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9장 엄마의 DNA를 물려받은 네 마리 '룡' (1)

 

‘용’들의 ‘반란’

 

   어머니의 일터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그냥 반세기 넘게 재봉틀하고만 싱갱이질 해오면서 살아 온 인생, 그 바느질로 어마어마한 부를 창출했고 그 바느질로 네 아들들을 의젓한 대학생, 사회인으로 키워냈고 그 바느질로 의령 남 씨, 남원 황 씨 두 가문의 기강을 바로 세우셨다. 어찌 보면 어머니는 평범한 일터에서 평범하지 않은 기적을 창출한 국자가의 전설, 근대 중국 조선족어머니의 롤모델이다.

   그런 어머니의 DNA를 물려 받은 남 씨 가문의 네 아들들이 오늘날 양자강 양안, 장성 안팎을 무대로 비즈니스를 해 온 후일담 또한 전설에 가깝다.

   현재 남 씨 가문의 네 아들 모두가 중국의 A급 도시에 흩어져 다들 내노라고 하는 실체를 운영하는 CEO로 활약하고 있다. 구름 ‘운’자를 소지한 맏이 남룡운(南龙云)은 중국 개혁개방의 전초기지인 심수에서 제조업계의 CEO로 활약하고 있고, 바다 ‘해’자를 소지한 둘째 남룡해(南龙海)는 해변도시 청도에서 서비스업계의 CEO로 활약하고 있고, 날 ‘일’자를 소지한 막내 남룡일(南龙日)은 현재 수술 후유증으로 치료중인데 한때 심수에서 중한합자기업의 중국 측 CEO로 활약했었다. 구름도, 바다도, 해도 아닌 그냥 ‘룡’중에서도 으뜸 가는 ‘룡’인 셋째 남룡(南龙)은 자금성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장성안팎을 자유로이 배회하는 CEO로 거듭나고있다.

 

주강삼각주를 배회하는 ‘룡’

                                                     남룡운(남씨네 맏형)
                                                     남룡운(남씨네 맏형)

    큰형님 남룡운은 1951년도 생으로 현재 광주 심수에서 헝디(恒迪)라는 전자제품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큰형님은 ‘문화대혁명’의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60년대 초에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가 3년간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고 돌아와 안산강철학원에 추천을 받아 가게 되었다.

   1978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압연공장(轧钢厂)에 배치 받아 열심히 일하다가 1985년도에 본 공장의 공장장 겸 총공정사로 발탁이 되었다. 그 당시로 말하면 연변에서 가장 젊은 공장장이었다.

   당시 형님이 근무하던 압연공장에 로동자가 500명을 넘었는데 그 당시로 말하면 연변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굴지의 기업이었다.

   그러다 80년 대말에 ‘하해’하여 대련에 가서 중한합자기업을 세우고 철강파이프 생산을 주품목으로 하는 합자기업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 후 대련에서 다시 야디전자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음향제품 생산과 연구를 주도해왔다.

   당시 야디전자가 생산한 4000수의 노래가 내장된 음향제품은 〈야디〉라는 브랜드로 국내시장을 석권하는 호황을 누렸다. 노래방기계하면 ‘야디’라 할 정도로 그 분야에서는 원조였다.

   회사 규모가 확장되면서 사업의 수요로 심수에 기업을 옮겨가게 되었다. 심수에서 야디가 헝디(恒迪)로 거듭나면서 디지털전산기술로 8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실시간 시청이 가능한 텔레비블랙박스(数字电视机顶盒) 3500만개를 생산하였고 공업산치 64억원을 돌파하여 심수 보안구 100강기업에서 49위권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 사이 9개의 국가급 전매특허를 따냈고  4개 프로젝트 저작권을 획득했다.

최근에는 스캔, 타자, 편집, 수정이 가능한 다공능교수용편집프로그램(智能教学采编系统)을 개발하여 여러 대학, 중등전문학교와 중소학교를 상대로 판매시장을 확장해가고 있다.

   일전에 중국교육장비항업협회(中国教育装备行业协会) 왕부(王富)회장과 심수시 교육장비협회 펑진환(彭锦环) 회장 일행이 헝디과학기술유한회사를 고찰하였다. 홍보부서 종업원들이 래빈들에게 헝디과기유한회사의 지난 력사에 대해 소개하면서 근년에 연구개발한 다공능교수용편집프로그램에 대해 치중하여 소개하였다. 

