짝을 복장점에 내려놓고는 병원을 다녀온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벼라별 짐짝으로 복장점이 물건보관 창고로 되는 경우도 있다. 복장점 이미지에는 안 좋은 일이지만 어머니는 그런 걸 개의치 않아했다. 

    물건을 보관해주는 일은 보통 일이다. 어떤 때는 병을 보이거나 반드시 사야 할 물건이 있는데 돈이 모자라 난처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선 듯이 호주머니를 열어 바쁜 몫부터 풀라고 돈을 빌려준다. 

    어떤 손님은 어떡하나 남은 물건을 다 팔고 갈려고 시간을 지체하다보니 막차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참으로 애간장이 타들어간다. 지금처럼 택시가 있는 세월도 아니고 밤새도록 십여 리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럴 때면 어머님은 그 아줌마들을 집에까지 데려다 재워서는 이튿날 아침 조반까지 챙겨준다. 그런 불청객들이 들어오는 날이면 어련히 우리 형제가 방 하나를 내주어야 한다. 누구 방을 내줘야 하느냐는 하는 일을 가지고 티격태격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어머님이 한 마디 한다.

   “저 사람들은 가진 게 없는 불쌍한 분들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어려움에 처하기 마련인데 도와드릴 여건이 된다면 어련히 서로 돕고 살아야지. 너희들이 불편하더라도 조금씩 양보해서 도와드려야지 않겠니?…”

    그런 분들이 나중에는 고객이라는 차원을 넘어 ‘친척’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정을 나누었다. 그들은 늘 받기만 한 그 고마움을 달리 표달할 방도가 없어서 집에서 재배하는 풋옥수수며 콩이며 돌배 같은 걸 가져다주는 것으로 성의를 표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거기에 버금가는 사탕이며 과자 같은 걸 사서 답례를 한다. 

    어머니는 항상 받는 것 보다 베푸는 일에 선심을 쓰는 넉넉한 삶을 원하셨다.

 

‘소 대갈’ 아저씨 일화

 

    어머니는 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흥성흥성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예전에 복장점을 할 때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면 벼라별 계층의 사람들이 다 있다. 미장원을 운영하는 ‘파마쟁이’ 아줌마에서 짠지장사를 하는 ‘반찬아줌마’, 빵가게를 하는 ‘빵순이아줌마’, 인력거를 모는 삼륜차부까지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챙겨들고 삼삼오오 복장가게로 몰려온다.

    그때마다 인심 좋은 어머님이 김치며 반찬이며 이것저것 아낌없이 내어준다. 아줌마들은 점심을 드시면서 남편과 싸운 얘기, 자식 놈들이 속 썩이던 얘기, 시누이 얄미운 얘기… 하여간 벼라별 얘기들을 다 터놓는다. 어머니는 늘 그런 북적대는 분위기의 중심에 서있는 걸 좋아했다. 

    당시 어머니 복장점에 자주 드나드는 분들 중에 같은 황 씨 성을 가진 시골아저씨 한 분이 계셨다. 연길시 교외 동광촌에 산다는 분인데 자주 시장에 남새 같은 걸 갖고 와서 팔다가는 나머지가 있으면 복장점에 맡겨두고 다음날 와서는 계속 팔았다. 워낙에 사람을 좋아하는 어머니인 데다가 같은 황 씨이다 보니 ‘누님, 동생’하면서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맨날 계급투쟁만 부르짖으면서 ‘자본주의 사조’가 꼬리를 쳐들라치면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그 매정한 세월임에도 어머니는 겁 없이 그 황 씨 아저씨하고 몰래 ‘원대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말하자면 그 황 씨에게 어머님이 투자하여 송아지 몇마리 키워 그 리윤을 반반씩 나눠가지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사육관리는 그 황 씨가 전담하기로 되어있었다. 

