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6장  개혁개방의 봄바람 타고(1)

 

기회는 항상 준비된 자의 것

 

    7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우리 가족이 사는 집 앞거리가 보행거리(步行街)로 탈바꿈을 하기 시작했다. 워낙에 비즈니스에 촉이 있는 어머님이 그 절호의 기회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만 볼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대담하게 사는 집을 영업집으로 개조해서 고가로 세를 주었다.

    가정집이 영업용으로 용도가 바뀌다보니 집값도 껑충 뛰어올랐다. 어머니는 그 기회에 높은 가격대로 집을 팔아버리고 그 돈으로 다시 그 부근에 더 쾌적한 아파트 한 채를 사들였다. 원래 살던 집에서 불과 70메터 상권에 위치한 단독주택이다. 공간도 쾌적해서 좋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볕이 잘 드는 데다가 대통로 옆 정원이 달린 집이어서 참으로 좋았다. 정원에는 앵두나무도 한 그루 있었고 또 남새를 심어 먹을 만한 텃밭도 있어 거주환경으로 나무랄 데가 없었고 상업용으로도 제격이었다.

    어머니는 그 쾌적한 집에 또 투자하여 확장건설을 진행했다. 우리 네 형제는 독방이라기 보다는 아예 ‘독집’ 같은 공간에서 활보하며 살았다.

    우리 형제는 그 집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대학에 붙어 장성 안팎으로 뻗어져나갔다. 큰형님은 안산강철대학에 붙어갔고, 둘째인 나는 강서대학에 붙어갔고, 셋째는 1980년에 중산대학 일본어학부에 붙어갔고, 막내는 연변대학 의학원에 붙어갔다. 그 당시 연길시내 인구가 30만 명을 웃돌았는데 한 가문에서 네 아들이 다 대학에 붙어갔다는 건 희한하리만치 잇슈가 되는 특종뉴스였다.

                                          의젓한 대학생이 된 남씨네 4형제
                                          의젓한 대학생이 된 남씨네 4형제

 

    지금 와서 다시 뒤돌아보면 어머님은 참으로 원견성이 있는 분이셨다. 1958년도에 도문에서 세 자식을 거느리고 막무가내로 새끼들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짓궂은 일념만으로 이사를 강행했던 그 용기와 추진력, 지금 보면 어머니는 자신의 그 꿈을 멋지게 이루어낸 셈이다. 어머니는 그 꿈 하나만을 위해 바느질과 연을 맺어왔고 그 꿈 하나만을 위해 연길에 와서도 3번씩이나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 이사를 강행했고 또 어찌 보면 그 꿈 하나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걸고 헤아릴 수 없는 대가를 치러왔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의 소망했던 바를 이루어 낸 승자가 된 기분으로 만년을 즐기셨다.

 

KBS가 맺어 준 인연

 

    중국의 대외개방이 가시화되면서 중한관계의 물고가 서서히 트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에 혈육을 두고 온 아버지는 밤이면 밤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살벌했던 ‘문화대혁명’의 세례를 경험해 온 공산당원으로서 이미 정치적으로 리념이 갈린 지 오래된 상황에서 육친을 찾아뵐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나 본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부르는 향수에 젖은 노래는 가슴을 허비는 구슬픔이 있었고 애잔함 또한 남달랐다. 

    네 형제 중 항상 생각이 열려있는 셋째가 아버지의 심정을 미리 읽고 넌지시 KBS 이산가족 찾기 프로에 아버지의 사연을 적어 보냈다. 

    동족상잔의 아픔이 빚어 낸 가슴 쓰린 사연을 접한 KBS는 그 후 수차에 걸쳐 의령 남씨 가족의 가슴 아픈 사연을 방송해주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방송이 전파를 타서 얼마 안 되어 연이 닿았다. 

