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8장 임종을 앞두고(1)

 

마지막 생일파티

 

    저명한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자식에 대해 더 깊은 애정을 갖는 이유는 어머니는 자식을 낳을 때의 고통을 겪기 때문에 자식이란 절대적으로 자기 것이라는 마음이 아버지보다 더 강할 수 밖에 없다.”

    과연 그래서일까? 우리 남 씨 가문의 자식들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 대해 더 애틋한 정을 지니고 있다.

    2019년 4월 3일은 어머니의 91세 생신날이다. 생신 바로 전날 나는 연길로 향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머님의 생신도 쇠어드릴 겸 청명이 코 앞이라 〈남씨가족릉원〉에 모셔진 아버지 묘소에 찾아가 제사도 지낼 겸 해서 말이다.

    한낮이 되어 비행기가 연길조양천공항에 착륙했다. 마중 나온 친구 차에 앉아 곧장 어머님이 사는 집으로 향했다. 

    4월의 연길은 유난히도 아름다웠다. 장백로 양 옆에 한 일자로 늘어선 가로수들에 이미 파아란 새움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길 가운데 노타리들에는 벌써 봄을 알리는 꽃들이 망울을 터뜨리기 직전이다. 하지만 그래도 북방이어서 그런지 화창한 날씨에 비해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시원스레 쭈욱 뻗은 장백로를 그냥 달릴 줄 알았던 차가 금세 중환에 꺾어 들더니 십분도 안 되어 어머님이 거처하는 무지개다리 부근의 강변아파트에 다달았다. 

    7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님이 벌써 문 앞에 마중을 나와 있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지만 어딘가 그늘이 짙은 모습이다.

    나는 한발 다가가 어머니의 두 손을 꼭 잡아드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그 모진 세월의 풍상을 이겨오면서 바느질 하나만으로 우리 남 씨 일가의 가세를 일으켜 온 그 두 손, 그 바쁘신 와중에도 우리 형제들을 손수 챙겨 먹이고 입히느라 늘 쉴 사이 없어 갈구리가 되어버린 두 손이지만 어머니 손은 그래도 따스한 약손이다. 어느새 벌써 그 손끝으로 따스한 난류가 나의 가슴속으로 흘러들고 있다. 

    그 작은 두 손으로 기적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부를 창출하고도 늘 성차지 않아했던 ‘작은 거인’이 오늘 따라 너무 초라해 보이고 너무 무기력해 보여서 가슴이 짠하다. 이제 살아 계실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갈마들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샘솟아 오른다.

    나는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어머니를 꼭 껴안아 주었다. 다 큰 아들이 어머니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말이다. 그렇게 한참 있으니 마음의 평온이 찾아 온 듯 싶었다.  

   “엄마, 요즘은 주로 어디가 많이 불편한 거요?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이젠 그럴 때도 됐지 뭐,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며칠 전에 침대에서 내려서다가 조심하지 않아 넘어졌는데 어깨박죽이 바닥에 내리 꼰지면서 어디가 삐걱했나 봐. 정통편 두 알을 먹었는데 왠지 먹으나 마나네. 그래서 오늘부터는 두알 추가해서 네알씩 먹고있네. 아직까지는 참을만하니 이제 하루 이틀 지나보면 나을걸세.”

    당시 나는 대수롭지 않아하는 어머니 얘기를 귓등으로 흘러 보내면서 그저 살짝 풀친 거니 곧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후에는 셋째동생과 함께 부동산교역중심에 찾아가서 유산 포기수속을 끝냈다.

    이튿날이 어머니 생신이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아무쪼록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커튼을 열어젖혔다. 유난히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파아란 ‘도화지’에 천태만상의 그림을 그려놓았다. 꼭 마치도 어머니 생신을 축하해주 듯이 말이다. 

