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8장 임종을 앞두고(3)

 

마지막 구정

 

    2020년 1월 1일, 우리 형제들이 양력설을 쇠려고 어머니 집에 모였다. 어머니는 다 큰 아들들에게 만원씩 세배 돈을 챙겨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도 그게 자식들과 마지막으로 보내는 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형제들 모두가 환갑나이를 넘긴 ‘벤츠족’으로 남 부러울 게 없는 삶을 살아가는 처지이지만 90 고령을 넘긴 로모한테서 두툼한 세배 돈을 받고 보니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같은 해 음력설에 우리 남 씨 가족들은 가급적이면 연길에 다 모여 설을 쇠기로 하여  2020년 음력설을 앞두고 우리 형제들은 또 연길로 날아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 번 기회를 빌어 어머님께서는 또 손주, 며느리들한테 세배 돈을 줄려고 21개 봉투를 챙겨놓았다. 그 속에는그해 90 고령을 바라 보는 외삼촌 몫도 따로 있었다. 

    그날 어머니는 오랜만에 손수 지은 전통한복을 입으시고 자손들이 선보이는 춤 노래에 맞추어 박수도 치고 가벼운 율동도 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그날 따라 어머니가 어찌나 젊어 보이고 예뻐 보이는지… 하지만 어머니는 말없이 서서히 락엽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세배를 올리는 기특한 손군들
                                         마지막 세배를 올리는 기특한 손군들

   어머님이 92고령을 넘긴데다가 최근 들어 말기 췌장암(胰腺癌) 진단을 받은 뒤로 건강상태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져 이제는 순리대로 보내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보다 한발 앞서 왔던 우리 부부는 코로나로 온 나라가 교통관제에 들어가다 보니 아예 발목이 묶였다. 그 참에 아예 잘됐다고 어머니하고 한 달 간이나 함께 지내는 효도의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다.

    그 사이 나는 어머니 주위를 맴돌면서 간혹 가다 사유는 이상하리만치 명석하고 논리적인데 비해 기력이 따라 주지 못하고 거동이 몹시 불편해하는 조금은 어머니답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바깥 출입을 하자해도 휠체어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안 된다고 딱 잡아뗀다. 내일 죽더라도 항상 씩씩하고 용감하고 겁 없는 녀강자의 모습이었는데 세월 이기는 장수는 없나부다.

    나는 매일 아침 어머니를 침대에서 일으켜 앉히고는 옷 갈아입히고 얼굴을 씻겨드리고 치아를 닦아드리고 삼시 세끼 색다른 음식을 준비해 대접시키느라 지극정성을 보였다. 또 저녁 취침 전에는 족욕까지 시켜서 잠자리에 들게 하였다. 그게 나의 하루일과였다. 해살이 따스한 한낮에는 밖에 모시고 나가 볕 쪼임도 시키면서 난생 처음으로 자식이 된 도리를 다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머리를 감겨드리고 씽크대앞에서 웃음을 유발해보려고 애쓴다.
                           머리를 감겨드리고 씽크대앞에서 웃음을 유발해보려고 애쓴다.

   한번은 어머님이 전에 없던 효심을 보이는 아들을 대하기가 안쓰러웠던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늙으면 아이가 된다고 하던데 내가 아마도 그런 철부지가 돼 가나보지? 맨날 바삐 보내는 자네를 이렇게 붙잡아놓고 애먹이니 말이오…”

   “엄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해요? 그렇게 애쓰는 자식 보기가 민망하면 빨리 툭툭 털어버리고 일어나야지. 지금처럼 이렇게 휠체어에 앉아 살다보면 영 앉은뱅이가 되어 다시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어요. 어머님이 자식들한테 페 끼치지 않으려거든 얼른 어머니 힘으로 일어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어요. 알겠어요?”

    나의 그 말에 어머님이 엄청 자극을 받았나 본다. 이튿날부터 어머니는 다시 일어서려고 무진 애를 썼다. 매일 볕 쪼임 하러 나가서는 홀로서기 연습을 했고 또 홀로서기가 되니 휠체어에 의지해 걸음마 떼는 연습을 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땀벌창이 되어 이악스레 30보, 50보… 차츰차츰 걷는 거리를 늘여나갔다. 그게 어머니한테는 얼마나 힘든 고역인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그러는 어머니 등 뒤에서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어머니도 어머니대로 진날 마른날 가리지 않고 오후 한시가 되면 여하를 불문하고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날씨가 찌뿌둥한 날에는 집안에서 혼자서 걸어보기도 한다. 어머니는 참으로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어머님의 명이 끝점에 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췌장암 말기가 오면 복수가 차서 우선 식욕부진이 오기에 아무리 강한 사람일지라도 음식을 넘기지 못하니 살아남을 수가 없다. 거기에 어머니의 췌장암은 이미 간에 전이된 데다가 복막유착까지 온 상태여서 그 진통이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신장기능도 많이 저하돼있는 상황이었다. 그 고통을 감내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리가 없다. 간과 신장의 부전이 심하고 복수가 차는 상황에서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게 된다. 반드시 체내 흡수율을 높이고 환자의 면역생태시스템과 전반적인 컨디션을 회복시켜야 하는데 90고령을 훨씬 넘긴 어머니 경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다시 청도로 돌아간다고 하니 어머님이 뭔 생각을 하고 이제 언제 다시 오느냐고 묻는다. 본인도 병마와 싸워 이겨보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그게 마음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상 싶다. 

