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나로 서민갑부가 된 유별난 엄마의 골 때리는 이야기/남룡해 지음

제9장 엄마의 DNA를 물려받은 네 마리 '룡' (2)

 

발해만을 배회하는 ‘룡’

                                                    남룡해 (남씨네 둘째)
                                                    남룡해 (남씨네 둘째)

    나의 이름은 남룡해인데 남 씨 가문의 둘째로 1954년에 태어났다. 한 집에 같이 사는 외삼촌이 연변일보사 사진기자여서 어려서부터 삼촌의 사진기를 만져보게 되였고 은근히 멋진 사진기를 멘 사진작가가 되려는 꿈을 꾸게 되였다. 그러다보니 학교 다녀오면 맨날 외삼촌을 기다렸다. 외삼촌은 그 귀한 루라이 사진기를 만지게 했고 기본적인 원리를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그 당시 그런 사진기를 만질 수 있었다는 게 내 생의 행운이자 사치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외삼촌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껌딱지’가 되다보니 신문사를 제집 나들듯 했고 삼촌이 자주 쓰는 암실에 들어가 사진을 인화할 때면 잔심부름을 해주면서 그 새까만 건판이 사진으로 재생되는 과정도 지켜보게 되었다. 카메라는 나에게 희망을 주었고 꿈을 주었다.

    그런 와중에 어정쩡하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변농기계공장에 배치되었다. 1800여명 로동자를 수용하고 있는 농기공장은 당시 연변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굴지의 기업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꿈보다 암담했다. 작업환경도 말이 아니었다. 

    주물(翻砂)작업반에 학도공로 들어가 일하게 되었는데 뜨거운 용광로앞에서 자신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촬영가가 되려는 웅대한 포부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이는 직종인데다가 맨날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사는 일터가 마음에 들지않았다. 유리창도 없는 4층 높이의 작업장도 싫었고 녹 쓴 양철지붕에서 나는 아츠러운 바람소리도 귀에 거슬렸고 허공에 달린 쇠물바가지가 부딪치는 순간 뿌려지는 쇠물은 더구나 싫었다. 언제면 쇠물에 숭숭 구멍이 뚫린 너덜너덜한 작업복을 벗어버리고 어깨에 카메라를 메여볼지를 두고 나는 맨날 고민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울며겨자먹기로라도 거기에 적응해야 했고 그 속에서 살아 남아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했어야 했다. 워낙에 일욕심이 많았던 나는 대인관계도 좋았던지라 인츰 40여 명을 거느린 공단장으로 승진했고 뒤이어 공청단 지부서기, 공회 선전간사, 당지부 서기 책임을 맡으면서 전도 있는 젊은이로 각광받게 되었다. 나는 자만하지 않고 더 허심하게 일하면서 공장 내 선전란도 꾸리고 작업현장을 반영한 사진도 찍어 신문사에 투고하면서 현실에 적응해나갔다. 그 와중에 풋돈을 모아 갈매기표 사진기도 한 대 장만했다.

    야간작업을 할 때면 낮에 카메라를 메고 촬영을 다녔고 주간작업을 마치고 밤이 되면 사진현상에 몰두하면서 꿈을 무르익혔다. 그러다 보니 어언 8년이라는 시간을 로동자로 근무하면서 공장 내에서 유망주로 떠올랐다.

    지성이면 감천으라고 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연변촬영계에서 서서히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나의 작품이 가끔씩 자치주급 사진전시회에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코흘리개 때부터 은근히 나의 성장을 지켜봐왔던 강찬혁(당시 연변촬영가협회 주석) 선생이 자치주창립 30주년 사진전시회 준비에 일손이 필요했던터라 나를 임시직으로 주선전부에 옮겨 앉아 일하게 하였다. 그게 어찌 보면 운명을 바꾸는 게기가 되었다.

    그 뒤에 대형촬영행사와 문화행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에게 새롭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이 되였다. 나는 그 여세에 힘 입어 끝끝내는 연변력사연구소에 들어가 사진편집으로 일하는 행운을 지니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원했던 본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차려진 것이다. 

