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7장 못 말리는 생존철학과 집착(2)

 

남원 황 씨 뒷이야기

 

  한때 국자가에서 풍류로 살았던 외할아버지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시골에 내려가 살다가 1968년도에 세상을 뜨셨다.

  국자가에 있을 때는 버럭이 좋아 돈도 꽤나 만졌다. 그렇게 되니 서시장 근처에다 영업집 한 채 얻어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돈 냄새를 다시 맡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돈 좀 만지니 또 옛 고질이 도진 것이다. 하마허재에서 놀음에 가산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었던 그 가슴 아픈 기억을 잊었는지 이번에도 도박에 손을 댄 모양이다. 또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나앉게 된 것이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해서 공원가 부근에다가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하나 차려놓고 권연을 위주로 팔았다. 그런데 일이 안 될라고 그랬던지 다른 사람 물건을 대신 받아 보관해주었는데 그 속에서 마약이 검출되어 또 몇 달간 콩밥을 먹게 되었다. 재수 없는 놈 뒤로 자빠져도 코를 깬다더니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풀려나온 뒤에 계속해서 장사를 하려 했는데 당시 정책적으로 개체공상호를 제창하지 않았다. 전에도 그런 상황에서 송눈평원으로 들어가서 논을 일구었던 경력이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락타산 쪽으로 귀농을 선택한 것이다. 동북범이나 곰 따위 야생동물들이 출몰하는 수한 산골마을에 들어가 땅을 일구고 다시 가세를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이다.

  문제는 그 당시 농촌토지가 이미 다 국유로 넘어간 뒤여서 개인적인 매매나 개간이 불가했다. 농장주가 되려는 꿈을 안고 락타산으로 들어갔는데 그 꿈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황화순 환갑잔치 기념
                                                       황화순 환갑잔치 기념

 

  외조부님이 워낙에 기가 센 분이라 시골에 내려가서도 줄줄이 자식 다섯을 낳다보니 살림형편은 점점 말이 아니게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황범송 외삼촌 아래로 1948년 생 이모, 1951년 생 외삼촌, 1954년 생 이모, 1957년 생 이모, 1960년 생 외삼촌이 태어나다보니 촌수로 따지면 외삼촌 아니면 이모님들이지만 우리 형제들과 같은 년령대였다.

                             락타산 중대촌에 뿌리를 두고 뻗어져나간 남원 황씨 가족들
                             락타산 중대촌에 뿌리를 두고 뻗어져나간 남원 황씨 가족들

 

  그렇게 후실을 맞아 자녀들만 다섯이나 낳아놓고 저 세상으로 돌아가셨으니 살림형편이 어려울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어머니 말대로 비록 의붓어머니가 낳은 자식이지만 필경 황 씨 가문의 핏줄이기에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였다.

 

이복동생들에게 몰 부은 사랑

 

  언젠가 어머니께서 그 배다른 이복형제들을 연길에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너무 무모한 모험이었다. 우리 형제는 물론 그렇게 말수가 적던 아버지도 그 일만은 반대해 나섰다.

  우리가 보기에도 어머니는 이미 이복형제들에 대해 베풀 만치 베풀었다. 솔직히 이쯤해서 지켜보고만 있다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호적도 다 농민으로 되어 있고 그렇다고 특수하게 기술력을 갖춘 사람도 아닌데 물까지 사먹는 시가지에 들어와 어떻게 생활한단 말인가? 만약에 들어온다 손 쳐도 그건 큰아들인 외삼촌 몫이지 어머니 몫은 아니라는 것이다. 남 씨 가족에서 어머니 빼고는 이 일에 찬성해나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차라리 생활비로 매달 얼마씩 보탬하라고 보내주자는 게 아버지 생각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 숙제를 풀어가리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락타산 중대촌에서 금라 결혼식을 치르고(1978,10,1)
                                   락타산 중대촌에서 금라 결혼식을 치르고(1978,10,1)

 

  어머님이 알고 지내는 친구 분 중에 5.7판공실 주임으로 계시는 국장급 간부가 한분 계셨다. 그 5.7판공실에서 전문으로 정책 락실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 주임을 통하면 어머니는 어련히 그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당시 농촌사람이 도시로 들어 온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하지만 뭔 일이든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성미인 어머니는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동분서주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여기저기 돈은 얼마나 썼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머니는 천방백계로 노력하여 이복동생들의 호구를 농촌에서 연길시로 이적해왔다. 정작 호구가 들어 오니 어머니 일상이 더구나 바빠졌다. 이사를 할라니, 세집을 얻어 줄라니 거기에다 전에 촌에서 살던 낡은 집을 처분할라니…

  안착을 시켜놓고 보니 다음은 먹고 살아야 하는데 일자리가 문제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복동생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줘야 최소한 생계 유지가 가능했다. 아니면 최소한의 보장마저 불가했다.

  어머니는 또 다시 아는 친구나 지인들을 찾아 사정 얘기를 하면서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해주었다.

