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8장 임종을 앞두고(4)

 

마지막 ‘투자’

 

    어머니는 택시를 거의 타지 않았다. 시장이나 약방 같은 다닐 수 있는 거리는 어련히 자기 두 발로 걸어서 다녔다. 조금은 멀어서 불편한 거리이거나 휴대한 짐이 있을 경우 남새바구니가 달린 작은 밀차를 끌고 나선다.  

    삼륜자전거가 연길에서 유행되던 그 때는 돈을 절약하려고 택시를 타지 않고 삼륜차를 흥정하여 타고 다녔다. 아무튼 죽기내기로 돈을 절약하려 하였다. 문제는 엄동설한에도 그렇게 한다. 자식들이 망신스러울 정도다. 남들이 보면 아들 넷이 다 잘 나가면 뭘 하냐고 할게 아닌가고 어머니를 나무람 해도 어머니는 그런 시설질에는 들었는 둥 말았는 둥이다. 어머니는 남들이 뭐라고 지껄여대는 건 신경 쓸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자기 방식 자기 멋대로만 사는 분이다.

    젊어서 돈을 한창 벌 때는 엄청 통이 크셨는데 언젠가부터는 죽어도 돈을 쓰려 하지 않았다. 특히 가사도우미한테는 너무 인색했다. 시걱 때가 되면 그냥 김치나 된장국에 밥이면 다라고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맨날 그렇게 먹으라고 하니 입이 나올 만도 했다. 고기붙이를 전혀 먹이지 않아 도우미아줌마들의 항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저 할매 뒤치닥거리 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려 지레 죽는다고 말이다. 그러다보니 도우미아줌마도 많이 바뀌었다. 

    곁에서 지켜보다 못해 막내 동생이 어머니 몰래 고기를 사서 도우미아줌마한테 쥐여서 들여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도우미아줌마가 자기 지갑을 열어 고기를 사 온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함께 고기를 드시면서 맛있다고 하면서 그 도우미하고는 호흡을 얼마간 맞췄다고 한다. 

    후에는 매번 그렇게 하기가 성가시여 아예 영양비 명목으로 별도로 고기 사는 돈을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또 문제가 생겼다. 도우미아줌마가 받은 영양비를 그냥 자기 주머니에 챙기고 시치미를 뗀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외려 영양실조에 걸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여 고민 끝에 고기 집에 말해서 정기적으로 도우미아줌마 명의로 고기를 배달시켰다고 한다.

    다 큰 자식들한테는 간이나 쓸개라도 빼 줄 어머니가 왜서 나이가 들어 가면서 로동력을 상실하더니 이다지도 인색하게 변해버렸는지 코 막고 답답할 지경이다. 

    그런데 썩 후에야 안 일이지만 유독 가사도우미한테만은 그다지 인색했던데는 다른 리유가 있었다. 90고령에 이르러서야 가사도우미를 들이기 시작했는데 ‘첫 단추’부터 잘 못 꿰여져서 트러블이 생긴 것이다. 

    50대 중반의 곱살하게 생긴 아줌마가 도우미로 들어왔는데 처음에는 어머니하고 척척 호흡이 잘 맞아 우리 자식들도 멀리 떨어져 살면서 한시름 놓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머니한테 돈이 꽤 있다는 걸 눈치 챈 아줌마가 그 돈을 빼내려고 벼라별 약은 수를 다 쓴 모양이다. 돈 관리에 오랜 노하우와 철학이 있는 분이지만 작정하고 달려드는 젊은이 앞에서만은 별 수 없었나 본다. 그 젊은 도우미아줌마의 간계에 걸려든 것이다. 핸드폰을 리용한 이른바 ‘온라인투자’라는 ‘미끼’를 던져 어머니를 구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과 같이 집안청소를 하네 하고는 짬만 나면 어머니 앞에서 여기저기 전화질을 해대며 ‘유인술’을 쓴 것이다.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안하던 어머니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차츰 그 전화에 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얘, 너의 핸드폰에는 몇 장 들어왔니? 나한테는 어제 저녁 12시에 5000원이 들어왔어. 호호호… 나 이러다 진짜 팔자 고치는 거 아니니?…”

    그 말에 상대가 한수 더 뜬다.

   “야야, 까짓 5000원에 흥분하니? 내 통장엔 200장이 들어왔어.”

   “뭐야, 200장하면 2만원? 너 지금 부는 거지?”

   “호호호, 불다니? 너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나 말이야, 세상에 돈 가지고 장난하는 놈만은 절대 용서 못해!”

   “너 그렇게 고상한척 하지 말고 그 2만원이 들어왔다는 통장을 사진 찍어 보내주라. 나는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어.”

