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자 문학평론가

소설가 채운산의 장편소설 〈숙명〉은 《장백산》(2022년 1호~4호)에 연재되었고 이제 곧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인데 이 평론은 단행본 원고를 텍스트로 한 글이다. 

장편소설 〈숙명〉은 그의 ‘생명’소설 시리즈의 완결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발표한 중편소설 〈귀歸〉(『장백산』2021년 2호)와 〈환생〉(《연변문학》 2022년 2호)에서 ‘불임’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결핍을 전면에 내세우고 인간의 

실존적 의미와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였다면 〈숙명〉에서는 불임이 아님에도 입양아를 키우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서 생명에 대해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유전 정보를 담은DNA가 서로 역방향으로 꼬인 두개의 리본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중나선 구조를 하고”(<네이처> 1953년 4월25일) 있는 것처럼 딸과 아버지라는 두개의 나선이 어떻게 생명의 흐름을 만들어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작가 채운산은 조선민족의 백 년 역사를 배경으로 두 주인공의 운명을 풀어나갔기 때문에 사소한 개인적인 가정사에서 벗어나서 거시적인 시선으로 민족의 운명을 보여줄 수 있었다.

채운산 소설가
채운산 소설가
  1. 시대가 낳은 불행아 짜구배들의 운명

소설에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화자로 등장하는 ‘나’의 고향마을은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 선조들이 괴나리보짐을 지고 남부녀대로 넘었다는 오랑캐령” 아래에 있다. 이 설정으로부터 주인공들의 운명은 자연히 일제시대에 처음으로 중국 땅으로 이주해오던 그 역사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형적인 특점으로도 “그 무슨 송림골이요, 큰 가마골이요, 작은 가마골이요, 쟈피골이요, 영자누이골이요, 싸리바위골이요, 노새골이요… 아무튼 골이 많기도 했다”는데 “지난 세기 30년대에 두만강을 건너온 화전민들이 일본놈들의 등살에 못 배겨” 부대를 일구며 살았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화전민들은 “일본이 투항하면서 집단부락으로 내려”왔고 거기에다가 타지로부터 태생이 불명한 아이들을 데리고 흘러 들어온 ‘박령감’, ‘맹씨’같은 사람들로 하여 민족적 정체성이 불완전한 성원들로 구성된 특이한 마을이 되었다. 

주인공 ‘혹쟁이’만 보아도 그는 조선인과 일본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이다. 그의 아버지 최도식은 “마을의 대지주 최군필의 아들”이었는데 “일본인을 등에 업고 출세가도를 달려보려고” “조선 회령에 있는 한 일본상인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최명건(崔明健) 즉 ‘혹쟁이’이다. 그런데 일본이 망하게 되자 그 엄마는 “나중에 다시 데리러 오마 하고 기약없는 약속을 남기고”는 부모를 따라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후 최도식은 “혼자서 우는 아이를 둥개둥개 어르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아이는 잔등이 이상하게 조금씩 굽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아이를 두고 숙청을 피해서 “남조선”으로 떠나고 말았다.

 

아직 젖먹이인 데다가 병신이나 다름없는 애를 데리고 3.8선을 넘어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리하여 최도식은 일단 애를 남겨두고 혼자서 먼저 남조선(지금의 한국)으로 나가 자리를 잡은 다음 다시 데리러 오기로 작심하였다. 자기 집 머슴을 산 김씨의 마누라가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김씨한테 팔간기와집을 넘겨주는 대가로 아이를 맡기면서 “나중에 다시 데리러 오마!” 하고 안해와 똑같은 헛약속을 하고는 밤도와 두만강을 건너 남조선으로 나갔다… 결국 아이는 홀로 이 세상에 남겨졌고 남의 슬하에서 고달프게 자라게 되였다. 부자집 ‘도련님’으로부터 가난한 집 ‘천덕꾸러기’가 된 셈이였다. 설상가상으로 어릴 때 상한 허리가 크면서 점차 만궁으로 당긴 활처럼 휘우듬하게 휘더니 결국 혹쟁이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타고난 운명이고 팔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혹쟁이’가 된 최명건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도 출생이 불확실한 사람들이 많다.

우선 그의 양딸의 친부인 오종화는 “전 촌의 권력을 휘뚜루 제 한손에 거머쥐고 쥐락펴락하는 실세인물이였다.” “오종화는 지식청년들을 추천해서 시내로 돌려보내는 ‘대권’을 손에 틀어쥐고 있었다. … 한마디로 그는 지식청년들의 생명줄을 움켜쥔 사람이였다.” 그는 이 권력을 이용하여 상해지식청년인 왕연과 부당한 관계를 가졌는데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후에 혹쟁이가 입양한 여주인공 ‘성옥’이다. 그 대가로 상해에 돌아갈 기회를 얻은 왕연이는 남모르게 낳은 딸을 ‘혹쟁이’에게 남겨놓고 떠나면서 “용서해주세요, 잠시 이 아이를 맡아 키워주세요. 제가 상해로 돌아가게 돼요. 일단 거기 가서 자리를 잡으면 다시 데리러 올게요.”하며 부탁했지만 결국 그녀는 데리러 오지 않았고 그렇게 한족인 왕연과 조선족인 오종화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성옥’이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혼혈아인 ‘혹쟁이’의 딸이 되었다. 

