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청년생활" 계림문화상 금상 작품

          류영자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제8회 '애심여성컵' 금상, 제5회 계림문화상 은상,                                                   제6회 계림문화상 금상 수상.  그외 수필 다수 발표 
          류영자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제8회 '애심여성컵' 금상, 제5회 계림문화상 은상,                                                   제6회 계림문화상 금상 수상.  그외 수필 다수 발표 

요즘 따라 구순이 훨씬 넘은 어머니는 별스럽게 내가 텔레비죤을 볼 때면 내 곁에 바싹 다가앉는다. 그리고는 내용도 모르면서 물끄러미 텔레비죤 화면을 바라보신다. 간혹 조선어 자막이 나오는 프로그람이 나오면 혼자말로 화면을 따라 흐르는 자막을 읽느라 여념이 없다. 지난해부터 나는 어머니한테 텔레비죤을 보면서 조선글 자막을 따라 읽어보라고 했다. 점점 쇠퇴하여가는 어머니의 기억력을 잡기 위한 나의 안러운 마음이다.

어려서는 소학교도 변변히 못 다녔고 이젠 고령에 치매증상까지 보이는 어머니가 텔레비죤 화면의 자막을 따라 읽는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나의 눈치를 살피며 울며 겨자먹기로 자막을 읽느라 무 애를 쓴다. 어머니는 날이 감에 따라 집에서 내 눈치를 살피는 일이 늘어갔고 내가 시키는 일은 어린애처럼 곰상스레 따라준다. 반찬 투정도 별로 없고 귀가 멀어서인지 묻는 말에는 생뚱같은 대답을 하군 한다. 거동이 불편하다보니 움직이기 싫어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창문으로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때가 많다. 젊어서는 그렇게 앙칼졌고 누구한테 지기를 싫어했던 어머니가 지금 어린애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보노라니 내 마음은 너무나 착잡하고 씁쓸하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그 누구한테 지거나 굽어드는 법이 없었다. 화를 내면 풀릴 때까지 끝을 보고야 마는 어찌 보면 아다모끼 성격이였다. 집에서 아버지 몫까지 감당해오면서 다져진 성격이라지만 그런 어머니가 나는 싫었고 리해되지 않았다. 허구한 날 비자루에 맞을가 봐 겁나 아버지의 등뒤에 피해 숨을 죽였고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따랐다. 아버지는 늦둥이로 태여난 나를 극진히 사랑했다.

1964년부터 줄곧 당지부서기 공작을 맡은 아버지는 한점 흐트러짐 없이 정직한 분이였고 개인의 사욕이 없이 집체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성심성의껏 일해온 우수한 로지부서기였다. 나의 동년은 거의 아버지와 함께 했다. 내가 태여난 이듬해에 전례 없던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아버지는 투쟁을 받았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계급로선을 가르지 않고 두둔했다는 리유로 아버지와 함께 쌀 창고에 갇히게 되였다. 심한 타격을 받은 할머니는 쓰러졌는데 그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우리 집은 그렇게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오빠, 언니들이 젖을 먹겠다고 보채는 나를 업고 집집을 돌아다니며 젖동냥을 해서 먹였다. 셈이 들지 못했던 나는 항상 어머니 젖을 못 먹고 자랐다는 그 아픈 응어리를 마음 한구석에 담고 자랐다.

아버지는 페질환에 걸려 드러눕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병수발을 들면서 집안팎의 모든 일을 혼자 감당했다. 그러다보니 언제 한번 자식들을 따뜻이 끌어안고 살뜰하게 사랑표현을 하거나 보살펴줄 겨를이 없었다.

소학교 때 겨울이면 다른 아이들은 모두 어머니가 손수 해준 솜장갑을 끼고 두만강반의 세찬 바람을 안고 다녔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어머니는 서로 엇바꾸어 들이대는 다섯남매의 해진 옷을 깁다보니 밤 새기가 일였고 나는 항상 언니들이 입던 물림옷을 입어야 했으며 솜장갑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가 언 손을 호호 불며 녹이거나 바지주머니에 넣고 움츠린 모습으로 다닐 때 다른 애들은 도톰한 장갑을 끼고 활개치며 다녔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너무나 부러워 눈물이 났다. 난 속으로 어머니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생각했고 나의 어머니와 다른 집 애들 어머니를 바꾸었으면 하는 그런 천연덕스러운 생각까지 했다.

어머니는 밤낮없이 밥알 같은 자식들을 거느리고 아버지 몫까지 담당하면서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일하러 다녔다. 그 덕에 우리 가정은 비록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있었지만 세끼는 때울 수 있었다.