    그 당시로 수백 원을 투자하여 숫송아지 한 마리와 암송아지 네 마리 사들여 쥐도 새도 모르는‘황우농장’을 가동한 것이다. 그때로부터 1년이 지나고 2년 철에 접어들던 어느 날 그 황 씨가 느닷없이 소대가리 하나 둘러메고 복장점에 나타났다. 소가 갑자기 병이 들어 다 죽었다는 것이다.

    정신이 아찔해나는 순간이다. 소가 새끼치기를 하여 몇 마리 더 늘어났다는 얘기를 들은 지 불과 며칠 안 되는데 갑자기 다 죽고 소대가리 하나만 남았다니 이거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기분 같아서는 그 놈을 당장 앞세워가지고 가서 현장을 점검하고 싶었으나 원체 해서는 아니 될 일을 추진해 온 터라 그냥 덮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통이 엄청 컸던 어머님은 그냥 가난구제를 한 셈 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성실하지 못한 그 오라버니한테 따끔하게 한마디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대가리라도 하나 챙겨줘서 눈물이 나게 고맙네. 애초에 사람 잘 못 보고 투자한 내가 소보다 더 아둔한 년이지! 아무튼 썰썰하던 차 한 끼 잘 먹겠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라고만 생각하게나.”

    어머니는 이렇게 한마디 하고는 그 소대가리를 푹 고아서 한 끼 잘 먹어주는 것으로 아퀴를 지었다. 주변에서 그 작자를 잡아다 깜방에 처넣어야 한다고 윽박질렀으나 어머니는 당신이 선택이 빗나갔기에 미련을 버리는 것으로 홀가분하게 일을 마무리했다.

    그 후로 그 ‘소 대갈 아저씨’는 다시 복장점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나타 날 리유도 없었거니와 나타나서도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자선사업가 따로 있나

 

   어머님하고 자주 대면하는 사람중에 구씨 성을 가진 아줌마가 있었는데 어느 가도에서 주임으로 일하시는 분이다. 어머님하고는 50년대부터 교분이 있었던 분이라 무람없이 지내는 친구인 셈이다. 

   1969년도에 그의 남편이 ‘하방간부’로 농촌에 내려가게 되여 그도 남편 따라 시골로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게 되였다. 그 당시 국가간부들이 정부에서 주는 사택에 들어 살았는데 농촌에 내려가게 되면서 사택을 정부에 들여놓았다고 한다. 

   2년이 지나 정책낙실이 되여 다시 시가지로 들어오게 되였는데 원래 살던 집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 상황이라 갑자기 가족이 엉덩이를 들여놓을 집구석이 없었다. 그 당시는 세집을 얻자해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어머니는 가족하고 아무 상의도 없이 그들 가족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이 갖고 온 가장집물들은 아예 창고에 넣어두고 두 세간이 50평방도 아니되는 집에서 함께 지내기로 한 것이다. 다행이 큰형님이 농촌에 내려가 있어서 우리 가족 다섯식구에 그집 식구 다섯을 합쳐 갑자기 열식구가 그 좁은 공간에서 비비닥거리며 지내게 된 것이다. 집안 식구가 살기에도 비좁은 공간인데 갑자기 식구가 배가되니 그 불편함을 이루다 형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 말씀이 항상 가내에서 ‘최고지시’였으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님이 하자고하면 아버지나 우리 형제들은 무조건 따라야 했다. 그만큼 어머니는 주견이 셌고 남을 도와준답시고 마음 먹으면 끝까지 도와주는 그런 스타일이였다. 

   몇달이 지나 구아지미네가 다시 집이 생겨 나간지 한달이 되나마나했는데 이번에는 전에 연변가무단 단장으로 계셨던 조득현선생의 사모님이 어머니를 찾아와 세 들어 살 집을 구해달라고 닥달이다. 그 당시 사모님이 연변의학원 강사로 계셨는데 어머님하고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들도 '하향간부'로 촌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자주 어머니 복장점에 드나들었던 단골이다. 


