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8장 임종을 앞두고(2)

 

마지막 유물

 

   어머니는 복장점이 한창 잘나가던 80-90년대 악착같이 돈을 모아 4채의 아파트를 장만했다. 

   최근 들어 기력이 많이 떨어지면서 본인 스스로 그 아파트들을 하나하나 자손들의 명의로 변경해주었다. 

   나도 어머님의 부름을 받고 지난(2019년) 1월초에 연길로 갔다. 그 당시만 하여도 연길시 낮 기온이 영하 20도였고 밤에는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갈 때도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도착해서부터 밤새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옹근 도시가 살얼음판으로 변해버렸다.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들이 굴러가는지 미끄러져가는지 헷갈릴 정도다. 길 가는 행인들도 발꿈치를 줄줄 끌면서 미끄럼타듯 걸어간다. 자칫 하다가 뒤로 자빠질 판이다.

   이런 비상기후이지만 미리 약속을 잡아놓은터라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부동산교역중심으로 향했다. 부모님 명의로 된 부동산을 나의 명의로 변경수속을 할려고 말이다. 그런데 수속이 까탈스럽기로 말이 아니였다. 그나마 당사인이 와서 싸인을 하고 기타 서류가 구전하여 무사히 변경수속을 마쳤다. 

                                                          만년의 어머니
                                                          만년의 어머니

   돌이켜보면 나는 어머니한테서 아빠트 2채를 넘겨받았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에 있은 일이다. 당시 내가 연변문련에서 사업하던 때다. 직장에서 크게 마음을 썼다는 게 지난 세기 60년대에 지은 20여평방 되나마나한 낡은 집 한채다. 하지만 나는 그에 만족했다. 대학을 나온지 얼마 안되여 근사한 직장이 생긴데다가 그런 집까지 차려졌다는 게 그 당시로 말하면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였다. 일가족 세식구가 들어 살기에 그 당시로 말하면 부족함이 없었다. 저의 또래 대부분이 대학을 나왔어도 셋방살이를 몇년씩 하는 게 보통일이다. 

   어머니께서 가끔 우리가 사는 집에 와보고 어딘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집이 몹시 낡은데다가 불을 때는 집이라 불도 잘 들지 않아 겨울이면 늘 창문을 열어놓고 온돌을 덥혔다. 그더다 보니 집안 벽체가 석탄연기에 그을려 볼품이 없었고 손주녀석도 쩍하면 감기에 걸려 콜록거렸다. 어머니는 우리 내외가 모르게 둘째아들집을 바꿔 주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침 그 당시 친척방문차 한국으로 가게 되였다. 국내에서 특산품을 사가지고 한국에 가 친척들을 통해 판매를 하고 나니 빌린 돈을 갚고도 꽤 남았다고 한다. 거기에다 어머니가 하는 한복코팅사업이 호황을 맞아 돈도 좀 벌었다. 어머니는 여기저기 루적된 자금에서 3만원을 꺼내 나한테 주면서 집 한채 알아보라고했다. 

   당시 어머니는 살던 집이 개발권에 들어 새로 지은 아빠트 1층에서 살았다. 그런데 같은 아빠트단지 4층에 오래도록 비여있는 집이 한채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은근히 그 집을 봐둔 모양이다. 십중팔구는 부동산개발업체가 무슨 연고로 마지막으로 남겨둔 집임이 분명했다. 이렇게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던 집은 현금거래를 할 경우 싸게 살 확율이 높았다. 어머니는 한시 급히 개발상을 찾아 상황을 알아보라고 한다.

   어머니 뜻에 따라 나는 여러 모로 수소문해 그 개발상을 찾아냈다. 보아하니 그 총경리 역시 전에 어머니 가게에 자주 들려 맞춤양복을 해입었던 분이다. 어머니 얘기가 화제로 떠오르자 그 개발상은 7만원 시가에 해당되는 그 집은 반값 조금 더 얹어 주는 조건으로 통쾌한 답복을 주었다.

   이렇게 되여 나는 어머님이 건네준 돈 3만원에 자금을 조금 보태 난생 처음으로 방이 두개 달린 70여평방짜리 난방집을 마련하게 되였다. 그 집이 나의 인생에서 순수 내 명의로 된 첫번 째 집이다. 그 당시로 말하면 상당히 고급스러운 아빠트다.

  1988년 당시 나의 월 로임이 고작 150원 정도였다. 그런 재력으로는 20년을 먹지 않고 모아도 그런 집 구매는 불가능했다. 보통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 말하면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였다. 어머니는 본인이 아껴 먹고 아껴 써가면서 모은 돈으로 자식들한테 이런 다함없는 사랑을 베푼 것이다.