오종화의 아내 ‘몽고말’(본명 춘자) 역시 정체가 불명한 혼혈아이다. “그녀의 아버지 박령감은 원래 두만강을 건너와서 일본놈들의 등살을 피해 멀리 (내)몽골에 가서 정착하였는데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대여섯살이 된 그녀를 데리고 이곳으로 나왔다. 당시 박령감이 살았던 곳은 꽤 큰 동네였는데 몽골족을 위주로 한족, 만족, 회족 등 타민족들도 쌀에 뉘처럼 가담가담 섞여있었다. 한 마을 사람 11명이 함께 두만강을 건너 (내)몽골로 왔는데 어쩌다보니 뿔뿔히 흩어지고 박령감만 이 다민족 마을에 보짐을 풀게 되였다. 거기서 박령감이 어떤 녀인과 눈이 맞았는지 모르지만 결혼을 하여 딸을 낳았다. 물론 딸의 생모가 누구이고 어느 민족인지는 오로지 박령감만 알 뿐이였다. 아무튼 조선인 녀자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주인공 ‘혹쟁이’의 첫사랑이고 후에 연인이 된 맹복금도 출신이 불명확하다. 모친 맹씨는 “일제강점기에 룡정의 기방에서 예기(艺妓)로 있었는데 일제가 투항하고 기방이 문을 닫게 되면서 어린 딸 맹복금을 데리고 여기저기 정처없이 떠돌다가 이 마을에 와서 정착하게 되였다. 기방에 몸 담그었다는 리유로 벙어리 양씨한테 시집을 갔는데 자기의 신분이 떳떳하지 못한 데다가 남편마저 불구여서 늘 위축되여있었다. 맹복금은 그녀가 기방에서 일할 때 낳은 자식인데 친아버지가 일본군관이라는 둥, 한족 부자의 아들이라는 둥, 조선인 대학생이라는 둥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이같이 본인이 혼혈아인 주인공 ‘혹쟁이’의 주위에는 ‘짜구배’라 불리는 혼혈아들이 많았는데 그런 불행의 ‘낙인’이 찍히게 된 것에는 일본의 침략과 수탈로 인한 조선인들의 이주의 역사와 정치적 동란시대의 영향이 컸다. 이런 역사적, 시대적 원인으로 하여 그들은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했고 그래서 그들의 겪은 불행은 단순히 개인의 운명이라 하기보다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 서로 역방향으로 꼬인 두개의 리본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시스템

    주인공 ‘혹쟁이’와 그의 양딸 ‘성옥’이는 둘 다 혼혈아이고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부모는 후에 데리러 온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서는 누구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외로운 두 사람은 부녀父女가 되었고 서로 의지해서 살아가는 운명이 되었다.

    1953년 4월 25일, 미국의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과 영국의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은 과학 전문지 <네이처>에 유전정보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물질인 DNA의 구조가 이중 나선형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중 나선이 풀리면 플러스 가닥과 마이너스 가닥으로 나누어진다. 플러스 가닥을 모체로 새로운 마이너스 가닥이 생기고 원래의 마이너스 가닥에서 새로운 플러스 가닥이 생성되면 두쌍의 새로운 DNA 이중나선이 탄생한다. 이것이 ‘생명의 자기 복제 시스템’이며 새 생명이 태어나거나 세포가 분열할 때 유전정보가 전달되는 시스템의 근간을 이룬다.” (블로그 ‘메타건강디자인연구소’, emjcho)

    이 DNA구조가 생명을 만들고 이어가게 하는 것처럼 ‘혹쟁이’와 ‘성옥’은 두개의 나선이 되어 ‘가족’이라는 하나의 운명으로 꼬여갔다. 두 사람은 서로가 상대방의 운명이 되었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생명줄이 되었다.