조득현(赵得贤,1913~2002). 조선 평양 태생. 연변대학 예술학원 교수, 무용가. 1941년에 할빈교향악단 발레단 배우, 1947년 조선의용군 제3지대 선전대 무용지도, 건국 후, 연변가무단 무용단 교원, 부단장 및 연변예술학교 부교장 역임. 장시기 조선족무용 및 민간무용예술에 관한 연구에 종사. 대표작으로《농악무》,《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등이 있음.


   사모님 말대로라면 이젠 도저히 촌에서 지낼 수 없어서 한시 급히 정책락실이 되기도 전에 여하를 불문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엉덩이를 들여놓을 집구석부터 얻어야 하는데 어머니더러 나서달라고 한다. 정책락실이 되면 어련히 순리대로 집문제도 해결이 되련만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용기가 없어서 돌아 온 모양이다. 

   어머니는 그들의 조급한 심정을 리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별루 어디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그분들을 또 우리 집에 들이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도 미안한지 일단은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 그리 할 수 밖에 없다는 도리를 구구히 설명하면서 정책락실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도와드리자고했다. 우리 집 식구들은 그냥 다들 입이 뿌주기 나와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말대꾸는 못했다. 이렇게 되여 구아줌마가 나간지 한달이 지나 우리 집에는 또 식구가 갑지가 불어났다. 또 두 세간이 한 가마밥을 먹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한달이 지나 그들 일가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20여평되는 집을 사고 나갔다. 그뒤 단위에서 집을 그들에게 배분해주다보니 급히 자금이 수요되였는데 갖고 있는 집이라도 팔아야 했는데 살 때와는 달리 집이 얼른 팔리지 않아 애간장을 태웠다. 하여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머님이 돕는 셈 치고 그 집값을 선대해 준 것이다.

   어머니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 준 이야기는 ‘천방야담’이라해도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한시기 아버님 국적회복 일로 한국에 장기체류해있다는 ‘상황극’을 연출해야 하는 데 호텔에 그냥 묶는다는 것도 말이 아니였다. 고민 끝에 어머니가 행여나 문안 인사나 전하려고 전에 도와주었던 박모 양에게 전화를 했다. 박모는 전화를 받자 곧장 달려 와 호텔에 투숙해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자기 사는 집에 기거하게 하고 불편해 한다고 자기는 아예 친구집에 가서 류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누구를 도와주면 화끈하게 도와주는 스타일이다. 

   사실 이러루한 얘기는 부지기수다. 

 

하늘나라에 간 한 씨 

 

    어머님이 선의를 베푼 이야기는 많고도 많다. 소설로 쓴다 해도 장편소설 몇 권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당시 한승학(韩承学)이라 부르는 분이 연변수리부문에 계셨는데 장춘에서 수리전업을 전공한 보기 드문 고급지식인이었다. 어머님하고는 예일곱 살 아랫벌 되는 분인데 ‘문화혁명’시기 같은 ‘보수파’진영에 있었던 어설픈 인연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한 씨가 그때까지 독신숙사에 있는 사람이라 자주 우리 집에 들려 밥도 먹고 신세타령도 하다 보니 어머니하고는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한 씨는 지식인 냄새가 다분한 사람이었다. 말을 해도 진정성이 느껴지게 차근차근 잘 했다. 흠이라면 술을 너무 반가워하는 게 탈이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면서 다들 그분의 신세타령을 들어주면서 곁을 내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예 어머니를 ‘누님’이라고 부르면서 한발 더 다가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건 말건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인심 후하게 술도 내주고 때로는 빈속에 술을 마시는 게 안쓰러워 안주도 볶아주었다. 그 사람은 안주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냥 술만 있으면 된다는 그런 알짜 술꾼이었다. 술이 거나해지면 어련히 말도 다사해졌는데 하는 말들이 다 현실에 대한 불만정서에서 나오는 화제였다. 