    어느 날 한국에 두고 온 가족으로부터 사연이 담긴 편지가 날아왔다. 다들 ‘홍역’에 걸린 사람들처럼 우편배달원이 문어귀에 놓고 간 그 편지를 감히 개봉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자본주의 나라에서 보내 온 이상한 봉투의 편지라 감히 집에 들이는 것조차 저어하였다. 

   항상 보면 아버지는 우유부단한 스타일이고 생각이 많은 분이다. 그렇다고 겁 없는 어머님이 나설 일도 아닌지라 다들 서로 마주보면서 어둑꺼둑해 있었다. 그때에도 일을 저질러놓은 셋째가 그게 뭐 대수냐는 식으로 편지를 들고 들어와 봉투를 쭉 찢더니 속지를 꺼내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편지는 문안인사에 이어 가족들이 혈혈단신으로 중국으로 건너 간 아버님을 얼마나 그리워하면서 지냈다는 가슴 쓰린 사연이 적혀있었고, 아버지의 여러 조카들이 방송을 듣고 이제는 하루 속히 만나서 그간의 그리움을 빨리 나누고 싶다는 구구절절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어렸을 적에 우리는 아버지 말투가 주변 사람들에 비해 조금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를 ‘남도치’라고 하면 그게 무슨 뜻인지 딱히 몰랐다. 

    (‘남도치’가 뭐지? 아하, 그러니까 성씨가 남씨여서 붙여진 별명인가?…)

    후에 어느 정도 력사관이 서면서부터 그 ‘남도치’가 한국에서 건너 온 남도 출신의 사람들을 빗대 이르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투만 들어봐도 연변에 사는 조선족 대부분은 북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북선치’다. ‘남도치’는 ‘북선치’들에 비해 언어적인 부분 외에도 음식습관이나 성격 등에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한국에 사는 아버지의 친척들을 찾게 되면서부터 다년간 베일에 가려져있던 우리 가족의 뿌리를 하나하나 파헤쳐보게 되었다. 근 반세기 넘게 아버지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비밀스러운 수수께끼들이 하나하나 풀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올 때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슬하에 따님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경성에서 떠돌이 인생을 살면서 인편에 듣고 중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던 것이다. 

    일단은 중국으로 건너와서 돈이라도 왕창 벌어가지고 돌아가려했는데 그 당시가 일제치하의 남의 나라 땅이라 아버지 생각대로 돈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열심히 사느라고 노력했는데 도저히 손에 돈이 모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광복이 나면서 남과 북이 정치적으로 리념이 갈리게 되면서 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남쪽에 두고 온 가족들하고 련락이 두절되었다. 편지조차 할 수 없었던 그 긴긴 세월 혼자서 조용히 향수에 젖은 노래만 부르면서 살아오셨다.

    만약에 그 당시 아버지께서 중국에 눌러 살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가셨더라면 지금 어머님과의 인연은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지금 중국에서의 의령 남씨 가세는 운운할 여지조차 없는 일이다. 

    장장 50년 세월이 흘러 지난 뒤에야 아버지는 그때 한국에 두고 온 가족의 행방을 알게 되었고 그 때 태어난 따님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편지를 통해 접하게 되었다.

 

한국행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그해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로 말하면 반세기만에 지척에 두고 온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

    김포국제공항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노경선(卢敬善) 서울누님도 반백이 된 나이에 난생 처음 친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누님이 태어나던 그 시기 아버지가 경성에서 자동차운전을 배워가지고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북만으로 건너오다 보니 따님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법적으로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출생신고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서울어머니는 오매불망 중국으로 간 아범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범이 돌아오지 않으면 따님이 평생 호적이 없는 아이로 자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니 그 마음이 더더구나 애절했다고 한다.

    광복 후, 남과 북이 분단의 아픔을 겪으면서 모든 것이 두절되었다. 이제 더는 서로가 서로를 기다릴 의미조차 없는 수화상극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우연하게도 같은 촌에 살다가 병으로 명을 달리한 계집아이가 있어서 그 아이의 이름으로 늦게나마 호적에 이름은 올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누님의 성씨가 남 씨가 아닌 노 씨로 호적에 오르게 되었다.  