고중 때의 일이였다. 그 날 어머니는 둘째언니와 셋째언니를 데리고 나무하러 떠났다. 당시 위생학교에 다니는 오빠는 방학이여서 집에 있었는데도 어머니는 오빠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남존녀비사상이 강했던 어머니는 오빠는 집의 기둥이라면서 오빠한테는 힘든 일을 근본 시키지 않았다. 그 날 따라 해가 서산에 넘어간 지도 이슥하건만 어머니와 두 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창호지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지만 세찬 눈보라가 휘몰아칠 뿐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는 걱정으로 한숨만 쉬였다. 얼마나 지났을가, 끄덕끄덕 졸고 있던 나는 불시에 밖에서 나는 인기척에  화뜰 놀라 깨여났다. 그 때 정지문이 왈칵 열리면서 세찬 눈보라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뒤를 이어 두 언니가 눈사람이 되여 들어왔는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서로 부둥켜안고 정지구들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것이였다. 수레가 산비탈에서 두번이나 번져 나무를 다시 싣다보니 늦었다는 것이였다. 산골에서 땔나무를 해오는 일은 한다하는 남자들도 힘겨워한다. 어머니는 두번이나 수레를 번지면서도 이웃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두 딸과 함께 끝내 해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녀성이였다.

그 날 이후 평소 둘째언니와 셋째언니한테없이 잔소리 같은 욕을 하던 어머니 두 언니를 각별히 아끼고 나보다 더 총애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와 고락을 함께 해오면서 자라온 둘째언니와 셋째언니는 결혼하고 가정을 이룬 후에도 시간만 있으면 어머니 곁에 돌아와 맴돌았다. 저녁이면 한이불을 덮고 밤새 세 녀자가 귀속말로 쏙닥거리다 잠을 함께 자군 했다. 그 때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나는 어머니가 나보다 언니들을 더 편애하는 것 같아 은근히 어머니가 미워났다.

어머니는 밖에서 병상에 있는 아버지의 공백을 메우면서 여느 남정네들보다 더 뚝심 있게 농사일도 막힘없이 척척 해나갔다. 젊어서 소문난 담배재배기술원이였던 어머니는 전 향 몇십명 되는 배재배기술일군중에 유일한 녀성이였다. 해마다 봄 모종부터 시작해서 담배 건조까지 어머니는 막힘 없이 해내는 전문가였고 해마다 전 향 담배농사수입에서 일등의 영예를 안아왔다. 생산대 일에 신경쓰다보니 어머니는 공부하는 내게 등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초중을 다닐 때였다. 농촌의 일은 별을 이고 나갔다가 달을 지고 들어올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이른새벽에 일하러 나가면서 아버지 밥상과 나의 도시락을 챙겨놓았다. 우리 학교에서는 도시락을 난로 우에 놓고 덥히는데 오전 네번째 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도시락의 반찬이 덥혀지면서 구수한 냄새가 풍긴다. 다른 아이들은 계란볶음이랑 김치볶음이랑 감자채랑 무우 말랭이랑 맛 있는 반찬에 밥을 먹을 때 나는 도시락에서 반찬을 찾느라 숟가락으로 밥을 뚜진다. 아무리 찾아도 반찬은 없고 된장덩어리만 보인다. 그것이 내 점심밥 반찬이였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볼가 봐 창문 쪽에 돌아앉아 빠른 속도로 대충 밥을 먹어치웠다. 병상에 있는 아버지의 끼니도 챙겨드리기 힘든데 언제 나의 도시락에 신경 쓸 유가 없었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우리 마을에서 나까지 네명이 도문시에 있는 고중에 붙었는데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였다. 달마다 정한 날자에 쌀과 나무를 학교식당에 가져다 바쳐야 했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학교대문까지 나가 눈이 빠지게  부모님들을 기다리군 했는데 유독 나의 어머니만은 안 보였다. 어머니는 생산대 일로 몸을 뺄 수가 없어 내 몫의 쌀과 나무를 언제나 다른 애들 어머니한테 부탁해 보냈다. 고운 옷을 입은 친구 어머니들은 담임선생님 손을 따뜻이 잡고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그럴 때면 나는 나보다 생산대 일을 더 중히 여기는 어머니가 몹시 민망스러웠다. 항상 후줄근한 몸뻬차림에 고무신을 끌고 다니는 어머니가 너무나 싫었다.

내가 중등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였을 때는 오빠와 언니들도 가정을 이루었고 어머니의 부담도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손에서 일을 놓을 줄 몰랐다. 매번 방학이 되여 집에 가면 나한테 맛 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느라 어머니는 법석이였다. 아마도 그동안 나한테 등한했던 미안함을 보상해주고 싶은 것 같았다. 나의 마음에 서렸던 어머니에 대한 고까운 마음도 아침안개처럼 서서히 사라져갔다. 머리에 가리마를 낸 어머니 이마에도 주름이 많이 늘었고 전에 불같던 성격도 많이 누그러들었다.

