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자 문학평론가

채운산의 중편소설 〈환생〉(《연변문학》 2022년 2호)은 ‘불임’이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결핍을 전면에 내세우고 인간의 실존적 의미와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채운산의 근년의 소설들을 살펴보면 ‘불임’ 때문에 삶이 피폐해지고 존재적 의미를 잃고 갈등하는 인물들을 부각하고 있다. 〈평강(平康) 채씨〉(《연변문학》 2021년 4호)의 큰어머니는 채씨 가문의 맏며느리로서 아이를 못 낳은 죄책감에 수시로 머리 싸매고 눕거나 큰소리로 곡을 하며 우는 불행한 인물이고, 〈귀歸〉(『장백산』 2021년 2호)의 주인공 화연이는 지성인이지만 아이를 못 낳았다는 이유로 남편의 불륜을 보고도 눈감아줘야 했고 이혼까지 당한다. 〈환생〉에서 외숙모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시어머니에게 구박받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무정자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불륜까지 강요당한다. 이같이 불임 모티브는 채운산이 근년의 창작에서 많이 취급하고 있는 주제로서 불임으로 인해서 삶이 불안해지고 자기의 존재적 가치에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그려내고 있다.

인간의 삶, 인간의 미래를 관장하는 것은 ‘생명’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불임’은 현재를 미래로 이어갈 생명연속의 사슬이 끊어지는 치명적인 결핍이 된다. 

더욱이 〈환생〉은 남성의 ‘무정자증’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남성들의 정자가 이 40년간에 50∼60퍼센트 감소되어서 인류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과학자들의 견해가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이는 생명의 본질과 인간의 실존적 의미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채운산은 〈환생〉에서 생명사슬을 이어갈 권리를 박탈당한, 근원적인 결핍을 가진 캐릭터들을 부각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인간의 삶의 제현상諸現像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불임’이 인류의 발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채운산 소설가
채운산 소설가

1.‘불임’의 원형적 의미와 실존의 의미

‘불임’의 모티브는 먼 그리스신화에서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다. 알베르트 카뮈가 인간이 처한 실존적 부조리의 상징으로 내세운 시시포스는 신을 속이고 제우스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린 죄로 본인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들 글라우코스마저 ‘불임’이라는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글라우코스의 아들인 벨레로폰은 그의 아들이 아니라 포세이돈의 아들이라는 설이 나온 것이다.

이런 글라우코스의 원형적 의미는 인류에게 있어서 ‘불임’은 저주와 벌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아무 잘못도 안 한 글라우코스가 아버지 때문에 불임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그 본인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억울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심히 살아온 ‘외삼촌’에게 있어서도 ‘무정자증’이란 진단은 사형선고같이 절망적이고 억울한 일이다.

〈환생〉의 주인공 ‘외삼촌’은 책읽기를 좋아한 덕에 마을에서 수재로 알려져 대대(지금의 촌에 해당함)에서는 그를 현수의(兽医)강습반에 보냈”고 수의가 되었다. “외삼촌이 하는 일은 주요하게 돼지를 거세하거나 예방주사를 놓고 난산인 암퇘지의 새끼낳이를 도와주는 것이였다.” 작자는 특히 외삼촌이 돼지 거세를 하는 장면에 대해서 섬세한 세부묘사를 하고 있다.

 