     

    사실 혹쟁이는 어망결에 갓난이를 맡았지만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하였다. 아이가 보채며 숨이 넘어갈듯 앙앙 울어댈 때면 온몸에 진땀이 바질바질 돋고 애가 나서 개미 채바퀴 돌듯 하였다. 젖이 있으니 젖을 주랴, 그렇다고 궁핍한 살림에 우유를 사서 먹이랴? 아이가 바사질듯 울어댈 때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사카린을 물에 풀어서 입술에 발라주거나 암죽을 쑤어서 먹이는 것뿐이였다. 다행히 맹복금이 해산하여 가끔 젖을 얻어먹일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혹쟁이’는 몇번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① 빈궁한 살림에 결혼도 안 한 총각인 ‘혹쟁이’가 갓난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무리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침 맹복금의 남편 허영활이 좋은 집을 소개했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그 권유를 따라 맹복금네 친척집에 아이를 입양시켰다. 하지만 “아이를 보내고 나서 혹쟁이는 크게 앓았다. “비록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동안 입김이 어린 아이는 그에게 있어서 생명이고 삶의 전부임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내가 부모한테 버림을 받았던 거나 뭐가 다른가? 아이도 내 전철을 밟게 할 수 없다. 이건 죄악이다.” 결국 “달포쯤 지나 혹쟁이는 아픈 몸을 끌고 왕청으로 그 부부를 찾아갔”고 기어이 아이를 되찾아왔다. “어쩌면 그 저변에 자기와 성옥이가 둘다 튀기—짜구배라는 동질성이 깔려있는지도 모른다. 동병상련이 련민을 낳았고 나아가서 운명으로 엮어졌다.” 그는 아이가 그의 운명이고 그 아이를 키우는 것이 자기의 숙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② 자라면서 성옥이는 마을 아이들에게 특히 광철이에게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광철이는 말발버섯을 찾아서 꾹 밟아 뿡— 소리를 내고는 성옥이가 방귀를 뀌였다고 덮어씌웠다. … 이쯤은 그나마 약과였다. 광철이는 걸핏하면 성옥의 출생을 들먹였다. ‘야, 이 간나 짜구배 같은 게.’” 그렇게 자기 딸을 못살게 구는 것을 보고 화가 난 혹쟁이는 “멱살을 틀어잡은 채 광철이를 땅바닥에 홱 내팽겨쳤다.” 그 바람에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져서 그는 광철의 아버지에게 호되게 얻어맞았다. “혹쟁이는 갑자기 땅바닥에서 돌멩이를 쥐더니 자기 머리를 쾅쾅 쥐여박았다. 머리에서는 대뜸 선지피가 콸콸 쏟아져나왔다. 아귀가 무른 줄 알았던 혹쟁이가 목숨을 내번지자 깜짝 놀란 광철이 아버지는 허겁지겁 그의 손을 잡고 제지하였다.” 결국 주먹이 센 광철 아버지가 힘없는 불구자인 ‘혹쟁이’에게 지고 만 것이다. 그렇게 그는 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었다.

    ③ ‘혹쟁이’의 모친이 뒤늦게야 아들을 찾을 때 그는 일본에 갔었지만 어머니 옆에 남지 않고 다시 딸이 있는 고향으로 돌이왔다. “그래도 난 여기가 좋수. 내가 성옥이를 두고 가긴 어델 가겠수? 일본이 아무리 좋다구 해두 성옥이만은 못하지. 그리고 여기에는 노새두 있구, 또 두부도 앗을 수 있구… 아무튼 난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수.” 그에게는 피를 이은 혈육보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운명으로 이어진 딸이 더 소중했다. “거기서 모친으로부터 남조선(한국)으로 건너간 아버지 최도식이 조선전쟁에서 한국군으로 참전했다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④ 그는 딸 성옥이 때문에 과부 맹금복을 좋아하면서도 결혼하자는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고 맹금복이 임신했을 때도 현병원에 데리고 가서 낙태수술을 시켰으며 자기도 정관수술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 번식능력을 차단해버렸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매몰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인간에게 있어서 번식, 즉 자기의 혈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곧 생명의 근원을 이어가는 것이고 세상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거룩한 행위이다. 그런데 혹쟁이는 서슴없이 자기를 희생하였다. 어찌보면 이것은 자기의 삶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생명의 본질적 특성은 한 개체가 자신과 닮은 또 하나의 개체를 만들어내는 특성 즉 그 생식작용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생명의 유전적 정의를 부정하고 자기의 유전자를 가지지 않은 ‘성옥’이를 선택하였다. 

    ⑤ 성옥이의 생모 왕연이가 딸을 찾으러 왔을 때 ‘혹쟁이’는 “개떡같은 소리 하지 마우. 성옥이가 왜 내 자식이 아니우, 그 앤 내 딸이우. 안되우, 난 그 애를 못 보내우.”하면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성옥이가 집을 나가서 불량소녀가 될 때까지 전화번호와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열 살 때 ‘지주놈의 새끼’라고 구박하는 계모때문에 도무지 그 집에서 배겨낼 수 없어서 아버지를 찾아 떠났던 일을 상기하고는 성옥이의 미래를 위해서 딸을 친모가 있는 상해로 보낸다.

