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언희, 1991년 생, 현재 경희대학교 국문과 현대소설 박사 재학 중. 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원.
최언희, 1991년 생, 현재 경희대학교 국문과 현대소설 박사 재학 중. 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원.

한국영화에서 조선족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최근의 <황해>, <범죄도시>, <청년경찰> 등 범죄, 액션 장르의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예로 든 영화에서 조선족은 거의 다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로 등장한다.

<청년경찰>과 <범죄도시>의 경우에는 악당을 때려눕히는 슈퍼히어로 영화로 선과 악의 대결 구도가 명확하며, 결말에서의 선의 승리는 관객들의 희열을 불러오는 효과를 낳는다.

이와 달리, 한국영화나 매체에 등장하는 조선족은 초기에 거의 다 여성 인물이었으며 대개 순박하고 어린 여성들로 주로 착한 캐릭터들이었다. 박영훈 감독의 <댄서의 순정>(2005)에서는 국민 여동생으로 알려진 문근영이 19세의 순진무구한 조선족으로 나오는가 하면, KBS 1TV에서 방영되었던 일일드라마 <열아홉 순정>(2006)에서는 구혜선이 착하고 순수한 캔디형 캐릭터로 나온다. 이후, 2014년 영화 <해무>에서는 한예리가 한국에 있는 오빠를 찾으려고 밀항을 하는 조선족 여성으로 출연한다. 이러한 콘텐츠에서 착한 여성 캐릭터들을 연기한 문근영, 구혜선, 한예리는 극 중에서 비록 촌스러운 복장을 하고 등장하지만, 하얀 얼굴과 맑은 눈동자의 소유자들이며, 이들의 티 없이 맑은 이미지는 캐릭터를 더한층 선명하게 나타내었다.

하지만 이 선한 캐릭터들, <댄서의 순정>(2005)에서든 <해무>(2014)에서든, 그들도 명백히 범법자들이다. <황해>, <범죄도시>, <청년경찰> 등의 남성 인물들은 살인을 저지르고 장기매매를 하는 극악무도한 인물들로, 그들에게 돈 이상의 추구할 가치가 없게 묘사된다면, 여성 인물들에게는 좀 더 그럴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사정들이 그려지면서 동정적인, 연민의 시선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들 사이에는 선한 캐릭터의 범법자와 악한 캐릭터의 범법자라는 구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선한 캐릭터들은 결코 단순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 <댄서의 순정>(2005)의 경우, 영화의 개봉 시점인 2005년은 영화계에서 남성을 중심으로 강력한 남성성의 재현과 여성을 배제하는 서사가 대폭으로 증가하였던 시기였다.

이러한 스토리는 IMF 이후 붕괴된 가부장의 형상을 재건축하고 남성성의 신화를 재생산하면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되었다. <댄서의 순정>에서 조선족 여성인 채린이는 한국여성과는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희생성, 순수성, 전통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전근대적인 모습에는 전통적인 여성상의 요소가 각인되어 있다. 영화에서 여성에게 부여하는 순수하고 희생적인 이미지는 여성을 타자화하여 전통의 울타리 속에 가둬두는 것으로 남성 지배적 근대 인식 속에서 재현되어 온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된 남성은 시대적인 위기의식에서 여성을 전통적인 향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여성을 근대성에 훼손되지 않은 대상으로 신화화한다.

리타 펠스키에 따르면, 이러한 신화화는 근대 질서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타자의 위치에 여성을 배치하여 근대라는 비인간적 시대로부터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함의 대상으로 담론화하는 것이다. <해무>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해무>는 실제 사건이었던 2001년의 제7호 태창호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는데,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IMF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8년으로 설정된다. 영화에서 배의 선장인 철주를 비롯한 다섯 명의 남성은 모두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낙오된 사람들로,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배 한 척뿐이다. 현실을 바꿔보고자 시도한 밀항을 성공시키고자 배 위의 남성들은 각기 이기적이거나 폭력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펼쳐 보인다.

이와 반면에 <해무>의 홍매는 <댄서의 순정>의 채린과 같이, 때 묻지 않은 순진한 소녀로 유순하고 수동적으로 자신의 감정에만 휩싸여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프레임으로 아무런 대가도, 이유도 없이 홍매를 지켜주려는 동식의 눈에 비치는 홍매도 전통적인 향수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근대성에 훼손되지 않은 대상으로 홍매를 신화화한다는 점에서 <댄서의 순정>의 여성의 위치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 착한 소녀들은 2016년 <미씽: 사라진 여자>(이하 <미씽>으로 표기), 그리고 2019년의 영화 <우상>에서 완전히 뒤바뀐다. 외형적으로 이들은 앞서 말한 영화에서처럼 티 없이 깨끗한 피부와 맑은 눈동자를 소유한 소녀가 아니다. <미씽: 사라진 여자>의 한매(공효진 역)는 얼굴에 짐이 가득하다거나, <우상>에서 련화(천우희 역)는 실제로 눈썹을 밀어 다소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영화 <미씽>과 <우상>의 조선족 여성들은 내용상 축출되어야 할 부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이 부정적인 인물들은 모두 영화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중요한 작용을 담당하고 있다. <미씽>의 한매라는 인물은 하층계급이 지배계층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마저 짓밟히는 현실을 폭로하는 것을 통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적 체제의 폭력을 가시화하는 한편, 소수자 또는 약소자의 위치에 있는 한매가 이 거대한 권력에 대응해가는 서사로 하위주체들을 억압하는 기제들을 해체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고 있다. <우상>의 련화는 법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자시의 타자성을 재영토화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회에 의해 규정되고 강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을 몰적 존재물이라 하고 규정된 역할을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여성을 분자적 여성이라 일컬은 바 있다. 련화라는 인물은 원래 여자라는 이유로 이름도 가지지 못한 존재였으나, 스스로 련화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었다. (감독의 해석에 따르자면, 갖은 고난을 겪은 여성이라면 예쁜 이름을 가지고 싶어 했을 것이며, 그래서 련화라는 이름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온갖 고난을 꿰뚫었을 뿐만 아니라, 살인까지도 저지른다. 련화가 중식(설경구 역)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면서 이전보다는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아들이 죽고 난 뒤에도 며느리의 배 속에 있는 아이에 집착하는 중식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련화가 중식의 집에 시집을 온 뒤에도 어떤 억압 내지는 자신의 타자성을 느꼈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련화라는 인물에게 중요한 것은 타자라는 자신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주고자 탈출하면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비록 영화는 정교하지는 않지만, 조선족 여성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를 그나마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여성 주체성을 나타내는 서사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선인 또는 악인의 캐릭터를 막론하고 <댄서의 순정>, <해무>,  <미씽>, 그리고 <우상>의 조선족 여성은 모두 범법자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단지 작중에서 선하냐 악하냐를 두고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선과 악이 분명하게 나뉜다면, 그것은 드라마로밖에 볼 수 없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존재하겠지만, 현실에서 선과 악은 분명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주목되는 것은, 젠더적인 관점에서 놓고 보았을 때, 이 선한 캐릭터에서 악한 캐릭터의 변화는 여성 주체성의 변이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매체에 등장하는 이들의 모습은 잘못 재현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끊임없이 재현되어야 한다. 잘못 재현될지라도 잊어버린 존재나 가시화되지 않은 존재로 남는 것이 더 문제적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매체에서 끊임없이 재현되어야만 더 많은 문제가 가시화되어 나타날 것이다. 또한, 매체에서 정의되는 이들의 형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규정하고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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