    내가 한창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데 벌써 전화별소리가 울려온다. 보나마나 엄마의 호출이다. 매번 고향에 와서 투숙하게 되면 꼭꼭 이 시간에 전화가 걸려온다. 시원한 소탕 끓여놓았으니 빨리 와서 아침을 먹으라는 독촉전화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산지 20여 년이 되어오는 터라 늘쌍 어머님이 해주는 집 밥이 그리웠다. 특히 어머님이 손수 끓여주는 소고기국밥을 떠올리면 입에 금세 군침이 돈다. 우리 형제의 혈액 속에는 그 어머니 손맛으로 길들여진 똑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 어머님이 끓여주는 소탕 맛은 말 그대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다. 

    여기에 이런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다.

    중한수교 전해인 1991년도에 한국촬영가협회의 10여 명 촬영애호가들이 문화교류 차 연변에 오게 되었다.

    당시 연변촬영가협회 주석으로 있던 나는 연 며칠 빽빽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이들의 귀국 바로 전날 일행을 집에 초대하기로 했다. 뭔 음식으로 손님들한테 만족을 드릴까 고민하던 중 어머님이 늘 해주던 소탕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한우하면 상당히 귀한 음식이라 그 한우의 변조가 연변황소이니 그 이상 좋은 대접이 없을 듯했다.

    저녁 6시경이 되어 어머님이 손수 준비한 풍성한 음식상이 차려졌다.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구수한 소탕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어머님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소뼈에 꼬리까지 넣어 몇 시간째 우려냈으니 말이다. 

    그때까지 만도 불 지피는 집에 살았는데 집안에 들어서자 전기풀무(鼓风机)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소고기 냄새가 진동한다. 국물이 뽀얀 우윳빛이다. 

    손님들은 젓가락 들기도 전에 밥부터 달라고 아우성이다.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은 모양이다. 순식간에 소탕 한 그릇씩 뚝딱 해치우고는 추가요청이다.

   “이거 연변소가 한우보다 맛이 더 찐한데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넉살 좋은 어머님이 한마디 한다.

   “자네들이 지금 맛갈스레 먹고 있는 연변소가 어디서 왔겠나? 바로 우리 조상님들이 두만강을 건너오면서 몰아 온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결국 연변소가 명실공이 한우 사촌인 셈이지!”

   “어머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중국에 와서 진짜 ‘한우’를 먹어본 거네요.”

    구수한 소고기국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나니 이제 연변 술 맛을 볼 판이다.

     중한 문화교류차 연변을 찾은 한국촬영팀원들과 함께(가운데 사람이 저자)
     중한 문화교류차 연변을 찾은 한국촬영팀원들과 함께(가운데 사람이 저자)

 누군가가 한잔 들고 나서 이렇게 묻는다.

   “남주석님, 어머님께서 소탕 집을 운영했던 게 맞지요? 안 그러면 이런 맛이 날 리 없는데?”

    나는 아니라고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의 어머님은 평생 바느질로 살아 온 분입니다. 소탕은 그냥 자녀들을 위해 보양식으로 자주 해줬을 뿐입니다.”

   “아, 이거 서울에다 어머니 손맛으로 연변소탕집을 오픈하면 금세 대박이 날 텐데요?”

    다들 그게 그럴 듯한 아이디어라고 하면서 통쾌하게 웃었다.

    4월 3일, 저녁에 연길 카이로스호텔 한식관에서 어머님의 생신 축하파티가 열렸다. 60여명 친척, 친우, 지인들이 모여 다들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축원한다는 의미에서 화합의 장을 이루었다.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고저 방방곡곡에서 모여온 남씨 가족들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고저 방방곡곡에서 모여온 남씨 가족들

   어머니는 아들 며느리들의 배동 하에 화사한 한복까지 차려 입고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은 모습으로 축하파티에 나타났다. 생일단설기 초불을 불어 끄는 어머니 눈빛이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모처럼 오신 손님들에게 눈인사도 건네면서 자신의 할 도리는 확실하게 한다. 