    하긴 그 세월에 지식인들이 ‘고린 내 나는 아홉째’로 몰렸으니 그도 례외는 아니었을 게 뻔 하다. 그런 시설을 다 들어주는 어머니였기에 지나다가 들려서 한두 잔 하다가는 알딸딸해지면 알아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숙소로 돌아군 했다.  

    이런 일이 한 주일에도 한두 번이 아니게 잦아지다보니 집식구들이 은근히 그 아저씨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그런 눈치도 모르는지 처음에는 한 잔 두 잔 잔으로 마시더니 언젠가부터는 공기로 바뀌었다. 그러다보니 마시면 곧장 취해버리기에 아예 그 자리에 곤드라져 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 불청객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 해장국까지 끓여서 먹여서는 출근을 시킨다. 

    그렇게 자주 들려 술상을 벌리는 것도 싫고 더구나 오면 취해서 구석에서 넋두리를 하면서 잠까지 자는 건 더구나 싫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은근히 그러는 어머니를 나무람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어머니는 진담 반 변명 반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라고 그 사람이 반가워서 그리 대하겠니? ‘문화혁명’이 너무도 많은 간부와 지식인들에게 이름 할 수 없는 고통과 피해를 준 게 아니겠니? 그 아픔을 터놓고 싶은 곳이 우리 집이라고 찾아 온 건데 그걸 들어줘야지 어떡하겠니? 너희들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저 아저씨 마음을 받아주는 척이라도 하려무나.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니?”

    솔직히 어머니가 말하는 사람의 도리가 가슴에 와 닿아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집안에 ‘통수’인 어머니가 그리해야 한다고 하니 다들 이건 아니라고 하면서도 토를 달지 못했을 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술을 드시지 않았을 때는 아주 점잖은 분이다. 그놈의 술이 문제였다. 어머니 앞에서 이제 끊어야지 하면서 술 맹세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놈의 술이 한 잔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주체를 못한다. 

    때론 다른 곳에서 술을 많이 마셔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면 곧장 우리 집으로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만은 다 받아준다. 이런 차수가 차츰 잦아지더니 나중에는 ‘알코올중독’으로 번졌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 형제들도 도저히 용납이 안 되어 그 아저씨를 외면했다. 취해서 들어오거나 아니면 한 잔 하려고 들리면 아예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님만은 인심 좋게 술은 제한해서 주고 밥을 꼭 챙겨먹도록 하였다. 이런 어색한 국면이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아마도 한두 해 지속된 듯 하다.

    언젠가부터 한 씨가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가 하도 이상해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좋은 짝을 만나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때 한 씨 나이가 저그만치 마흔다섯을 넘겼다고 한다.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 뒤 한 씨 생각만 하면 어머님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역시나 그 험난한 시국에 한 젊은 지식인의 운명을 책임져준 거나 다름 없는 ‘쾌거’를 이루어낸 것이다. 끈기 있는 인내와 의리, 너그러움으로 벼랑 끝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 지식인의 손을 잡아준 것이다. 그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정상인으로 출근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는 은근히 기뻐하였다. 물론 우리 형제들은 앓던 이를 뽑아버린 기분이어서 덩달아 좋아했던 것 같다.

    이렇게 되어 우리 집에 술 냄새가 가셔진지 한두 해가 지났을까 하던 어느 날 그 한 씨가 갑자기 나타났다. 양손에 큰 보자기까지 해들고 말이다. 그러는 한 씨를 마주보는 순간 우리 형제들은 또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거라고 예측했다. 우리는 아예 반기지 않고 외면해버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느긋하게 웃으면서 한 씨더러 어서 들라고 한다. 그리고는 밥부터 챙겨준다.