외삼촌이 돼지 불을 까는 솜씨는 아주 쟀다. 그는 널판자나 통나무로 둘러막은 우리 안에 들어가 돼지를 구석 쪽에 몰아넣고 잽싸게 덮쳐 한쪽 뒤다리를 잡은 다음 옆으로 제껴놓고 무릎으로 몸뚱이를 꾹 눌렀다. 그러면 돼지는 멱 따는 소리를 꿱꿱 질러대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외삼촌은 주인더러 돼지의 뒤다리를 단단히 잡게 하고 우선 면도칼을 휴대용 연혁(研革, 면도칼 따위를 가는데 쓰는 가죽)에 쓱쓱 문질러 날을 선들선들하게 세운 다음 개복할 부위의 털을 말끔히 밀어냈다. 사발밑굽 만큼 허연 살가죽이 드러나면 술을 뿌려 소독하고 나서 수의용 칼로 거세를 시작했는데 숫돼지는 옆구리를 얼마간 쭉 짼 다음 손가락을 집어넣어 음낭을 꺼내 썩뚝 잘라냈고 암퇘지는 수란관을 들어내여 제거하였다. 그리고는 잘라낸 부위를 순대 끄트머리처럼 실로 꽁꽁 묶고 상처를 꿰매고는 된장을 철썩 발랐다. 지혈제가 변변치 않았던 당시에는 된장이 방혈(防血)이나 소염 대용으로 쓰였다. 가축의 거세는 생식을 막고 웅성호르몬의 분비를 격감시켜 성욕을 억제시킴으로써 스트레스를 낮춰서 최종적으로 성질을 온순하게 하고 육질과 량을 늘리기 위해서이다. 

 

동물의 거세를 하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고 생명의 탄생을 막는 일이다. 그런데 이 세부묘사에서 보이다시피 외삼촌은 이 일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환경속에서 돼지가 아니면 돈 나올 데가 없는 사람들이 마을 수의인 외삼촌에게 거세를 부탁할 수밖에 없었고 사실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거세를 부탁해 왔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때문에 외삼촌에게 있어서 돼지 거세는 수의로서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며 해야만 하는 ‘일’이었지만 객관적으로 그것은 ‘살생’의 이미지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삼촌에게 거세를 부탁한 사람들도 그것이 일종의 ‘살생’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외삼촌이 무정자증이라는 것을 알자 원색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돼지 불을 까대더니 죄를 만난 거지.”

“그러길래 사람이란 착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살생을 하지 말아야지. 돼지 불을 까는 것도 살생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돼지 거세는 외삼촌이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그들을 돕기 위해서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살생’을 한 것이 되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아야 했으니 그로서는 하루 아침에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무정자증이 된 것만 해도 억울한데 그 때문에 세상의 조롱을 받아야 하다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지, 그에게는 삶의 근간이 무너지고 삶의 희망이 사라진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자기 존재적 가치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삶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었다.

그러면 작자는 왜 ‘무정자증’이라는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이 근원적인 결핍문제를 ‘돼지 거세’라는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에 의해서 행해지는 반 자연적인 행위와의 대조속에서 표현하였는가?

그리스신화에서 글라우코스는 전차戰車를 끄는 암말들을 더욱 사납고 빠르게 달릴 수 있게 하려고 인육을 먹였을 뿐만 아니라 수컷과 교미도 시키지 않았다. 결과 전차 경주에서 진 글라우코스의 암말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날뛰다가 글라우코스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그 고기를 먹었다. 말들이 이렇게 난폭해진 것은 경주를 위해 암말들의 교미를 막은 글라우코스에 대한 아프로디테 여신의 분노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하지만 그동안 본능을 억제당해온 암말들의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하여 폭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신화가 시사示唆해주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인류를 해하는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경고이다. 현대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도 돼지 거세는 물론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페트에 대한 거세가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또한 인위적으로 성장을 촉진시킨 닭고기나 수정란이 아닌 달걀도 대량적으로 생산되고 있는데 이는 인류의 건강에 위해危害를 주는 잠재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거기에다가 산업발달로 발생되는 폐기물과 유해화학물질로 인하여 토양 및 지하수 오염은 인류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현대인에게 불임은 이미 하나의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현실적 문제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외삼촌 역시 희생자이고 그의 ‘무정자증’은 그런 반反 자연적이고 이기적인 현대인들에 대한 단죄적斷罪的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정실正室이 아니라 소실小室의 소생所生인 그는 대를 잇기 위해서 두 여자의 인생을 고단하게 만든 아버지의 원죄를 지고 태어났다. 그의 “외갓집에는 외할머니가 둘이였다.” 큰 외할머니가 아이를 못 낳는 바람에 “외할아버지가 작은외할머니를 씨받이로 들여서 우로 줄줄이 딸을 다섯이나 낳고”서야 겨우 아들을 봤다. 박씨 가문의 대를 이어가야 할 장자長子로 태어난 그는 태생적으로 윤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축첩제도는 정신을 좀먹는 잔인한 형벌이 된다. “큰외할머니는 부유한 집 딸이였는데 룡정에서 영신녀자학교까지 다녔다고 한다. 그러니 아주 유식한 편이였다. 그 시기 녀자가 학교를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출세였다. 당시로 놓고 말하면 큰외할머니는 개화물을 먹은 모던 녀성이였다. 어쩌다가 시골에 사는, 그것도 가갸 뒤다리도 모르는 외할아버지 같은 일자무식 농사군한테 시집을 왔는지 모르지만” 아이를 못 낳는다는 그 결함 때문에 남편이 소실을 들이는 것을 참고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눈을 펀히 뜨고 제 남편이 다른 녀자와 한 이불 속에 드는 걸 보는데 사람인 이상 어찌 시샘이 나지 않고 화가 꼭두까지 치밀지 않겠는가? 그 후유증으로 큰외할머니는 가슴앓이라는 병을 얻었는데 세상을 뜰 때까지 시달렸다.” 