   그 당시 형제 중 셋째가 한발 앞서 좋은 직장을 내려놓고 하해하여 비즈니스를 하다보니 순수 자기 힘으로 제집마련을 했었다. 큰형과 막내동생을 포함해서 나까지 셋은 다 어머니 덕에 제집 마련을 했다. 

                 언젠가부터 하염없어 저 멀리를 넋 없이 바라보는 그 뒤모습이 처량했다
                 언젠가부터 하염없어 저 멀리를 넋 없이 바라보는 그 뒤모습이 처량했다

   그날 남은 부동산을 명의변경하는데는 여러가지 서류가 필요해 결국은 당일에 원만히 끝내지 못하고 다음날 계속해서 어머님을 모시고 교역중심으로 가기로 했다. 문제는 아버지 명의로 된 부동산 명의변경하는데 골치아픈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명의로 된 집이긴 하나 법적으로는 어머니와 네 자식의 공동소유물이기에 어느 한 사람의 서류가 비어있어도 변경이 불가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소원대로 그 집을 장손의 명의로 변경해줘야 하는데 그러자면 네 형제의 포기각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먼저 나와 어머니께서 포기각서를 쓰고 싸인했다. 뒤이어 남은 형제들도 각자 포기각서를 써서 보내왔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께서 여러해전에 돌아가시다보니 호적등본만 가지고는 친자증명이 불가하여 계속해서 수속절차를 밟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 가서 그 친자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뽑아온단 말인가? 코막고 답답한 일 때문에 한참 실갱이질 하다가 그들이 주는 선색을 가지고 사회보험국에 찾아가 아버지 당안을 복사해서 서류로 제출했다. 

   이렇게 되자 나는 기타 교역중심에서 해야 할 서류에 한해서는 중계인한테 위탁대리를 의뢰해놓고 어머님을 모시고 사회보험국에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님이 대바람에 벌컥 화를 내면서 “남한테 믿고 맡길 일이 따로 있지 얼마나 험한 세상인데 부동산서류를 남한테 위탁해서 수속을 밟는단 말이요. 내 살아서는 안되는 일이니 그 서류 이리 주시우.” 라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서류를 나꿔채가지고 교역중심을 나선다. 위탁중계수속을 맡았던 한족공무원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님 의사에 따르기로 하고 미안하다는 뜻으로 눈을 찔끔해보였다. 그들도 어련히 어머니의 강경한 태도에서 짐작이 갔던지 그냥 아무 말 않고 입을 싸쥐고 웃기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조건 어머니 의사에 따라야 한다. 뭐라고 토를 달았다가는 그냥 하늘 땅이 맞붙는다. 어머니는 내가 아니라면 아닌 그런 성격이였다.

   부랴부랴 사회보험국에 이르러 자문해보니 당안실이 6층에 있는데 그날 따라 엘레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보수중이라 계단을 리용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더러 1층 로비에서 기다리시라 하고는 계단을 따라 당안실로 곧장 올라갔다.  

   6층 당안실에 도착해 한창 아버지 당안을 찾고 있는 데 갑자기 어머님이 나타났다.

 “아니 어머니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오셨어요?”

 “나 이래뵈두 아직은 사지가 멀쩡하다우. 6층이 아니라 10층일지라도 내 령감 당안이니 내가 직접 올라와서 확인해야 할게 아니겠수?”

   1층 로비에 가만히 앉아있자니 또 시름이 아니 놓인 모양이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무슨 일을 처리하든 항상 본인이 주도권을 쥐고 해왔다. 뭔 일이든 자기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처리해야 시름을 놓는 그런 스타일이였다. 

   91세 생신을 쇤 바로 이튿날인 이른아침부터 어머니는 마지막 부동산 한채를 장손의 명의로 변경해주는 일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고 독촉이 성화다. 

   일단은 오후 1시에 예약을 잡아놓았으니 그리하면 된다고 안심시켜놓고 어깨통증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어머님이 하는 말이 어제 생일파티를 앞두고 정통편 4알을 복용했고 오늘 아침에 또 4알을 먹었는데 웬일인지 복통이 멎지를 않는다고 한다. 

   하루 이틀 지나면 어련히 났겠거니하고 한시름 놓은 나는 친구들을 만나느라 분주히 보냈다.

   오후 1시에 어머니를 모시고 큰조카와 함께 하남에 있는 부동산교역중심으로 갔다. 관계자의 안내대로 차근차근 명의변경 수속절차를 밟았다. 유산상속과 관련되는 명의이전수속이기에 과정이 상당히 번다했다. 반드시 당사인이 직접 싸인을 해야 했고 지문채취는 물론 즉석카메라 촬영으로 증거를 남겨야 했었다. 그러다보니 3시간이 넘게 걸려서야 수속이 끝났다.

