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7장 못 말리는 생존철학과 집착(1)

 

자별난 오누이

 

  외삼촌인 황범송(黄范松)이 1930년, 생이니 어머니보다는 3살 연하다. 외삼촌은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엄마를 여의다보니 3살 위였던 누나가 ‘대리모’가 되어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 그 누님이 결혼을 하여 다시 연길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아들 넷을 둔 가정부가 되었는데 그 후에도 외삼촌은 그냥 그 누님의 집(우리 집)에 얹혀살면서 장가가기 전까지 한 가마 밥을 먹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지내 온 남원 황 씨 오누이가 어언 90고개를 넘어선 고령자가 되었는데 지난해(2020년)에 그 누님(나의 어머니)이 먼저 운명을 달리했다.

  뒤돌아보면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 다사다난했던 년대를 지긋지긋하게 살아왔지만 오누이의 우정은 어렸을 때나 나이 들어서나 자별났고 운명을 달리하기 바로 전까지도 별반 차도가 없을 정도로 유별랐다. 과연 세상에 이같이 사이가 각별한 오누이가 몇 명이나 될까고 어머님을 보내드리면서 많이 되새겨보았다.

  일찍 외할머니께서 세상을 뜨자 외조부님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어린 남매를 작은 할아버지 댁에 맡겨두었다. 그 바람에 3살 위였던 어머님이 오랍동생을 돌봐야 하는 숙명적인 중임을 떠안게 되었다. 실은 그 당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나이임에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오누이의 우애는 친자매라는 혈연을 넘어선 듯하다.

  오래 전에 외삼촌댁이 먼저 돌아가셔서 외삼촌이 홀로 지내고 있다. 연변에서는 알아주는 사진작가이다 보니 고정된 수입원도 있고 건강상태도 아주 양호한 편이지만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색다른 음식이 나지면 외삼촌부터 불러들인다. 외삼촌도 어머니 호출이면 하던 일을 제쳐놓고 달려온다.

  참으로 희한한 건 얼마 전까지도 오누이가 만나면 그렇게도 할 말이 많다는 것이다. 간혹 가다보면 두 사람이 밥상에 마주앉아 횡설수설 진지 드시면서 잡담을 하는데 두 시간이 넘었는데도 그냥 그렇게도 도란도란 진지한 대화가 이어진다. 뭔 할 얘기가 저리도 많은지?…

  넌지시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그냥 고리타분한 지난 얘기들 뿐이다. 하지만 두 분이 하도 진지하게 화제에 집중을 하니 우리도 따라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외삼촌이 오는 날이면 심심하지는 않다.

                                                        자별한 오누이
                                                        자별한 오누이

 

  우리 집이 도문에서 대약진이 한창이던 1958년에 연길로 이사 왔다. 그 당시 외삼촌이 《연변일보》사 촬영기자로 있었다. 촬영기자하면 상당이 각광받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외톨이’이다보니 신문사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 뒤 온 나라가 3년 재해의 ‘보릿고개’를 넘어 오면서 극히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떠돌이 인생을 살던 외삼촌도 그 보릿고개 때 몸져 눕게 되었다. 몸이 얼마나 망가졌으면 사진기를 들 힘조차 없어 출근도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이미 네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림살이가 빠듯했지만 어머니는 두말 없이 외삼촌을 집에 불러들였다. 입에 당장 거미줄을 치게 될 상황임에도 어머니는 단호히 그리하였다.

  어머니는 손수 외삼촌에게 ‘건강식’을 해서 들이댔다. 지성이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외삼촌의 얼굴에 기운이 돌기 시작했고 움푹하게 꺼져 들어갔던 눈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신기하리만치 궁금한 일이다. 도대체 뭔 보약을 드셨기에 당금 쓰러질법했던 사람이 요술을 부리듯이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걸가?…

  말할 힘조차 없어서 그냥 누워만 있던 외삼촌이 입을 열고 주절주절 사설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워낙에 다사한 사람인지라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건 건강이 돌아섰다는 신호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 어머님이 늘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뭔 고기를 정성들여 저미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손수 외삼촌의 입에 넣어주었다. 꼭 마치도 엄마제비가 먹이를 물어다 둥지에 있는 아기제비에게 먹이 듯이 말이다. 어머니가 한 수저 집으면 외삼촌은 고개를 천정으로 향하고 입만 벌려댄다. 먹이가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랭수 한 모금 챙겨준다. 뭔 먹이인지 씹지 않고 그냥 넘긴다. 순식간에 한 접시를 굽냈다. 후에 아주 정신이 드는지 그 다음부터는 챙겨주면 절로 알아서 훌쩍훌쩍 잘도 드신다. 모르긴 해도 외삼촌은 그 ‘보양식’을 하고 정신을 차린 게 분명하다.

  나는 내내 그 ‘보양식’이 궁금해 한번은 외삼촌에게 넌짓이 물어보았다. 외삼촌은 싱글벙글 웃더니 ‘물소고기’라고 했다. 썩 후에 안 일이지만 그건 ‘물소고기’가 아니라 어머님이 병원 산부인과에 근무하는 친구한테 부탁해 얻어 온 ‘태판’이란다. ‘태판’이 원기회복에 어떻게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 알고 있다.

  그때 그렇게 드셨던 ‘보양식’덕인지 외삼촌은 90세를 넘겼음에도 여전히 왕성한 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외삼촌이 시물시물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때 저그만치 ‘태판’ 20개를 드셨다고 하니 기적이 일어날 만도 했다. 그 기적이 짓궂은 성미를 가진 엄마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장가 가기 전까지 한집에 살았던 외삼촌이 형님처럼 느껴졌다
    장가 가기 전까지 한집에 살았던 외삼촌이 형님처럼 느껴졌다

 

  우리 집에 얹혀살던 외삼촌이 1962년도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락타산에 내려가 궁핍한 삶을 살던 외할아버지 내외는 혼사를 치러 줄 여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년세에도 외할아버지께서 기력이 왕성하여 후실로 맞아들인 아내와 함께 시골에서 여러 자식을 보았다. 그러다보니 번 할 날이 없이 살림은 그냥 궁핍했다.

  본가 사정을 손금 보듯 하는 어머니는 외삼촌의 혼사를 도맡아 치러주었다. 신혼집 마련부터 결혼식 준비까지 그 복잡다단한 일정을 혼자서 감당해냈다.

  외삼촌은 결혼해서야 신혼 집으로 이사 나갔다. 외삼촌도 그 뒤 줄줄이 네 따님을 낳다보니 살림이 펴일 날이 없었다. 그러다 ‘문화대혁명’기간 외삼촌댁이 정신분열증에 걸려 고생하다 보니 그 네 조카들마저 거의 어머님이 맡아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였다.

                                                        외삼촌 결혼식 기념사진
                                                        외삼촌 결혼식 기념사진

 

  오랍동생을 엄마 맞잡이로 키워서 장가를 보낸 것만도 조련찮은 일인데 네 조카들까지 돌봐줘야 했으니 고생문이 열린 것이다. 돌봐야 할 자녀가 내 자식 넷 외에 외조카 넷까지 저그만치 8남매다. 이거야말로 오복이 터졌다고나 할까.(계속)

부록:

[회고] 황범송,카메라와 더불어 칠십성상 (남용해)


[촬영가 황범송 별세] "주은래 등소평 그리고 김일성 시하누크도 카메라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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