작은 외할머니는 말을 못하는 벙어리로 “땅 한뙈기를 떼여주고” 사온 ‘씨받이’ ‘대리모’에 불과했기 때문에 자식을 여섯이나 낳았지만 “기실 가정대권은 큰외할머니가 쥐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말할 권리도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가져야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 그녀는 인생 전반이 결핍으로 일관된 인물이다.

창세기에는 삶의 흐름이란 곧 가계家系의 전승傳承이라는 관점에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라는 신이 언젠가는 아이를 준다는 약속을 들었지만 그 약속의 실행이 늦어지자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낳아 주고 싶은 갈망에서 남편에게 “내 몸종을 받아 주십시오. 그 몸에서라도 아들을 얻어 대를 이었으면 합니다”하고 청을 드렸고 아브라함은 사라의 뜻에 따라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받아들이고 아들 이스마엘을 얻는다. 이렇게 사라가 남편에게 자기의 몸종을 바치기까지 긴 세월동안 그녀는 좌절과 한의 세월을 겪어야 했고 그 제의를 받아들인 아브라함의 결정에는 후손에 대한 갈망이 내포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인류발전의 초기부터 ‘불임’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결핍이었고 더욱이 불임여성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가계를 이을 책임을 져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큰 외할머니 역시 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소실小室의 존재를 받아드려야 했고 그 소실의 아이를 키우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큰 외할머니는 아이를 낳지 못한 한이 큰 것만큼 이복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아들이 수의가 되자 “큰외할머니는 ‘우리 맏이, 우리 맏이’하면서 아주 대견스러워하였다.” 그렇게 기대가 컸던 만큼 아들이 무정자증이란 사실은 그녀에게 치명적인 쇼크를 주었고 그래서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드러누웠다”. 하지만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는 매일 삼신 할미에게 아기를 점지해달라고 빌었다. “그것이 효험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이는 큰외할머니의 자아위안이였고 자손에 대한 갈망이였으며 외삼촌을 향한 지극정성이였다.”

그래도 안 되니 이번에는 “외삼촌이 배꼽 아래가 총알에 맞아 구멍이 펑 뚫린 것처럼 듬성듬성 거멓게 타들어가도록 열심히 뜸을 뜨고 록용도 숱해 복용”하게 하였다.”

이 모든 방법이 헛되이 되자 마지막 수단으로 농약까지 마셔가며 자살로 며느리를 협박하여 다리 하나 없는 창수 아버지와 불륜을 하게 하였다. 자기가 불임 때문에 남편이 다른 여자를 안는 것을 묵인해야 했던 고통을 아들이 똑 같이 겪게 하더라도 아이가 있는 완전한 가정을 이뤄주고 싶었던 것이다. 