   보아하니 어머니께서 상당히 피곤해하는 눈치다. 오후 3시가 넘어서부터는 진정을 못하고 자꾸 짜증을 냈다. 빨리 끝내고 집에 돌아가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그게 생각대로 되지않았다. 어머니는 복통이 점점 심해진다면서 어디 좀 누웠으면 좋겠다고했다. 웬만해서는 아프다는 내색을 내는 분이 아닌데 이건 아마도 심각한 모양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쯤해서 어머니가 드신 정통편 약발이 다 떨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어머니의 어깨와 가슴통증의 원인이 딱히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저 점점 심하게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모든 수속을 끝냈다. 교역중심을 떠나나오면서 그 심한 복통을 호소하면서도 뭐가 빠뜨린 부분이 없는지 잘 점검하라고 신신당부하신다. 고도로 피곤해하는 어머니 얼굴에 일종의 이름 할 수 없는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내비쳐있었다. 나는 모든 것이 원만하게 처리되였으니 안심하라고 하면서 귀로에 올랐다. 

   그도 그럴것이 어머니는 최근에 여러번 부동산교역소에 오셔서 자신이 소유하고있던 부동산을 자손들 이름으로 명의변경을 해주었다. 그러다보니 실은 누구보다 그 과정의 복잡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오늘 그 마지막 부동산 수속을 끝내고 안도의 숨을 후-하고 내쉬는 어머니의 일그러진 얼굴에 조금은 어색하리만치 느슨한 웃음기가 어려있다. 눈가에도 입가에도 알게 모르게 가는 미소가 스치고 지나간다. 꼭 마치도 나 이제 소임을 다했으니 더 이상 아무 미련이 없다는 그런 눈치였다.

 

마지막 청명

 

    4월 5일, 청명 날 이른 아침부터 전화벨이 울린다. 보나마나 어머님이 걸어 온 전화다. 어머니는 이른 아침 일어나자 또 정통편 네 알을 복용하고 ‘지휘관’으로 나섰다.

    일면 보모와 함께 제사음식 만들면서 우리더러 서둘러 아침식사를 끝내라고 닦달을 한다. 여하를 불문하고 오전 10시전에 가족릉원에 도착해 아버지 산소에 술을 부어 올려야 한다고 한다.

    우리 형제는 어머니의 포치에 따라 시간 맞춰 가족릉원에 이르러 산신제부터 지내고 잇따라 순서대로 가토를 하고 청소를 하고 제를 지냈다. 이젠 이렇게 십여 년을 똑 같이 하다 보니 형제들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진다. 어찌 보면 조상어르신을 잘 섬겨 온 우리 가문의 이 전통만은 유별난 어머님 때문에 잘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고 특별히 자랑하고 싶다.  

    산소에서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니 오후 한시가 훌쩍 넘었다. 어머니는 몹시 힘들었던지 침대에 누운 채 일어날 념을 안 한다. 아무렴, 그 년세에 이른 아침부터 복새통을 놓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푹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여겨 회보는 후에 올리기로 하고 그냥 방심해버렸다.

    4월 6일 아침부터 우리 형제들은 또 각기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야 하기에 분주했다. 큰형님은 심수로, 나는 청도로, 셋째는 북경으로 각각 떠날 차비를 하였다. 

    4월 7일 날 여지껏 어머니 곁에서 고생이 많앗던 막내 동생한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어머님이 어깨와 흉부통증이 심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화장실 출입도 못하는 상황이란다.

    그날 늦어서야 연변병원에서 진단이 나왔다고 하는데 쇄골(锁骨), 늑골(肋骨)에 다 금이 간 상태라고 한다. 청청벽력이다.

    아니 그렇다면 어머님이 그 몸을 해가지고 객지에 나가있는 자식들이 왔다고 매일과 같이 색다른 음식을 하고 생일날에는 아픈 내색 아니 내려고 둥기당기 노래 부르고 춤도 추고 그 다음날에는 옹근 반나래를 부동산교역중심에 가서 그 복잡다단한 명의변경 수속을 했고 게다가 청명에는 이른 아침부터 산소에 제사지내러 가는 음식준비를 했단 말인가? 