   술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다들 축가 부르기에 열을 올린다. 어머니도 답례로 한곡 부르겠다고 자진해서 마이크를 넘겨 잡는다. 그 바람에 우리 아들 며느리들은 물론 손자 손녀들까지 다들 일어나 할머니 노랫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참으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흥이 오르기 시작한 파티가 장장 3세간 반 이어졌다. 웬만한 체질로는 버티기 어려운 지루함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조금도 피곤해 하거나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이 내내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이다.

    파티 뒤끝에 한 지인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용인 즉 자기는 한생을 살아오다가 오늘 저녁 처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이고 가장 행복에 겨워하는 한 로인을 보았다고 말이다. 어머니의 그 떠날 줄 모르는 미소어린 인자한 모습이 하객들에게 찐한 감동을 선사한 모양이다.

                               마지막 생일파티를 마치고(좌로부터 첫째,어머니,셋째,둘째 저자)
                               마지막 생일파티를 마치고(좌로부터 첫째,어머니,셋째,둘째 저자)

마지막 기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조용히 하나님을 맞이했다. 아버지 생전에는 공산당원인 남편한테 루가 될까봐 마음속으로만 늘 기도하는 성직자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2010년에 아버지를 떠나보내고는 가뿐한 마음으로 교회문턱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누구 말도 믿지 않기로 고집이 센 어머님이 그렇게 쉽사리 신앙을 접했다는 게 참으로 믿겨지지 않는다. 언젠가 집에 가보니 《성경》을 비롯해 교회선전자료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조금은 수수께끼 같은 면이 있긴 하나 그냥 모르는 척 했다. 

                          림종을 앞두고 어먼에게 "당신 수고 많았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
                          림종을 앞두고 어먼에게 "당신 수고 많았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

    그 뒤 몇 년 전부터 사주팔자를 본다는 아주 박식한 교인이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어머니는 그분한테서 사주보는 ‘점술’을 배우고 싶었나 본다. 그래서 그분을 아예 집에 모셔놓고 함께 생활하면서 매일과 같이 그한테서 《천자문》을 배웠다. 점술을 보자면 뭐니 뭐니 해도 《천자문》을 알아야 사주 뜻 풀이가 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한때 열심히 천자문을 익히느라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80고개를 넘긴 로인이지만 워낙에 머리가 좋아서 그 짧은 시간에 어섯눈을 떠서 자체로 하락시풀이를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하락시를 본다고 하니 동네방네 아줌마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들었다. 어머니 집은 또‘장마당’이 되었다. 남편들의 신수, 자식들의 운세, 언제면 볕들 날이 있을 지를 고대하는 자기들 사주에 이르기까지 풀이하다 보면 하루 해가 금방 멀어진다. 어머니는 그런 자기 중심의 분위기를 좋아했기에 그가 있는 곳은 늘 사람들로 분비였다. 

    썩 후에야 안 일이지만 어머님이 신앙을 접한 데는 따로운 속셈이 있었다. 말로는 본인이 천당으로 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고 하지만 실은 자식들의 건강이 념려되어 기도하러 교회를 다닌 것이다.

    심수에 사는 큰아들이 당뇨가 기준치를 넘어 늘 고생한다면서 다들 우리 아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성도들을 만나기만 하면 부탁했다고 한다. 청도에 사는 둘째아들은 오랜 피부병으로 고생하는데 제발 우리 둘째 피부병이 낳게 기도해달라고 부탁드리고 또 북경에 사는 셋째아들은 신경이 쇠약해 늘 밤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해 고생하는데 제발 그놈의 고질병을 뿌리 뽑아 달라고 기도했단다. 그리고 막내는 척추디스크수술 후유증으로 몇 년째 고생하다가 수십 번의 재활수술을 거쳐 어느 정도 건강은 되찾았지만 전에 앓던 허리통증 때문에 여전히 고생한다고 제발 우리 막내아들의 허리통증을 가뭇없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교회에 나갈 적마다 네 아들의 건강을 빌었고 또 성도들에게 체면 불구하고 우리 아들들을 위해 함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다녔으면 교회에서 우리 형제들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참으로 못 말리는 어머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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