큰 외할머니가 만약 작은 외할머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 집에서 나가야 했을 것이고 가정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근대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 전근대적인 존재인 소실小室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의미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 절망적인 일이었지만 박씨 가문의 안주인이라는 그의 위치는 굴욕을 참고 이 부조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대신 그녀는 그 아이들을 자기의 자식같이 키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찾았다. 혈연이 아니더라도 가족이 생기면 가정이 파탄되지 않을 것이고 아들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것이며 가계가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그의 인생경험에서 나온 뼈아픈 결론이었고 그래서 그런 하수下手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창세기의 기록에서 사라는 결국 신이 했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낳자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치라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였고 아브라함도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큰 외할머니는 그런 신의 은총을 받지 못했고 아들에게도 신의 은혜는 닿지 않았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큰 외할머니는 ‘아들’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에서 아들을 구할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한 결과 아들에게도 ‘아이’를 만들어주는 선택을 한다. 피가 이어지지 않은 자식들이지만 그래도 이복자식들이 자기를 ‘어머니’로 받아주었고 가족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갈 수 있었고 박씨 가문도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며느리에게 다른 피를 이은 아이라도 낳으라고 강요한 것이다. 자신이 모든 정성을 다해서 소실의 자식을 키우며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잃지 않고 실존해 나갔던 것처럼 아들도 그렇게 ‘자식’을 키우며 살아낼 것을 바란 것이다.

결국 아이가 생겼고 외삼촌은 고향을 떠나 멀리 타향으로 갔다. 이는 외숙모와 가정을 잃지 않기 위한 그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에 의해 혈연으로 맺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라는 자신의 새로운 본질을 얻게 되었고 실존적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불임인 글라우코스는 암말들에게 교미를 못하게 하는 비행을 저지름으로써 결국 그 암말들에 의해 찢기어 죽었지만 외삼촌은 자기 피가 아닌 아이를 ‘자식’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가족을 얻었고 존재적 가치를 찾게 되었다.

외숙모도 ‘불륜’이라는 오명汚名을 쓰게 되었지만 그런 선택을 통해서 사랑하는 남편 옆에 남을 수 있게 되었고 ‘어머니’라는 실존적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선택에서는 윤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태어난 생명은 존중해야 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작가의 생명관이 표현되고 있다.

이같이 작가 채운산은 인류의 창세초기부터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결핍이었던 ‘불임’문제가 현대에 와서도 어떻게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 인간이 어떻게 시행착오를 범하면서도 선택을 통해서 실존적 의미를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 불임이 시사해주는 인류의 미래

그리스신화와 창세기기록에 적힌 인류의 ‘불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소설 〈환생〉에서 ‘불임’이 가지는 원형적 의미와 그것을 이겨 나가는 인간의 실존적 의미에 대해서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불임’이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작가 채운산은 이 문제를 외할머니의 집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 ‘불임’은 2대에 걸쳐서 이어진다. 큰 외할머니가 불임이었기 때문에 작은 회할머니가 씨받이로 들어와서 자식을 낳았지만 유일한 아들인 외삼촌이 무정자증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자 박씨 가문은 후대가 끊어지게 생겼다. 

생명의 본질은 유전자라는 형태의 자기복제이다.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유전자가 자신을 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생체기계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자신을 복제하는 수단인 생체기계가 고장 나면 더는 생명이 이어질 수 없게 된다.

또한 이것은 생명연속의 사슬이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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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을 통해서 이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일인지에 대해서 현실감 있게 보여주었다. 2027년, 더 이상 세상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지18년이 지났고 최후의 아이였던 18살 소년마저 사고로 죽었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생(生)의 순환 속에서 임신 능력을 상실하여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인류에게는 무수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런던을 제외한 모든 도시, 국가가 붕괴되면서 수많은 이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불법입국을 시도하고 런던 정부는 불법이주민들을 색출, 감금하고 죽인다. 내일이 없다는 기정사실에 텔레비전에도 편히 자살을 할 수 있는 약제 광고가 넘치는 세상에는 인류가 생존해 나갈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만든 디스토피아적 가상세계라면 채운산이 그리고 있는 박씨 일가는 형상화된 현실세계이다. 이 두 세계의 공통점은 ‘불임’이다. 더는 아이가 없는 ‘런던’이 무정부주의적이고 살육이 넘치는 암울한 세상이라면 장자가 ‘무정자증’이란 판단을 받은 박씨 일가와 외삼촌의 세상은 생지옥이다. “큰외할머니는 주먹으로 가슴팍을 탕탕 두드려대며 넋두리를 하였”고 “작은외할머니도 ‘어버버, 어버버…’ 하며 손등으로 눈굽을 찍었”으며 외할아버지는 “애꿎게 담배를 풀썩풀썩 피워댈 뿐이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주요하게 돼지를 거세하거나” “건강한 숫돼지를 암퇘지와 교미를 시키는” 일을 하면서 “뭐니뭐니 해도 숫놈은 씨를 많이 뿌려야 해. 인간이나 동물은 그게 근본이고 가장 거창한 일이지.” “난 마누라는 하나면 족하네. 다만 씨는 수두룩하게 남겨야지. 이 세상에서 번식처럼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나?”하며 큰소리치던 외삼촌이 무정자증이었다는 사실이다.

