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남룡해 지음

제5장 ‘코신부대’ 전설(1)

 

‘코신부대’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1966년에 모택동이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문회보'에 발표된 모택동 주석의 '사령부를 포격하라'
                   '문회보'에 발표된 모택동 주석의 '사령부를 포격하라'

 

   그 당시 나는 고작 소학교 6학년생이다 보니 ‘문화대혁명’에 참여에는 `자격미달이었다. 나보다 한살 위인 초급중학교 1학년생들부터 ‘문화대혁명’에 참가하였는데 애매모호하게도 나만 ‘왕따’를 당한 기분이어서 은근히 서운했다.

   당시 초중 1학년생들부터는 왼팔에 ‘홍위병’이라는 붉은 완장을 두르고 대련합을 한답시고 이런저런 학생조직을 내왔다. 그들은 자나 깨나 모주석의 접견을 받고자 다들 초록색 군복에 붉은 오각별이 빛나는 군모를 쓰고 허리에 혁띠까지 두르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북경으로 향하였다. 하여 연길역은 늘 군복을 입은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대오 속에 끼어 천안문성루가 있는 북경으로 가고 싶은 마음 뿐인데 소학생이라는 딱지를 벗지 못해 불가하다고 하니 속상했다. 꼭 마치도 담 너머로 쳐다볼 수는 있는데 그 담을 넘어서면 벌칙이 되는 그런 기분이다. 그때 나는 그 일 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그 당시 형이 초중 2학년생이어서 멋진 군복차림을 하고 친구들과 함께 북경으로 가는 걸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형은 늘 또래 친구들과 함께 대자보도 쓰고 삐라를 등사해 살포하면서 상당히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 모든 것들이 그림의 떡이어서 나는 늘 입이 뿌루퉁해있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네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밤낮이 따로 없이 바삐 돌아쳤다. ‘혁명’이니 뭐니 하는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는 '문화대혁명' 시작을 앞두고서야 연길로 전근하여 일가족이 모여살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연길시에 이른바 ‘홍색’과 ‘홍군’이라는 두개 큰 파벌이 생겨나면서 치열한 대립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대자보를 써 붙이는 형식으로 서로를 공격하더니 차츰 선을 넘어 입 싸움, 말 싸움으로 번저졌고 나중에는 아예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격돌로 발전했다.

   무차별적인 유혈투쟁이 가시화되면서부터 도시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학교나 공장 및 사회구조 전반이 불꽃 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른바 ‘홍색’이란 반란파조직으로서 그들의 주되는 진압목표가 당시 중앙위원 겸 길림성 부성장에 연변주위 제1서기로 있던 주덕해를 타도하는 것이었다. 그에 맞선 ‘홍군’은 일면 로동자혁명위원회라는 조직이었는데 이름 하여 주덕해를 보호하고 지지하는 보수파진영이었다.


주덕해(朱德海,1911∼1972). 러시아 연해주 태생. 1920년 지신향 승지촌(勝地村) 이주. 1931년 5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선후하여 동북항일련군 제4군단 제2련대 당지부 서기, 팔로군 359려단 특수중대 정치지도원, 연변조선혁명군정대 총무과 과장,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 송강군구 직속 8지대 정치위원, 동북민족사무처 처장을 력임하다가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서기, 주장, 길림성 부성장 력임.


 

  유혈투쟁 현장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우익진영에 몇 백여 명이 포진해있고 좌익진영에도 몇 백 명이 포진해 있으면서 서로가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다. 게다가 머리에는 광산로동자들이나 쓰는 안전모를 눌러쓰고 면전에는 철사로 된 보호 장치를 하고 또 어깨에는 ‘탄약’으로 써야 할 돌 주머니를 메고 상대방에 대해 드센 공격을 들이댔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시내안의 백화점이며 소형잡화점들이 죄다 ‘홍색’의 손에 넘어가 반란파조직의 ‘물자공급기지’로 변해버렸다.

   그 당시 우리 집이 해방로 바로 옆 서시장 부근이어서 바로 문 앞이 그 불꽃 튀는 ‘전장터’였다. 사태파악을 못하고 그냥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문밖으로 나갔다가는 어디서 날아 온 지도 모르는 ‘돌총’에 머리통이 묵사발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어머니는 워낙에 바쁘신 몸이라 어느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보수파 쪽에 마음이 가 있었다. 한 것은 큰아들과 남편이 보수진영 쪽에 가담해있었으니 여하를 불문하고 아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내색을 내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하는 복장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두 파벌의 싸움이 지속되면서 언제부터인지 아버지도 보수진영 쪽에 가담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과 같이 바느질을 하면서도 항상 간이 콩알만해있었다. 큰아들하고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면 그나마 한시름 놓으면서 매일과 같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근 양복점의 장아줌마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큰일 났어요. 지금 보수진영이 ‘홍색’의 고립과 타격을 받아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네요. 이제 더는 빠져 나 올 수조차 없게 되었다는데 어쩌지요?”