  골치 아픈 일은 끝이 있을 상 싶지 않았다. 겨우 일자리를 얻어 안착을 시켜 놓고 보니 하루가 멀다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동생들의 혼사문제가 의사일정에 올랐다. 이렇게 되어 작은 외숙모의 결혼식을 어머님이 신경을 써서 치러주었다. 하지만 외숙모(小姨)가 훗날 리혼하게 되자 어머니는 또다시 여러모로 신경을 써서 지금의 오스트랄리아 이모부를 주선해준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의 재혼식도 우리 집에서 치르게 되었다. 지성이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현재 외숙모네 살림에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전에 최하층 생활을 하던 외숙모님이 지금은 아주 근사한 별장에 살면서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 뿐만 아니라 전 이모부 사이에서 낳은 딸과 사위마저 오스트랄리아에 입적해 그 곳에서 서양요리집을 운영하고 있다.

  어머님이 나서서 다리를 놓아주어 작은외삼촌은 현재 북경에 있는 모회사에 20여 년간 근무하면서 회사의 중견으로 쓰임받고 있다. 작은외삼촌의 딸도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결혼하여 북경에서 구강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다. 어머니는 다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이복동생들을 진심어린 사랑으로 보듬어주었고 그들의 운명을 개변시켜주었다.

 

서울누님

 

  서울에 사는 노경선(卢敬善) 누님도 마찬가지이다.

  1988년에 친아버지와의 숙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뒤 서울누님은 련속해서 10여 차 중국을 다녀갔다. 아버님이 살아 계시던 시기 서울누님은 자주 아버님 뵈러 오셨다.

  2011년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서울누님은 자주 어머님 뵈러 오셨다. 누님은 올해 세는 나이로 81세다. 한국에서 말하면 저소득층에 속하는 독거로인이다. 남편도 일찍 돌아가셔서 현재는 시골에 살면서 자녀들이 보내주는 용돈으로 넉넉하지 못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거의 같이 늙어가는 서울누님을 많이 동정한다. 아버지 없이 장장 반세기 가까이 지내오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모대겼을 누님이다.

                         피 한방울 안섞였지만 어머니와 서울누님의 감정은 유별났다.
                         피 한방울 안섞였지만 어머니와 서울누님의 감정은 유별났다.

 

  하기에 일단은 서울누님이 오신다하면 어머니는 누구보다 반가이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몸소 서시장에 나가 색다른 음식도 사다 장만해놓고 성심성의로 서울누님을 맞이해주었다. 한국에서 웬만한 형편으로 양껏 드실 수 없는 귀한 소고기(한우)도 사다는 장만해둔다. 쪼잔하게 한 두 근 사다 대접한 것이 아니라 한번 사면 적어 10근, 20근 사오는 건 물론 뼈까지 사다 사골국에 꼬리곰탕까지 해서 대접한다. 처음 며칠은 소고기 위주로 기타 요리를 겯들여 식욕을 돋구어주고는 연이어 삼겹살에 돼지족발 같은 걸 들이댄다.

  이제 너무 기름지게 드셔서 새들해지면 그 뒤에는 조선에서 건너 온 해산물이나 연변음식을 초대한다. 이런 초대가 만약에 한국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건 어련히 국빈급이다. 한국에서 소고기나 소갈비 값이 얼마인지는 세인이 다 아는 이야기다.

  어머니는 늘쌍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이지만 초대가 미흡하지는 않았는지? 이국에서 온 사람이라 혹여 입맛에 맞기나 한지 노심초사하면서 최선을 다하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늘 서울누님하고 전화연락을 하면서 지냈다. 아범은 돌아가셨지만 이 어미는 아직 살아있으니 아무 념려 말고 자주 중국에 와서 전과 다름없이 지내길 바란다고 말이다. 어머니의 지극정성이 통했던지 서울누님은 그 후에도 자주 중국에 왔다. 그 바람에 조카들도 중국을 자주 드나들었다.

                                               서울누님의 마지막 중국 방문
                                               서울누님의 마지막 중국 방문

 

  서울누님은 매번 중국에 오면 적어서 한 달은 류하고 비자가 만기되어서야 돌아갔다. 한번 왔다 돌아갈 때면 복새통이 터진다. 이것저것 많이 챙겨 보내느라 며칠씩 장보기를 한다. 어머니는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먹이고 입히고 챙겨주는 데만 신경을 쓴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종종 건네주는 생활비를 아껴뒀다가는 아낌없이 서울누님에게 건네주었다. 어머니 본인이 가지고 있는 돈이 있으면서도 늘 배다른 형제들의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 그런 명분으로 돈을 건네주었다.

  보통 연변에 사는 사람들이 한국에 친척이 있어 긁어먹는 경우가 다반사다. 연변에 사는 서민으로 한국에 사는 누군가에게 베풀었다고 하면 그건 아마도 어머니 빼고는 거의 없는 전례일 것이다.

  어머니는 원체 그런 스케일이 다른 분이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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