 

외삼촌이 무정자증이란 소문은 삽시에 온 마을에 뜨르르 퍼졌다. 무정자증과 고자는 완전히 다른데도 농촌사람들은 외삼촌을 고자로 몰아갔다. 가끔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중구난방 외삼촌의 흉을 보군 하였다. …

“돼지 불을 까다가 제 발등에 액이 떨어진 셈이 되였군.”

“자기 집 돼지는 숱한 암퇘지들과 쌍붙임을 시키면서… 아무튼 박씨네 대가 끊기게 생겼네.”

“그러게 말이야. 애비는 마누라를 둘씩이나 끼고 사는데… 선대의 기가 너무 세면 후대가 그 업보를 받는 법이지.”

그 때로부터 외삼촌에게는 ‘물알’이란 별명이 붙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절망한 외삼촌은 두문불출하고 집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쩍하면 버럭버럭 화를 냈고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외숙모한테 트집을 잡고 밥상을 엎어버렸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존재리유는 생육이고 번식인데 그것을 상실했으니 억장이 무너질 일이 아닐수 없었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절망적인 세상에 ‘임신’이라는 희망의 키(열쇠)를 주었다. 주인공 테오(클리브 오웬)는 이유 없이 납치된 곳에서 전처 줄리언을 만나게 되고 미지의 흑인소녀 키(Kee)를 해안까지 데려가주라는 부탁을 받는데 키는 이민자 격리구역에서 딸아이를 낳는다. ‘딜런’의 탄생은 이제 죽음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한줄기의 희망을 주었다. 총싸움이 한창인 전쟁터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는 총소리를 멎게 하였고 총을 쏘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길을 내주게 하였다. 이미 총에 맞은 테오는 키를 바다까지 데려가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곁에 둬' 라는 말과 함께 우는 아이를 안아 트림을 시키는 법을 알려주고 죽는데 안개를 뚫고 도착한 배 ‘내일(TOMORROW)호’가 키와 아기를 구한다. 이 장면에서 영화가 끝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그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있는 미래를 예언하는 상징적인 엔딩이다.

그러면 채운산은 〈환생〉에서 어떤 희망을 주었는가? 역시 ‘아이’를 주었다. 무정자증인 외삼촌은 아이를 만들 수 없지만 건강한 외숙모는 큰 외할머니의 강요로 창수 아버지와 불륜하여 임신을 한다. 물론 처음에 외삼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내의 불륜을 발견한 “외삼촌은 다짜고짜 외숙모의 머리태를 휘여잡더니 주먹을 날렸다. 외숙모는 단통 코피를 쏟으며 구들 한 복판에 나가동그라졌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외삼촌은 쌀방아를 찧어대듯 외숙모의 몸에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살인이라도 저지를 잡도리였다.”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했지만 결국 외삼촌을 현실을 받아들이고 흑룡강 어딘가로 이사를 갔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의 이름을 박씨네 족보 대로 ‘경’자 돌림을 따른 ‘경민’이라고 지었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가진다. 혈연인 “창수네 족보를 따라서 ‘수’자 돌림으로 이름을 짓자고” 하던 외삼촌이 외숙모의 주장대로 ‘경민’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아이를 자기의 자식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때문에 외삼촌은 그 아이를 위해서 외숙모와 함께 한국에 가서 돈도 벌었고 돌아와서는 돈사豚舍를 짓고 아들과 같이 돼지치기를 할 수 있었다. 친 혈육은 아니지만 아이를 받아들이면서 가족이 생기고 살아갈 이유와 자기 존재의 의미가 생긴 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키가 낳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딸아이가 인류의 희망이 된 것처럼 외삼촌이 ‘경민’이를 아들로 인정하면서 아이가 누구의 피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더는 의미가 없어진다. 가족이 생겼고 박씨 가문에 후대가 생겼고 가문이 이어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혈연을 초월한 가족의 탄생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되었고 혈연의 약화는 미래 인류의 또다른 존재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1. ‘돼지’의 상징성으로부터 보여지는 생명의 본질