    한 씨는 서먹서먹해하면서도 우리 형제들 눈치를 살피면서 밥술을 든다. 어머니는 술도 한 컵 따라 주면서 뭔 일로 또 이렇게 보따리까지 챙겨가지고 나왔냐고 묻는다. 한 씨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머뭇머뭇하더니만 어머니 손에서 술병을 찾아 한 컵 더 마시더니 그간의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한 씨와 결혼한 그 녀인에게 따님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세 식구가 오붓이 한 가족이 되어 1년 넘게 살았는데 어느 날 공안에서 제보를 받고 한 씨를 미성년강간범으로 잡아갔다고 한다. 제보자의 말만 듣고 한 씨에게 6년 판결을 내려버린 것이다. 한 씨는 너무도 억울했다. 왜냐하면 40대 중반이 되도록 ‘홀아비’ 신세로 살아 온데다가 오랜 알코올 중독자여서 그때 이미 성기능을 상실한 사람인데 강간범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 억울함만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법원에 그 억울함을 기소했다고 한다. 후에 법원에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리유로 그를 석방했다. 그러고 보니 감옥에서 출옥해서 갈 데가 없으니 결국은 우리 집에 찾아 온 것이다.

    어머니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지 그더러 원래 단위에 찾아가 사정 얘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한 씨가 하는 말이 이미 6년 판결을 받아서 단위에서 공직을 떼운 상황이란다. 억울한 누명을 벗었으니 다시 공직을 회복한다 해도 래신래방을 거쳐 새로운 정책 락실을 기다려야 한단다. 

    이건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우리 집 말고는 엉덩이를 들이 밀 곳이 없다는 얘기다. 세상도 무심하지, 우리 집이 민정국도 자선단체도 아니고 또 려인숙도 아닌데 하루 이틀도 아니게 또 그 아저씨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니 이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되었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알코올중독자에 감방까지 다녀 온 사람을 또 받아들여야 한다니 우리 형제는 이번에는 가차 없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숨 한 번 쉬더니 또 다시 그 한 씨를 받아들였다. 그때 어머니가 하는 말이 참으로 화가 날 정도로 얄미웠다.

   “의지할 곳이 없어 찾아 온 사람을 문전박대하다니? 그다지 반가운 손님이 아닐지라도 찾아 온 사람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누구를 막론하고 도와주려고 했으면 끝까지 도와줘야지. 중도에 껄끄럽다고 물러설 거면 아예 도와 나서지 말아야지!”

    이렇게 되어 앓던 이를 뽑았다고 좋아했던 한 씨 아저씨가 또 다시 우리 집에 들어 살게 되었다. 

    그 뒤 한 씨는 부지런히 래신래방판공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바다에 돌을 던진 격이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정부에서 하는 정책 락실이라는 게 하루 이틀 사이에 진전이 있을 리 만무한 일이다. 그렇다고 무한대로 기다린다는 것도 속 터지는 일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술을 찾게 될 수밖에 없다. 아버지께서 자주 반주 술을 드시다보니 집에 술병이 비지 않았다. 나중에 그 술들을 여기저기 감춰놓으면 어떻게 알고 찾아내서는 공기로 벌컥벌컥 마셔댔다. 술로 자신을 혹사시키고는 잠을 청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조차 없다. 그럴 수록 한 씨 아저씨의 알코올중독증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그냥 이렇게 가다가 무슨 변고가 생길 게 뻔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한 씨 일을 해결해보려고 나섰다. 

    우선은 신흥가판사처 서기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가도에서 안 된다면 민정국에 찾아가려고 사람까지 찾아놓았다. 다행이도 며칠이 지나 가도에서 소식이 왔다. 한 씨를 정신병원에 보내 치료를 받게 하기로 했다고 말이다. 그 당시 알코올환자를 그렇게 치료하기도 했다. 

    이튿날 병원에서 보낸 차가 와서 한 씨를 실어갔다. 우리 형제는 또 다시 후 -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이젠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때는 은근히 어머니를 원망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한 씨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두둔 해 나섰다. 세월을 잘 못 만난 데다가 부모는 물론 형제자매나 일가친척 하나 없는 건 둘째 치고 안해 복, 자식 복마저 없으니 얼마나 불쌍한 존재냐고 하면서 넋두리를 한다. 그러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우리도 할 말은 없다. 어머니는 그 후 맛나는 음식을 해가지고 정신병원에 자주 찾아갔다. 

