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 남룡해 지음

제5장 ‘코신부대’ 전설(2)

 

새로운 임무를 맡고

   비록 아들은 찾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그 안에 어떤 사람들이 갇혀있고 그들이 그 안에서 어떻게 반란파들과 대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친히 목격했다. 다들 보수파진영의 사람들이라 어머니는 그들의 일거일투수족에 심이 감동을 먹었다.

   듣자니 병통 청사 안에 소금이 떨어진지 한주일이 넘는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들을 위해 뭔가 득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작심했다. 당시 그들이 가장 절박이 수요 하는 것이 소금이었다. 어머니는 우선은 소금부터 구해주리라 마음먹었다.

   병동 내에 잠복한 보수파 리더들은 너무도 위험한 행동이라 다들 만류하였다. 무릇 병동 안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에 대해 눈에 뜨이는 족족 미친 듯이 총질을 해대게 돼 있어 위험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 소름끼치는 모험을 하기로 작심했다. 어차피 그 포연 속을 뚫고 들어왔을 라니 기회를 노리다보면 나가는 것 또한 별문제일 거라고 자신했다. 또 그것이 여러 동지들의 목숨과 직결된 일이기에 해볼 만한 모험이라고 자처했다.   

   어머니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휴대 가능한 정도의 소금을 얻어 허리에 띠고 다시 어둠이 깃든 새벽을 리용해 다시 돌진해 들어갔다.

   병동 안에서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리고 있던 보수진영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사선을 겁 없이 넘나드는 어머님을 보고 너무도 놀라 두 눈이 꿀 등잔만 해졌다고 한다. 다들 어머니를 둘러싸고 이젠 살았다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두 번 다시 희망의 불씨를 심어준 것이다. 비록 많은 양의 소금을 얻어다 준 건 아니지만도 갇혀 사는 사람들한테는 그 소금이 금보다 귀한 존재였다.  

   보수진영의 리더들은 다들 어머니를 ‘영웅’이 따로 없다고 극찬했다. 어머니의 그 용감한 행동은 축 처져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감동을 주었다. 그들은 어머니의 겁 없는 행동에서 자신들의 암담한 미래가 어쩌면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신심과 용기를 얻었다.  

   어머니는 아들 찾으러 들어갔다가 그 병동청사에서 이틀 밤을 지내게 되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지휘부 책임자가 어머니를 직접 뵙자고 찾았다. 병동청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항을 낱낱이 적어 당 중앙에 보고하려고 〈고소문〉을 작성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 〈고소문〉을 북경에 가지고 가서 당 중앙에 전달해 줄 적임자로 어머니를 지목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총탄이 빛발 치는 곳으로 겁 없이 뛰어들어 온 녀인이라면 이 세상 그 어떤 험난한 상황이 들이닥친다 해도 거뜬히 임무를 완성해 낼 거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어머니도 그 임무가 수백 명 고위급지식인과 간부들의 운명과 관계되는 사명이기에 어련히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제안을 선뜻이 받아들였다.

   그날 밤 어머님은 〈고소문〉을 몸속 깊이 숨겨가지고 야밤삼경에 또 다시 포위권을 뚫고 나왔다. 다시 콩 볶듯 한 총소리가 한참 울려댔다.

   병동 청사는 뛰쳐나왔는데 어디로 어떻게 해서 북경에까지 가야 할 지는 파악이 없었다. 자칫 반란파들에게 잡히는 날에는 〈고소문〉을 빼앗길 건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경계가 삼엄한 연길역에서 기차에 오른다는 것도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더더구나 그 당시 연길역이 이미 반란파들의 손에 넘어가 통제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북쪽 출구로 빠져나 온 뒤 밤도와 왕청 방면으로 걸음을 재우쳤다.

  그 다음날 날이 훤히 밝을 무렵 왕청 기차역에 당도하였다. 하지만 대합실 근처에 다가가 보니 이미 반란파들이 통제하고 있는지라 경계가 상당히 삼엄했다. 어머니는 아예 발길을 돌려 락타산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왕청에서 락타산 쪽으로 가자면 중도에 4개 간이역을 지나야 하는데 마침 락타산에 본가가 있어서 일단은 그곳에 가서 달리 방도를 대보기로 작심했다.

   락타산에 있는 본가에 가서 하룻밤 류숙하고 그곳에서 북경 방향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다행이 락타산역이 간이역이다 보니 반란파들이 그곳까지는 통제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었다.

   한평생 바느질에만 전념하면서 살아 온 어머니인지라 어찌 보면 그 번 북경행이 생에 처음 되는 먼 길 출장이었다. 그 출장이 그냥 노랫말에서 외워대던 북경이라고 하니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그 살벌한 세월에 중국말이라야 ‘니디워디’ 밖에 못하는 어머니가 어떻게 여러 번 기차를 갈아타면서 수도에까지 찾아갔는 지 지금 생각해봐도 수수께끼다.