 

생물은 번식을 하며 자신의 특성을 자손에게 물려주는데 번식을 잘하는 동물 하면 돼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임’이란 근원적인 결핍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인공 ‘외삼촌’은 번식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돼지’와 연관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첫 생일때부터 ‘돼지’와 함께 삶을 시작한다.

 

외삼촌은 목에 백금으로 만든 돼지목걸이를 걸고 다녔는데 그것은 큰외할머니가 외삼촌의 첫돐생일 기념으로 시내의 금은방에 가서 만들어다준 것이라고 한다. 후에야 알게 되였지만 돼지는 복을 상징하고 특히 다산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물이여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어찌면 큰외할머니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는 자기의 념원을 외삼촌한테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씨받이’로 소실을 들여서 딸 다섯을 낳고 그 다음에 겨우 얻은 외아들인 ‘외삼촌’, 더욱이 아이를 못 낳아서 다른 여자와 남편을 같이 공유해야 하는 부조리한 삶을 살아온 큰 외할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지니고 태어난 그에게 ‘돼지목걸이’는 자식을 많이 낳아서 박씨 일가의 대를 이어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 자신도, 그의 가족도, 마을사람들도, 모두 그것을 응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가 수의獸醫가 된 것도 책 읽기를 좋아한 덕분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큰외할머니가 외삼촌에게 돼지목걸이를 해주었기에 수의가 되였다고 입을 모았다. ‘돼지’와 ‘수의’를 한줄로 꿔여 련결시켰던 것이다.”

그런 환경속에서 그는 ‘수의’를 자기의 천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자부감을 가졌다. 그는 “겉에 ‘홍십자(红十字)’가 새겨진 자주색 가죽가방을 메고 시뚝해서 다녔는데” “돼지를 거세하거나 예방주사를 놓고 난산인 암퇘지의 새끼낳이를 도와주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그가 외숙모를 만나게 된 것도 난산이었던 그녀 집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것이 계기가 되어 결혼까지 간 것이다. 결혼해서 세간난 후에는 “푼돈이라도 벌려고 수의인 자기의 특기를 살려 돼지치기를 하였다. 그냥 돼지치기가 아니라 건강한 수퇘지를 암퇘지와 교미를 시키는 것이였다.” 

‘굴암퇘지’라 불려도 좋으니 “소원이 아이들을 한구들 가득 낳는 거”라는 외숙모와 “마누라는 하나면 족하”나, 씨는 수두룩하게 남겨야” 한다고 호언豪言하는 외삼촌은 서로 뜻이 맞고 사랑하는 부부였다. ‘돼지’는 그들이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 경제적 내원來援이었고 ‘돼지목걸이’는 그들의 밝은 미래를 지켜주는 부적符籍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무정자증’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돼지목걸이’는 반대로 불행의 증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이 따위 게 다 무슨 쓸데 있어요?” 하면서 “목에 걸고 있던 돼지목걸이를 벗어 팽개치”었다. 아이를 만들 수 없는 그가 다산을 의미하는 ‘돼지목걸이’를 건다는 것 자체가 그에 대한 풍자이고 조롱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체성에 혼란이 생겨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그에게 그동안 ‘쌍붙임’을 시키지 않아서 발정 난 돼지는 불임이 된 그의 운명과 대비가 되어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상황속에서 외삼촌의 돼지를 자기 집 암퇘지와 쌍붙임 시켜 달라는 앞마을 ‘채석반장’의 청은 그의 배알을 꼬이게 하려는 심사로 보였고 그래서 “왜 돼지가 영 맥을 못 추오? 혹시 이 집 돼지도 물알이 된 게 아니오?”하는 무신경한 말은 그의 울화를 터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동네에서 자식낳이를 못하는 자기를 ‘물알’이라고 놀린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는 외삼촌이였다. ‘물알’이란 별명은 ‘고자’와 일맥상통한 뜻을 내포하고 있어 외삼촌에게는 최대의 수치이고 경멸이고 모욕이였다.” 화는 애매한 돼지에게 떨어지였다.