    손꼽아 세어 보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몸에 이상이 생겨서 옹근 8일째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리해가 가지 않는다. 그 8일간 매일 정통편 몇 알로 버텨 온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못 말리는 ‘막무가내’ 어머님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식들이 알면 걱정한다고 쇄골, 늑골이 다 부서졌는데도 꾹 참고 견뎌내면서 정통편에 의지해 그 긴긴 낮과 밤의 고통을 감내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제 60고개를 다 넘긴 자식놈들은 제 잘난 멋에 놀아대다가 살도리는 했다고 훌훌 떠나버리고, 어허이구 이 주책없는 ‘도리깨아들’들이 과연 언제 철이 들려냐? 가슴에 손을 얹고 그 사이 어머님이 얼마나 힘들었으랴를 떠올리면서 늦게나마 참회의 눈물을 흘려본다.

                                         아픈 엄마의 머리를 다듬어 드리는 저자
                                         아픈 엄마의 머리를 다듬어 드리는 저자

    어머니는 뒤늦게야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90고령을 넘긴 몸이라 특별한 치료대책은 없다고 한다. 그저 안정을 취한 상태에서 느긋하게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다고 한다. 

    큰형님 내외가 만사를 제쳐놓고 다시 심수에서 연길 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가문에 이런저런 큰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군소리 한마디 없이 앞장에 서는 이가 장손인 큰형님이다.

    그때로부터 20여 일간 큰형님 내외가 지극정성을 다해 잘 모신 덕에 어머니 병세는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 화장실 출입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5.1휴가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형님 내외만 고생시킬 수 없어 우리 부부가 ‘교대근무’를 한답시고 연길 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그 소식을 들은 순간 어머님이 형님을 통해 전화를 걸어왔다. 곁에 가사도우미가 있는 데다가 이젠 많이 호전되었으니 제발 바쁜 걸음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때마침 5.1휴가가 잡혀있는 지라 우리는 우리 대로 연길로 날아갔다.

    5.1절 기간 우리 부부는 간만에 어머님하고 한주일간 함께 지냈다. 전에 어머님이 우리가 오면 그리했 듯이 우리도 매일 서시장에 나가 신선한 산나물을 사다 메워드리고 소뼈나 해산물들을 사다 영양보충을 시켜드렸다. 전에 어머님이 자식들이 오면 매일 장보는 재미가 이런 재미었겠구나를 가슴으로 느끼면서 행복하면서도 반성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성이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어머니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호전을 보였다. 의사들의 말로라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란다. 아무렴, 우리 어머님이 어떤 분이신데… 처음에는 집안에서 작은 밀차에 의지해 발자국을 떼더니만 며칠이 지나서는 아예 혼자 힘으로 걸어서 베란다 쪽에 가서는 햇볕 쪼임을 한다. 

    진통이 멎으니 어머니는 또 가사 일에 참견을 하고 가사도우미더러 이건 이렇게 하라고 저건 저렇게 하라고 지시한다. 가끔 가다 목소리도 높아진다.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는 신호다.  

    그제서야 우리 부부는 한시름 놓고 다시 청도로 돌아오려고 했다. 홀가분하게 떠나려 했는데 어머니께서 기어이 우리 내외를 바깥까지 배웅한다고 한다. 제발 집안에 계시라고해도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기어이 배웅한다고 휠체어에 올라탄다. 그러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작별인사 하는 걸로 하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입구에 나와서는 기어이 아래까지 내려가야 한다고 우겨댄다. 

    나는 한발 양보하고는 어머니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내려오면서 오만가지 상념에 잠겼다. 그런데 정작 1층에 다 내려오고 나니 이번에는 아파트 출구까지 나가야 한다고 한다. 언약위반도 유분수지 그건 아니라고 내가 기어이 붙들어 말렸다.

    그리고는 이제 또 올 터이니 부디 몸 조심해야 한다고 인사하고 나오는데 벌써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힌다. 그 순간 어머님이 휠체어에 앉은 채 손을 흔들어 보인다. 애써 웃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력연한데 웃는지 우는지 아무튼 반은 일그러진 모습이다. 

    순간 가슴이 쿵― 무너져 내려앉는 느낌이다. 난생 처음 어머니와 생리별을 하는 그런 느낌이라할까?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가슴속으로 올리 밀면서 설음도 함께 욱 북받쳐 오른다. 꼭 마치도 두 쪽으로 된 철문이 우리 모자의 연을 영 갈라놓는 느낌이 들면서 난생 느껴보지 못한 설음에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안해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비행장에 도착하는 내내 한마디 말도 없다. 

    나는 청도로 오는 내내 기내에서 어머니의 쾌유를 빌면서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를 드렸다. 안해도 옆에 두 눈을 꼭 감고 앉아 아무 말을 안 한다. 그이도 나하고 똑 같은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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