   “저 한 달 후면 또 와요. 그때가 어머니 생신이잖아요. 그땐 아마도 다 올 거예요. 그때까지 재활치료를 잘 하세요.”

    나는 이렇게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는 다음날 누구를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부부동반으로 잠간 다녀왔다. 부랴부랴 미팅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어머님이 안보였다. 아마도 답답해서 가사도우미와 함께 볕 쪼임 하러 나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와 안해는 그제사 안달아 났다. 여기저기 문의할 만한데 다 물어보았는데 소식이 없다. 자주 볕 쪼임하러 가는 청년호광장에 달려 가 보았는데 어머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갑자기 은행에 돈 찾을 일이 있어 언제 다녀와야겠다고 하던 생각이 났다. 나는 부랴부랴 은행으로 달려가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가 오지 않았었냐고 물었다. 은행직원이 하는 말이 그런 할머님이 왔었는데 이미 은행 문을 나선지가 한 시간이 될 거라고 한다. 

    그제야 나는 짚이는 바가 있어 어머님이 서시장에 갔을 거라고 안해에게 단언했다. 한 것은 이번 기회에 맨날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서시장 소풍을 했으니 그곳 빼고는 갈 데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서시장에 가면 어머니는 맨날 정신이 나했다. 아마도 평생을 그 바닥에서 살아 온 분이여서 그런가부다. 나는 매번 어머님이 지휘하는 대로 휠체어를 밀기만 하면 되었다. 어느 매대에서는 누가 무엇을 팔고 어느 매대는 값이 싸고 어느 매대 음식은 맛이 어떻고 하는 걸 어머니는 손금 보듯 했다. 

    어머님이 지휘하는 대로 휠체어를 밀어가면 물건 값은 늘상 어머님이 치른다. 그 년세에 그 몸을 해가지고도 늘 목에 작은 가방을 메고 다니면서 돈 관리는 확실하게 한다. 내가 지갑을 열려하면 절대 그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한다. 집안에서도 밖에서도 항상 리더로 살아 온 분이여서 그런지 어머니에게는 그만의 투철한 생존철학이 있었다. 

    연길서시장은 어머니 삶 자체가 녹아있는 곳이다. 어찌 보면 20대 초반부터 이곳을 드나들었고 그 뒤 도문에 시집을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가 30대 초반이었는데 그때부터 여기 서시장통에서 60여년을 전전해왔으니 ‘서시장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서시장에서 황정자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통할 지경이다. 

   “아이고 우리 황 아매 오셨네요.” 

   “어허, 세월 이기는 장수 없다더니 천하에 황 아줌매가 휠체어에 앉아 ‘호강’ 누리네유?” 

    서시장 아줌마들은 입담도 가관이다. 

    그쯤하면 어머님도 뭐라고 한마디 께낀다.

   “다들 추운 날씨에 고생이구먼. 대신 건강 관리 잘 하면서 돈이나 많이 벌라우!”

    서시장바닥에서는 ‘스타’나 다름 없는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한 바퀴 돌다보면 벼라별 사람들을 다 만난다. 조금 년배가 계시는 분들은 다들 뭐라고 인사를 건네고 덕담 한 두 마디씩 건넨다. 

    그런데 오늘만은 그 ‘서시장 황 아매’가 어디에도 없다. 우리 부부는 속이 타서 재가 될 지경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부랴부랴 소고기 파는 매대에 가보았다. 업주가 하는 얘기로 금방 이곳에서 소고기 사가지고 떠나간 지 얼마 안 된다고 했다. 