 

외삼촌은 다짜고짜 돼지우리 안에 서부렁섭적 뛰여들어가더니 발정이 나서 벌그죽죽한 양물을 적라라하게 드러내놓고 갈갬질을 하는 돼지의 두 귀를 잡아 자빠뜨리고 바줄로 앞뒤다리를 꽁꽁 묶은 다음 수의가방에서 한뼘 쯤 되는 칼을 꺼내 옆구리를 쭉 째고 게세를 해버렸다. 다시는 쌍붙임을 못하게 아예 불을 까버렸던 것이다. 발정을 주체하지 못해 우리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펄떡펄떡 용을 쓰던 돼지는 대뜸 고자누룩해져서 간헐적으로 가쁜 숨만 헐떡거렸다. 맥을 잃고 훌쭉한 쌀주머니처럼 축 늘어진 돼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외삼촌의 얼굴에는 득의에 찬 잔인한 미소가 느긋하게 어렸다. …

 

화김에 저지른 행위이지만 거세당한 돼지는 결국 불임이 된 외삼촌 자신의 모습과 같았다. 화풀이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돼지’에게 상처를 준 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에 칼을 대는 행위였기 때문에 거세당한 돼지를 볼 때마다 그의 상처는 더 깊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그 현실을 받아들이어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떠나기 전날 그는 끝내 돼지를 죽이고 만다.

 

이사를 떠나기 전날, 외삼촌은 푸름한 새벽에 일어나서 돼지굴로 들어가더니 바줄로 돼지의 네다리를 꽁꽁 묶었다. 식구들은 외삼촌이 돼지를 이사짐 차에 싣고 가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헌데 외삼촌은 품에서 식칼을 꺼내더니 사정없이 돼지의 목을 푹 찔렀다. 돼지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줄에 묶인 다리를 몇번 버둥거리더니 미구에 맥아리 없이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외삼촌은 쭈크리고 앉아 죽은 돼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는 외삼촌의 눈에 물기가 번뜩이였다…

 

다산의 상징인 ‘돼지’를 죽였다는 것은 ‘씨’를 “수두룩하게” 남기려던 자신의 꿈을 버렸다는 것을 말하며 불임 때문에 상처받고 아파하던 과거의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돼지’가 죽음으로써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미트라교 신화에 따르면 미트라가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친 황소를 죽이는 순간 커다란 기적이 일어나 그흰 황소가 달로 변했고 황소의 꼬리와그의 피에서 낟알의 첫 이삭과 포도가, 생식기에서는 신성한 종자들이 나왔는데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그 신성한 종자들이섞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신화가 상징하는 것처럼 돼지는 주인공 외삼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 바쳐진 ‘제물祭物’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영광과 무정자증자가 된 절망의 상징물이었던 ‘돼지’가 제물이 되면서 외삼촌은 ‘아버지’로 다시 태어난다. 돼지를 거세하고 “득의에 찬 잔인한 미소”를 지었던 외삼천이 돼지를 죽이고는 “눈에 물기가 번뜩이였다”는 묘사는 외삼촌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발정 난 돼지를 거세하여 자기와 같은 처지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기를 비웃는 마을 사람들에게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화풀이를 한 것에 대한 일시적인 만족감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조소이기도 하다. 돼지를 죽이고 지은 눈물은 영광과 상처로 얼룩진 과거의 자신과 작별을 하는 개운하면서도 미련을 어쩔 수 없는 복잡한 심리의 표현인 것이다.

