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6장  개혁개방의 봄바람 타고(2)

 

대박아이템을 찾아

 

    서울에 체류하는 기간 아버지는 50년간 헤어져 지낸 친척, 친우들을 찾아 뵙느라 여념이 없었으나 어머니 심정은 조금 달랐다. 괜히 남 씨 네가 모여서 눈물 코물 쥐어 짜는데 끼여서 같이 울어 줄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뛰쳐 나와 서울의 시장바닥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다. 바느질로 한생을 살아 온 몸이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복장시장에 대해 관심이 많아 고찰을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개혁개방이 본격화되면서 도시화 붐이 일기 시작한 중국에 비해 한국의 복장시장은 많이 활성화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바쁜 시장조사 일정을 소화하는 한편 재단학원에 들어가 전통한복에 관한 재단공부를 시작했다. 그때 어머니 나이 62세였다. 이미 신흥복장점에서 정년을 마치고 퇴직을 한 홀가분한 몸이었는데 복장에 대한 애착심은 여전했나본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중국과 한국 복장시장의 차이를 실감하는 순간 저으기 마음이 급해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부모님들은 서울에 사는 삼촌집(叔叔家)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어느새 벌써 서울은 물론 주변 지역에 대해서까지 손금 보듯 환히 꿰뚫고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지하철을 타고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한국의 복장시장은 어머니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게 했다. 어머니는 거의 매일 으슥한 골목에서 김밥이나 과자 같은 편의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동분서주했다. 갖고 간 달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쪼록 이번 기회에 한 건 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어머니는 모든 정력을 복장시장고찰에 쏟아 부었다. 

환갑을 넘긴 년세에 아이템을 찾아 서울바닥을 누비고 다니던 시절의 어머니
환갑을 넘긴 년세에 아이템을 찾아 서울바닥을 누비고 다니던 시절의 어머니

 

    어느 날, 동대문시장 한 골목 귀퉁이에서 우뚝 발걸음이 멈춰졌다. 볼품 없는 작은 가게인데 손님으로 붐비었다. 도대체 뭘 하는 가게인데 손님이 이다지 많은 거지? 호기심이 동해 들어가 보았다.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복장점에서는 한물이 간 한복에 금박 은박을 인화해 새 한복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재활가공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피씩 웃었다. 한국텔레비죤에서 녀인들이 우아한 한복차림으로 쇼를 하는 모습들을 심심찮게 보아왔는데 알고 보니 그 뒤에 이런 기술이 안받침 되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불쑥 이거야말로 내가 동분서주하면서 찾아 헤맨 아이템이라는 확신이 섰다. 어머니는 당장에서 무릎을 탁 하고 내리쳤다. 

    “그래, 이거야! 바로 이거야!!”

 

제2창업신화

 

   “옷이 날개”라는 말은 우리가 심심찮게 사용하는 명언이다. 거기에 한 수 더 떠서 “신은 인간을 낳고 옷은 인간을 꾸미고 돈은 인간을 완성시킨다.”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옷은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품위이면서 한 민족에게 있어서는 문화이고 영혼이며 기풍이다. 

    어머니는 평생에 거쳐 그 고매한 옷을 재단하고 만들어 온 베테랑이다. 그러니 누구보다 그 사업아이템을 접하는 순간 더 없이 흥분했다고 한다. 그는 당장에서 그 대박아이템을 중국 연변에 가져다 사업적으로 펴보기로 작심한 것이다. 밑천도 적게 들고 시장성이 넓은 데다가 지극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조선족녀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족 녀성 치고 조선옷치마저고리 한 두 벌은 다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대의 발전템포가 빠른 만큼 새로운 업그레이드된 조선옷치마저고리- 한복이 생겨나면서 어쩌다 명절 때나 입는 낡은 조선옷치마저고리가 시세에 뒤떨어져 미를 추구하는 녀성들의 고민거리였다. 어느 한 순간을 위해 거금을 들여 새 것으로 교체하기에는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한물이 간 치마저고리를 분위기 있는 장소에 그냥 입고 나서기도 그렇고 이러나저러나 고민이었다. 

    그런 조선족 녀성들의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 줄 수 있는 ‘해결사’가 바로 어머님이 선택한 한복코팅사업이다. 저렴한 가격에 반짝반짝 금은 빛이 나는 인화도장을 찍어주기만 하면 금세 낡은 치마저고리가 새 한복으로 탈바꿈한다. 이거야말로 마술에 가까운 신기하리만치 이목을 끄는 아이템이다. 

    200만 조선족에 반이 녀성이라 하면 적어도 100만을 헤아리는 고객층이 어머님의 손 안에 있다는 얘기다. 어머니는 흥분했고 그 흥분을 무서운 추진력으로 밀어 붙이게 되었다. 그때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년세임에도 어머니는 다시 달걀가리를 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몇 십 년간 복장점을 경영해 온 베테랑이라 그만큼 자신이 임하고저 하는 그 프로젝트에 백퍼센트 파악이 있었던 것이다. 하여 귀국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2의 창업인생을 시도해보기로 작심했다.