   천신만고 끝에 북경역에 당도해 이제 중남해로 찾아가야 하는데 중남해가 어디에 붙어있는 지 알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일단은 시위 대오에 끼어 함께 구호를 부르면서 행진했다고 한다. 그 시위대가 언젠가는 천안문을 지날 거고 거기까지 가면 무슨 방법을 대서라도 중남해로 찾아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교롭게도 시위행열에 끼였다가 며칠 전에 북경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는 보수진영의 사람을 만났다.

  어머니는 그분의 도움을 받아 일단은 국무원 산하 래신래방 접대실에 찾아가 그〈고소문〉을 전달했다.

   그 다음날부터 어머니는 무작정하고 그 래신래방 판공실에 찾아가 답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머니의 지극정성이 감동으로 이어졌는지 접대실에서는 끝내 당 중앙의 회신을 어머니에게 전해주었다.

   어머니는 보수파조직에서 맡겨 준 임무를 원만히 완성해 가지고 연길로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백색공포에 말려든 국자가

   하지만 그때 국자가가 이미 백색공포에 휘말려들어 보수진영이 력사무대에서 완전히 힘을 잃은 뒤였다. 연변의학원 병동청사는 완전히 반란파들에게 함락되었고 그 안에 갇혀있던 간부와 지식인들이 이미 잡혀 간 뒤였다.

   암담한 현실 앞에서 어머니는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된 심정이랄까. 하여간 공든 탐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목숨을 걸고 사수해 온 당 중앙의 회신을 넘겨줘야 하는데 그 회신을 접수할 조직이 이미 사라진 뒤였으니 말이다.

   그 사이 총격전을 피해 외가에 가 있던 큰아들도 돌아왔다. 오랜만에 돌아 온 큰아들을 보는 순간 어머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코신부대’ 멤버들은 어머님이 북경에 다녀왔다는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어머니를 찾아왔다. 수도 북경의 분위기는 어떠한지? 당 중앙에서는 우리 보수진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배는 기울어졌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 볼 심정에서 그래도 미련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는 멤버들 앞에서 어머니는 단호하게 “당 중앙에서는 어디까지나 우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다들 신심을 잃지 말고 이럴 때 일 수록 뭉쳐야 합니다.”라고 고무격려해 주었다. 어머니는 북경에서 보고 듣고 목격하고 느꼈던 일과들을 두서 없이 찾아오는 멤버들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보수조직의 암담한 미래를 두고 근심에 쌓여있던 ‘코신부대’ 대원들은 어머님이 전하는 말에 심히 고무되어 너도나도 하면서 보수조직의 든든한 뒷심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결의를 다졌다.

   그 당시 어머님이 운영하는 가게는 언녕 영업을 때려치고 ‘코신부대’ 어머님들의 ‘사령부’로 활용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본이 아니게 어머니 위상이 상당히 올라갔다. 그들은 어머니 말이면 ‘철칙’으로 믿고 따랐다. 그러는 와중에 ‘코신부대’ 규모는 하루가 멀다하게 장대해져갔다.

   어머니는 ‘코신부대’ 대원들과 한 통속이 되어 비밀활동도 가끔씩 진행했다. 큰형님이 어머니의 왼팔이 되어 선전삐라도 찍어내고 표어도 써냈다. 그러면 어머님이 대원들을 거느리고 나가 분조를 나누어 감쪽같이 그 표어나 대자보들을 거리에 붙였다. 이런 식으로 신출귀몰하면서 ‘야간행동’을 개시하다가 일단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몸을 숨기거나 도주하면서 활동을 이어갔다. 

   어머님들의 ‘야간행동’은 준비가 주도면밀했고 작전이 은폐적이고 분공이 명철했다. 매번 행동이 사전 점검이 잘 되여 있고 망을 봐주는 사람, 대자보나 표어를 붙이는 사람, 그러다도 일단 위태로울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물건을 숨기고 도망한다. 혹여 반란파들에게 잡혔다하더라도 중국어 한마디도 모르는 어머니들이라 막무가내로 마구 들이대는 ‘작전’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형님은 워낙에 팔방미인이다 보니 붓글씨도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철필글씨도 잘 쓰다 보니 삐라(传单)들도 많이 찍어냈다. 그 당시 집에는 삐라를 찍는데 필요한 강반(钢版)、묵지(腊纸) 외에 등사기(油印机)도 한대 있었다. 형님은 그것들을 김치 움에 감춰두고 거기에서 자주 삐라를 찍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잡혀갔던 보수 세력의 리더들이 풀려나왔다. 그들은 어머님이 북경에 다녀 온 것을 너무도 잘 아는지라 소식이 궁금해 어머니 복장점을 자주 찾았다. 그렇게 되다보니 보수진영의 리더들이 자주 어머니 가게에 모여서 새로운 조직편성 회의도 하고 앞으로의 사업방향 문제에 대해 토론하다보니 복장점이 보수파들의 사무국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회의를 하자면 장소도 장소거니와 돈이 필요했다. 그들에게는 자금력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장소도 제공하고 회의비용도 분담해드리고 식사도 가끔 대접해드리면서 편리를 많이 제공했다.