    이렇게 몇 개 월 간 안정을 찾았는데 어느 날 병원에서 또 다시 소식이 왔다. 이젠 병이 많이 호전되었으니 한 씨를 데려가라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씨가 주원할 때 적어둔 리력서에 우리 집 주소가 적혀있었고 어머님이 보호자로 기록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이거야말로 코 막고 답답한 일이다. 어머니는 별 수 없어 곧장 병원에 가서 또 한 씨를 데려왔다.  

    그런데 3~4개 월 간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한 씨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피골이 상접했는데 바람이 불면 넘어갈까 무서울 정도로 허약해 있었다. 병원에서 하는 얘기로는 알코올중독자가 술을 끊다보면 다들 그렇게 된다고 하나 이건 산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한 씨 원래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 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이런 사람을 식구로 받아들였다가 무슨 변고라도 생기게 되면 더 큰 화를 불러 올 지도 모른다는 게 우리들의 판단이다. 

    이번에는 어머니 주장이라면 흙으로 메주를 쓴다 해도 수긍해주던 아버지마저 반대해 나섰다.

    일이 이지경이 되고 보니 어머니도 안달이 났다. 어머니는 무슨 골칫거리든 생기면 그 즉석에서 풀어가는 스타일이다. 우선 한 씨를 집에 데려다 안착시켜놓고는 다시 가도에 찾아가서 교섭하고 또 민정국에 찾아가 교섭하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한 씨더러 알아서 해결하라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한 달이 지나서야 학수고대하던 소식이 왔다. 민정국에서 한 씨를 요양원에 보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건 적어도 온 집 식구가 받아들일만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 씨는 얼마나 때가 묻었으면 그냥 우리 집에 있는 게 편하다고 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했다.

    이렇게 어언 세월이 흘러 2년이 지나갔다. 어느 날 무슨 일을 보다가 그 한 씨 생각이 나서 궁금하던 차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그 한 씨가 잘 지낸대요?”

    필경 우리 집에 드나든 시간이 몇 년 잘 되니 미운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머님의 표정이 사뭇 어두워지더니 한식경이나 말이 없다가 한마디 한다. 한 씨가 요양원에 가서 얼마 안 되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고 말이다. 

   “내가 끝까지 지켜줬어야 했는데 중도에 포기했으니 일찍 간 거지…”

    어머니는 꼭 마치도 한 씨의 죽음이 자신이 최선을 다 하지 못해 빚어진 결과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어쩌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한테 나라가 못하는 일을 할만치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지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는다. 

    어머니가 오래 동안 말이 없자 우리도 따라서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하도 유별난 어머니 때문에 우리도 가슴이 멍해났다. 

                                                        어머니 (1982년)
                                                        어머니 (1982년)

못 말리는 처세철학

    평생 학교 문이라는데 가보지 못한 어머니이기에 문화정도는 논할 바가 못 된다. 고작 해방이 나면서 야학에 좀 다녔고 또 본의 아니게 군에 입대해서 어섯눈이라도 뜨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군정대학 조양천교도대에 들어가 토지개혁 선전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맨날 극본을 암송하고 연극에 출연하다보니 신문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에 어머니께서 이런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작은 아버지 댁에 있을 때 계집은 출가지 외인이라고 서당에 보내주지 않고 오랍동생만 동네 서당에 보내주어 글을 읽게 했다고 말이다. 동생이 집에 돌아와서 맨날 방에서 소리 내어 오전에 배운 천자문을 읽는데 공부머리는 아니었나본다. 몇 번씩 곱씹어 외워대고는 돌아앉으면 까먹는 그런 ‘맹추’였다. 외려 부엌에서 설거지 하면서 듣고 있던 ‘부엌데기’가 하늘 천 따지를 줄줄 외워대어 황명도 어르신이 깜짝깜짝 놀랐다고 한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달랐고 머리가 빨리 돌았다고 한다. 뭐니 뭐니 해도 기억력이 비상하고 감각기능이 뛰어나서 판단이 빨랐다고 한다. 하기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한해서는 남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고 무작정하고 밀어붙인다. 