중국교육장비협회 왕부(王富)회장, 심수시교육장비협회 펑진환(彭锦环)회장 일행이 헝디(恒迪)회사에 사업고찰을 오다.
중국교육장비협회 왕부(王富)회장, 심수시교육장비협회 펑진환(彭锦环)회장 일행이 헝디(恒迪)회사에 사업고찰을 오다.

   래빈들은 본 프로그램의 과학성, 기능성, 응용성, 보급성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아니하면서 앞으로 교수 뿐만 아니라 신문, 출판, 방송, 도서관, 문화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활용될 수 있다고 그 전 전망에 대해 긍정하였다. 고찰단 일행은 본 제품이 그 신통방통한 기능성과 정보처리, 언어처리 기능이 돋보이는 최첨단연구제품이기에 중국의 교육이 정보화에로의 발전을 주도하는 선두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킬 거라고 평가해주었다.

   올해 고래희를 넘겼지만 형님은 여전히 IT업계에서 내노라는 오너로 활동하고 있고 젊은이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저력으로 헝디를 이끌어가고 있다.

                                                    우리가족 (맏형)
                                                    우리가족 (맏형)
림종을 앞두고 잡지에 발표된 어머니 인생후담[연길서시장의 전설] "어머니는 삭바느질로 4형제를 키운 원조 CEO였다"을 읽어드리는 저자(둘째 아들).
림종을 앞두고 잡지에 발표된 어머니 인생후담[연길서시장의 전설] "어머니는 삭바느질로 4형제를 키운 원조 CEO였다"을 읽어드리는 저자(둘째 아들).
                                                        남룡운 회장
                                                        남룡운 회장

부록:

광동조선족기업의 자부심―항적디지털

광동성은 조선족들이 창업을 시작하고도 경우에 제한된 자본력때문에 상당한 고충을 겪고있는 실정이다. 민족사회에 금융권이 형성된다면 쉽게 타개해나갈수 있는 문제점으로 지적되고있으며 이 역시 광동성조선민족련합회에서 우선적으로 고심하고있는 문제로서 조속한 시일내에 제2금융권의 출범이 절실한것으로 론의된다.

《광동성에서 창업한 조선족기업들중 초창기의 수많은 좌절을 용감히 이겨내고 크게 성공하여 민족사회에 무한한 영광과 자부심을 안겨준 기업들이 적지 않다》며 리철호회장은 남룡운이 운영하는 전자제품회사인 항적디지털기술유한회사를 특별히 실례로 들었다.

한국노래방기계 중국판매회사로 시작한 류통업체인 항적회사는 과감하게 제조항목을 바꿔서 오늘과 같이 광동성 조선족기업가운데서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였다.

항적회사가 첫걸음을 뗀것은 남룡운회장이 당시만 해도 셋탑박스생산업체로 독보적인 현대디지털 테크 사장과 중국공장 현지화생산 상담을 성공시킨것이다. 항적회사는 위성, 지상파, 유선케이블 등 세종류로 나뉘는 셋탑박스에 대한 기술개발에 전력을 다해나갔다. 수출했던 24만대의 셋탑박스가 전량 불량품으로 반품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는 등 초창기의 시련을 이겨냈다.

셋탑박스는 월생산량 1만개로부터 지금의 40만대로 상승곡선을 긋고있다. 초기의 70여명 공장일군도 이젠 1500여명으로 증가되여 6만 3000평방메터나 되는 두 공장에서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전 중국에서 판매되는 3000만개중 13%이상을 항적이 차지하고있어 업계에서의 위치도 실감케 한다. 래년부터는 60만대의 월생산량을 목표로 하고있다.

초창기에 몇번의 시련기가 있었지만 항적회사는 결코 좌절에 굴하지 않고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더욱 큰 성공을 거듭했으며 거듭되는 연구개발을 통해 최고의 품질과 신용이라는 영원불변의 카드를 꼭 잡고있었던것이다. 하여 항적회사는 2008년도에 심수시 보안구 100대기업중 59번째로 조선족기업중 유일하게 선정되여 본 기업뿐만 아니라 광동성의 민족사회에 무한한 영광과 자부심을 안겨준 통쾌한 사례로 남았다. 

<길림신문[60년60인]광동성: 조선족기업 2000여개 조선족 8만여명>중에서(2009-11-19)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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