    올림픽이 열리는 그해 김포국제공항에서 아버지와 서울누님의 운명적인 상봉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아버지와 딸은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 속에서 난생 보지도 못한 혈육을 몇 십 메터 밖에서 알아봤다고 한다. 서울누님은 아버지를 알아 본 순간 아무 거리낌이 없이 뛰어가 품에 안겼다고 한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먼 발치에서 뛰어오는 중년녀인이 따님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고 한다. 두 사람은 반세기만에 만나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순간 김포공항 출구가 삽시에 울음바다로 변해버렸다. 손꼽아 세어보면 만 50년이다. 아버지는 시종 남쪽에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했고, 더더구나 이름 모를 그 따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하지만 누구한테도 그 가슴 미여지는 사연을 토로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늘 혼자서도 끼니마다 약술을 드셨다. 과음한 건 아니지만 늘 술 한 잔 기울이고는 ‘카―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 한동안 미간을 찌푸리고 깊은 상념에 잠기셨다. 어쩌다 술친구들이 와서 한두 잔 더 기울여 취기가 오르면 노래도 한곡 뽑을 때가 있었는데 그 18번이 〈울고 넘는 박달재〉 아니면 〈그리운 고향〉과 같은 향수에 젖은 노래였다. 아버지 노래 실력은 솔직히 가수 뺨 치는 수준급이다. 우리는 그저 아버지가 노래 하나는 멋지게 부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부르는 그 노랫말 속에 본인의 아픈 사연이 녹아 있는 줄은 몰랐다.

    그 세월을 살아 온 따님도 시종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지도 모르고 반백이 되었으니 그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분단의 아픔과 민족의 분열은 이 죄 없는 무고한 가정에 이름 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반세기 동안이나 묻어두었던 것이다. 

               반백이 되여 처음으로 친아버지를 만난 서울누님의 응석을 어색하게 받아주는 아버지
               반백이 되여 처음으로 친아버지를 만난 서울누님의 응석을 어색하게 받아주는 아버지

 

    언젠가 서울누님께서 자신의 지나 온 동년의 추억을 터놓으면서 이런 얘기를 들려 준 적이 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학교 운동회가 있었어요. 달리기선수로 출전하게 되었는데 체육선생님이 그 번 달리기 종목 규칙에 대해 설명하는데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 생긴 거지요. 호르래기 소리와 함께 30메터 앞으로 뛰어가서 제비꼬리 형으로 접은 종이쪽지를 펼쳐보고 그 쪽지에 씌어진 요구사항대로 종착점에 도착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뛰어가서 잡은 쪽지에 뭔 내용이 적혀있었는지 아세요? 하필이면 그 찰나에 객석에서 ‘아버지를 찾아 함께 뛰세요.’라는 글발이 적혀있었지 뭐예요. 맙소사! 순간 아찔해나면서 눈앞이 캄캄해났어요. 뒤이어 설음이 욱 하고 북받치면서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지요. 이 순간 어디 가서 아버지를 찾아온단 말이지? 저는 그저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요. 영문을 모르는 선생님들이 달려와 달래주었어요. 그들도 나의 손에 쥐어진 쪽지를 들여다보고서야 사실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지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 온 저에게, 그것도 아버지 성씨조차 사용할 수 없었던 저에게 하필이면 이 난감한 숙제를 주어 풀어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코 막고 답답한 일이였겠어요. 아무리 눈물을 참으려 애써도 도무지 참아지지가 않았어요. 그날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두 눈이 퉁퉁 부어있었어요…”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서울누님은 거의 웃음을 잃고 살아왔다고 한다.

                    환갑잔치에 온 서울누님과 기쁨에 겨워 향수에 젖은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
                    환갑잔치에 온 서울누님과 기쁨에 겨워 향수에 젖은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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