    ⑥ 그렇게 딸을 보낸 그때부터 그는 술만 마시면 노새를 두들겨 팼다. “이눔의 노새, 아무 쓸모도 없는 놈! 말도 아니고 당나귀도 아닌 것이 세상엔 왜 나왔어? 차라리 뒈질 거지.” 새끼를 낳지 못하고 일만 하는 노새에게 그는 자신을 투영하였고 딸을 지켜내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는 마음으로 노새를 때렸을 것이다. 결국 후닥닥 뒷발질을 하는 노새에게 앙가슴을 호되게 얻어맞은 ‘혹쟁이’는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다만 ‘딸내미 전화번호(상해): ○○○…’라고 비뚤비뚤하게 씌여져있는, 땀에 절어 눅눅해지고 잉크색이 바랜 탓으로 글자가 희미하게 보이는 메모지를 손아귀에 꽉 움켜쥐고 있었”을 뿐이다. 딸이 떠나며 ‘이중나선’의 다른 한 가닥이 끊어지니 그의 생명도 끊어지었다.

    ‘혹쟁이’의 인생은 딸 성옥이를 위한 인생이었고 딸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온 인생이었으며 동시에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딸을 사랑하며 거기에서 삶의 보람을 느꼈기에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딸인 성옥이에게 있어서 엄마의 결핍은 그의 가장 아픈 곳이었다. 어릴 때 광철이에게 ‘짜구배’라고 놀림을 받았을 때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난 엄마가 없어? 광철이랑, 영식이랑 경자랑은 다 엄마가 있는데. 광철이가 그러는 데 엄마가 없는 애는 짜구배래.”

    엄마가 없었지만 성옥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랐기 때문에 절대 남에게 기죽지 않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동네아이들 중에서 “‘대장’— 우두머리인 광철이는 몸집도 뚱뚱하고 컸지만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쇠붙이를 또 언제 마구 휘둘러댈지 몰라 동네 아이들은 광철이라면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그런 광철이가 걸핏하면 성옥의 출생을 들먹이며 “야, 이 간나, 짜구배 같은 게.” 그러면 성옥이는 “이 아새끼, 똥싸개 같은 게.”하고 대들었다. “소와 노새 중 어느 동물이 인간에게 더 유용한가를 두고 옥신각신” 할 때도 마을아이들은 소를 두둔하는 광철의 편에 섰지만 성옥이는 혼자서 노새를 두둔하였다.

     

    “소는 덩치가 되게 큰데 노새는 쪼꼬만하잖아?”

    광철이가 먼저 선불을 걸었다.

    “우둔하게 크기만 해서 뭘 해? 노새는 짐을 등에 지고도 바위산을 잘 타지만 소는 엉기적거리며 못 오르잖아?”

    “소는 고기가 맛 있지만 노새는 고기를 못 먹잖아?”

    “넌 어째 먹는 것밖에 모르니? 노새는 등에랑 배에랑 줄무늬가 있어 귀엽지만 소는 누런 똥색이잖아?”

    “소는 새끼를 낳지만 노새는 새끼를 못 낳잖아?”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노새는 50년이나 살지만 소는 20년밖에 못산대.”

     

    성옥이가 노새를 두둔한 것은 아버지가 늘 노새를 몰고 다니며 두부를 팔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 노새는 아버지와 통일된 이미지로 정착되었고 노새도 가족이었다. “노새란 놈도 제 집식구를 알아보는지 성옥이가 등에 올라타면 고분고분하다가도 내가 올라타면 푸르릉푸르릉 투레질을 하기도 하고 뒤발을 들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였다.” 비록 ‘나’가 성옥이의 유일한 친구이지만 ‘나’가 “짜증이 나서 발로 노새의 앞다리를 걷어차면 성옥이는 발끈 소리를 질렀다. ‘야, 노새를 왜 때려? 노새가 아파해.’” 성옥이의 노새에 대한 사랑은 곧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었다.

    소무리에 깔릴 뻔한 자기를 구하고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죽은 오종화가 자기의 친부이고 자신은 불륜으로 의해 태어난 아이이며 한족과 조선족의 혼혈아인 ‘짜구배’라는 것을 알게 된 성옥이는 엄마 찾으러 상해로 가겠다고 선포한다. “공부고 뭐고 나한테는 엄마를 찾는 게 최고 목표야. 여기가 지긋지긋해. 사람마다 짜구배라고 놀려대지, 양아버지는 불구자지, 친아버지라는 사람은… 그만하자. 아무튼 난 여기를 떠날 거야.” 비록 자기를 버린 엄마이지만 그녀에게 엄마가 있는 상해는 이 아픈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을 것이다. 집을 나간 성옥이는 이틀 후 심양역에서 발견되었고 향파출소의 소장과 송국이 아버지가 심양까지 가서 성옥이를 데려왔다. 이 일은 성옥이에게 상처로 남았고 그 후유증으로 크게 앓아 향 병원에 실려가 수혈하고 현병원에까지 가서 입원하여서야 나을 수 있었다.