    우리 부부가 그 뒤를 밟아 뛰다싶이 집으로 오는데 저 먼 발치에서 가사도우미가 휠체어를 밀고 아파트단지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휠체어 양 옆에 크고 작은 비닐봉다리가 데룽데룽 달려있다. 어머니 무릎 위에도 커다란 비닐봉다리가 안겨져 있었는데 보나마나 소고기와 소뼉다구임이 틀림 없다. 그 와중에 떠나는 아들에게 챙겨서 보낸다고 장을 봐 온 것이다.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언제 아팠던 사람 같지 않게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얼른 짐짝부터 챙기라고 성화다. 우리 부부는 어머님이 보는 앞에서 트렁크를 열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쩐지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 나면서 눈물이 자꾸 나온다. 그 불편한 몸을 해가지고 날씨도 별로 안 좋은데 다 큰 자식을 염려하어 그새 장을 봐 오다니… 청도에도 어련히 소고기며 산나물이며 연변에 있는 거면 다 있는데 말이다. 

                                        코로나시대에도 꿋꿋함을 보였던 어머니
                                        코로나시대에도 꿋꿋함을 보였던 어머니

   우리 부부가 못 마땅해하는 기미를 눈치 챘는지 어머님이 한마디 한다.

   “자네들이 어떤 쇠고기가 진짜 국거리 고기인 줄 아나? 모르긴 해도 내가 여기서 골라 산 소고기하고 청도에서 산 고기는 비교가 아니 될 걸세. 이제 가서 끓여 먹어보면 알걸세.” 

    어머니 그 말씀은 천만지당한 말씀이다. 어머니가 끓여준 소탕은 국은 물론 소고기 육질부터가 달랐다. 그래서 어머니는 지금에 와서 시대가 많이 바뀌고 배달문화도 많이 발전했지만 모든 물건을 본인이 직접 현장에 가서 보고 골라서 산다. 살림에는 9단이다. 어머니는 짐짝을 챙기는 며느리한테 또 ‘무료수업’을 한다. 이번 소고기는 얼마 정도 삶아야 하고 사골이나 꼬리뼈는 또 얼마는 약불이나 중불에 우려야 하고 각종 조미료는 언제 넣어야 한다는 등 어머니만의 비법을 가르친다. 매번 그런 교육을 받아서인지 집사람도 이젠 시어머니 손맛 못지 않게 음식을 한다. 특히 소탕은 아예 판박이다. 

    어머님은 이렇게 매번 자식들이 다녀갈 때면 똑 같이 챙겨준다. 큰아들 몫 따로, 작은아들 몫 따로, 손자들 몫 따로 짐짝도 형형색색이다. 받아가는 사람은 모르지만 챙겨주는 사람은 엄청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다. 어머니는 번다한 이런 일은 항상 조용히 혼자서 한다. 그게 어머니의 낙이었던 것 같다.

    본인은 이미 췌장암 말기진단을 받아 생명이 경각을 다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라도 자식들을 더 챙겨 먹이겠다고 노심초사하는 모성애에 고개가 숙여진다. 매일 진통제에 의지해 링거를 맞아가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도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만은 변함이 없다. 

    제발 그러는 어머님이 툭툭 털고 일어나서 몇 해만 더 앉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워낙에 유별난 어머니기에 그런 기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하게 된다.

 

마지막 소풍

 늘 창가에 마주앉아 명상에 잠겨있는 엄마의 마지막 처량한 모습
 늘 창가에 마주앉아 명상에 잠겨있는 엄마의 마지막 처량한 모습

   임종 15일을 앞두고 막내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소풍을 나갔다. 어찌 보면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그날도 멀리는 못 가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옛 청년호광장으로 갔다. 중년녀인들이 광장무를 신나게 추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리듬에 맞추어 박수라도 치면서 응원해주셨을 어머님이 휠체어에 앉은 채 무표정한 얼굴이다. 이미 죽음에 대해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상 싶었다. 

    약 1시간 가량 넋을 잃고 광장무를 추는 녀인들을 힘없이 바라보는 어머니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차라리 정신이 흐리멍텅 했으면 좋으련만 기력이 너무 떨어져 힘이 없을 뿐 정신은 그냥 말똥말똥한 편이었다. 세상 무서운 게 없이 벽이라도 밀고 나가던 그 기세가 다 어디로 갔는지 옆에서 지켜보는 마음이 짠했다. 그러는 어머니를 눈물을 머금고 지켜보다가 동생이 넌짓이 사진 한 장을 찍어두었다고 한다.

   서서히 야위어 가고 기력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몹시 안타까웠다. 이제 저승에 가서만은 제발 자식들 걱정을랑 내려놓고 엄마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이기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고 양보하지만 말고 때론 자신을 위해 유행에 따르는 해어스타일도 하고 멋진 옷도 사 입고 립스틱도 찐하게 바르고 맛나는 음식도 사드시면서 때로는 저 멀리 려행도 다녀오면서 폼나게 살았으면 좋겠다. 

2020년 5월 4일, 23시 30분경, 어머님께서 93세를 일기로 끝내는 생을 마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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