    본 항목은 그냥 보면 스쳐 지나 갈 수도 있는 별거 아닌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이 큰 땅덩어리의 조선족녀성들만을 상대로 시장을 개척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마음을 다잡아먹고 차질이 없이 확실한 준비가 뒤따라야 했다.

    귀국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이른 아침, 어머니는 생산업체에 찾아가 마지막 담판을 끝내고 조금 늦은 시간에 귀가하게 되었다. 그날 따라 지하철을 타지 않고 셔틀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삼촌 집 부근에 당도해서 내리려는 찰나 부주의 하셨는지 그만 발목을 접질렀다. 무거운 짐까지 든 몸이라 어쩌지 못하고 넘어지면서 크게 발목골절상을 입었다. 넘어지는 순간까지는 정신이 말짱했는데 정작 일어서려고 하니 다리가 도저히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행이도 주변에 맘씨 착한 분이 계셔서 구호차를 불러주어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며칠간 치료를 받고 쌍지팽이에 의지해 퇴원하였다. 병원에 있는 기간 어머니는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많은 창업을 위한 설계도를 그려보았다. 설계도가 머릿속에 익혀질수록 마음은 급해났다. 결국 병원에서는 아직 출원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기어이 퇴원했다.

    우선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뭐니 뭐니 해도 그 기술부터 투철하게 터득해야 했다. 그 다음으로는 한국 내에서 그 원자재 공급을 책임져 줄 생산업체나 유통업체를 찾아야 했다. 그런 다음 조선족녀성들이 선호하는 문양의 디자인을 찾아내야 했다. 앞으로 어떤 류통모식으로 원자재 공급을 보장받아야 할지에 대한 담판도 뒤로 미룰 수 없는 부분이다. 

    이상의 세부적인 절차에 대한 점검을 다 끝내고 어머니는 조선족녀성들의 미학관에 알맞을 것 같은 문양의 한복샘플 수십 벌을 챙겨가지고 귀국길에 올랐다.

 

한복의 변신

 

    어머니는 쌍지팽이에 의지해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발목에는 그때까지 석고로 부스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몸을 해가지고도 창업 준비로 마련한 다섯 상자의 물건을 휴대해가지고 말이다.

    귀국해서는 여하를 불문하고 한 단계 안정을 취했어야 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는 비행기에서 내리면서부터 전화질을 하여 전에 함께 복장점을 경영했던 믿음직한 멤버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한국에서 가지고 온 샘플하고 그 작업에 필요한 공구와 자재들을 꺼내놓고 그들에게 기술전수를 하면서 시운영 단계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님의 한복코팅업은 문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늘어났다. 처음 찾아오는 사람들한테는 시제품삼아 무료로 코팅해드렸다. 낡은 치마저고리 한 벌을 가지고와서 빤짝이를 찍어 간 녀성들은 돌아가 주변사람들을 데리고 왔고 또 그들이 돌아가 또 다른 고객들을 앞세워 가지고 왔다. 서시장바닥에서 몇 십 년간 복장업을 해 온 어머니기에 발이 상당히 넓었다. 그 바닥은 거의 녀성 대 녀성들만이 통하는 세상이라 녀성고객님들을 불러들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어느 날부터 사업규모를 확장해 볼 심산으로 어머니는 약간 풋면목이라도 아는 사람들을 죄다 긁어모아다 낡은 치마저고리에 무료로 빤짝이도장을 찍어드렸다. 그때까지도 재활코팅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은 버리기도 아깝고 입기는 또 그랬던 치마저고리가 몇 푼 안 되는 대가를 지불하니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변신할 줄은 몰랐다. 

어머니 손만 거치면 낡은 치마저고리가 빤짝이가 가미된 한복으로 금시 '날개'가 돛힌다.

 

    낡은 치마저고리의 한복으로의 변신은 입소문을 타고 삽시간에 연변은 물론 전 동북3성, 나아가서는 멀리로 산해관 넘어 황하, 장강 이남지역에도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제2창업을 한지 한 달도 안 되어 대박이 났다. 

    우리 집은 본의 아니게 또다시 복장가공부로 탈바꿈했다. 다행이도 그때 이미 우리 네 형제가 다 대학을 나와서 결혼을 한 몸인지라 어머님한테 걸림돌이 될 자식은 없었다. 그저 워낙에 활동적인 분이어서 지칠 줄 모르고 일만 할 뿐이어서 근심이 따랐다. 