    퇴원한 후 성옥이는 말수가 적어지고 공부에만 집념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엄마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우연히 맹복금에게서 자기의 생모인 왕연이 자기를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엄마에게로 가려는 결심이 더 굳어졌다. 그녀도 아버지에게 있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지만 자기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알아, 아버지가 나를 키우느라고 고생 많이 한 걸. 그리고 나를 장중보옥처럼 여긴다는 것두.” “하지만 난 꼭 엄마를 찾아서 상해로 갈 거야. 난 이곳을 떠나고 싶어. 내 인생의 락인을 지우고 싶어. 마치 자자와 같은 락인을 말이야. 난 죄인이 아니야. 난 이런 ‘형벌’을 더는 받아낼 수 없어”하면서 자기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마지막 수단으로 불량소녀가 되어서 무리들을 이끌고 아버지 집을 뒤지고 나갈 때도 그녀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으며 배은망덕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너무하지. 키워준 정도 모르고 행패를 부렸으니까.” 그러면서 혹쟁이의 호주머니에 두툼한 봉투 하나를 쑥 밀어 넣어주었다. “그냥 써. 그깟 두부를 해서 몇푼이나 번다구? 인젠 두부방을 그만둬.”하는 그녀의 말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표현되고 있다. 되돌아 나가는 “성옥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도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차별을 받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를 버릴 수밖에 없는 아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도리를 버리면서 선택한 도피처였지만 성옥이는 행복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는 엄마 옆에서도 행복하지 않았고 공황장애를 앓게 되었다. 그녀의 유일한 위안은 ‘워낭’이었다. “혹쟁이아버지가 키우던 노새의 목에 달았던 거래요. 어머니는 항상 그 워낭을 보면서 자기를 키워준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또 죄책감을 느끼군 하였어요. 심지어 우리 집 출입문에는 초인종이 아니라 워낭이 달려있었어요. 어머니는 늘 귀가에서 노새 울음소리가 울리는 공황장애를 앓았는데 그 워낭소리를 들어야 누군가 자기를 지켜주는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고 편하다고 하였어요. 하루라도 워낭소리를 듣지 않으면 어머니는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가빠지면서 불안과 공포에 떨군 하였어요…”

    이와 같이 ‘혹쟁이’와 성옥이는 생물적인 DNA가 유전된 혈연관계가 아니지만 ‘가족’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는 DNA의 서로 역방향으로 꼬인 두개의 리본과 같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운명으로 엮어지면서 그들은 이중 나선의 플러스 가닥과 마이너스 가닥 마냥 서로가 서로의 생명줄이 되었고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면서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세계적인 분자생물학자인 후쿠오카 신이치(1959-현재)는 “생명이란 동적평형 상태에 있는 흐름이다” 라고 정의하면서 이를 ‘동적평형(Dynamic Equilibrium)’이라고 이름 붙였다.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은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파괴되기 시작한다. 이는 생명이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혹쟁이’와 성옥이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운명으로 엮이는 순간부터 많은 시련과 아픔을 격어야 했다.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어서 다른 집에 아이를 입양시켰다가 되찾아 오기도 했고 성옥이는 두 번이나 가출을 하고 불량소녀가 되었다. 하지만 쌍으로 존재하는 DNA가 생명 내부의 얽히고 설킨 형태의 상보성에 의해 지탱되고 유지되는 시스템을 가진 것처럼 근 20년동안 서로 사랑으로 상보하며 살아갔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이‘생명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딸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강한 광철이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싸웠고 딸은 ‘노새’가 ‘소’보다 더 유용하다며 모두가 무서워하는 광철이와 싸웠다. 이같이 파괴하고 다시 복원하고 그렇게 서로 상보하면서 그들은 혈연을 넘어선 진짜 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동적평형 상태는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를 같은 속도로 올라갈 때만이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어느 한쪽이 포기하거나 힘의 균형이 어그러질 때는 평형상태가 파괴되고 따라서 생명도 죽게 된다. 딸을 지키려는 ‘혹쟁이’의 마음과 기어이 엄마한테로 찾아가려는 성옥이의 마음이 엇비슷했을 때는 그들의 가족관계 유지가 가능했지만 엄마에게 향한 성옥이의 집념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기어 평형이 파괴되었을 때 두사람의 ‘집’은 무너지었다. ‘혹쟁이’는 죽었고 성옥이는 ‘공황장애’에 걸려서 페인이 되었다.