    력사자료집 편찬에 땀동이를 흘려가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때에 또 한 번의 도약이 기회가 차려졌다. 당시 강서대학 신문학부에서 사진전공자 대상으로 본과생 모집이 있었다. 사진전공분야의 대학본과생 모집이 처음인지라 수많은 지원자들이 나섰지만 각 성에 배분된 명액은 한 두 명 뿐이었다.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험에 응했는데 워낙에 마음을 다잡아먹고 덤벼들었던지라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입학통지서를 받아 쥐게 되었다. 대학에서 전문으로 사진촬영기교에 리론까지 배우고 나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사고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곧장 연변문학예술련합회에 자리를 옮겨 앉아 사진가협회의 지도사업을 맡아 할 후계자로 지목을 받았다. 나는 더욱 분발해 일하면서 나의 예술기량을 한껏 뽐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틈이 나는 대로 두만강류역을 훑었고 장백산에도 수없이 올라갔다. 그 와중에 우리 민족의 기백과 얼, 한과 설음, 넋과 정서를 담은 사진작품들을 륙속 토해냈다.  

                                            장백산 답사에 나선 촬영가 남룡해
                                            장백산 답사에 나선 촬영가 남룡해

    나의 활동무대는 서서히 두만강, 압록강지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황산에도 태산에도 올랐고 귀주, 사천, 운남 등 소수민족지역에도 다니면서 문화비교 차원에서 인간이 공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북경, 상해, 광주 등 대도시에서 수풀을 이루는 고층 루각과 총망히 오가는 도시인들의 현대적인 리듬에서 인간 삶의 고뇌와 깊이를 발견하곤 했다. 나는 이런 정서를 사진언어로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시작했다.

    성과가 주렁지니 영예나 직위도 뒷따랐다. 나는 연변촬영가협회의 말단회원으로부터 부비서장, 비서장에 이어 부주석, 주석을 거쳐 장장 10년간 길림성촬영가협회 부주석을 련임하게 되었다. 

    당시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물고가 트이지 않은 상황에서 1989년에 서울에서 개인사진전을 펼치었다. 중국 촬영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한국사회의 반응도 컸다. 그 뒤를 이어 1990년에는 중국촬영가대표단 일행을 인솔하여 한국 공식방문을 성사시켰다. 

    그 후 중한수교 되면서 한국과의 문화교류 뿐만 아니라 중국, 한국, 조선 3국 사진전도 개최하였다. 2000년에는 평양에서 백두산사진전을 개최하였는데 조선의 최고지도자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전업으로 사진업에 몰두하면서 나는 선후하여 연변촬영가협회 제4기 주석, 길림성촬영가협회 제4기, 제5기 부주석으로 당선되었고 그때 벌써 중국촬영가협회에 가입하였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중국미술출판사에서 《지나칠 수 없는 순간들(捕捉辉煌的瞬间)》이라는 표제로 나의 촬영작품집이 출판되었다. 

[남룡해촬영작품집] 지나칠 수 없는 순간들(영상 보기)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성과가 주렁져 가슴 설레는데 그 당시 문화사업이 경제난으로 활기를 띠지 못하고 있었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예술가들도 밥을 먹고 사는 인간인데 돈이 없다보니 예술교류활동을 한번 하자해도 곤란이 막심했다. 

   나의 머릿속에는 우선 돈을 벌어야 이 초라한 국면을 타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어서 부진에 처한 예술활동과 교류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자는 게 그 비즈니스 입문 동기였다. 

   그렇게 되어 연길시에서 처음으로 노래방을 경영하게 되었는데 대박이 터졌다. 돈주머니는 두둑해오는데 필경은 술문화가 혼합된 장사이다 보니 가끔씩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겨 당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하여 1990년대 중반부터 연해도시에 대한 사업고찰을 하던 중 청도에 옮겨 앉아 새롭게 사업을 시작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나는 그 당시 새롭게 일떠서는 홍콩중로 상권에 <코리아타운>을 오픈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그때로부터 선후하여 무역, 합자기업, 부동산 산업, 요식업, 사우나 경영 등 수많은 업종에 매달려 풍성한 노하우를 쌓게 되었다.