                                               다시 어머니와 손잡은 파트너
                                               다시 어머니와 손잡은 파트너

 

    수요가 많아지고 물량이 점점 늘어나자 어머니는 기능공들을 몇몇 더 불러들여 규모를 확장해나갔다. 그래도 도저히 늘어나는 시장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트렁크로 몇 상자 휴대해 온 반짝이재료가 거덜이 났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이대로 간다면 수요가 공급을 초월할 게 뻔한 지라 사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100여 평방 되는 집안에서 밤에 낮을 이어 가공하다가 나중에는 몇몇 리더들과 함께 영업집을 세내어 분점 형식으로 사업범위를 넓혀나갔다.

                   옛 연길의 복무대루청사, 그 맞은켠으로 국자가 보행거리가 뻗어져나갔다
                   옛 연길의 복무대루청사, 그 맞은켠으로 국자가 보행거리가 뻗어져나갔다

 

     전 세계 억만장자 중 62%가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비록 억만장자는 아니지만 순수 재봉틀 하나로 외길인생을 살아 온 무서운 녀성강자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한 땀, 한 땀의 바느질로 자식 넷을 의젓하게 키워냈고 두 가문의 가세를 일으켜 세웠으니 칭찬 받을 만도 하다. 그래서 연길 서시장 아줌마들은 어머니를 두고 복장업계의 ‘작은 거인’이라 불렀다.

                                                20세기 80년대 서시장의 모습
                                                20세기 80년대 서시장의 모습

 

    20세기 90년대를 전후하여 어머님이 리더가 되어 펼쳤던 한복코팅사업은 한때 중국 동북3성 전역의 조선족녀성의류계를 석권할 정도로 트랜드를 일으켰다. 그때로부터 조선족부녀들은 한국 개량한복문화의 정수를 받아들여 한물이 간 치마저고리에 반짝이코팅을 해서 입는 바람이 유행처럼 번져졌다.

    명절 때나 가문에 군일이 있을 때면 녀성들이 청일색으로 개량한복을 입고 나와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한다. 그 개량한복문화의 붐을 일으킨 분이 바로 나의 어머니시다. 어찌 보면 어머님의 지나 온 발자취는 연길서시장의 살아있는 력사이자 중국조선족 복장문화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통이 크게 무슨 일을 잘 벌리기도 하고 또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마무리도 잘 하셨다. 로년에 창업을 시작하여 돈도 어지간히 벌었겠자 녀세도 고희를 넘겼으니 자식들은 은근히 이제는 그만 내려놓았으면 했다. 자식들이 귀띔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모든 걸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하던 업체를 그대로 후배들에게 넘겨주었다. 사업만 넘겨 준 것이 아니라 문전상가 확장공사를 해서 집세에 권리금까지 받는 조건으로 넘겨주었다. 

    후배들이 하는 복장사업 역시 문전성시를 이루며 호황을 맞이했다. 그들은 황아매 기운을 받아 복이 터졌다고 기뻐하면서 사업 확장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가격대에 안성맞춤한 상가자리가 없었다. 그냥 제자리에서 사업 확장을 하는 게 가장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한 후배들은 렴치 불문하고 황아매를 찾았다. 제발 사는 집 전부를 세 맡게 해달라고 말이다.

    어머니는 선선히 사는 안채까지 통째로 세를 주고 근처에 장만해 두었던 4층 아파트로 이사갔다. 일은 내려놓았지만 축적해놓은 자본금에 다달이 세돈이 생겨 돈이 그리운 줄 모르고 지내셨다. 거기에 자식들까지 다 잘 되여 대도시권에 안착을 하다 보니 어머니는 늘 마음이 흡족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심수에 사는 큰손자가 연길에 왔다가 4층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안쓰러웠던지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한마디 했다고 한다.

   “우리는 별장에서 사는데 무릎이 아픈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4층을 오르내리며 살아요. 맨날 시장 봐서 오르내리는 모습이 너무 보기 안쓰러워요.”

    헴이 든 자식의 그 말 한마디에 형님은 바로 이튿날 연길로 날아가서 부모님께 부르하통하 강변에 새로 지은 엘리베이터가 달린 아파트를 사서 드렸다. 

                                      '가정혁명', '자식농사' '쌍풍작'을 걷우워놓고
                                      '가정혁명', '자식농사' '쌍풍작'을 걷우워놓고

 

    그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참으로 행복한 만년을 즐기셨다. 문 앞에 부르하통하가 흐르고, 강 건너에 모아산이 보이고, 주변에 산책로가 있고, 그 산책로 합수목에 무지개다리까지 놓여 있어 그냥 집안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무릉도원' 같은 아빠트였다. 게다가 햇볕까지 기가 막히게 잘 드는 집이여서 그 집 덕에 적이 몇 년 더 사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님한테도 고맙지만 그런 조언을 준 조카의 행실이 더 기특하다. 

    형제들의 부모 효도 이야기는 유별나다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셋째는 달마다 로임을 내주듯이 모이 차게 용돈을 들여 어머니께서 많이 흡족해하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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