그런 선택을 거쳐서 ‘아버지’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한국에 가서 돈을 벌고 양돈기술을 배워와서 현대식 돈사豚舍를 지었고 300여마리 돼지를 키운다. 비록 아내를 잃었지만 아들이 있고 돼지가 있는 한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돼지를 많이 키운다는 것은 자식을 많이 낳고 싶었던 옛날의 꿈이 간접적이나마 실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자식을 많이 낳을 것을 바라는 ‘아들’에 대한 기대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생명은 이어지고 있다.

작가 채운산은 마지막 부분에서 ‘환생’이란 말을 3번 쓰고 있다. 첫번째는 옛일을 추억하면서 “네 큰외할머니는 내 인생을 바꿔주었어. 아니, 환생을 시켰어…”는 말에서 나오는데 자기에게 아들을 만들어 준 ‘어머니’ 덕분에 자신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두번째는 외삼촌이 전화로 “전번에 네가 왔을 때 교미를 하던 그 암퇘지 있지 않냐? 새끼를 배였어.”라고 알리면서 “아무래도 구천을 떠돌던 네 외숙모의 혼이 그 암퇘지한테 붙은 것 같애. 네 외숙모의 평생 소원이 자식들을 한 구들 낳아 키우는 것이였거든. 네 외숙모가 돼지로 환생한 것 같구나.”라고 한 말이다. 무정자증인 자기 때문에 풀지 못한 아내의 ‘소원’이 ‘돼지’로 환생해서라도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낸 것이다.

세번째는 외삼촌의 전화를 받다가 차로 칠 뻔했던 돼지무리에 대한 생각에서 나온다. “아래배에 젖통이 주렁주렁 달린 굴암퇘지가 새끼 대엿마리를 거느리고 느릿느릿 길을 건너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외숙모의 고향을 지나가는 이때 하필 돼지가 느닷없이 나타났다는 것이 무척 괴이하였다. 정말 외삼촌의 말이 맞을가? 외숙모가 확실히 돼지로 환생하였을가?…”하고 생각하는데 이는 외숙모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믿고 싶은 ‘나’의 마음의 표현이다.

세차례의 ‘환생’은 모두 생명과 연관된다. 새로운 생명이 생긴다는 것은 생명이 이어진다는 것을 설명하며 이같이 생명이 이어지는 것이 곧 생명의 본질라고 작가 채운산은 말하고 있다. 그것이 혈연이든 아니든, 그것이 사람이 아니고 ‘돼지’같은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의 탄생은 위대한 것이고 찬미할 일이라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긍정이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이 작가 채운산은 자기의 중편소설 〈환생〉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인 ‘불임’이란 모티브를 쥐고 ‘생명’이란 무엇이며 생명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파고들면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유전자 연구가 깊어지면서 시험관 아기를 넘어 피부의 IPS세포에서 배양해낸 정자와 난자로 생명이 만들어지고 있는 시대에, 인류의 중성화가 진행되면서 정상적인 생육과 분만이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에서, 채운산의 중편소설 〈환생〉은 “인류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사색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연변문학》2022년 8호에 실린 글

채운산 약력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선후하여 중공연변주위 《지부생활》잡지사 편집, 《청년생활》 부주필, 《연변문학》 주필 력임. 현재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 주임. 중단편소설집 “두만강에 살어리랏다”를 출간. 연변작가협회 “김학철문학상”, 《길림신문》두만강문학상 소설본상, 제5회 중국조선문신문출판문화대상 우수편집상, 제1회동북3성(북경)조선문간행물 우수 주필(총편집)상 등 수상.

 

 

엄정자 약력 :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원, 길림신문사 기자 역임,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에 재직 중. 동북아신문 일본지사 대표.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회장. 연변작가협회 이사, 일본조선학회 회원.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 평론집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엑소더스』. 제9회 『도라지』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제10호 『동포문학』평론부문 대상. 제40회『연변문학』 평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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