                                                  우리 가족(둘째)
                                                  우리 가족(둘째)

    그 와중에 중.한 수교가 이루어 지면서 동아세아 문화권의 판도가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고 그 호세를 빌어 중국촬영가협회 한국방문을 성사시켰고 중국촬영예술전시회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성황리에 개최했고 잇따라 한국사진예술전시회를 천안문광장에 있는 중국력사박물관에서 성황리에 개최했다.

    청도 진출 당시 한국 사진작가 조용석 선생과 함께 동업자로 시작하였는데 장장 18년간 고락을 함께 하면서 얼굴 한번 붉히지 않았고 마무리까지 상호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 당시 문화적인 차이나 열등감에서 오는 콤플렉스로 동업이 시작은 그럴듯 한데 결과가 좋은 실체가 너무 적었다. 어찌 보면 우리 두 사람의 동업이 청도조선족사회의 롤모델이 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상 싶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한국기업의 청도진출과 투자유치 및 창업 아이템 설정에 '해결사'로 나서 주었고 당지 정부와 한인사회 및 조선족사회 간에 가교역할을 발 벗고 나서주었다. 그 뒤를 이어 청도조선족사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모래알처럼 흩어진 ‘무풍지대’의 조선족들이 자기의 정체성 찾기에 노력을 경주하면서 1998년에 조선족기업인협회의 창립을 이루어냈고 2000년에는 청도조선족골프협회, 청도조선족축구협회를 창립시켰고 2002년에는 글로벌사회 진출을 위하여 세계한인무역협회 청도지회 창립을 이루어냈다. 뿐만 아니라 2006년에는 청도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 창립을 이루어내여 청도는 명실상부한 신형의 조선족 집거구로 탈바꿈 하는데 나름 일조했다. 

   청도 인생 26년 세월을 주름잡아오면서 현재 코리아수정실업유한회사 동사장을 지내면서 몇 년 전부터는 청도조선족사회의 구심점을 만들어가는 일에 지성인으로서의 소신을 쏟아붙고 있다. 그 사이 청도조선족기업협회 제2임 회장을 맡아하면서 <새천년맞이 중한친선교류의 밤>행사를 성사시켰고 연변가무단을 청해 <청도조선족경로대잔치>도 성사시켰다. 

   뿐만 아니라 청도시정부대표단을 이끌고 연변방문을 수차 조직하였는데 그 때마다 스스럼 없이 호주머니를 열었다. 이런 사업의 진행 와중에 나는 조선족을 소개하고 우리 문화를 홍보하여 우리 민족의 이미지 향상에 나름대로 열정을보였다. 그 와중에 연변TV위성프로를 청도에 락지시켰다. 

   청도는 이렇게 서서히 조선족의 새로운 집거지로 거듭나게 되었고 그 한가운데서 나는 나름대로 기업인의 사명을 다 하면서 사회활동가로서 책임도 짊어지고 살아왔다. 와중에 여러 리더와 함께 청도조선족운동회도 십여 차 조직하였고 중국조선족축구대회도 성황리에 조직했다. 

  뿐만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조선족의 응집력을 키우기 위해 <청도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를 설립해 초대회장을 맡아하면서 지성인과 엘리트들의 묘략과 지혜를 모아 조선족사회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 와중에 나는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청도지역 회장직도 맡아하면서 조선족 차세대 교육에도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에는 청도시 남구정치협상위원회 위원, 세계한인무역협회 제17기, 제18기 부회장 등 직을 력임해오면서 불유구(不逾矩)의 나이임에도 조선족사회의 화합을 위한 일이라면 두 팔 걷어붙이고 뛰고 있다.

림종을 앞두고 <연변녀성>잡지에 발표된 어머니 인생후담[연길서시장의 전설] "어머니는 삭바느질로 4형제를 키운 원조 CEO였다"을 읽어드리는 저자(둘째 아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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