   어머니는 금세 마음이 무거워났다. 보수진영이라면 남편과 큰아들이 들어있는 그 ‘홍군’조직이었으니 말이다. 집안의 세대주인 두 부자가 곤경에 처해있다는 건 우리 가문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어머니는 두말없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집안이 몰락할 위기에 처했는데 우리라도 힘을 보태야지!”

   실은 장아줌마 남편도 보수진영 쪽이라 같은 처지였다. 그 외에도 어머니가 아는 신흥가의 적지 않은 녀인들 남편들이 보수진영 쪽이라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작 합심해서 나가 싸우자고 하니 선뜻 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장 아줌마도 주춤주춤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생각을 달리했다. 내 자식, 내 남편이 위기에 처해있다면 어머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판사판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들 내 말 똑똑히 들으시오. 지금 우리들 집안의 세대주인 남편, 그리고 새끼들이 위험에 처했단 말이오.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나서주겠소? 우리가 모여앉아 안달복달한다고 길 가던 사람이 선의를 베풀어 줄 것도 아니잖소? 지금은 우리 어머니들이 나설 때란 말이오.”

   어머니가 겁 없이 설득에 나섰다. 일하던 그 맵시 그대로 당장 뛰쳐나갈 잡도리였다. 어머니의 강경한 태도에 힘을 입어서인지 장 아주머니가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두 사람은 금세 손뼉을 마주치고 주변에 아는 보수파진영의 아줌마들한테 연락을 취한다. 이제나 저제나 애끓는 속만 태우던 치마저고리 입고 코신 신은 엄마들이 하나 둘 복장점으로 모여든다. 어머니는 그들을 조직해 일단은 보수진영을 두던 해 반란파들과 싸울 ‘작전’을 짜고 있었다.

   엄마들은 우선은 연집강과 부르하통하 강변에 나가 자갈을 주어 치마폭에 싸안고 돌아들어왔다. 보수진영이 싸우는데 ‘탄약’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날부터 신흥가를 중심으로 하는 가도아줌마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어머니가 운영하는 복장점에 모여들어 어떻게 보수진영을 두던 해 싸울 것인지에 대한 수다를 한바탕 떨고는 그 내용을 실천에 옮겼다. 복장점이 금세 보수파진영의 ‘작전 지휘부’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모인 엄마들을 누가 ‘코신부대’라고 처음 불렀는지는 모르나 그 ‘코신부대’가 순식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것만은 세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들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모여서 어떻게 하면 보수진영 쪽에 제때에 ‘탄약’을 공급하며 또 어떻게 앞장서 싸우는 가장들에게 제때에 급식공급을 할 것인가 하는 등등의 문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렸다. 그 중심에 늘 어머니가 계셨고 어머니가 운영하는 복장점이 그 코신엄마들의 ‘근거지’역할을 하고 있었다.

   중국 조선족문단의 대표소설가 류원무가 쓴 《연변취담》이라는 책에 <코신부대>라는 글의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온 사회가 동난 속에 빠지고 파벌성이 우심화되는 때 가두의 녀성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대변론에 가담하였는데 그들 모두가 코신을 신었다고 「코신부대」라고 불려진 것이다. 이는 코신 신은 녀인들에 대한 찬미이기도 했다. 그들 모두는 정의감에 불타 이악스러웠고 담찼다. ‘주덕해동지는 좋은 간부다!’ 그들은 한결 같이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작고한 전임 주위서기를 변호해 나선 그 경상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류소기,등소평,도주,주덕해,요신,전인영을 타도하자는 프랑카드가 걸려 있는 가운데 집회가 열리였다. 사진은 룡정체육장에 몰려든 인파

공세에 밀린 보수파

   그날 나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복무대루청사가 반란파들에 의해 함락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포로’들은 손에 손을 잡고 두 눈을 수건으로 가리운 채 무장인원들의 압송하에 해방로를 건너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안에서 안절부절이다. 한 것은 큰아들이 집을 나간 지 20여 일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혹여 저 복무대루에 갇혀있는 건 아닌지? 그게 아니라면 혹시 저기 연변의학원 병동에 갇혀있는 건 아닌지? 어제 저녁 그 포위망을 뚫고 나오다가 총탄에 맞아 쓰러진 그 셋 중에 혹시 큰아들이 끼어 있었던 건 아닌지?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머니는 도저히 앉아서 멀쩡하게 기다릴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판사판으로 뛰쳐나가 아들을 찾아보리라 용단을 내렸다.

   어머니는 곧추 ‘포로’들이 갇혀있다는 복무대루를 향해 뛰어갔다. 가면서 누구든 만나면 복무대루 안에 연변일중 학생들이 들어있냐고 묻는다. 또 어제 저녁 총격에 쓰러진 사람들 중 학생이 몇 명이 있었냐고 말이다. 간난신고 끝에 어머니는 복무대루 안에는 학생이 없었고 총격에 맞아 쓰러진 사람도 죄다 성인임을 확인했다. 뜻인 즉 큰아들이 아직은 살아있다는 얘기다.