    DNA 핵산의 이중 나선은 염기가 반드시 정해진 짝을 만나야 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혹쟁이와 성옥이는 서로의 운명이었기에 그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하나도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1. ‘노새’의 슬픈 운명을 통하여 보여주는 생명의 존엄성

    작가 채운산은 〈숙명〉의 프롤로그로부터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줄곧 ‘노새’를 놓지 않고 이끌고 왔다. 프롤로그의 ‘노새바위’에 관한 전설은 ‘혹쟁이’와 성옥이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 작자는 왜 ‘노새’를 이같이 전면에 내세우고 작품을 엮어 나갔는가? 그것은 당나귀와 말의 잡종인 노새가 주인공들의 운명을 닮았기 때문이다.

    우선 주인공 최명건(혹쟁이)은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서 ‘노새’의 운명을 타고났다. 거기에다가 일본이 망하면서 어머니가 그를 버리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 아버지가 혼자서 우는 아기를 어르다가 떨구는 바람에 불구가 되었고 아버지마저 ‘남조선’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고아가 되었다. 불구가 되고 고아가 되면서 그의 운명은 비극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사는 동안 불구 때문에 ‘최명건’이라는 이름을 잃고 ‘혹쟁이’라 불리어야 했고 떠맡은 딸을 위해서 결혼을 포기하였다. 정관수술을 한 그날 그는 진짜 새끼를 낳을 수 없는 ‘노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생명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와 마찬가지로 ‘노새’의 운명을 타고난 딸 성옥이를 키우면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 “남자 홀로, 그것도 등에 혹을 단 변변치 않은 몸으로 젖도 안 뗀 갓난이를 맡아서 키운다는 건 고역이였다. 하지만 혹쟁이는 그토록 즐겁고 보람찬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옥이는 적막한 인생의 한줄기 빛이였고 생명의 동아줄이였던 것이다. 그 동아줄은 그에게 또다른 삶의 용기와 환락을 안겨주었다. 우연히 생긴 아이였지만 그는 하늘이 자기에게 내려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하였다. 모든 것이 연분이고 숙명이였다.”

    딸 성옥이도 조선족인 오종화와 한족인 왕연의 불륜으로 인해서 ‘노새’의 운명으로 태어난 혼혈아이다. 지식청년들을 추천해서 시내로 돌려보내는 ‘대권’을 손에 틀어쥐고 권력으로 상해지식청년인 왕연과 부당한 관계를 맺은 죄로 감옥에까지 갔다 온 범죄자의 딸이고 불륜의 결과물이며 혼혈아인 성옥이는 ‘짜구배’라고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마을사람들의 질시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힘센 광철이 아버지와 맞서 싸우는 아버지가 있어서 두부를 팔아서 그녀가 배고픈 삶을 살지 않도록 돌봐 주는 아버지가 있어서 그녀는 당돌하고 자주적이고 예쁜 소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담약한 소꿉친구 송국이를 사랑해서 자기 의지로 딸 윤희를 낳음으로써 생명의 사슬도 이어 놓았다. 물론 자기를 사랑으로 키운 아버지를 떠남으로써 공황장애에 걸리고 이혼을 하고 홀로 아이를 키워야 했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상징물인 노새를 사랑하고 노새를 키우는 것으로 자기의 마음을 치유하였다. ‘노새’의 운명 때문에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는 노새 때문에 자신을 구원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조선족인 ‘나’와 혼혈아 송옥이의 딸로 태어난 윤희는 자기를 ‘버새’라고 하였다.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는 혼혈아의 딸로 태어나서 아픈 엄마의 슬하에서 자란 그녀의 삶도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윤희는 한국에 유학을 갔다 왔고 지금은 작가지망생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녀는 성격도 밝고 얼굴도 예뻐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멋진 여성으로 성장하였다.

    ‘혹쟁이’의 첫사랑인 맹금복의 엄마 ‘맹씨’는 일제 시대에 ‘기생’으로 살며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힐 수 없는 ‘노새’같은 딸을 낳아서 딸에게 아버지의 성을 줄 수 없었으며 “근본없는 짜구배를 낳았”다고 광철이 아버지에게 괄시를 당해야 했다. 하지만 노새로 태어난 딸 맹금복은 운명에 지지 않고 어떻게 하든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애썼기에 자식 셋을 키워냈고 ‘혹쟁이’의 본가인 팔간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 집도 현의 관광코스의 하나로 지정되었고 전통가옥으로서 “촌 집체경제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또 마을을 대외에 적극 홍보하는 데 한몫하고 있”으니 그녀의 삶도 헛되게 산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가 ‘노새’의 운명을 타고 났지만 운명에 지지 않고 자기의 목숨을 다하여 자기의 삶을 살아갔다.