   어느 한번은 오밤중에 누구의 밀고로 반란파조직이 가택수색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 집에서 꽤나 많은 양의 삐라가 나오자 형님을 협의분자로 지목하고 잡아갔다. 어머니는 가정주부로만 여겼던지 잡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잡혀가는 걸 본 어머님이 그냥 강 건너 불 구경 할 그런 분이 아니셨다. 어머니는 반란파조직의 사무실에까지 쫓아가 행악질을 하면서 내 아들을 내놓으라고 호통쳤다. 반란파들도 형의 몸에서 별다른 단서를 찾아 내지 못한데다가 어머님이 하도 드세게 나오니 시끄러워서 그만 돌려보냈다.

   보수파조직에서는 이참에 시위를 조직하여 사기라도 북돋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위조직에 어머님이 또 조직자로 나선 것이다. 하지만 괜히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면서 시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또 다시 무장진압을 당하는 날에는 더 큰 희생을 초래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코신부대’ 어머니들에게 이번 기회에 반드시 우리 녀인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모를 박았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데 이번 타이밍을 놓치면 보수진영은 영 사기가 저락되어 다시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으니 시위는 반드시 강행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나왔다.

   그날 자발적으로 조직된 ‘코신부대’어머니 100여 명이 모여 해방로에서 출발하였다. 치마저고리 입고 코신 신은 어머니들이 표어를 들고 거리에 떨쳐 나와 구호를 부르면서 행진한다. 반란파들에게 무장진압을 당한 후 처음으로 있은 민중적인 항의였다. 시위대오가 외쳐대는 구호 소리에 크게 놀란 반란파들이 총을 꼬나들고 거리에 뛰쳐 나섰다.

   하지만 뜻밖에도 시위대오가 말짱 코신 신은 어머니들인데다가 그 기세가 하도 감때 사나워 감히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못하였다. 그렇게 되자 많은 시민들이 시위 대오에 끼어들게 되어 나중에는 100여명 대오가 500여명 대오로 늘어났다.

   그 번 시위에서 단맛을 본 보수파들은 또 한 번 시위를 기획했다. 그 번 시위활동 역시 어머님이 조직자가 되어 ‘코신부대’ 멤버들이 나서서 조직하였다.

   그 후부터 일단 ‘코신부대’하면 연변에서는 그 ‘부대’가 얼마나 무서운 조직인지에 대해 이렇쿵 저렇쿵 전설 같은 미담들이 많이 나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번째 시위에 1000명이 넘게 참가하면서 국자가를 들썽 해 놓았으니 말이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보수진영에서도 다시 지휘부를 내오고 공개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보수진영이 다시 활동을 재개하게 된 데는 어머니를 위수로 하는 ‘코신부대’ 엄마들이 한 몫을 했다. 하여 어머님은 그 ‘코신부대’의 리더로 보수진영 총지휘부 산하 상무위원 겸 제9사 ‘사령원’으로 선임되었다. 제1사는 로동자조직이고, 제2사는 농민조직이고, 제3사는 대학생조직이고, 제4사는 학생조직이고, 제5사는 지식인조직이고, 제6사는 의료위생조직이고, 제7사는 문예사업자대오이고, 제8사는 공상업자조직이고, 제9사는 이른바 ‘코신부대’ 엄마들 조직이었다. 이렇게 군사편제로 되어있는 각 사에는 모두 사령원과 부사령원이 배정되어 있었다. 어머님이 바로 그 제9사의 ‘사령원’으로 선임된 것이다.

   어느 날 연변군관회(军管会)에서 로동자문화궁(工人文化宫) 뒤 울안에서 연변 각 파벌 련합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대회주석단에 여러 진영의 ‘사령원’들이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당시 연변의 최고권력자 최해룡이 ‘문화대혁명’가운데서 상호 분열이 된 대오의 대련합을 위해 각 파벌의 대표들을 접견하기로 되어 있었다. 보수진영 쪽에서는 어머님을 주석단에 추천했고 최해룡이 직접 어머님을 만나 ‘평화담판’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사진기자로 있던 외삼촌이 그 대련합을 위한 모임에서 주석단에 추대된 어머니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 사진이 당시 《연변일보》에 게재되었다.

   그 당시 어머니가 보수파 조직을 부활시킨 공로자로 추대되여 주석대(뒷줄에 얼굴이 살짝 보이는 분이 어머니임. 군복을 입은 사람이 최해룡)에 오르는영광도 지녔었다. 최해룡은 당시 연변 집권파세력의 1호 인물로 연변군분구 정위 겸 연변주위 서기로 위세를 부렸다.

  로동자문화궁 뒷울안에서 진행한 대련합대회에 어머니께서 '코신부대'사령원 신분으로 참석했다.(세번 째 줄 두번 째가 어머니)

 

   그 번 대련합을 계기로 사회는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으며 무질서하게 여기저기 결성되었던 여러 민간성을 띤 조직들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 한 단락의 력사를 사람들이야 어찌 평가하든 나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어머님은 탄복할 수밖에 없는 상당히 우람한 산 같은 존재였다. 그 다사다난했던 년대에 어머니는 쇼가 아닌 실제 행동으로 남편과 자식들에게 영화에서나 봐왔을법한 ‘영웅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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