한때 식구들이 북적거렸던 큰집에 홀로 남은 어머니는 내 공부뒤바라지에 외롭고 힘든 것도 잊고 있었다. 어머니는 풍습성 관절염 때문에 농사일 하기가 벅찼지만 언제 한번 힘들다고 한 적이 없었다. 매번 꼬깃꼬깃 꾸겨진 돈을 괴춤에서 꺼내 나의 손에 쥐여줄 때면 나는 어머니의 갈라터진 손을 잡군 했다. 어머니의 곡진한 사랑이 있었기에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중등전문학교를 순조롭게 졸업하고 정부계통에 배치 받았다.

애면글면 자식을 키운 어머니도 자식들의 효도를 받을 때가 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예전보다 더 다망히 보냈다. 자식들의 집을 번갈아 다니면서 손주들을 봐주고 오빠와 언니들의 뒤시중을 해주었다. 꼬부장한 허리를 펼 사이 없이 아기장아기장 걸어다니는 손주들을 돌보는 어머니한테 내 자식 봐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도로 삼키고 말았다. 차마 년로한 어머니한테 더 부탁할 수 없었다. 오빠와 언니들의 자식은 봐주면서 나의 자식들은 봐주지 않는 어머니한테 서운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세월은 흘러 손자 손녀들도 모두 성장하고 그동안 이 자식 저 자식 집으로 전전하면서 옮겨다니느라 어머니는 어느 자식 집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였다. 게다가 고향집을 비운 지도 오래되여 로인 혼자서 생활하기 어렵게 되였다. 홀로 된 어머니는 자식들 눈치만 보았다. 간혹 막내딸인 우리 집에 오면 가기 싫어하는 눈치였고 또 소리없이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에서 나와 함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어렵잖게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 온 후 어머니는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식사도 잘하고 잠도 잘 주무셨다. 누구한테 지려고 하지 않았던 강경한 성격도 많이 유순해졌고 자식들 가운데서 제일 많이 떨어져있었던 나한테 이상하리만치 살뜰하게 대하면서 내 눈치를 많이 보았다. 그렇게 아끼고 고와하던 오빠와 언니들 거칠게 대했다. 사소한 일로 언니들과 모순이 생기면 예전의 강직한 성격의 어머니로 돌아가 막무가내로 변했다. 그리고 언니들과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린아이가 부모한테 고자질하듯 나한테 하소연하군 했다. 나는 일부러 어머니 앞에서 언니들한테 전화를 하여 높은 목소리로 언니들을 책망하면서 무작정 어머니 역성을 들어주었다. 그 때면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어머니는 나한테 빚 진 사람처럼 나의 눈치만 살피며 생활했다. 우리 집에 얹혀 사는 것이 미안해서였을가? 나한테 사랑을 주지 못한 죄책감에서였을가? 나의 비위를 맞추느라 여간 조신스럽게 행동하지 않았다. 예전의 어머니가 아니였다.

어머니를 편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나는 되도록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마련했다. 일요일이면 모든 일 제쳐놓고 어머니를 차에 모시고 외식하러 다녔다. 조수석에 앉은 어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하였다. 하지만 식당에 도착해서는 내가 돈을 팔가 걱정되여 잔소리를 또 시작한다.

“이런 비싼 식당에는 왜 왔노?”

“채를 너무 많이 시키지 말아라.”

“이 료리는 너무 비싸다.”

내가 음식을 주문하기도 전에 나한테 귀띔한다. 그리고 식당복무원한테는 “너무 많아요. 다 못 먹어요.”라고 말하면서 내가 더 주문 못하게 복무원을 쫓는다.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복무원을 보기가 너무 민망스럽다. 나를 더 많이 먹으라고 채를 짚어주느라 반찬 기름을 튕기면서 법석여서 다른 상에 앉은 손님들을 보기가 구차할 정도이다.

내가 사드리는 대로 짚어드리는 대로 맛 있게 드시면 얼마나 좋으랴만 고생 속에서 살아온 어머니는 근검절약이 몸에 깊숙이 배여 매번마다 아무리 달래도 말려낼 수가 없다. 어머니에게 볼 부은 소리를 몇마디 하면 금방 아이처럼 조용해진다.