    우리 형제는 늘 문화가 없는 그런 어머니를 ‘도깨비엄마’, ‘무대포엄마’라고 얕보았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어머니는 본인이 이루고저 하는 일은 꼭 이루어내고야 마는 그런 끈질긴 성미였다. 참말로 어이없다고 하는 일도 어머니는 척척 잘도 해제낀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생존철학이 뚜렷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벽이라도 밀고 나가는 그런 분이셨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철면피하다 할만치 부끄러움이라는 게 뭔지 모르고 사는 분이다.

    어머니의 중국어는 하위권 수준이다. 하지만 누구를 상대하든 의사표현에는 문제가 없다. 발음도 어순도 엉망이지만 ‘손마선’질을 해가면서라도 의사표현은 확실하게 한다. 그러다보니 간혹 한족고객이 찾아오면 다들 긴장하는데 그럴 때면 어머님이 나선다. 손짓 발짓 해가면서 교류를 해도 소통이 안 되면 아예 분필로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면서라도 납득을 시킨다. 

    그런 사람 중에 누구를 막론하고 고객손님이 될수 있다고 판단이 서면 아예‘갈비전’을 들이대서라도 무조건 내편으로 만든다. 우선은 내편으로 끌어당겨놓고는 그 사람 비위나 취향에 맞추어 끊임없이 ‘애정공세’를 들이댄다. 

    여기서 강찬혁 선생과의 에피소드만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당시 《연변일보》사 촬영부 주임이셨던 강 선생이 하루는 같은 부서에 사진기자로 일하는 외삼촌과 함께 퇴근길에 양복점에 들렸다. 초면에 강 주임을 대하는 순간 어머니는 이 사람을 ‘내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딱히 그 리유가 뭔지는 몰라도 저런 분을 친해두어 랑패될 게 없다는 것이 그 당시 어머님의 단순한 판단이다. 그쯤 촉이 오면 어머니는 하던 일을 제쳐놓고 술상부터 차린다.

                           나의 진로 선택에 결정성적인 영향을 준 사진기자 강찬혁 선생 
   나의 진로 선택에 결정성적인 영향을 준 사진기자 강찬혁 선생 

강찬혁(姜赞赫,1924~1995). 화룡현 덕화 태생. 1955년부터《연변일보》사 촬영기자에 이어 미술촬영조 조장, 중국촬영학회 연변분회 비서장, 주석, 길림성촬영가협회 회원, 중국촬영학회 리사 역임. 중국 조선족촬영예술 개척자의 한 사람.


   보아하니 강 주임은 술을 퍼그나 반가워하시는 분이셨다. 아버지 또한 둘째라면 서러워할 애주가였으니 어련히 옆 좌석에 끼어 앉는다. 권커니 작커니 술이 몇 순배 돌고나면 취흥이 도도해 젓가락장단이 나온다.

   “내가 한턱 / 자유단장님이 한턱 / 팽글팽글 도는 술이나 마셔나 봅시다 / 청청 하늘엔 잔별도 많고 / 요내 가슴엔 먹물도 많네.…”

    아버지께서 먼저 가수 뺨치는 수준으로 한곡 뽑으면 강 주임도 덩달아 한곡 넘긴다. 어머니는 ‘얼씨구 좋다! 지화쟈 좋구나, 좋다!’ 하면서 부지런히 안주를 볶아 올린다. 술도 귀하고 음식도 귀했던 그 세월에 지나가는 나그네를 이렇게 후하게 대접하는 집이 우리 집 빼고는 국자가에 없었을 것이다.

    밤이 깊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강 주임한테 어머님이 센스 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다음에 오시면 제가 근사한 양복 한 벌 맞춰드리겠습꾸마. 언제든 들립소.”