   과연 그렇다면 아들이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누군가가 말하기를 연변일중학생들이 일부 연변병원 병동청사에 갇혀있다고 하였다.

   어머님이 보기에도 그 말에 일리가 있을 상 싶었다. 여러 날 째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도 그렇고 또 복무대루청사는 확인한 상태이니 이제 의심이 가는 곳이 연변병원 병동청사다.

   거기까지 추리를 하고나니 이제는 누구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애오라지 내 발로 그 병동 안에 들어가 내 눈으로 자식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를 확인하리라 마음을 단단히 굳힌 것이다.

   다음날 이른 아침, 어머니는 무슨 정신으로 그 겹겹이 늘어선 포위망을 뚫고 연변병원 병동부근으로 접근해갔다. 어머니는 그 청사 주위를 갔다왔다하면서 그 안으로 들어 갈 방도를 찾고 있었다.

   마침 병동청사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던 중 같은 심정을 지닌 겁 없는 어머니 몇 분을 만났다. 그 어머니들 역시 남편이나 가족을 찾아 나선 분들이셨다.

   어머니는 일단은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 병동청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단호히 말했다. 두 어머니도 찬동해 나섰다.

   어머니는 일단은 합의를 본 두 어머니와 단짝이 되어 콩 볶듯 한 총소리가 자주 울려대는 그 주변을 맴돌면서 기회를 노리였다.

   그 사이 여러 번 무장을 한 반란파들한테 걸려 저지를 당하고 입에 담지 못할 욕도 먹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 당시 연변의학원 병동청사는 물 샐 틈이 없이 반란파들의 포위권에 들어있었다. 대낮에 반란파들은 그 병동 안에서 얼씬하는 기척만 나도 총질을 해댔다. 창문 밖으로 누가 머리만 얼핏 내밀어 보여도 따따따… 총을 갈겨대군 하였다. 그러다도 밤이 되면 탐조등을 설치해놓고 몇십 메터 안팎을 탐조등으로 비추어대어 주위가 대낮 같이 환했다. 간혹 바람에 풀잎이 소리를 내도 가차 없이 총질을 해댔다.

   그런데 그 살벌한 판국에 어머니는 끝끝내 병원 후문 쪽에 나있는 작은 입구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그 ‘위대한 발견’을 뜻을 함께 하기로 한 두 어머니에게 고하였다.

   그 다음날 이른 새벽에 어머니는 그 두 어머니와 함께 쥐도 새도 모르게 그 후문 쪽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 입구에서 청사 대문까지 불과 60메터 거리였는데 그 사이를 무슨 정신에 뛰어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일단은 막무가내로 앞만 바라고 뛰기 시작했다. 뒤이어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지만 멈춰 서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판사판으로 뛰고 또 뛰었다. 이렇게 끝끝내는 포위를 뚫고 의학원 병동청사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세 사람이 동시에 출발해 뛰었는데 어머니와 다른 한 어머님만은 목적지에 이르고 다른 한 어머님은 따라서지 못했다.

   청사 안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보수파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탄우가 빛발 치는 포연 속을 뚫고 들어 온 녀인들을 보고 다들 초풍환장할 지경으로 놀랐다.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때 그 3명 어머니 중 한 어머님이 총에 맞아 후문 입구 불과 몇 메터 밖에서 쓰러졌는데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고 한다. 갇혀있던 보수파들은 그 무시무시한 탄우속을 뚫고 청사 안에 불쑥 뛰어든 두‘영웅’어머니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어머니는 그때 당시의 상황을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로 저 병동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 내 아들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 아무 것도 뵈지 않더구나. 물론 자리러지게 짖어대는 총소리가 귀전에 아니 들린 건 아니지. 하지만 무슨 수가 있나? 여하를 불문하고 저 지하방공구 입구에 다달아야 내 아들의 행방을 확인할 수 있다는데…”

   겁 없는 두 녀인의 깜짝 출연은 병동 청사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총싸움이 시작된 뒤로 그 공포의 병동 청사 안으로 개미 한 마리도 기어 들어오지 못했는데 말이다. 전기도 끊기고 전화며 통신이 아예 다 막혀버린 지 오래고 게다가 식양공급마저 안 되어 그냥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하면서 다들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겁 없는 두 엄마가 총탄이 빛발 치는 그 포연 속을 뚫고 들어 온 것이다. 그냥 행방이 묘연한 자식하고 남편을 찾으려는 일념만으로 이런 ‘거사’를 강행한 것이다.

   함께 움직였던 세 어머니 중 한명은 불행하게도 총에 맞아 사망했다. 저의 어머님을 따라 청사 진입에 성공한 다른 한 어머니는 공포에 정신착란이 왔는지 마구 헛소리를 하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 안에 의사가 있어서 진정제를 복용해서야 약간은 정신을 차리게 되었단다.

   하지만 나의 어머님만은 정신이 올롱해서 들어서자부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아들을 찾기 시작했다. 병동 내 지휘부에서 사정을 알고 알아보았는데 다행히 큰아들이 그 안에 있은 게 아니었다. 갇힌 사람 중 연변일중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계속)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