물건 구입하러 큰 슈퍼마케트에 가서 어머니한테 사고 싶은 물건들을 골라 밀차에 담으라고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아주 신이 난 아이처럼 나의 뒤를 바싹 따르면서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밀차에 잘도 담는다. 값을 계산하려고 계산대에 가서 밀차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낼 때면 어머니는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이 물건은 큰딸을 줄 것이고 저 물건은 아들을 줄 것이며 이 물건은 외손자를 줄 것이라고 하였다.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은 하나도 고르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척하고 계산을 마치면 긴장하게 나의 눈치를 쳐다보던 어머니는 합죽한 입에 웃음을 가득 담고 내 뒤를 따른다.

구순을 넘기면서 어머니는 예전보다 행동이 많이 꿈떠지고 기억력도 현저히 못해져갔다. 툭하면 부리던 까칠한 성질도 없어지고 녀자형제들이 모여앉아 잡담을 하여도 온 하루 한마디 말도 끼여들지 않는다. 밖에 나가 외식한 지도 오래전 일이고 슈퍼마케트에 가자고 하면 맥이 없어 못 가겠다고 잡아뗀다. 모든 일에 관심이 없고 그냥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만 쳐다보는 어린이로 되였다. 최근에는 경한 치매증상을 보이기까지 한다. 집식구도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고 내가 옛날일을 물으면 도리질한다.

단위에서 행사가 있어 늦게 퇴근하면 어머니는 출입문 앞에 어린애처럼 앉아서 나를 기다린다. 나는 술을 어지간히 마시면 어머니 이름을 부르기 좋아한다. 나는 우정 아버지 목소리를 본 따서 “송명옥” 하고 부르면 어머니는 그렇게 좋아하고 다시 더 듣고 싶어 내 뒤를 따라 이 방 저 방 따라다닌다. 그런데 최근에는 내가 “송명옥” 하고 부르면 간혹가다 나를 아버지로 착각하고 “당신, 애 아버지” 하며 손을 잡는다. 그러면 나는 계속 아버지역을 담당하여 어머니의 ‘남편’으로 된다. 내 손을 잡고 나를 아버지로 착각하는 어머니를 보면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렇게 강인하던 어머니가 이렇게 치매기가 있서 사람도 못 알아보다니?!

나는 어머니가 어린아이로 되여가면 내 곁을 떠날가 봐 두렵고 싫고 미워난다…

나는 어머니가 내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것이 싫고 반찬투정을 하지 않는 것도 싫고 목소리 높이며 성격을 부리지 않는 것도 싫다.

나는 어머니가 예전처럼 언니들과 다투지 않아서 밉고 나를 책망하지 않아서 밉고 자식들하고 투정을 부리지 않아서 밉다.

나는 어머니가 따뜻한 장갑을 안해줘도 미워하지 않겠다! 학교에 제때에 쌀과 나무들을 가져오지 않고 남한테 얹혀보내도 성내지 않겠다!

나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던 모든 것을 다 리해하고 싶다.

나는 어머니가 해준 도시락반찬이 된장이라도 먹고 싶고 어머니를 모시고 더 근사하고 더 맛 있는 음식점들을 마음대로 다니면서 돈도 팍팍 쓰고 싶고 어머니를 모시고 슈퍼마케트에 가서 어머니가 갖고 싶어하는 모든 물건들을 내가 직접 골라서 모두 안겨드리고 싶다!

나는 어머니가 한겨울 소수레 우에서 호탕하게 웃던 그 모습을 다시 봤으면 좋겠고 향정부에서 담배기술원 모범이 되여 붉은 꽃을 가슴에 달고 우리한테 달려오던 그 발걸음소리가 다시 울렸으면 좋겠고 내가 어머니 역성을 든다고 아이처럼 웃던 그 웃음소리가 다시 들렸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이제 5년만 더 앉으면 100세이다. 근간에 와서 어머니는 가끔씩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면서 입 속으로 뭐라고 념불하듯 한다. 자세히 들어보면 큰딸의 이름부터 손주의 이름까지 차례차례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하루하루의 삶이란 어떤 것이였을가?

어머니의 삶에는 가정을 위한 희생, 오직 자식들을 위한 사랑밖에 없었다. 오직 그것을 위해 녀자의 일생을 바쳤다. 어머니의 인생에는 당신 자신의 삶이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안해로서 우리 5남매의 어머니로서, 농촌의 한 평범한 부녀로서만 살았고 녀자로서의 삶은 희생했다. 그것은 어느 한쪽을 소홀히 하거나 버려야 하는 어머니의 숙명이기도 했다.

나는 나의 옆에 앉아 덤덤한 표정으로 텔레비죤 화면에서 움직여가는 조선어 글자를 읽고 있는 어머니를 보노라니 자신의 지난 인생을 잊어가며 어린아이로 변해가는, 나를 서서히 떠날 것만 같은 어머니가 미워난다! 아니, 어머니를 데려간 그 세월이 더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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