    도우미아줌마가 정색을 해서 바투 들이댄다.

   “그래, 꼼짝 말고 기다려. 내 금방 보내 줄게.”

    이윽고 ‘띵-똥’ 소리와 함께 도우미아줌마 핸드폰으로 메세지가 들어왔다.

   “어머머! 진짜네!! 이 아줌마가 또 크게 한건 했네!”

   “그게… 그게 뭔 얘기인데? 나한테도 보여주면 안 되나?”

    어머니가 한발 다가서는 모습을 보이는데도 아줌마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그냥 수다를 떨어댄다. 

   “아이구머니… 넌 이미 팔자 고치고도 남은 게로구나! 안되겠다. 나 당장 집을 저당 잡혀 몇 만원 더 넣을 거야. 그러면 월 3만원 순 수입이 문제 없을 거잖아?”

    들어보면 과연 귀가 솔깃해나는 얘기다. 어머니가 한발 다가서며 그녀의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아줌마가 새초롬해하며 한수 뜬다.

   “그러게 제가 뭐라 했어요? 여기에 투자하면 떼돈 만진다고 했잖아요? 이것 보세요? 제 친구가 제 말 듣고 여기에다 6만원 투자했는데 한 달이 안돼서 본전 다 뽑고 순수입 2만원을 챙겼다잖아요.”

   “어허? 그럼 10만원 넣으면 계산이 어떻게 되는데?”

    어느새 어머니도 머릿 속으로 수판알을 튕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이구머니, 역시나 큰돈 만지셨던 분이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이참에 확 집어넣어 한건 해보세요. 절호의 기회예요.”

    어머님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큰아들의 당뇨병, 둘째아들의 피부병, 셋째아들의 신경 쇠약, 넷째아들의 허리 디스크를 생각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을 몇 배로 불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건가? 이걸 그냥 한방에 확 불려 자식들한테 크게 한몫 챙겨주고 편하게 하늘나라로 갈 수만 있다면?)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또 내 새끼부터 생각한 것이다. 

    결국 도우미아줌마의 감언이설에 리지를 잃은 어머니는 이판사판으로 거금을 밀어 넣었다. 감나무 밑에 앉아 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리 듯이 어머니는 맨날 핸드폰을 들여다 보면서 몫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그 사이 맨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무단결근’을 하던 도우미아줌마가 어느 날부터는 아예 전화도 받지 않고 두문불출이다. 그제야 당했다는 걸 눈치 챈 어머니가 막내아들한테 이 사실을 이실직고한다. 이미 엎질러 놓은 물이라 퍼 담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90고령의 노모한테서 돈 뜯어 간 그 아줌마는 지금 어디에서 뭘하고 지내는 지? 또 새로운 ‘미끼’를 찾아 헤매고 다니겠지? 사실 그 때 법적인 수사망을 늘여 그 아줌마를 잡아서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어머니 건강을 념려해 단념하기로 했다. 

    그 일로 해서인지 어머님의 건강히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나빠진 것도 사실이다. 그 보다는 ‘시어미 역정에 개배때기 찬다’더니 그 후유증으로 후에 들어 온 가사도우미한테 괜히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 내고 인색하게 대했다고 한다. 어머니 눈에 가사도우미하면 다 그렇고 그런 ‘치사한 아줌마’들이라는 선입견이 생긴 것이다.

    어머니로 말하면 그 큰돈을 날리고 눈 감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평생 돈을 만져 온 분이다. 그런만큼 버럭도 많이 해서 어마어마한 부를 창출했지만 또 여기 저기 뜯기기도 많이 했다. 원체 녀성치고 담이 크고 겁이 없다 보니 모험적인 일을 벌리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한 나이 젊어서 그런 일을 당했으면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났겠지만 90 고개를 바라 보는 년세에 젊은 녀인한테 당했으니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속에 응어리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누구의 자잘못을 따지고 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다. 그저 세상 인심이 어쩌다 요지경이 되였는 지가 가슴 아프게 느껴질 뿐이여서 불미스러운 얘기지만 적어두게 된 것 뿐이다.

 

마지막 유산

 

    어머니는 죽음을 눈 앞에 둔 바로 몇 시간 전까지도 돈 관리만은 스스로 하셨다. 항상 보면 늘 작은 가방을 목에 걸고 다녔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어머니 몸에 붙어 다니는 ‘그림자’였다. 그 가방 안에 지갑이 따로 들어 있었는 데 늘 보면 현찰이 얼마간 있었다. 저녁이나 한낮에 잠을 잘 때에도 그 가방만은 항상 머리맡에 챙기였다. 그러다도 돈 쓸 일이 있으면 손수 그 가방을 열고 쑥쑥 뽑아 쓰셨다. 