    물론 ‘노새’는 순종純宗이 아니다. 채운산은 말에게 편자를 신기는 사실에 비유해서 ‘노새’의 운명을 이렇게 말하였다. “말한테는 편자를 신기고 당나귀는 발톱을 깎아주지만 노새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아무튼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태여난 노새였지만 말과도 다르고 당나귀와도 달랐다. 말이나 당나귀는 순종(纯种)이고 노새는 잡종(杂种)이여서 그런가? 즉 말이나 당나귀는 순수한 품종이여서 ‘신발’까지 신는 호강을 누리고 노새는‘짜구배’여서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다녀야 하는가?”

    수난의 시대는 모든 백성을 힘들게 만들지만 노새처럼 ‘짜구배’의 운명을 타고난 혼혈아들의 운명은 더 힘들기 마련이다. 응당 존중을 받아야 할 생명이 차별을 당하고 멸시를 받으며 불행해야 했다. 그럼에도 부구하고 ‘노새’의 운명을 가진 두 주인공 ‘혹쟁이’와 성옥이는 아버지와 딸로 만나서 생명의 이중나선의 두 리본같이 서로 사랑으로 지켜주면서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생명의 이중나선을 꼬아갈 수 있었다. 사랑이 있어서 ‘노새’같이 슬픈 생명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1. 적재적소適材適所한 방언과 표준어로 부각되는 시대상과 리얼리티성

    〈숙명〉은 함경북도 방언과 표준어를 인물과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일제시대로부터 시작해서 근 백 년에 이르는 조선족의 역사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는데 “우리 선조들이 괴나리보짐을 지고 남부녀대로 넘었다는 오랑캐령” 아래에 있는 변경마을을 주인공들의 활동무대로 삼고 있다. 

    이 마을성원은 지난 세기 30년대에 두만강을 건너온 화전민들과 집단부락 사람들, 그리고 타지에서 떠돌다가 흘러 들어온 조선인들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그들의 일상 회화는 자연히 함경북도방언을 쓰고 있다. 

    소설에서 화전민의 아들인 광철이 아버지는 “우직하고 힘꼴이 셌”고 “촌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는데” 그런 성격은 그의 언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 당시 일년 치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은 음력설과 추석뿐이였다. 일반적으로 생산대에서 추석에는 소를 잡고 음력설에는 돼지를 잡았다.” 그런 것만큼 돼지를 잡고 돼지고기를 외상으로 나눠주는 중요한 일은 광철 아버지가 맡았다. 하지만 돼지의 부위에 따라 맛이 다르니 사람들의 요구를 다 만족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앙앙불락하던 두 아낙은 이번에는 광철이 아버지한테 화살을 날렸다.

    “그러게 고기를 공평하게 나눴더라면 이런 일이 없습지, 칼을 쥔 사람이 집집의 사정을 고려 안하믄 어떡함둥?”

    “하 이거 참, 그럼 이 모든 게 다 내 탓이란 말임둥?”

    “그게 아니라 좀 골고루 나눴으면 좋겠다는 말입지비.”

    “그렇게 잘하믄 어디 아즈마이가 한번 해봅소. 나는 재간이 미천해서 안되겠습꾸마.”

    “우— 아즈바이두 남세스럽게 어째 이램둥? 세상에 치마를 두른 아낙이 ‘백정’질을 하는 법이 어디 있슴둥?”

    “이 아즈마이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닙꾸마, 아즈마이 눈에는 내가 천한 ‘백정’으로 보임둥? 에익,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이 대화를 살펴보면 윗사람에게 쓰는 존경어로 의문형은 ‘-ㅁ둥?’을, 대답하는 서술형은 ‘-습/ㅂ꾸마’를 쓰고 있다. 전형적인 함경북도방언의 종결형 어미이다. “매일 굶주린 배를 붙안고 낮이면 논으로, 밭으로 내몰리고 밤이면 자정까지 사원대회에 시달리다 나니 지칠 대로 지쳐있던 그들”이 외상으로 먹는 돼지고기 한근에 목숨을 거는 모습은 당연한 것으로서 때문에 그 시대 연변의 조선족농촌마을에서의 삶의 정경이 리얼리티 하게 생생히 그려지고 있다. 이런 시대상은 가난한 ‘혹쟁이’가 상황에 떠밀려 맡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63년 주은래 총리가 "중국 조선어는 반드시 평양 표준을 전형적인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시를 함에 따라 ‘-습/ㅂ니다’ 즉 ‘-니다’체가 많이 쓰이게 되었다. 때문에 주인공인 ‘혹쟁이’도 대상에 따라서는 이런 ‘-니다’체 존경어를 쓰고 있다.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아이를 도로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부부는 대뜸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아이를 이미 저희 호적에 올렸는데… 이 아인 엄연히 우리 아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 생모한테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약속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아이를 입양한 집 주인들은 중학교 교원으로서 지식인들이었다. 평소에는 방언을 쓰는 ‘혹쟁이’지만 아이가 자기의 생명줄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나 아이를 찾아야 하는 형편에서 그는 강경하면서도 정중하게 자기의 요구를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여기에서의 ‘-니다’체는 주인공의 심정을 표현하는 데에 아주 적절하게 쓰인 것이다.