    워낙에 신사스타일의 강 주임이 이건 술대접보다도 더 귀가 솔깃해진다.

   “술을 공짜로 먹었는데 양복이야 돈 내고 지어 입어야지요. 그렇잖아도 한 벌 맞추려던 참인데 마침 잘 됐수다. 이제부터 내 양복은 황 여사 전담이요.”

    이렇게 강 주임하고 인연이 된 게 어언 몇 년째다. 그 사이 강 주임은 시도 때도 없이 양복점에 들려 옷도 맞춰 입고 술잔도 자주 나누셨다. 어머니 단골 중에 유난히 잘 생긴 신사스타일의 아저씨였다. 기기에 카메라까지 척 메고 나타났으니 그 자체가 어머니한테는 홍보 아닌 홍보였다. 그 바람에 어머니 가게도 입소문을 탔고 강 주임은 강 주임대로 믿음직한 ‘주막’에 술친구까지 생겨 서로가 윈윈이 된 셈이다. 

    당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변농구공장 주조차간에 배치 받은 나는 그 직장이 마음에 안 들어 고민이었다. 일이 힘든 건 둘째 치고 맨날 먼지투성이 꼬라지를 해가지고 사는 게 정말 싫었다. 이러다가 장가나 갈 수 있을는지 미래가 걱정되었다.

    우리 형제 넷이 다 촬영기자인 외삼촌과 함께 자라다보니 사진기 다루는 재주는 남달랐다. 지금은 별거 아닌 재주지만 사진기가 비행기만큼이나 귀했던 그 세월에 사진기를 만질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시뚝해 할 만한 일이다. 

    어느 날, 오랫동안 꼬깃꼬깃 숨겨두었던 말을 넌지시 꺼낸다.

   “강주임한테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둥? 우리 둘째가 사진에 애착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어디 써 줄만한 곳이 없겠습둥?” 

    언제부터 어머님이 저런 혼자생각을 굴린 거지? 곁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내가 외려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어머니가 놓은 ‘덫’에 강 주임이 꼼짝 못하고 걸려든 것이다. 아니 솔직히 강 주임도 어머니도 누가 누구를 리용해 먹으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아니지만 그 찰나 강 주임도 발뺌 하려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허, 룡해 그놈이 사진 감각이 남다르지유, 내 그 얘기 허투루 들어두지 않을 거니 어두 두고 봅시다!”

    누구를 좋아하면 밸까지 다 빼주는 ‘무대포’ 어머님의 ‘처세술‘에 강 주임이 녹아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또 한마디 툭 던진다.  

   “강 주임께서 지난번에 제가 한 부탁 잊은 거 아닙지? 우리 둘째 취직 말입구마. 내 그 은혜 평생 두고 있지 않을 터이니…”

   “황 여사 부탁인데 내가 잊어버릴 리 있겠수? 좋은 자리 찾아보고 있으니 곧 연락드리오리다.”

    강 주임도 인심 좋은 분이라 대답 한번 시원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되어 나는 강주임의 소개로 그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벗어버리고 주위 선전부에서 주관하는 자치주창립 30주년사진전시행사 주비처에 들어가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진짜 사진기를 멘 카메라맨이 된 것이다. 그 당시 대형촬영행사들도 많았는데 그게 열정을 가진 나에게 끼를 펼쳐 보일 수 있는 도약의 기회로 다가왔다. 

    행사 뒤끝에 나는 정식으로 연변력사연구소에 사진편집으로 초빙되었다. 내가 그렇게 원했던 카메라를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차려진 것이다.

연변력사연구소 한준광 소장을 모시고 동경성 고찰길에 나선 저자.(왼쪽 첫번 째가 저자,그 옆에 분이 한준광)

연변력사연구소 한준광 소장을 모시고 동경성 고찰길에 나선 저자.(왼쪽 첫번 째가 저자,그 옆에 분이 한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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