      어머니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베푸는 삶을 살았다. 손군들에게 마지막으로 챙겨 준 세배돈
      어머니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베푸는 삶을 살았다. 손군들에게 마지막으로 챙겨 준 세배돈

   어머니는 어디 가나 항상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자식들이 지갑을 여는 걸 절대 용허하지 않는다. 어머니 얘기를 곧이곧대로 옮겨놓는다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너희들에게 폐를 끼치는 어미가 되지 않을 거다. 그리구 집안에 어른이라면 어련히 지갑을 열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게 어머니만의 생존철학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지갑을 여는 그 자체를 즐겼고 언젠가 지갑을 열 힘조차 없을 때는 죽는 날이라고 했다. 그게 뭔 말인지 모르고 귓등으로 흘러 보냈는데 어머니의 림종을 지켜보고 나서야 그 말의 참 뜻을 알게 되었다.

    평생 돈을 악착스레 벌고 또 폼 나게 쓴 분이기도 하지만 부질 없는 일에는 땡전 한 푼 아끼는 분이다. 게다가 생에 어마어마한 부를 창출했지만 근검절약이 몸에 배인 분이다. 돈도 써야 할 곳에는 확실하게 쓰지만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일에는 아예 지갑을 열지 않는다. 그리고 뭐든 돈이 되는 일이면 다하려고 시도한다. 돈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

    몇 년 전에 아파트관리사무소에서 ‘송사’가 들어왔다. 주민들이 버린 포장박스를 주어다 분류해서는 계단입구에 무져놓아 화재 발생 위험이 따르기에 제발 그리하지 말아달라고 말이다. 관리사무소 직원이 여러 번 귀띔했는데 들었는 둥 말았는 둥 그냥 그 본새라고 한다. 

    며칠이 지나 소방부문에서 출두해 벌금딱지까지 붙여놓았다고 한다. 로인네가 뭐가 부족해 종이박스까지 주어들이면서 이렇게 유난을 떠는지? 종이박스를 모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면 몰라도 왜 이러시는지 참으로 리해가 안 간다. 결국 제복을 입은 소방일군들이 출두해서 얼리고 닥치고 해서야 누구러 들었다고 한다.

    그런 유별난 어머님이 림종을 앞두고 깜짝 놀랄만한 유산을 공개해 화제가 되었다. 이제 더는 말할 힘조차 없게 되자 모기소리만한 귓속말로 막내아들을 불러 저기 장농 속에 넣어 둔 뭔가를 꺼내 달라고 한다. 

    이윽고 장농 속 깊은 곳에서 비단으로 감싼 보자기가 나왔다. 풀어보니 그 농엔 저축통장이 무더기로 나왔다. 하나, 둘 세어보니 저그만치 37개다. 90세 생신을 치르고 나서부터 본인의 명의로 된 부동산을 자손들의 이름으로 명의변경을 해주어 ‘유산분할’은 이제 끝난 줄로 알았는데 이게 또 무슨 변이란 말인가.

   “이것이 나의 마지막 적금일세. 나름대로 열심히 사느라고 노력했는데 요지경 뿐이어서 부끄럽네, 자네가 알아서 네 몫으로 똑 같이 나누어 가지도록 하게나. 그리고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 형제들이 의좋게 살아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네. 나는 아마도 아범 곁으로 가야겠네…”

   “엄―마―!”

    60고개를 넘긴 막내아들이 목이 꺽 메어 올라 젖먹이 때처럼 엄마를 부르며 울음보를 터뜨린다. 

    한식경이나 울다가 눈물을 닦고 엉거주춤 꿇어앉아 수판알을 튕겨본다. 모진 세월의 풍상을 악으로 버텨오면서 꼬깃꼬깃 모아 온 돈이라 저금통장 사이즈도 각각, 저금액, 적금일시도 제마끔이었다. 어떤 통장은 손때가 묻어 글씨마저 희미하다. 애오라지 자식들의 장래를 념려해 악착같이 돈을 모아 온 어머님의 고달팠던 바느질 인생이 저금통장 갈피갈피에 아라비아수자로 또렷이 기록되어 있다는 생각이 짙게 들었다. 

    한식경이 지나서야 계산이 끝났다. 합산총액이 예상을 초월한 천문수자(액수는 공개하지 않기로 함)다. 