    화자인 ‘나’와 윤희의 만남은 21세기의 20년대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이미 한국문화와 한국어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흔히 ‘-요’체를 쓰게 되었다. 더욱이 한국에서 공부하고 온 윤희에게 가장 어울리는 어법은 자연히 ‘-요’체가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작자는 윤희에게는 ‘-요’체를 쓰게 하였다. 

     

    “선생님, 기쁜 소식이예요.”

    “기쁜 소식이라니? 복권에라도 당첨됐소?”

    “글쎄 미국에 간 어머니의 병이 많이 나아졌대요. 인젠 까닥없이 불안하지도 않고 두려움에 떨지도 않고 귀가에 노새의 울음소리나 워낭소리도 들리지 않는대요.”

     

    기실은 부녀관계이면서도 그 사실을 확실히 밝히지 않은 ‘나’와 윤희, 그 관계는 윤희에게 존경어와 반말 사이의 중간어인 ‘-ㅆ소/-오’를 쓰는 ‘나’와 자연스럽게 ‘-요’체를 쓰는 윤희의 어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이같이 소설가 채운산은 작중인물의 말 한마디에도 그 시대, 그 지역, 그 인물의 성격, 상황에 맞게 언어를 쓰고 있다. 더욱이 작품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혹쟁이’와 마을사람들의 대회에는 기본적으로 함경북도방언을 씀으로써 시대성, 지역성과 인물성격을 생동하면서도 리얼리티 하게 부각할 수 있었다. 현대소설에서 이같이 대량적인 방언의 사용은 흔치 않은 일이다. 

    “언어학에서 ‘방언’은 한 언어의 하위 형식으로서, 그 자체가 독자적인 체계를 가진 언어 형식을 가리키기 때문에 ‘방언’이란 용어에는 표준적인 언어 형식에서 이탈된다 거나 정확하지 않다 거나 하는 등의 부정적인 의미가 없다. …표준어는 정책적으로 다듬은 인공적 언어이지만 방언은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로서, 화자들의 정서와 감정이 살아있는 언어이다.”(방언학사전. 김옥화) 이런 방언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작가 채운산은 이 소설을 쓰면서 몇 번이고 《조선말방언사전》을 훑으면서 정확하고 적당한 어휘들을 고르기 위해서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때문에 독자들은 작품 속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게 되며 인물의 말만 들어도 그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소설가는 언어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채운산은 언어의 장인匠人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맺는 말

    21세기 20년대에 와서 세계는 글로벌화 되었고 혼혈아를 차별하는 풍조도 많이 나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나라지간 민족 간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있는 한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문제는 여전히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그들에게 대한 차별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속에서 채운산은 우리 민족의 수난시대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여 혼혈아문제를 풀어 감으로써 과거의 교훈을 섭취하고 모든 생명이 존중을 받는,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생명은 매 순간 균형을 맞추면서 시간 축을 일방통행 하는 존재이다. 생명은 놀라운 유연성으로 동적평형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인위적인 어떤 작은 조작과 개입에도 쉽게 전체의 균형이 깨질 수 있다. 우리 사회도 차별이나 편견같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오류를 제거하지 않으면 동적평형이 이루어진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 

    불행한 역사를 가진 것이 우리의 ‘운명’이었다면 이런 역사를 고쳐가는 것은 우리의 ‘숙명’일 것이다. 

    소설가 채운산의 장편소설 〈숙명〉은 생명의 본질을 역사적인 조명속에서 문학적으로 풀어 감으로써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사회적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와 현실적 의의가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장백산》2022  4호에 실린

     

채운산 약력 :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선후하여 중공연변주위 《지부생활》잡지사 편집, 《청년생활》 부주필, 《연변문학》 주필 력임. 현재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 주임. 중단편소설집 “두만강에 살어리랏다”를 출간. 연변작가협회 “김학철문학상”, 《길림신문》두만강문학상 소설본상, 제5회 중국조선문신문출판문화대상 우수편집상, 제1회 동북3성(북경)조선문간행물우수 주필(총편집)상 등 수상.

엄정자 약력: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원, 길림신문사 기자 역임,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에 재직 중. 동북아신문 일본지사 대표.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회장. 연변작가협회 이사, 일본조선학회 회원.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 평론집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엑소더스』. 제9회 『도라지』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제10호 『동포문학』평론부문 대상. 제40회『연변문학』 평론상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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