    맙소사! 그 다사다난했던 모진 세월을 버텨오면서 바느질 하나로 네 아들을 남부럽잖게 먹이고 입히고 또 나란히 대학생으로 키워낸 것만도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이런 ‘거금’을 유산으로 내놓아 자식들을 놀라게 하다니 참으로 못 말리는 어머님이시다.

   실은 슬하의 네 아들도 어머니 유전자를 물려받아 이 세상 부러울 게 없이 잘만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기업계의 CEO들이다. 맏이는 광주에서, 둘째는 청도에서, 셋째는 북경에서, 막내는 연길에서 내노라는 실체를 운영하면서 너무도 멋지게 살고 있다. 하지만 자식이란 부모님 앞에서만은 영원히 자식인 것처럼 어머님 앞에서만은 어쩔 수 없는 ‘응석둥이’이다. 제아무리 잘 나가는 기업인이기로서니 한생을 삯바느질로 서시장 밑바닥의 력사를 써 온 어머니 앞에서만은 영낙 없는 ‘새비’임을 폐부로 느껴보는 순간이다.

    어머니의 유산은 수자적인 계산으로 끝낼 일만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진정한 ‘유산’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불요불굴의 정신, 그 어떤 난관 앞에서도 주저앉지 않는 견인분발한 의지력, 자신의 안일 보다는 가족과 이웃을 생각하는 자아희생정신이었다. 

    그 아름다운 ‘유산’이 기강이 바로 선 우리 의령 남 씨 가문의 ‘가훈’을 만들었고 오늘날 남부럽잖게 잘 나가는 남씨 형제를 비롯한 자손들의 번성과 번영을 이끌어왔다. 

    정녕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가장 개성이 넘치는 당대 중국조선족어머니의 롤모델이라고 치하하고 싶다.

    고작 200만 명을 헤아리는 우리 민족이 13억을 웃도는 이 대국의 틈에 끼워 100여 년을 살아오면서 그나마 나름대로 자기 말을 하고 자기 글을 쓰고 자기의 노래를 부르면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밑바닥에 항상 우리 민족 어머니들의 끈기와 집념, 애환과 열정, 분투와 로고가 깔려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어찌 보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부여가 되었는 지도 모른다.

    어머님이 남겨 준 마지막 유산을 받고나서 우리 네 형제 내외가 모여서 가족회의를 했다. 회의에서 거론된 쟁점의 하나가 어머님이 남긴 그 유산을 어떻게 의미 있게 쓸 것인가였다. 

    합의 끝에 어머님의 명의로 남 씨 가문의 후대들을 위한 〈교육장학기금〉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보아하니 우리 남 씨 가문에 비즈니스를 잘 하는 사람은 있는데 대학 교수나 연구분야에서 내노라고 하는 차세대들이 전무한 상태다. 앞으로 여느 집 자녀이든지 학문을 하려는 의지가 보인다면 어머님의 명의로 된 장학재단이 그 일을 받쳐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다음 쟁점의 하나는 어머니의 그 범상치 않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책이나 영상다큐로 남겨 후세에 남기자는 것이다. 

    나는 그 후속작업을 맡아 하느라고 어머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불면불후의 밤을 보냈다.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작업이라는 걸 뼈 속 깊이 느껴보았다. 하지만 남도 아닌 나의 엄마를 쓰는 작업이기에 쓰면서도 늘 가슴이 울렁거렸고 쓰는 내내 행복했다. 

    거기에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 가족사를 쓰고 있는 김창석 작가가 여러 모로 조언을 주고 못난 글을 다듬어 주어 예상했던 시간 안에 책을 펴낼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김창석(1961~), 화룡 태생. 원 연변인민출판사 상해지사 지사장. 연변작가협회 회원.  현 연변단풍수필회 법인대표. 주요 저서로《중국영화황제 김염》,《동방명주를 빛낸 사람들》등 다수 있음


   내가 맨날 코물 눈물 쥐여 짜며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코웃음 치지 않고 랭정하게 지켜봐 주면서 은근히 박수를 보내 준 안해한테도 고맙고 할머니의 력사를 쓴다고 하니 자기도 글감을 제공해보겠다면서 성의를 보여 준 아들놈한테도 무지 고맙게 생각한다. 세상 일이라는 게 워낙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이 될 때 큰 그림이 그려지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실감하는 순간이여서 은근히 기뻤다.

   유교사상을 집대성한 어느 한 《경서》에 이런 명구가 있다. 

   “이 한 몸이 숨이 붙어 있는 한은 자식들의 어려움을 대신해 살아가기를 원하고 죽은 뒤에는 자식들의 평온을 지켜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머니의 일생이야말로 《경서》에 씌어진 명언대로 일편단심 가족과 자식만을 위해 살아오신 외길인생 그 자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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